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베드로의 그림자
(행 5:12-16)        
10월26일

요약보도 형식
오늘의 본문이 ‘아나니아와 삽피라’ 사건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다가온 박해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우연한 게 아니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의 편집의도가 개입된 것이다. 우리가 누가의 편집의도를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는 없지만, 또한 그것이 평신도들의 성서읽기에서 필수적인 작업은 아니지만 최소한 밑그림의 차원에서라도 어느 정도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누가는 무슨 이유로 앞에서 제시한 ‘요약보도’(2:42-47, 4:32-37)에 이어 또 하나의 요약보도를 제시하고 있을까?
우리가 본문을 꼼꼼히 살펴보면 문맥의 전개가 자연스럽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4절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와 15절 “사람들은 심지어 병자들을 길거리에 매고 나가···”라는 문장 사이의 틈이 바로 그것이다.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12a에서 15절로 직접 연결되어야 문맥이 자연스럽다고 한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첫째, 이 대목이 누가의 원 작품에는 없었지만 훗날 다른 편집자에 의해서 가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편집자가 세 요약 보도의 일관성을 위해서 약간의 손질을 했다는 것이다. 둘째, 원저자인 누가는 ‘아나비아와 삽피라’ 사건에 의한 공포 분위기로부터 사도들이 박해받게 되는 이유인 초기 기독교의 부흥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기 위해서 문맥적으로 약간 느슨한 방식으로 이 ‘요약보도’를 바로 이 자리에서 제시했다.
여기서 우리가 성서읽기에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원저자, 또는 다음 세대의 편집자에 의해서 진술된 사건과 그 해석을 무조건 사실(fact)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점이다. 성서는 그런 보도의 형식을 통해서 훨씬 근원적인(a priori) 세계를 간접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이지 직접 담고 있지는 않다.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신생아가 어머니 품에 안겨 젖을 빨면서 그 어머니를 모두 인식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 아이는 단지 따뜻한 어머니의 몸을 통해서 만족감을 느낄 뿐이지 어머니의 실체를 모두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서의 보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직접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예컨대 성서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가르침도 있지만, 아무리 하나님의 뜻대로 살더라도 불행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가장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던 예수는 가장 불행한 운명이라 할 십자가로 죽어야만 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누가의 편집의도에 의해서 요약보도 형식으로 진술되고 있는 이 본문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일에 주력할 것이다.

두려움에서 동참으로!
‘아나니아와 삽피라’ 사건은 교회 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지난 공부에서 결론적으로 지적했듯이 이런 두려움은 생명을 파괴하는 공포라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의 신비를 엿보게 하는 경건한 외경이었다. 이러한 경건한 외경은 이중적인 효과를 빚는다. 하나는 거리감이며, 다른 하나는 친근감이다. 이게 곧 거룩한 것에 대한 이중적인 체험이기도 하다. 아마 진정한 종교라고 한다는 이런 두 가지 성격을 담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누가는 그 당시 기독교 공동체의 형편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신도들의 모임에 끼어 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은 그들을 칭찬하였으며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13,14절).
이 요약보도의 핵심은 초기 기독교가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지만 칭찬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서 결국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이런 보도가 어느 정도의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지 우리가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누가 공동체가 자신들의 전통과 그 역사를 이런 방식으로 이해했다는 사실만 여기서 확인할 뿐이다.
