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아나니아와 삽비라
(행 5:1-11)        
10월19일

난해구절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만나는 이유는 성서의 세계에 들어갈 만큼의 인식론적인 깊이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흡사 프로 9단인 이창호의 바둑을 아마추어인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훨씬 근원적인 이유는 성서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있다. 칼 바르트가 하나님을 ‘절대타자’라고 일컬은 것처럼 근원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소통의 길이 막혀 있다. 다만 하나님의 주도적인 계시에 의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날 뿐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계시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인식론적 훈련과 노력이 없는데도 단지 성서를 많이 읽고 받아쓰고 기도했더니 모든 비밀이 훤하게 풀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서에 대한 큰 오해다. 이런 방식은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특별한 ‘노하우’가 있기라도 하듯이 계시와 성령을 거론하는 사이비 이단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기독교 역시 그런 유혹을 받을 가능성은 많다. 우리의 경우에도 기도만 하면 모든 성서의 말씀을 풀어낼 수 있다는 듯이, 혹은 성서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듯이 강조하는 일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지내온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명쾌하게’ 이해하려는 일종의 강박증에 빠져 있다. 융엘의 표현대로 ‘세계 비밀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과 성서를, 더 나아가 신앙 자체를 단정적이고 완료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인식론적 잠정성을 인정하고, 우리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종말론적 생명의 빛이 우리에게 닿도록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바른 태도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본문도 아직 우리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떤 세계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겉으로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 형식이지만 그 내면의 세계는 여전히 문을 닫고 있다.

땅을 판 후에
오늘 본문은 어두운 색조로 시작한다.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는 하나님께 바치려고 땅을 판 다음에 ‘의논한 끝에’ 돈의 일부를 빼돌리고 나머지만 사도들 앞에 가져왔다. 독자들은 이 첫 구절에서 인간에 대한 연민과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부부는 가난한 사람들로 구성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에 속했던 것 같다. 이들은 왜 땅을 판 돈의 일부를 빼 돌리기로 생각을 모았는지 우리는 그 자초지종을 모른다. 그들이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또는 충동적으로 땅을 팔았지만 그 뒤로 욕심이 생겨, 또는 노후생활에 대한 염려 때문에 일부를 숨겼을까?
우리는 어느 누구도 이 부부의 행동을 무조건 책망할 수는 없다. 원래 모든 돈을 바치기로 했다가 무슨 이유인지 마음이 달라져서 일부를 바쳤다는 것이 그렇게 죽을 정도의 죄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떻게 보면 일전 한 푼 바칠 게 없는 사람도 있고, 재산이 있더라도 무조건 바쳐야만 하는 것도 아닌 마당에 이들 부부는 비록 일부를 떼어두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상당한 재산을 바쳤으니까 비교적 괜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주 일반적인 사건 중의 하나로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을 이 이야기가 황당한 결말로 흘러가게 된 데에는 베드로의 역할이 중요했다.  

베드로의 책망
땅을 판 돈 중에서 일부가 손실된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향해서 이렇게 책망한다. “아나니아, 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 판 돈의 일부를 빼돌렸소? 팔기 전에도 그 땅은 당신 것이었고 판 뒤에도 그 돈은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요? 그런데 어쩌자고 그런 생각을 품었소? 당신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3,4절).
본문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첫 번째 난해구절이 바로 이 대목이다. 초기 기독교 안에서 차지하고 있던 베드로의 위상을 감안한다면 땅 판 돈의 모자라는 부분을 ‘족집게’처럼 뚫어보았다는 사실은 그런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예수님이 체포당해 심문당하는 그 현장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시치미를 뗀 적이 있던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이렇게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본문이 그 구체적인 정황을 설명하는 데 별 관심이 없기는 하지만 일단 본문만으로 본다면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변명할 기회를 한번도 주지 않은 셈이다. 이런 베드로의 태도는 문제가 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땅 판 돈의 일부를 감춘 행위가 곧 성령과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는 베드로의 단죄는 정당한 것일까?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스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 말씀은 마귀가 들려 눈이 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친 예수님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이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으로 그런 일을 했다고, 즉 예수의 행위는 악한 영에 의한 것이라고 헐뜯은 다음에 나온 것이다. 과연 아나니아의 행동이 이런 정도로 무거운 죄였을까? 이런 기준에 의한다면 우리 모두 아나니아처럼 당장 죽어야할 사람들일 것이다.

