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마술사 시몬
(행 8:4-25)        
12월14일

사마리아 선교
우리가 앞에서 한번 언급한 대로 예수가 태어난 이스라엘에서는 기독교가 맥을 못 추고 오히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상당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이 역설적 사실은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사도들이 보인 태도에서 이미 결정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동로마 제국의 수도이며 동방 정교회의 본산이었던 콘스탄티노플 같은 도시라든지 바울이 설립한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도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초토화하긴 했지만 예수의 사도들이 이끌어가던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교와 격렬하게 투쟁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독립할 의사가 전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미묘한 긴장을 풀어내는 역사 공부는 재미있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과거의 교회 역사를 배우려는 것은 (사실 성서 읽기는 곧 역사 공부와 다를 바 없다) 그 역사가 늘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고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을 밝히려는 데 있다기보다는 우리의 선택과 결정으로 크게 잘못되는 것만은 막아보자는 데 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복음이 예루살렘을 벗어나는 역사적 순간에 대한 누가의 보도를 읽었다. 스데파노 순교 이후 본격적으로 박해를 받기 시작하던 ‘헬라파’ 기독교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여러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짐으로써(8:1) 결국 복음이 사도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고수되던 예루살렘의 한계를 벗어나게 된 것이다. 누가는 유다의 여러 지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주로 헬라파의 한 대표자였던 빌립보에 의해 수행된 사마리아 선교를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스라엘의 중부에 자리하고 있는 사마리아는 남쪽의 유대와 북쪽의 갈릴리 지역에 비해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앗시리아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한 후에 사마리아에 이주해온 앗시리아 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혈연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유대인이 이방인들과 혈연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사마리아 인들은 정통파 남유대 인들에 의해서 따돌림을 당했다. 이런 실제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남북 분단 시대로 접어들었을 때 사마리아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다스린 남유대에 속하지 않고 솔로몬 시대의 한 장군이었던 여로보암이 다스린 북이스라엘에 속했다는 이유가 이런 일종의 지역감정에 일조했을 것이다. 이에 반해 같은 북이스라엘에 속했던 갈릴리 지역이 무시당하긴 했지만 사마리아처럼 차별당하지 않은 이유는 남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과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세겜이 바로 사마리아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의한 이주 정책에 의해서, 또는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사연으로 인해서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도 사마리아 지역에는 여러 종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것은 곧 여러 문화가 공존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러 문화가 배타적으로 작용하지 않고 공존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단일 문화 세계가 따라잡을 수 없는 역동성을 일구어내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예루살렘을 벗어난 기독교의 복음을 사마리아 인들이 받아들였다는 사도행전의 보도는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빌립보의 활동
5-7절에 묘사된 빌립보의 활동은 오늘 우리의 일상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세겜으로 추정할 수 있는 사마리아의 도시 사람들은 빌립보가 전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설교를 듣고 그가 행하는 기적을 보면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이 헬라파 기독교인의 말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죽이거나 박해했는데 반해서 그들이 무시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이러한 전개는 이제 바울이 본격적으로 나서게 될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미리 암시하려는 의도다 있다 하겠다.
누가는 빌립보의 설교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피하고 대신 그가 일으킨 기적에 대해서 약간 보충한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악령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병자들과 불구자들이 깨끗이 나았기 때문이다.”(7). 물론 누가는 전승을 통해서 주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필요에 따라서 이 대목에 편집했을 것이다. 모든 종교의 초기에는 열광주의적 현상이 따라다니기 때문에 기독교도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단 묘사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문제를 반성적으로(reflexive)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서읽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런 텍스트에 개입된 수많은 전승 층의 내면이지 외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 7절의 묘사는 예수에게 있었던 치유 이적과 거의 흡사하다. 누가는 왜 빌립보의 활동에서 예수에게 일어났던 사건과 똑같은 일들이 벌어졌다고 기록하는 것일까? 인간의 몸까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복음서 기자들의 증언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빌립보마저도 이런 능력이 있다는 증언은 좀 어색한 것일지 모른다. 물론 예수의 경우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빌립보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려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사건 자체는 우리에게 충분하게 납득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소극적으로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가 가장 핵심적으로 말하려고 한 부분은 사도에 버금가는 빌립보를 통해서도 역시 복음의 능력이 드러난다는 것이며, 그 당시에 그런 능력을 가장 돋보이게 할 수 있었던 현상은 악령과 질병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는 것이다.

