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베드로의 두 가지 전승  (행 9:32-43)        

리따의 애네아 전승
사도행전이 바울 이외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보도하는 인물은 베드로다. 그는 앞부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히브리파 기독교인들과 헬라파 기독교인들 사이의 문제로 인해서 잠시 주춤하다가 오늘 본문부터 당분간 또 다시 큰 역할을 감당한다. 베드로의 핵심적 역할은 사도행전에서 볼 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 선교의 초석을 놓는 일이다. 바울이 본격적으로 이방인 선교에 돌입하기 이전에 사도를 대표하는 베드로에 의해서 그것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곧 바울의 이방인 설교에 대한 합법화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가 행한 이방인 선교의 대표적인 사건은 10장에 나오는 ‘고르넬리오’와의 만남이다. 이제 본문은 고르넬리오 이야기를 위한 서론에 해당된다.
여기에 두 가지 전승이 소개되는데, 첫 번째는 애네아라는 병자의 치유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대략 40km로 떨어진 리따에 있는 성도들을 방문했다. 그는 아마 새롭게 조직되고 있는 교회들을 시찰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곳에는 8년 동안 중풍병으로 앓고 있는 애네아라는 사람이 있었다. 베드로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애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34). 그러자 애네아는 곧 일어났다. 이 이야기는 지나칠 정도로 단순명료하다. 목회적인 차원에서 방문한 자리라고 한다면 말씀과 기도가 있어야겠지만 그런 모든 게 생략된 채 단순히 중풍병자를 고친 이야기만 나온다. 더구나 사람들이 애네아를 고쳐달라고 베드로에게 부탁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 걸 보면 누가가 이 전승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된 부분을 과감하게 ‘가지치기’한 것 같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중풍병자의 치유현상보다는 다른 데 관심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베드로의 이런 중풍병자 치유사건은 예수님의 중풍병자 치유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있다(눅 5:17-26).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예수님의 선언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보신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선포하신다.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눅 5:24).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마음은 ‘두려움’에 싸여 ‘신기한 일’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 보도는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가 그 중풍병자의 치유에서 확인되었다는 것인데, 오늘 본문에서도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애네아를 일으킨다. 우리는 이런 중풍병자의 치유사건이 초능력의 발현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는 일들은 성서에 자주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나니까 그것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요빠의 다비타 전승
애네아의 중풍병 치유를 작은 기적이라고 부른다면 다비타의 환생은 큰 기적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중풍병은 물리치료나 정신치료를 통해서 어느 정도 회복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본문이 과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지만 다비타 전승은 상황이 상당히 다르다.
다비타가 살고 있던 ‘요빠’는 애네아 치유 사건이 벌어졌던 리타에서 별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바닷가 마을이다. 다비타는 여신도였으며, 사슴이라는 뜻의 헬라어 이름 ‘도르가’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본문은 애네아 이야기와는 달리 이 여자에 대해서 조금 더 상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했다(36절). 이 뒤에 나오는 고르넬리오도 역시 로마 장교였지만 경건하고 자선을 많이 베푼 사람으로 표현된다.(10:2).  
다비타는 병으로 죽었다. 죽은 시체는 장례 절차에 따라 처리한 다음에 무덤에 장사지내는 게 원칙인데, 웬일인지 사람들은 다비타를 이층 방에 눕혀 놓았다고 한다. 아마 이 장면에는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왕상 17:17 이하)와 엘리사(왕하 4:32 이하)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의 환생 이야기에서도 죽은 아이들은 다락방에 누워있었다. 누가는 이런 진술 방식을 통해서 사도들이 구약의 예언자들과 동일한 능력의 소유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것 같다.
요빠의 신자들은 베드로가 그리 멀지 않은 리따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람 둘을 보내어 베드로의 도움을 청한다. 단지 본문의 진행 상황만 본다면 그들이 베드로가 다비타를 다시 살려낼 것으로 기대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야기가 그렇게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요청을 받은 베드로는 요빠로 온다.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다음 베드로는 기도를 드리고, 시체를 향해서 이렇게 외쳤다. “다비타, 일어나시오.”(40절). 그러자 이 여자는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 베드로는 밖으로 내몰았던 신자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환생한 다비타를 보여주었다.
