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헬라파’의 운명
(행 8:1-3)        
12월7일

유대교와 기독교
졸저 <기독교를 말한다>에서도 한번 제기된 질문이지만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 흩어졌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모임을 가졌다는 사실은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 처형에 이르는 일련의 비극적인 상황을 전제한다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가 심문 받던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베드로가 세 번에 걸쳐 예수와 무관하다고 증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당시 예수 공동체에 대한 유대교의 적대감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면 예수의 제자들은 당장 유대교와 일전을 치르든지 아니면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게 상식적인 행동인데, 우리가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의 미문 앞에서 장애인을 치유한 사건에서 보았듯이 제자들은 수시로 성전을 드나들며 기도생활을 했다. 사도행전의 이런 보도에는 무슨 내막이 있는 것일까? 도대체 유대교와 원시 기독교는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 문제를 직접 언급하기 전에 우리가 다시 한번 더 확인해야 할 대목은 사도행전이 기록된 시기와 집필 목적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진 ‘누가’는 사도행전이 진행되는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인물이 아니라 바울이 죽고 대략 20년쯤의 세월이 흐른 90년대에 기독교 선교를 위해서 로마와의 연대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고급 헬라어를 구사할 수 있는 기독교 저술가였다. 기원 후 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와 누가와의 시간적 차이는 두 세대나 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사도행전의 서술 내용은 상당한 전승과 편집의 과정을 견뎌냈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이런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사도행전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그런 태도를 믿음이라고 강변하는 근본주의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문자로서의 성서를 뛰어넘어 궁극적인 생명의 진리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사도들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에도 여전히 유대교와의 선린 관계를 청산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기존에 있었던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상황을 추론할 수 있게 한다. 우선 <기독교를 말한다>에서 나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된 이유를 사도들이 태생적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렇지만 사도들이 순수한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만 갖고 원시 기독교가 유대교와 우호적으로 지냈다는 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은 원기 기독교인들에게 유대교와 단절해야할 만큼 절박한 사건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예수의 십자가는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의심하자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 그 십자가 사건이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저질러진 게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들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반감을 가져야 할 하등의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만 사도들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든 이유가 설명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유대교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는 말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복음에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의 가르침은 세례 요한과도 달랐고, 바리새인들과도 달랐으며, 그 당시 백가쟁명 식으로 야훼 하나님을 섬기던 여러 유파와도 달랐다. 그렇지만 어느 종교에서나 그런 차이는 있는 법이니까 그런 차이는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배를 갈아타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예수도 역시 율법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 완성한다고 말씀하지 않았는가? 예수의 제자들은 유대교와의 차이보다는 일치점이 훨씬 많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결국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여기에는 당연히 예수의 부활 사건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긴 했지만 그것까지 포함한 예수 사건 전체가 새롭게 해석되는 과정에서 어떤 힘이 개입했다고 보아야 한다. 요약하자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현현 이후에 제자들은 자신들을 유대교 안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구약성서를 그들과 약간 다르게 해석하는 하나의 분파로 생각했지만 그들이 죽은 다음의 기독교 역사는 차이점이 훨씬 중요하게 부각되는 쪽으로 흐른 셈이다.

