10. 천한 사람들의 반란                      
(행 4:1-22)        
9월14일

5천명
오늘 본문은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지체 장애인을 고친 사건에 연속적인 이야기이다. 3,4장에 걸친 이 긴 이야기의 구성은 다음과 같이 네 단계다. 1. 베드로와 요한이 지체 장애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친다. 2. 베드로가 몰려든 군중들에게 설교한다. 3.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당하고 심문 당한다. 4. 석방된 베드로와 요한이 믿음의 동료들과 함께 기도드린다. 세 번째 단계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다.
베드로의 설교 현장에 제사장, 성전 수비대장,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부활에 근거해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선전하는 데 분격하여 두 사도를 체포했는데, 이미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일단 구치소에 가두었다(3,4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에 사람들이 격분했다는 누가의 진술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유다의 모든 종파와 대결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사두가이파와 입장을 달리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전달하고 있다. 사도행전 뒷부분으로 가면 유대인 군중에 의해서 위기에 몰렸던 사도 바울이 부활을 인정하는 바리새인과 그것을 부정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부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 위기를 벗어난 적이 있다. 분명히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사는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갈등의 소지를 줄여보려고 했는데, 그 당시 가장 유대적인 순수성을 지킴으로써 군중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던 바리새인과 부활을 매개로 어떤 신앙적 연대성을 확보하고, 반면에 그 당시 종교적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군중들에게 별로 큰 인기가 없었던 사두가이파 사람들과는 일정한 선을 긋고 있었을지 모른다. 초기 기독교의 이런 선택은 일종의 생존전략일 수도 있고, 더 근본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이 부활로 집중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귀결일 수도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두 사도의 구속과 다음날 진행된 심문 사이에 보기에 따라서 약간 이질적인 보도를 슬쩍 개입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수효는 장정만도 오천 명 가량 되었다.”(4절). 만약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는 사실을 일종의 사실보도로 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면 앞서 베드로의 설교가 끝난 장면에(3장26절) 이 보도가 자리 잡고 있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은 데에는 누가의 어떤 신학적 의도가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게 무얼까?
우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장정만도 5천 명 가량이나 되었다는 주장이 사실보도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미 오순절 설교가 끝난 다음에도 하루에 새로운 신자로 등록된(?) 사람이 3천 명이었다는 보도가 있었다(행 3:41). 두 번의 설교로 8천 명의 기독교 신자들이 확보되었다는 이러한 보도는 어떤 신문보도처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고 누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과학적 진실이나 사회학적 사실을 전달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해가는 과정을 배운다는 점에서 우리는 성서에 신학적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학 행위는 표면적인 사건에 머물지 않고 그 내면의 영적인 생기(生起)를 추적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3천 명, 또는 5천 명이라는 숫자가 초기 공동체에 전승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누가의 독특한 해석에 의해서 사도행전에 올라간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의 객관적 사실을 오늘 우리가 해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별로 큰 의미도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은 사실이 중요하다. 5천 명이라는 숫자가 가리키는 신학적인 의미는 그 숫자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이 그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는 데에 있다.

또 하나의 충격
다음날 유대의 최고 법정이라 할 수 있는 산헤드린 의회가 열렸다. 71명으로 구성된 이 산헤드린은 비록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였지만 사형수 이외의 모든 범죄자들을 사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한 기구였다. 이들의 심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신들은 무슨 권한과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7절). 이런 질문이 부활 문제로 인해서 구속되어 심문당하고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향한 것으로는 별로 적절하지는 않지만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기독교의 케리그마가 다시 진술되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만은 분명하다. 베드로의 변론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12절).
구원으로 번역된 헬라어 ‘소테리아’는 ‘치유’와 ‘구원’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이런 헬라어의 의미로 본다면 인간 몸의 치유와 종말에 일어나게 될 궁극적인 구원은 거의 동일한 차원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질병 치유와 종말론적 구원의 전적으로 똑같다고 볼 수는 없다. 일단 우리의 몸이 치유되는 것은 여전히 잠정적인 의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정적인 구원은 궁극적인 구원의 선취적 상징으로서 역사 안에서 결정적인 의미가 있다.
