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회심 이후의 행적에 대해
(행 9:19b-31)     3월15일


다마스커스에서 예루살렘으로!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회심 직후 다마스커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그를 죽이려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한다. 그 뒤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어 했지만 아무도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다행스럽게 중재역할을 한 바나바 덕분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었으며, 사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결국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고향인 다소로 피신한다. 그 와중에도 복음은 유다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전파되고 교회의 토대가 탄탄해졌다.
우리가 이런 보도를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신앙의 본질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텍스트의 심층적 지평으로 들어가기 위해 ‘해석’(hermeneutics)하는 이유는 일단 원래의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이 지나치게 이상주의로 흐르거나 현실성을 놓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텍스트 너머에, 텍스트의 내면에, 혹은 텍스트 행간에 주목해야만 하며, 이를 위해서 텍스트에 얽힌 사태를 가능한대로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급선무이다.
우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 환상 가운데서 예수를 경험했다고 해서 그 즉시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는 이 보도가 그렇게 설득력이 있을까? 박해자로서의 바울과 전도자로서의 바울 사이에 개입해 있는 ‘회심’ 사건은 그의 개종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징표일 뿐이지, 즉 이미 그의 내면세계에서 발생한 회심을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지 그에게 일어난 모든 신앙적 삶의 과정을 결정하는 단서는 아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생략하고 있지만 이 다마스커스 도상의 환상 이전과 이후에 바울의 정신세계는 매우 심한 종교적인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우여곡절의 배경은 초기 기독교의 태동과 연관된다. 최소한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이후, 그 즉시 유대교와 구별되는 기독교 공동체가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의 시작은 유대교의 여러 유파인 엣세네파, 바리새파, 사두개파처럼 ‘나사렛파’가 새롭게 등장하는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들 여러 유파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 수행에 모든 종교생활의 뿌리를 두고 있는 바리새파의 한 사람이었던 바울은 새롭게 등장한 나사렛파와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내면적 변화를 통해 결국 나사렛파의 일원이 된 것이다. 나사렛파가 언제 어떻게 명실상부하게 그 유대교로부터 독립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만 바울이라는 인물이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거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오늘 텍스트에서 자연스럽지 않은 또 하나의 진술은 바울이 다마스커스에서 피신한 즉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예루살렘 대제사장들에게서 나사렛파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던 바울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는 누가보아도 상당한 비약이 전제된다. 또한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공동체가 바울의 회심을 모르고 있었던데 반해서 바나바가 알고 있었다는 것도 설득력 있는 보도는 아니다.
왜 이렇게 자연스럽지 않은 진술들이 본문에 등장할까? 그렇다고 해서 성서 텍스트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2천년 전 한 역사가의 한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울이 죽은 지 이미 한 세대가 지난 시기에 비교적 빈약한 전승에 의존해서 초기 기독교 역사를, 특히 바울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재구성해야 할 역사가로서 누가는 최선을 다 했지만 다른 정보를, 예컨대 바울의 서신을 알고 있는 우리가 볼 때 허점이 보인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회심 이후의 행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아라비아 3년을 누가가 몰랐다는 것이다.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의 차이

