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초기 공동체의 선택
(행 11:1-18)        
4월12일

할례파의 베드로 비난
고르넬리오 사건이 있은 다음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온 베드로에게 할례파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한다. “왜 당신은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었습니까?”(11:3). 할례파의 이 비난이야말로 고르넬리오 사건의 내막을 가장 정확하게 담고 있는 진술 중의 하나이다. 누가가 매우 부드럽게 묘사하고 있긴 하지만, 이 비난은 초기 공동체가 안고 있던 고민의 일단을 알려준다.
우리가 사도행전 공부에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인들과 헬라파 유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벌어진 신앙적 갈등, 더 나아가서 유대 기독교인들과 이방 기독교인 사이에 발생한 갈등이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점이다. 그 속사정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이방인 선교를 철저하게 거부했다는 데에 있다. 지금 우리의 눈에는 그런 태도가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사도행전 글머리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다음과 같은 지상명령을 주셨다는 사실이 이런 시각의 토대로 제시될 수 있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1:8). 그런데 성서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정확하게 기술하거나 물리학적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에 근거해서 그 역사를 재해석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지상명령은 역사적 가치가 충분한 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이제 다시, 그 당시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따라잡기 위해서 이렇게 생각해보자. 어떤 목사가 가톨릭의 신부나 불교의 승려를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자로 초청했다면 그 교회와 교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는 이방인 선교를 이런 정도의 심정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자신들을 유대교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이방인들을 향해서 호혜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왜 이방인 선교가 매우 자연스럽게 진행된 것처럼 설명하고 있을까? 그 대답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살고 있던 시대가 초기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와 크게 차이가 난다는 사실에 있다. 반(反)이방인 정서가 허물어진 상태, 현실적으로 예루살렘 공동체가 와해되고 있는 상태, 이름도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실현된 이방인 선교가 열매를 맺던 상태에서 초기 기독교 역사가 새롭게 해석되고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는 그런 상황을 완전히 왜곡한 것은 아니고 단지 반이방인 정서를 약화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에둘러가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본문에 기록된 할례파의 비난을 초기 공동체에서 일어난 가벼운 해프닝이 아니라 심각한 신학적 논쟁, 혹은 이단논쟁 정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철저하게 유대교 안에 머무르면서 이방인을 향한 적개심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유대 기독교인들과 예루살렘을 넘어서 로마 세계로 뛰어나가려던 이방 기독교인들 사이에 치열한 투쟁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있었다는 말이다. 기독교 역사의 발전과정이 늘 그랬다.

베드로의 자기변호
할례파들의 문제제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의 집에 들어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들과 식사를 함께 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할례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먹을거리에 한정해서 자신의 행위를 해명하고 있다. 베드로는 여전히 율법이 금하고 있는 음식을 먹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를 거역할 수 없었다는 게 그 해명의 핵심이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11:9). 유대인으로서 부정한 음식을 먹거나 이방인들과 접촉한다는 건 그 내면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에서는 주초문제도 거의 신앙적인 수준에서 언급되고 있는 실정이니까, 부정한 음식을 구체적으로 거론한 율법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생각하고 있던 초기 유대인들이 먹을거리에 대해 갖는 알레르기적 태도를 우리는 예측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왜 네발 가진 동물 중에서 “되새김질을 하고 발굽이 갈라진 동물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서가 무엇인지 아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일 것이다. 명분으로는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을 두려는 의도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돼지처럼 고지방의 동물이 그들 민족의 생존을 위협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율법이 금한 음식을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 본문이 진술하고 있듯이 하나님이 깨끗하게 했다거나,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로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의 시대가 열렸다거나, 그리고 예루살렘 종교회의에서(행 15장) 율법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십일조 헌금을 여전히 율법적인 차원에서 강조한다는 걸 보면 우리가 성서를 편의에 따라서 적용하고 있다는 게 분명한 것 같다.
여기서 다시 한번 성서읽기에서 무언이 관건인가를 짚어야겠다. 모든 성서 텍스트는 오랜 전승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한 사람들의 신앙고백적 진술이다. 이들의 진술에는 당연히 그들이 살아가던 시대의 풍습이나 세계관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 주술적인 세계관, 고대물리학, 당시의 도덕과 윤리, 국가관 같은 요소들이 성서에 개입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동성애를 죄의 결과라고 비판했으며, 교회 안에서 여자의 주도적 역할을 부정했고, 로마 정부의 권력을 인정했다. 이런 시대적인 특징과 한계를 안고 있는 성서의 진술을 문자의 차원에서 사실로 인정한다면(축자영감설) 우리는 성서 기자들이 원래 전하고 싶어 했던 그 실체를 놓치게 된다. 성서기자들이 고대인들의 세계이해를 통해서 경험한 그 영적 실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성서읽기의 바른 태도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성서를 통해서 그런 영적인 실체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더 근본적으로는 텍스트에 그런 실체가 은폐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에덴동산 설화나 노아홍수 설화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한국교회에는 적지 않는데, 만약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에덴동산을 찾아서 길을 나서야만 한다. 고대 유대인들이 이런 에덴설화를 형성하게 될 때까지 그들에게 작용한 영적인 경험, 혹은 그 실체를 찾아보고,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내용과 방식으로 작용하는지 새로운 지평에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 우리가 기울여야 할 해석학적 수고는 시를 쓰는 것만큼이나 무겁다. 이런 작업의 무거운 짐을 피하기 위해서 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화적 성서읽기’, 또는 성서의 인간론적 도식화라 볼 수 있다.