아나니아의 돌연사
베드로의 추상같은 꾸중을 듣자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 거꾸러져 죽고 말았다. 아무리 아나니아가 신앙적인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더라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이런 대목은 사실 기독교를 빛내기보다는 먹칠할만한 내용이다. “젊은이들이 들어와 그 시체를 싸 가지고 내어다 묻었다.”(6절)는 구절을 보면 흡사 조폭들이 배반한 조직원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방식과 오늘 이 이야기의 전개가 쏙 빼 닮은 것처럼 느껴진다.
성서학자들은 아나니아 이야기가 구약의 아간 설화(여 7장)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한다. 양측 모두 하나님에게 이미 바쳐진 것을 개인적으로 착복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아간은 여리고 성의 노획물의 일부를, 아나니아는 자기 재산의 일부를 챙겼다는 사실이다. 또한 아간 전승에서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었지만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전혀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간의 경우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생존에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일벌백계의 접근이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아나니아의 경우는 일견 공동체 전체의 생존과 연관된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여기서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조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아나니아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베드로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 했어도 말 한마디에 죽어버렸다는 게 말이 될까? 어떤 사람은 이것을 심리학적 현상으로 설명하지만 본문이 말하려는 바는 그런 차원이 아닐 것이다. 아나니아만이 아니라 3시간 뒤에 그 자리에 들어온 그의 아내 삽비라도 똑같이 죽었다는 사실을 보면 단지 심리학적인 현상으로 해명될 수는 없을 것 같다. 더구나 아나니아가 죽은 다음에 가족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장례절차도 밟지 않고 무연고자의 주검처럼 간단히 처리했다는 보도는 한 인간의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건에 대한 객관적 묘사라 할 수 없다. 또한 오늘 분문에 따르면 3시간 뒤에 삽비라가 베드로 앞에 나타날 때까지 돈을 그대로 놓아두었다는 말이 되는데, 교회가 범인을 심문하는 검찰이 아닌 다음에야 이렇게 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두려움의 정체
누가는 무슨 이유로 이런 불안하고 어두운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보도하는 것일까? 어떤 학자는 이 이야기가 초기 기독교에서 예비 세례자를 위한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재산의 액수를 속이는 행위를 엄격하게 처벌했던 쿰란 공동체의 규율과 이 이야기의 상통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또는 초기 기독교의 전설에 속하는 이야기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이유로 갑자기 죽어버린 한 부부 이야기가 전승을 통해서 재산과 연관된 전설로 굳어졌다는 말이다. 그 이외에도 여러 가능성들이 타진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이 이야기의 실체적 진실을 완벽하게 찾을 수 없다.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는 게 ‘알레고리칼 방식’의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것보다 훨씬 지혜로우며, 더 나아가서 신앙적이다.
비록 완벽하고 궁극적인 실체를 모르기는 하지만 최소한 본문이 말하려는 그 언저리만은 우리가 추적할 수 있다.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에서 볼 수 있듯이 성서의 부분적인 것들은 성서와 신학의 전체 틀과 상호순환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비록 완전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근사한 대답을 찾아볼 수는 있다.
오늘 본문에서 그 키워드는 ‘두려움’이다. 아나니아가 죽었다는 말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으며’(5), 삽비라 사건을 전해들은 사람들도 역시 “몹시 두려워하였다.”(11). 물론 여기서 두려워한 사람들은 이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다. 자기들도 아나니아나 삽비라와 전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던 교회 공동체 사람들과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오늘 사건의 핵심은 인간의 죄를 뚫어보는 베드로의 영적 직관력과 하나님의 심판이다. 물론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것이 초기 기독교인들의 두려움이다. 그 어떤 거짓말도 통할 수 없는 투명한 영적 세계,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런 두려움은 어린아이들이 엄한 아버지에게서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사이비 종파들도 그런 두려움을 통해서 회원들을 조직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한다.
오늘 본문에 진술된 두려움의 정체는 베드로의 직관력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내면적으로 경험하게 된 하나님의 큰 능력에 대한 놀라움이다. 기독교의 두려움은 어떤 사람이 지옥의 고통을 상상하면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큰 힘 앞에서 느끼는 놀라움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두려움은 우리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살리는 힘이다.
이런 두려움은 루돌프 오토가 설명하고 있는 ‘누미노제’이다. 즉 인간의 ‘피조물 경험’은 창조자의 신비 앞에서 크게 두려운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이런 경험은 ‘세계내존재’로 표현되고, 노장에게는 ‘아득함’이다. 이런 모든 경험을 신학용어로 바꾼다면 ‘거룩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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