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고르넬리오 이야기 (행 10:1-48)        
3월29일

의심의 해석학
일반적으로 ‘의심’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만 근본적으로는 무조건적인 ‘믿음’보다 훨씬 창조적이다. 여성신학자들도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구조화한 가부장제도와 성차별을 의심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인 생명의 심층을 새롭게 밝혀내려고 한다. 이미 앞서 니체와 맑스와 프로이트 역시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기독교의 교리를 의심함으로써 세계의 역사를 생명 지향적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서 성서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의심의 해석학’이다. 성서를 의심해야만 하는 이유는 성서 자체가 그만큼 허술하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읽는 독자와의 사이에 시공간적인 틈이 심각할 뿐만 아니라 성서가 담지하고 있는 진리의 지평들이 늘 새롭게 변화한다는 데에 있다.
오늘 분문을 이런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자. 오늘 누가가 보도하고 있는 고르넬리오 사건은 역사적 사실이었을까? 대개의 기독교 신자들은 ‘두말하면 잔소리!’ 식으로 이 이야기를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우리가 이런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이유는 성서 일반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성서에 기록된 것이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따라서 모두 역사적 사건이라고 단정하는 이런 태도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죽은 문자로 떨어지게 하고,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절대규범으로 자리 잡게 하는 첩경이다.
그렇다면 고르넬리오 사건은 누가가 만들어낸 ‘허구’라는 말일까? 일단 오늘 본문에 묘사된 내용이 역사적으로 그대로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앞으로 조금씩 밝혀지겠지만, 우선 한 가지만 짚는다면 헤로데 아그리빠 1세의 영토가 된 44년 이전에는 가이사랴에 로마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다는 게 그 근거이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 백부장 이야기가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앞장의 공부에서 ‘다비타 쿰’이 예수가 말씀하신 ‘탈리다 쿰’과 연관이 있다고 했듯이, 본분의 고르넬리오는 예수에게 자기의 종을 고쳐달라고 했던 가퍼나움의 백인대장(눅 7:2-10) 전승과 연관이 있다. 즉 누가는 자신이 수집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전승과 설화를 중심으로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이 한편으로는 사실에 가까운 것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자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편집된 것도 있다는 말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성서가 그렇게 신빙성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겠는가 하고 불안해 할 것이다. 그런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대개는 ‘축자영감설’로 도피한다. 성서가 전하고 있는 것은 그대로 믿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는 그런 주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긴 하지만, 그건 결국 성서의 영적 심층을 간과한 채 인간학으로 떨어진다는 점에서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르넬리오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 원칙적으로 말한다면 본문을 우선 최대한 철저하게 ‘역사비평’의 방식으로 분석한 다음에, 그것의 신학적 토대를, 또는 집필 목적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런 작업에서 얻어진 결과를 오늘 우리의 삶에 근거해서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진리, 혹은 하나님의 세계에 좀더 새롭게, 깊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고르넬리오의 환상
누가는 앞서 리따의 애네아와 요빠의 다비타 전승을 소개한 다음에 이제 이방인 선교 역사에서 일종의 신기원(epoch)이라 할 고르넬리오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대의 한 책임자인 백인대장 고르넬리오라 하는 사람이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았다. 그는 유대교인이건, 유대 기독교인이건 모두가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종교적이고, 경건하고, 자선을 많이 베푸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천사가 나타난다는 건 그 당시에 있을만한 일이었다.
성서에 기록된 천사의 출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현상들이 고대사회에서는 그렇게 별난 게 아니었다. 우리의 눈에 초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우리와 전혀 다른 ‘코드’로 세상을 해석하던 고대인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말이다. 그들의 그 코드라는 게 오늘 현대물리학적인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있는 우리의 코드에 비해서 확실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예컨대 유령과 요정들이 현실세계로 들어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나 비현실과 현실이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미야자키의 작품 세계를 우리가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오늘 우리의 세계 인식도 역시 절대적인 게 아니라 1억년 후에는 우리가 지금 2천년 전의 사람들의 세계를 신화로 생각하듯이 전혀 다르게 평가될 것이다. 따라서 천사 이야기를 읽는 우리들은 고대인들이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했는가 하는 점을 파악하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 천사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어떤 영적인 실체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영적인 실체는 단순한 느낌이나 신비한 사건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존재였다. 여기서 대화는 영적인 인식의 심화과정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영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그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방식도 역시 영적일 수밖에 없다.

