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스데파노의 설교
(행 7:1-53)        
11월23일

자기변호가 없는 이유
사도행전에 들어있는 몇 편의 설교 및 연설 중에서 스데파노가 순교당하기 직전에 행한 설교라고 일컬어지는 오늘 본문만큼 장문도 없다. 일견 장황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그런데 이 연설문은 순교를 앞둔 사람의 글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장감이 떨어져 있다. 1-16절에 유대인들의 족장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이야기가 상당히 거칠게 묘사되고 있다. 17-47절은 모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마흔 살이 된 모세가 이집트에서 살인사건으로 인해 추방된 사건, 여든 살에 호렙산에서 야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이야기는 예상 외로 세부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뒤로 광야에서 ‘증거의 회막’을 만든 사건과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정복한 후 다윗에 의해 계획되었다가 결국 솔로몬에 의해서 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이야기로 이 연설문이 대충 마무리되었다. 결론적인 대목에서 유대인들을 향한 책망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마저도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발언으로서는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1절에 보면 대사제가 유대인들의 고발 내용이 사실인가 하고 스데파노에게 물었다. 그 내용의 진위 여부에 따라서 스데파노의 생명이 갈라지는 이 숨 막히는 순간에 스데파노는 자기에 대해서 한 마디의 변론도 제기하지 않았다. 물론 유대인들의 고발 내용이 율법과 성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스데파노의 연설을 광의로 해석한다면 자기 변론이 될 수도 있겠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쏟아내는 연설로서는 그 내용이 지나치게 느슨하다는 말이다. 자신의 무죄를 구체적으로 증명해보려는 안간힘을 이 연설문에서 읽을 수 없는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죽음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을 만큼 그의 믿음이 대단하다는 의미일까?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시도된 해명을 종합적으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은 디벨리우스의 견해가 이에 대한 가장 정확한 대답일 것이다. “이 설교는 내용적으로 유대교 공동체로부터의 그리스도인들의 분리를 예비한다. 이것은 결코 전형적인 순교자의 설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순교의 이익이나 위험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 연설문은 스데파노가 직접 행한 설교라기보다는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그 당시의 기독교 선포를 스데파노의 순교 사건과 연결시킨 것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의 편집 의도를 두 가지 측면에서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스데파노의 순교를 자기 시대의 기독교 선포로 새롭게 해석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시대의 선포를 스데파노의 순교로 강조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누가의 본래 의도에 가까운지 오늘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으며, 어떤 점에서는 이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접어두기로 하고, 누가가 스데파노의 순교 사건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좀더 따라가 보자.

사건과 해석
누가는 지금 스데파노가 행한 순교 연설을 그대로 재연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공동체가 처한 상황을 변증해내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 그의 상황이라는 것은 유대교로부터 기독교가 분명하게 갈라서는 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를 선포하는 것이 유대교와 기독교를 구분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지만 누가는 이런 케리그마에 이르기 전에 이미 유대교가 따르고 있는 구약 사건에서도 서로의 다름이 확인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유대의 족장 서사를 좀 장황하게 나열함으로써 유대인들이 한편으로 구원사적 과업을 지닌 민족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우상숭배와 예언자 살해에 연루된 민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만약 이런 논리가 정당하다면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의 설교자도 역시 누가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사건을 그대로 반복하는 게 아니라 해석한다. 물론 대개의 목사들이나 성경을 지도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성서 사건을 해석한다는 말에 동의하겠지만 그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좁혀서 말한다면 성서를 전달하는 사람이 자신의 주관적 신앙을 전달하기 위해서 성서를 도구화한다는 데에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미 기독교 신앙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는 전제 가운데서 성서의 정보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자신들이 기독교를 충분히 안다고 여긴다는 사실과, 아울러 기독교의 가르침이 이미 드러났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누가 시대에만 기독교 신앙의 체계가 불완전한 것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누가 시대에 비해서 오늘의 기독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내용을 확보하고 있긴 하지만 근본의 문제에서는 별로 차이가 없다. 예수님에 대한 ‘vere Deus, vere homo’라는 개념이나 삼위일체론 같은 개념이 누가 시대 이후에 기독교 역사에서 정리된 부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누가 시대보다 예수님과 하나님, 그리고 그 두 관계를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예수님의 부활과 종말론에 대해서 수많은 신학자들이 진지한 논의를 전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교리의 실체적 진실은 우리에게 여전히 은폐되어 있는 상태이다.
기독교의 진리가 여전히 과도기에 있다고 한다면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변증해야 한다는 말일까? 여기에 어떤 왕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강절이 교회력의 출발이듯이 신앙적 인식론에서도 역시 이 ‘기다림’은 근본이다. 이 기다림은 막연한 게 아니라 종말의 선취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한 참된 생명을 희망하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우리의 희망이 확보해야할 보편적 지평을 성서 사건을 해석함으로써 열어가는 작업이다. 자신의 실존적 신앙경험에 묶이거나 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에 철저하게 의존해야만 우리는 성서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단초를 획득한다.