베드로에 의해서 선포된 이 결론은 기독교의 유일성을 변증하는 데 중요한 구절로 인용될 때가 많다. 기독교 이외의 종교에는 절대 구원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 자료로 사용된다는 말이다. 이 문장은 분명히 예수가 인간을 구원할 유일한 분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이 말씀을 타종교를 배척하기 위해서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 타종교 문제는 매우 복잡하고, 또한 로마서 2장을 공부할 때 어느 정도 대답이 주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다만 누가가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을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타종교를 배척해야할 직접적인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점만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베드로의 자기 변론을 들은 산헤드린 의원들은 당황스러워했다. 우선 불학무식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들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논리적으로 대답했다는 사실, 이 두 사람이 예수의 제자들이라는 사실, 그리고 장애인이었다가 치료받은 사람이 그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들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14절). 이 세 가지 사실이 산헤드린 의원들에게는 일상적이지 않은 것들이었기 때문에 한 사건만 벌어졌더라도 하더라도 상당히 불편했을 텐데, 이 세 가지 사건이 서로 맞물려 터졌으니 이들이 얼마나 당황했겠는가는 불문가지이다. 베드로와 요한을 의회에서 내보내고 자기들끼리 비밀회의를 열었다는 사실과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베드로와 요한을 처리할만한 어떤 대책이 없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처지가 매우 궁색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된다.
산헤드린 의원들을 놀라게 한 세 가지 요인은 각각 초기 기독교의 정체성에 대한 해명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주로 첫 번째 요인을 중심으로 그 기독교의 정체성을, 다르게 표현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풀어볼까 한다. 본문을 다시 읽어보자.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13a). 아마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의 주류라기보다는 마이너리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그 이외에 예수에게 관심을 갖고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대개 학문이 깊지 않았으며, 바울의 편지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그렇고 그런 평범하거나 심지어는 노예 계급에 속한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이런 사람들로 시작한 기독교가 오히려 종교적인 전문가 집단인 산헤드린 의회를 놀라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 당시에 정치, 경제, 예술 분야에서 모든 세계를 압도하던 로마 문명을 뛰어넘으리라는 그런 역사가 바로 이런 누가의 진술에 이미 담겨 있는 셈이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예수님의 아포리즘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증명되었다.
이런 보도를 읽는 우리는 이런 의미를 너무 상투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삶의 가장 확고한 토대로 삼아야 한다. 학력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 모든 면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사람을 놀라게 한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벌어지지 않는 사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진리이며 실제적이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그어놓은 세상의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훨씬 근원적인 세계를 향해서 자유롭게 나가도록 돕는다. 그런 신앙적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베드로처럼 ‘자신 있게’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 교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보고 들은 사람
산헤드린 의회는 오랜 시간 비밀회의를 열었지만 베드로와 요한을 처리할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베드로의 논리가 그렇게 명백했는지 아니면 산헤드린 의회가 상당히 민주적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훈방으로 석방시키려고 했다. “예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했다. 상황이 이렇게 자기들에게 좋게 돌아가면 대충 알겠다, 하고 나오면 좋았을 텐데,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 중에서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냐, 하고 물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추가한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20절). 앞에서 베드로가 비록 배운 게 많지 않지만 산헤드린 의원들도 놀랄 정도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고 들었다. 듣기만 한 게 아니라 보기도 했다. 예수의 사건을, 특히 예수의 부활을 보고 또한 들었다. 이는 곧 예수의 부활이 그들의 삶에 ‘리얼리티’가 되었다는 뜻이다.
“보고 듣는다”는 이 표현에 주목해보자. 예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너희들은 모세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신약성서가 동양의 인식론에서 깨달음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개념인 ‘본다’를 똑같이 사용하지는 않았겠지만 어떤 근원과의 연관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없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인 경험에서는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들음 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이지만 본 사람은 분명히 들음의 세계를 훨씬 뛰어넘는다. 내가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작곡가들도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소리를 듣기보다는 오히려 본다고 한다. 여기서 ‘본다’는 감각은 반드시 시각작용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설교를 듣기는 듣지만 그런 들음에서 끝나지 말고 그것이 자기의 삶에 확연하게 체현됨으로써 ‘봄’의 단계로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산헤드린 의회에 의해서 심문당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상식과 문명의 최고 권위인 산헤드린은 학문이 없고 예수의 제자들이라고 낮추어보던 베드로의 자기 변론을 듣고 놀랐다고 한다. 어떻게 천한 자가 귀한 자를 놀라게 하는 사건이 벌어질 수 있을까? 예수에게서 신성을 본 사람만이 그런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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