만약 사도행전의 보도를 단순한 연대기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여기에는 적지 않은 과장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비록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이 적극적으로 말씀을 전하고 전도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많은 것들이 생략되거나 숨겨져 있을 것이다. 초기 공동체 내부로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명백한 경험과 성령강림의 특별한 경험이 작동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예루살렘의 실제적인 상황은 십자가 사건이 훨씬 강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핵심 신도들이 세계와 맺었던 태도는 아주 소극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사도행전은 적극적인 관점으로 초기 기독교를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일차적으로는 그것이 바로 누가의 신학적 해석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초기 공동체에 관한 사도행전의 묘사는 초기만이 아니라 누가가 활동하던 90년 어간까지의 전체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어쨌든지 이제 누가는 초기 기독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베드로의 그림자
누가는 ‘아나니아와 삽피라’ 사건과 같은 놀라운 일들이 일반 사도들에게서도 똑같이 일어났다는 점을(12절) 지적하는 한편 베드로의 특수한 지위를 암시하고 있다(15절). 아마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베드로의 사도권을 수위권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일반화할 것인지 논란이 없지 않았던 같다. 사도행전 앞부분에는 베드로가 전면에 등장한다. 비록 성전 미문에서도 베드로가 요한과 동행하고 있고 오늘 본문에도 사도들의 능력이 언급되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뉘앙스에서는 분명히 베드로의 특수한 위치를 인정하는 것 같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런 베드로의 수위권을 교황이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당한 비약이다. 어쨌든지 초기 공동체 내부에서 사도들의 주도권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우리가 명확하게 추적하기는 힘들지만 베드로의 특수한 지위는 일정 정도 보장된 것 같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예수의 어록집인 ‘큐’ 자료와 더불어 베드로의 설교를 매우 중요한 자료로 사용했으며, 마태는 마태복음을 기록하면서 은연중에 베드로의 권위를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베드로의 권위는 그렇게 구조적이고 교권적인 차원은 아닌 것 같다. 이미 바울이 베드로를 직접 거명하면서 책망한 적도 있고, 예루살렘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였다는 주장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영적인 권위가 거의 신격화되어 있다는, 약간 이상한 현상을 만난다.
15절 말씀을 그대로 읽어보자. “사람들은 심지어 병자들을 길거리에 메고 나가 들것이나 요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행여나 그 그림자만이라도 그 몇 사람에게 스쳐 갔으면 하였다.” 예수님도 병자와 장애인을 치료하셨고, 이미 앞에서 사도들에게도 이런 일들은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이런 사건이 초자연적인 것인지 아니면 자연적인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여기서 무의미하다. 고대인들에게 병자의 치료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도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처럼 베드로의 ‘그림자’만이라도 병자의 몸에 스치기를 원했다는 것은 예상 밖이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18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자가 병 나을 욕심으로 예수의 옷자락을 움켜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예수의 그림자까지 어떤 치유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없었다. 그런데 왜 베드로에게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어떤 종교이든지 민간전승의 차원에서는 이런 미신적이고 마술적인 요소들이 개입하기 마련이다. 요즘도 로마 가톨릭 세계에서는 성모 마리아 상에서 피눈물이 흘렀다거나 어린아이에게 성모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나돌고 있다. 불교의 전승에는 이보다 훨씬 미신적인 사건들이 많이 등장한다. 초기 기독교는 이런 미신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정경화 작업에서 일어났다. 초기 공동체에 유포되던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 중에서 예수의 어린시절에 있었던 초능력에 관한 모든 설화들을 교회는 정경에서 제외시켰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표면적인 현실 너머에, 또는 그 심연에 작동하는 신적인 현실(divine reality)에 주목하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인들이 병자의 치료에서 그 능력을 경험하려고 했다는 것은 그렇게 비정상적인 일은 아니다. 그런 일들은 차츰 주변부로 밀려나고 신앙의 본질이 그 중심으로 자리를 잡기만 한다면 기독교의 건강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넘어
오늘 누가는 베드로의 그림자가 병자를 고쳤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그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바는 사도들을 통한 능력이 이런 정도로 강력하게 작용했다는 점이다.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여러 동네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  몰려왔는데”(16절)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누가의 관심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섰다는 사실에 있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하루에 5천 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적이 있지만, 이제 병자 치료라고 하는 보이는 복음(구원)의 사건을 통해서 예루살렘 주변의 사람들에게까지 기독교가 전파된 셈이다.
오늘 말씀에서 신앙적 교훈을 한 대목만 지적하자. 예루살렘 근방의 사람들이 ‘병자’와 ‘악령 들린 사람’을 사도들에게 데리고 와서 모두 고침을 받았다는 16절 말씀은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치료 행위가 종교로부터 독립된 이후에 이런 육체적인 질병과 정신병은 전문의들이 감당해야 하겠지만 기독교는 이런 표면적인 병보다 훨씬 심층적이고 본질적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능력이 교회 자체로부터 발생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흡사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는 피리가 되어 있기만 하다면 하나님의 숨(루아하)이 우리를 관통함으로써 아름다운 소리를, 즉 인간 치유의 사건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 심층적이고 본질적인 병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들을 절대화함으로써 빠져들게 되는 삶의 무의미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생산품은 반드시 세상의 물질적 탐욕이나 무한 경쟁구도 같은 것들만이 아니라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일종의 율법주의를 가리킨다. 즉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착각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병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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