이 환생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 등장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 이야기와 비슷하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고 죽은 아이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가신 다음 아이의 손을 잡고 이렇게 외치셨다. “탈리다 쿰!” 이 아람어를 번역하면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는 뜻이다.(막 5:41). 탈리다 쿰은 오늘 베드로가 다비타에게 외친 말, 즉 “다비타 쿰!”과 철자만 다를 뿐이지 기본적으로 같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탈리다’이고, 베드로의 경우에는 ‘다비타’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애니아의 중풍병을 치료할 때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대목에서 생략된 이유도 이미 이 선언 자체가 바로 예수의 선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살려내는 외침이 똑같을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등장하는 과부들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점에서도 다비타 설화가 탈리다 설화에 의존하고 있다는 일부 학자들의 설명은 나름으로 설득력이 있다.

누가의 ‘삶의 자리’
신약성서 기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문제인데, 우리가 이런 텍스트의 리얼리티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처했던 ‘삶의 자리’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도대체 그들이 이런 텍스트를 집필하게 된 이유와 그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인데, 대충 세 가지다. 첫째, 그들의 문서작업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요소는 당연히 예수 사건이다. 그들은 예수에게 일어났던 일들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둘째, 또 하나의 다른 요소는 그들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있던 구약성서이다. 구약성서가 신약성서 기자들에게 얼마나 실질적이고 심각하게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에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 어떤 점에서는 구약의 세계가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도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말은 곧 신약의 중심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구약의 배경에서만 해석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을 하나도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자신들의 경전으로 받아들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세 번째의 요소는 자신들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상황이었다. 사도들 중심의 공동체,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 기독교 공동체, 각각의 복음서가 태동하게 된 서로 다른 공동체가 놓인 상황이 신약성서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셈이다.
이 세 가지 요소, 즉 예수 사건, 구약, 교회 공동체가 곧 신약성서 기자들이 살았던 삶의 자리인데,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 같은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예수 사건이 전승으로만 주어져 있다는 또 하나의 어려움이 있었다. 어쨌든지 그는 사도행전을 집필을 통해서 이제 예루살렘 공동체와는 색깔을 전혀 달리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매우 확실하게 확장되어 간다는 사실과 아울러 이 공동체가 구약이나 원래 예수 사건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변증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그는 구약 사건을 연상키는 방식과 아울러 예수 사건을 연상시키는 방식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사건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실, 의미, 진리
이제 이런 텍스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 이야기는 보도되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인가, 아닌가? 만약 이 보도를 사실로 보고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건 텍스트의 지평에서 훨씬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이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다만 이 텍스트는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다는 말이다. 이 텍스트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병과 죽음까지 이길 수 있게 하는 모든 능력의 근원이라는 사실에 관한 확신이며 변증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초자연적이고 신화적인 사건들의 사실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단지 그것의 의미만을 찾으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병을 고친 이야기에서 우리의 영적인 병을 고친다거나, 죽음으로부터의 환생 이야기에서 우리의 도덕적이고 실존적인 죽음과 절망을 벗어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텍스트를 단순히 인간의 실존적인 의미의 차원으로 넘겨 버리는 것도 역시 텍스트의 지평을 정확하게 따라가는 게 못된다.
성서 텍스트는 우리에게 단순히 초자연적인 사실을 강요하거나 실존적인 의미를 제시하는 게 아니라, 훨씬 심층적이고 포괄적인 진리의 지평으로 들어가게 한다. 여기서 사실의 관점은 텍스트의 해석은 과거에 놓는 것이며, 의미의 관점은 현재에, 진리의 관점은 미래에 놓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를 해석의 원리로 삼는다는 말은 진리를 미래지향적으로, 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괄하는 방식으로 열어간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직 진리가 그 실체를 완전히 우리에게 나타내지 않았으며, 따라서 오늘의 인식이 늘 잠정적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을 읽는 우리는 이런 일이 사실이냐, 아니냐에 관심을 두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가 왜 우리를 구원하실 분인지 진리론적으로 해명해나가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신구약의 지평을 훨씬 진지하게 이해해야 하며,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가 진리를 어떻게 인식하고 규정했는지 알아야 하며, 오늘 이 시대가 열어가고 있는 보편적인 진리의 지평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모든 작업을 신학이라고 한다면, 신학적 영성이아말로 가장 옳은 영성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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