베드로의 환상
고르넬리오의 심부름꾼들이 요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기도하기 위해서 옥상에 올라갔다가 이상한 환상을 본다. 누가의 설명에 의하면 그 시간이 바로 점심 때(12시)였기 때문인지 베드로는 먹을거리의 환상을 보았다. 유대인들이 먹지 말아야 할 짐승들이 담긴 보자기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걸 먹으라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가 거절하자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15절)는 말이 다시 들렸다. 이런 말이 세 번 오간 다음에 그 그릇은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고 베드로는 정신을 차렸다.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약간만이라도 알고 있는 독자라고 한다면 이 베드로의 환상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대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특히 바로 앞에 배치된 고르넬리오의 환상과 상응함으로써 이 베드로의 환상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이 철폐된다는 의미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누가가 무슨 이유로 바로 이 대목에서 베드로를 등장시켰는지 단정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지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함께 음식을 먹고 며칠 동안 머물었다는 이 엄청난 사건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베드로 밖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더구나 누가가 사도행전을 집필할 때의 교회 상황이 이제 어느 정도 베드로의 수위권이 확보되기 시작할 때였기 때문에 이제 베드로에 의해서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바울의 이방인 선교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생각이 있었는지 모른다.

베드로와 고르넬리오의 만남
베드로는 고르넬리오가 보낸 사람, 그리고 요빠의 몇몇 신자들과 함께 50km떨어진 가이사랴로 갔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고르넬리오 문중 사람들에게 설교한다(34-43). 이 설교의 내용은 이미 앞에서 몇 번 나온 초기 기독교의 전형적인 케리그마에 속한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설교의 서론에 속하는 베드로의 입을 빌린 누가의 생각이다.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34,25절).
이 설교에서 우리가 한번 짚어볼만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누가는 예수의 부활 현현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증인으로 미리 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41). 부활현현은 누구에게나 인식될 수 있는 자연과학적 사건이라기보다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난 의미 있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활현현이 사도들의 심리적 현상에 불과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부활은 단순하고 객관적인 사실로서의 사건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어떤 실존적인 확신에 불과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명백하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해명되어야 할 어떤 궁극적 생명사건이다.
베드로의 설교가 끝난 다음에 성령이 청중들에게 내렸다. 그것은 곧 방언이라는 현상으로 타나났는데, 베드로와 함께 내려온 유대 기독교인들은 그 현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현상이 여기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누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방인들에게까지 방언을 통해서 성령이 내렸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런 장면에서도 우리는 성서읽기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모든 걸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성서를 읽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이 텍스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비록 힘든 작업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텍스트가 가리키는 그 근원적인 사태를 추적해야만 한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
우리는 고르넬리오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나 역사적 근거를 갖고 있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앞에서 44년 이전에는 로마 군대가 가이사랴에 주둔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비록 시기는 좀 늦더라도 베드로가 고르넬리오라는 로마 백인대장을 전도한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누가는 그런 전승들의 연대기적 정확성을 별로 고려하지 않은 채 어떤 신학적 의도를 전하기 위해서 사도행전의 전반부에 배치한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신학적 의도는 그 당시 초기 기독교가 전혀 원하지 않았던 이방인 선교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쨌다는 말인가? 그 당시 누가로서는 최선이었겠지만, 사람이 실제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사안들을 무조건 하나님의 지시였다고 미루는 태도는 썩 바람직한 건 아니다. 요즘도 우리가 자주 목도하는 것처럼 기도하는 중에 교회당을 건축하라거나, 선교사를 파송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주장은 신앙적인 것 같이 보여도 별로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뜻으로 치장하지 말고,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의 뜻에 어울리도록 합리적이고 영적인 인식능력을 키우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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