성령의 일, 인간의 책임
베드로의 해명은 자신의 행위가 자기 의지보다는 다른 힘에 압도되어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에 집중되어 있다. 신비로운 환상, 속된 것과 깨끗한 것에 대한 하늘의 음성, 고르넬리오가 보낸 사람들을 따라가라는 성령의 지시, 고르넬리오 집에 성령이 내리는 현상 등등이 그것이다. 베드로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그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17). 누가는 나름으로 이 사건의 전체 결론을 이렇게 내린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회개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셨다.”(18).
우리는 이런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이런 현상 자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당혹스럽다. 모든 걸 하나님과 성령이 이끌었다는 이런 성서의 진술은 무슨 뜻일까?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내렸다는 말은 초기 공동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의미이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또는 베드로가 명시적으로 해명할 수 있을 정도로 성령 현상을 경험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이런 진술들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이지 어떤 사태에 관한 실증적 진술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곧 노아홍수가 매우 사실적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결국은 유대인들의 신앙을 표상화한 설화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누가는 지금 이방 세계를 향한 초기 기독교의 선택이 결국은 성령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성령의 활동을 직접적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베드로 사건이 실제로는 성령과 아무런 상관없는, 단순한 초기 공동체의 산물이라는 말인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성령’이 무엇인가에 대해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의 성령은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믿고 있는 주술적인 능력이나 초월적 신통력과 전혀 차원이 다르다. 좀 큰 틀에서 말한다면 성령은 삼위일체의 한 인격체로서 이 세상에서 생명의 영으로 활동하는 하나님이다. 그 생명의 영은 곧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성령이 내렸다는 말은 우리에게 생명의 힘이 작용하고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의 존재론적 토대라 할 생명과 진리는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한다기보다 역사, 혹은 그 역사 과정, 그 전체와 연관해서 운동하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의 인식론적 범주 안에 폐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우리가 성령의 활동을 인식하고 경험한다는 것은 생명과 진리를 역사적으로 얼마나 심층적으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가에 달려 있다. 초기 공동체는 이방인 선교를 향해 방향을 트는 것이야말로 바로 성령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방식으로 성령을 묘사하고 있다. 성서시대의 고대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설명하는 게 당연했겠지만, 오늘 우리가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진리의 영인 성령에 순종하는 게 아니라 거부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신약신학자 헨헨의 설명을 여기 인용한다.
“이방인 선교에 대한 결정을 오로지 하느님께 돌리기 위해 인간의 작용을 가능한 한 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누가는 진정한 신앙적 결단들이 내려지는 현실을 떠났으며 우리에게 하느님의 행위를 감지하도록 우리 대신에 일련의 기적들을 만들어낸다. 물론 누가는 그런 것을 원치도 않았고 그렇게 느끼지도 않았다. 그는 여기서 그 시대의 표상양식을 악의 없이 충실히 따랐다. 이것이 그다지 위험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가 그 시대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의 결정을 하느님께 미루고 싶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작용한다. 따라서 누가 신학의 이런 특징 속에 담긴 유혹을 물리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D. Ernst Haenchen, 사도행전 1,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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