스데파노의 죽음
유대교와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갈라지게 된 것은 역사가 상당히 전개된 다음이지만 그런 단초는 이미 초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게 바로 최근에 우리가 공부한 예루살렘 공동체의 분리 사건이었다. 사도행전 6장에 묘사되어 있는 소위 ‘일곱 집사’ 선정은 히브리말을 사용하는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과 그리스 말을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었다는 상황을 배경에 두고 있다. 이런 역사적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일곱 명의 지도자가 곧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서 사도들의 과중한 업무를 덜어주기 위해서 선택된 것처럼 설명했다. 그리스말을 쓰는 디아스포라 기독교인들은 스데파노를 비롯한 일곱의 대표자를 중심으로 사도들이 중심이 된 팔레스타인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두 공동체의 차이가 곧 스데파노의 설교에 담겨 있는데, 그의 설교에서는 유대교 신앙의 두 기둥인 성전과 율법이 철저하게 부정된다. 이에 반해서 사도행전 2,3,4,5장의 베드로 설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언하는 데 무게를 두면서도 유대교의 성전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데파노의 설교에 비해 훨씬 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스데파노의 설교는 죽음을 불러왔다. 아마 스데파노도 자신의 과격한 설교가 유대교 지도자들의 큰 반발을 불러올 것으로 내다보았겠지만 유화적인 사도들과 달리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가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을 것이다. 스데파노의 순교 사건도 역시 사실 그대로의 보도라기보다는 누가가 알고 있는 전승을 중심으로 조금씩 손질을 가한 것이긴 하다. 원래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을 위해서는 통곡하거나 장사지내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도 본문(8:2)에는 정상적인 죽음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어쨌든지 이 스데파노의 순교 사건을 기점으로 예루살렘에 있던 디아스포라 기독교 공동체는 와해의 길을 걷는다. 그 장면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 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심한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모든 신도들은 유다와 사마리아 여러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사도들만 남게 되었다.”(8:1). 이 구절에는 서로 모순 되는 상황이 함께 서술되어 있다. 모든 신자들이 흩어졌다는 사실과 사도들만 남게 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예루살렘에 있는 기독교 전체가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사도들이 박해의 표적이 되어야 할 텐데 그들이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렀다는 것은 그들의 안전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는 뜻이다. 사도들의 위기는 이 스데파노 사건이 일어난 후 상당한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행 12장). 사도인 요한의 형 야고보가 헤로데 왕에 의해서 죽은 다음에 베드로는 서둘러 예루살렘을 빠져나간다.
그렇다면 8장에 기록된 초기의 박해는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일까? 이 대상은 예루살렘의 모든 기독교 공동체 전체가 아니라 그리스말을 쓰는 디아스포라 기독교인들이었다. 반면에 사도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기독교 공동체는 그 후로도 상당한 세월 동안 유대교와 별 마찰 없이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기들과 같은 기독교 신앙인들인 디아스포라 신자들이 스데파노의 순교 이후로 극심한 박해를 받은 이 사태 앞에서 사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우리는 지금 그런 내막을 충분히 설명할만한 자료가 없다. 다만 두 가지의 가능성은 모두 열려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는 있다. 하나는 약간 다른 형식의 신앙생활로 인해서 받게 된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박해를 팔레스타인 공동체가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내면적으로 여전히 동일성을 유지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디아스포라 신앙의 과격성을 지적하면서 신앙의 동질성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훗날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예루살렘 모교회가 상호 교류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아마 전자의 가능성이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헬라파
기독교의 초기 단계에 예루살렘 내부에서 사도들과 일종의 신학논쟁을 벌임으로써 유대교와 차별성을 강조했다가 극심한 박해를 받고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던 디아스포라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학자들은 “헬라파”라고 일컫는다(에티엔느 트로크메, 초기 기독교의 형성, 61쪽 이하). 이들은 유대교와 우호적이었던 사도 중심의 팔레스타인 공동체와 다를 뿐만 아니라 예수를 헬라 철학의 토대에서 변증하려고 했던 요한공동체와도 다르며, 훗날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합 공동체를 이룬 안디옥 공동체와도 달랐다. 여러 갈래의 노선 가운데서 유대교와 가장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던 헬라파는 유대교의 표적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축출당한 후 여러 곳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기원후 58년경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이들의 신앙은 초기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트로크메의 설명에 따르면 마가복음이 바로 그 대표적인 문헌이라고 한다. “마가복음서는 그리스도론 해설서도 아니고 전기적 서술도 아니다. 이 책은 어떤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복음 선교사요 순회 치료자인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자는 초대장이다.”(71쪽). 기성질서와 체제에 가장 격렬하게 도전했던 헬라파의 신앙이 마가복음의 중심 메시지라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예컨대 마가는 예루살렘 초기 지도자들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으며, 예수의 동생 야고보를 비롯한 예수의 가족을 맹렬히 공격한다. 이렇듯 유대교와 타협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를 비난하는 집단은 ‘헬라파’가 유일하다. 이 헬라파가 초기 기독교에 남긴 유산은 적지 않다. 예루살렘 교회가 자폐증에 빠지지 않고 외부 세계를 향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는 점과 기독교를 문화적인 면에서 헬라화 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 헬라파가 바로 스데파노를 정점으로 한 디아스포라 공동체였다. 그들은 오늘 본문에서 극심한 박해를 받아 흩어지고, 대신 그들에 비해 덜 과격하지만 여전히 유대교와의 차이를 강조했던 바울이라는 특별한 인물이 역사 안으로 조금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짧지만 강렬했던 헬라파의 활동이 기독교 역사에서 바울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지 모르며, 더 나아가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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