마술사 시몬
누가는 이 도시에서 ‘마술’로 사람들을 미혹했던 인물을 등장시킨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 시몬이라는 마술사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어떤 연구에 의하면 이 시몬은 사마리아 지역의 한 신(神)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는 교주였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지 이 사람에게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혹’하게 만드는 비상한 능력이 있었다는 건 분명하다.
마술은 고대인들만이 아니라 계몽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위대한 힘’(10)으로 작용한다. 정치, 경제, 교육, 심지어는 종교에도 역시 이런 마술은 통한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 안에 생명의 토대를 갖고 있지 못한 인간이 자기를 초월하는 힘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우리를 초월하는 궁극적인 생명의 힘과 마술을 구별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마술의 특징은 그 힘이 파괴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나 인간의 소비중심주의로 인한 생태계 파괴같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상만이 아니라 인간을 어느 힘에 의존적으로 만듦으로써 결국 자기 훼손의 길을 가게 하는 숨겨진 현상들도 여기에 포한된다. 오늘의 교회는 혹시 마술로 작용하지는 않을까?
빌립보에 의해서 세례를 받은 마술사 시몬의 관심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기적과 놀라운 일들에 있었다. 물론 우리는 시몬의 영적인 상태를 모두 파악할 수 없으며, 누가도 그것에 대해서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않지만 오늘 본문의 전반적인 맥락에서 볼 때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시몬도 믿음이 있었다고 하지만 결국 엉뚱한 것에 관심만 보였다는 점에서 ‘믿음’에 앞서서 ‘인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지 모른다.

성령 임재
누가가 사마리아 선교 사건에 예루살렘 교회를 끌어들이는 이유도 역시 이런 문제점들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일 것이다. 사마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검증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파송 받는다. 누가는 빌립보에 의한 선교의 한계가 바로 ‘성령’의 부재에 있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은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16).
도대체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는 근본적으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 자체가 바로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이며, 세례가 이런 신앙고백을 전제한다면 결국 세례는 성령과 분리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누가는 이런 기본적인 논리를 부정하고 빌립보에 의한 세례를 베드로와 요한에 의한 성령 안수로 보충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예루살렘 교회와 헬라파 교회 사이의 알력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헬라파를 대표하는 빌립보의 선교활동은 늘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유대인 교회에 의해서 검증 받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빌립보에 의해서 세례 받은 마술사 시몬은 베드로에 의해서 가장 극단적인 표현으로 책망을 받았으며, 이런 사태에서 빌립보의 역할은 배제되어 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서 그들에게 임한 성령의 현상은 ‘방언’이었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에서 이런 방언 현상은 그렇게 흔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주 드믄 것도 아니었다. 특히 바울의 피선교지에서 이런 현상은 자주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종종 경계했다. 사람이 어떤 엑스타시의 상태에 몰입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지를 수 있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한다. 흡사 무당들이 접신 상태에서 노래와 춤을 추듯이 말이다. 기독교 안에도 이런 열광적 종교현상이 있을 수 있는데, 문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견뎌내지 못하고 이런 현상에 빠지게 되는 경우에 결국 하나님의 영보다는 인간의 주관적 심리작용이 그 중심을 차지한다는 데에 있다.
사도들의 안수로 인해서 성령이 임하는 현상을 목도한 마술사 시몬은 호기심이 발동해서 돈을 주고 그런 능력을 받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시몬이 이런 요구를 했다는 게 이해되지 않지만 누가는 각각 분리되었던 마술사 시몬에 대한 전승과 베드로의 사마리아 선교 전승을 여기서 하나로 묶는 과정에서 약간의 불협화음이 발생한 게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하나의 신앙적 가르침을 새긴다면 마술의 힘으로 사람들을 매혹시켰던 시몬이 성령의 능력으로 활동하는 사도들 앞에서 무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정체가 여지없이 폭로되었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이 이런 차원에서 작용하고 있는 뒤돌아보아야 한다. 거짓과 불의가 무력화하고 그 정체가 드러나는 활동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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