회심 이후의 바울 행적에 관한 보도는 사도행전보다는 바울의 서신이 훨씬 정확하다고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전승에 기초를 두고 보도했지만 서신은 본인의 직접 진술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행적에 관한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1:11-24). “그때 나는 어떤 사람과도 상의하지 않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커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삼 년 후에 나는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그때 주님의 동생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는 만나지 않았습니다.”(1:16b-19).
만약 바울의 서신인 갈라디아서의 보도가 확실하다면 사도행전은 상당한 오류를 안고 있는 셈이다. 첫째,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회심 이후 바울은 아무에게도 의논하지 않았지만, 사도행전에 의하면 이미 다마스커스 신자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전도했다. 둘째,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는데, 사도행전에 의하면 올라갔다. 셋째, 바울은 원래 3년이 지난 다음에 예루살렘에 갔다. 넷째,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도 바울은 베드로와 야고보 이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지만 사도행전에 따르면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바울의 행적에 관해서, 특별히 예루살렘과의 관계에 관해서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 대답은 누가의 사도행전 집필 목적이 바울의 정확한 전기, 또는 초기 기독교의 정확한 사실 역사를 복원하려는 게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본인이 아무리 정확하게 언급하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부족한 전승과 정보만으로는 불가항력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 사도행전의 독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구체적인 장면에 어떤 역사적 가치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노파심으로 한 마디 한다면, 성서의 역사적 가치가 상대화한다고 하더라도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갖는 권위가 훼손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성서가 별로 과학적이지 않은 형식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더라도 훨씬 본질적인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지시하고 해명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실’과 그것의 ‘해석’이 혼합되어 있는 이 성서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만을 포착해야지 부수적인 것에 휘말리면 바른 성서읽기가 아니다. 예컨대 성서를 통해서 ‘창조과학’ 같은 것을 주장한다는 것은 매우 비신학적일 뿐만 아니라 결국 비신앙적인 태도라는 말이다.
다시 오늘의 텍스트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의 진술은 완전히 대립적이라는 뜻일까? 즉 누가는 지금 픽션을 쓰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는 바울의 아라비아 체류를 몰랐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순서를 다르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지 완전히 없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다마스커스에서 아레다왕의 총독에게 쫓긴 것은 사실이며(고후 11:32,33),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오랜 전부터 내려온 전승만 알았던 누가는 그 순서를 조금 바꿔서 기록했을 뿐이다.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의 상황이 다른 이유도 바울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이 우호적으로 바뀐 후대의 역사를 미리 앞당겨 설명했다는 데에 있다. 바울과 예루살렘 공동체와의 긴장에 관해서 누가는 별로 아는 게 없었을 수도 있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상황이 좋아진 마당에 지나간 일을 들출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90년대에는 그런 갈등이 거의 사라지고 교회의 토대가 확고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31절) 전제해야만 이런 모순들이 해결된다.

하나님의 아들

비록 사도행전이 전승 자류의 한계를 보이고 있긴 하지만 바로 그 당시 공동체에 뿌리박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꾸준하게 지켜내고 있다. 회심 이후 바울이 다마스커스에서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는 사실이(20절) 바로 그것이다. 이는 곧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언과(22절) 동일한 의미이다. 나사렛파가 유대교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유대교와 기독교의 결정적인 차이도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에 있었다.
어떻게 인간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을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부자지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예수와의 ‘동일시’이다. 과연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예수의 공생애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그런 증거였을까? 가르침, 자기희생, 치유와 축귀 같은 것들이 증거인가? 십자가와 부활인가? 물론 결정적으로는 부활이야말로 초기 공동체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게 된 사건이다. 그렇지만 그 부활이라는 게 흡사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과 같은 현상이 아니며, 복음서에 묘사된 부활보도 역시 실증적인 진술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대답이 그렇게 간단하게 주어지는 게 아니다. 더욱이 예수에 관한 신약성서의 설명이 한결같이 구약성서를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도 여기서 매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우리는 이렇게 추정할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뒤에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중의 일부가 이상한 현상을 경험했다. 그 현상은 곧 부활한 예수의 현현이었다. 그들은 시간을 두고 자신들의 경험을 예수의 공생애 중에 있었던 일들과 구약성서에 비추어 반성적으로 성찰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들에게서 예수의 사건이 곧 하나님의 사건이라는 확신이 들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단지 사도들과 예수 추종자들의 실존적인 경험과 주관적인 인식에 의한 결과일 뿐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기본적인 신앙고백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게 아니라 매우 긴 역사적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아직 체계를 갖추기 이전의 이런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서 바울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누가는 지금 그 바울을 통해서 전개된 선교의 역사를 그 당시의 신학적 시각으로 풀어가고 있는 중이다.
오늘 우리도 역시 이런 기독교 진리의 역사에 참여해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큰 줄기는 지난 2천년 동안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것의 내용을 채워가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참고적으로, 삼위일체론적인 신앙이 형성되기 위해서 3,4백년의 역사를 필요로 했다. 어떤 이유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일까? 그의 부활은 어떤 리얼리티를 담고 있으며,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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