성전과 세계
스데파노의 설교는 전반적으로 긴장감이 떨어지는 가운데 뒷부분에서 겨우 그런 상황이 회복되고 있다. 그는 솔로몬 성전에 집착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비난하기 위해서 이사야 66:1,2절을 인용한다. 모든 종교가 성전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듯이 솔로몬 성전을 갖고 있던 유대교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유목생활에 시달리던 민족이었기 때문에 한 공간에 자리를 잡은 솔로몬 성전이 그들에 주는 정신적 안정감은 다른 민족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요즘도 오래 된 교회당이나 성당에 들어가면 어떤 종교적 신비감을 맛볼 수 있듯이, 그것은 일종의 영성인데, 성전의 고유한 의미와 그 작용을 우리가 부정하기 힘들다.
구약 성서의 야훼 하나님은 이런 성전 중심주의와 그것을 뛰어넘는 우주론적 차원과의 긴장 가운데 있다. 야훼 하나님께 최고의 상징적 예전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는 장소라는 원래의 의미를 바르게 유지한다면 솔로몬 성전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건축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영적 가치를 확보할 수 있었겠지만 성전 자체가 절대화함으로써 결국 야훼 하나님의 우주론적 지평이 축소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런 긴장을 성전 영성과 세계 영성의 갈등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기독교의 영성에도 이런 갈등이 내재해 있다. 유대교에서는 성전 영성이 득세했다고 한다면 기독교 영성은 기독론적 영성이 그런 역할을 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 일원론적 영성’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사실만 배타적으로 강조됨으로써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를 통한 영성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어거스틴이다. 자기 스스로 젊었을 때 방탕하게 생활한 탓인지 어거스틴은 인간을 매우 부정적인 존재로 보고 은총 일원론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비해서 펠라기우스는 비록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근본적으로 파괴되지 않았다고 보고 구원 사건에서 인간의 역할을 인정했다. 어거스틴이 인간의 죄를 강조했다면, 펠라기우스는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기독교 역사는 어거스틴을 정통으로 받아들이고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단죄했지만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일단락된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여전히 길을 가야하듯이 오늘 우리는 이제 어거스틴의 기독론적 영성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펠라기우스의 자연적 영성도 역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령론적 영성
그리스도 일원론적 영성은 삼위일체론적 신론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 신학에서는 극복되어야 과제이다. 여러 관점에서 이런 문제들이 논의될 수 있지만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우리는 그것을 ‘성령론적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51절 말씀은 다음과 같다. “이교도의 마음과 귀를 가진 이 완고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당신네 조상들처럼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을 절대화하는 그들의 태도는 성령에 의해서 선포한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성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곧 “천사들에게서 하느님의 율법을 받고도” 그 규례를 지키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53).
성령만큼 교회 안에서 오해되는 가르침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이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대로 형식적인 차원에서나마 정상적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성령만큼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이나 아들 예수에 비해서 성령이 훨씬 우주론적 차원에서 해명되어야 할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루아하’, 헬라어로 ‘프뉴마’로 이름이 붙여진 이 영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 현상과 관계하고 있다. 이미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이 영을 불어넣으셨으며, 이스라엘이 전쟁을 치를 때도 이 영이 작용했다. 신약성서에서 ‘프뉴마’는 비교적 기독론적인 차원에서 언급되는 일이 많기는 하지만 우주론적 차원을 여전히 포함하고 있다. 앞으로 기독교의 성령론은 생물학의 유전공학이나 물리학의 장이론과도 연결될지 모른다.
오늘의 공부를 마치면서 유대인들이 성령을 거역한다는 스데파노의 충고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의 한 토막만 새겨보자. 궁극적인 진리와 생명은 종교적 독단에 갇히지 않고 미래를 향해 열린 태도를 유지하고 있을 때만 인식될 수 있다. 그 ‘미래’가 바로 오늘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견인해나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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