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놀람의 영성
(행 12:1-25)         5월3일

누가의 편집 의도
사도행전 12장은 우리가 얼핏 보아도 저자 누가의 편집 의도가 분명하게 들어온다. 일단 이 이야기는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사실(6-17)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누가는 앞뒤로 매우 자극적인 사건을 첨부하고 있다. 1-5절은 사도 야고보의 죽음과 베드로의 투옥을 전하고 있으며, 18,19절은 베드로의 탈옥을 막지 못한 경비병들이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20-23절은 헤로데의 돌연사를 다루고 있다. 죽을 운명체 처했던 베드로는 천사의 도움으로 살아난 반면에 그 주변에 있던 몇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대비시킴으로써 누가는 이방인 공동체인 안티오키아 교회를 공인해줄 베드로의 특별한 위치를 부각시키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누가가 철저하게 편집의도에 따라 집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베드로 못지않은 사도의 권위를 갖고 있었을 야고보의 죽음에 관한 단순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데파노의 순교 사건은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 이후로 일어난 박해도 역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반면에 사도 중에서 첫 순교자라 할 야고보의 죽음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다루어졌다. 야고보의 죽음에 관한 자세한 전승이 원래 없었는지, 아니면 누가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누가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있었던 사실들을 그대로 전달하려는 게 아니라 사도행전의 편집의도에 충실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서 자연스럽지 못한 서술 방식이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편집 의도는 물론 이방인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원만한 소통, 그리고 이방인 선교의 당위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억울한 죽음을 우리는 놓칠 수 없다. 베드로가 탈출한 다음에 경비병들은 처형당한다. 누가는 야고보의 순교에 관해서 아무런 감정도 보태지 않은 것처럼 이 경비병들의 처형에 관해서도 역시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고 있다. 베드로의 탈출 이야기와 비슷한 바울의 탈출 사건에서는 경비병들이 오히려 복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어쩌면 지금 누가는 베드로의 신기한 탈옥 이야기를 전하고 있긴 하지만 베드로 자체에 관해서 관심을 기울인다기보다는 여전히 이방인 선교에 궁극적인 관심을 두고 있는지 모른다. 만약 누가가 이 전승 자체를 중심 주제로 생각했다면 억울한 경비병들의 처형을 아무런 코멘트 없이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헤로데의 죽음은 베드로의 탈옥 전승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지만 누가에 의해서 연속적인 것처럼 보도된다. 유대와 가이사리아 지역에서 명실상부한 권력을 행사하던 헤로데는 띠로와 시돈 지역을 오가는 식량 선박의 출항을 저지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키웠을 것이다. 막강한 카리스마를 확보한 헤로데를 민중들은 ‘신’처럼 추켜세웠다. 헤로데의 연설을 듣던 민중들은 “이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다.” 하고 외쳤다(21). 누가의 설명에 따르면 헤로데는 민중들이 보내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벌레에 먹혀 죽었다고 한다. 로마의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도 전하고 있는 헤로데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인 것 같다. 다만 요세푸스는 그의 돌연사를 자연적인 죽음으로 표현하지만 누가는 ‘천사’의 징벌로 표현한다는 차이가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헤로데가 급성 맹장에 걸려 죽었을지 모른다고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 죽음의 원인에 관한 객관적인 사실 여부보다는 누가의 역사 해석, 또는 그의 편집 의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그 편집 의도가 본문 24절에서는 좀더 명확하게 진술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줄기차게 널리 퍼져 나갔다.”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누가는 야고보의 죽음도 냉정하게 처리하고, 경비병의 죽음에도 아무런 연민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괜찮은 정치가였을 가능성이 있는 헤로데의 돌연사마저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더구나 여러 사람들의 끔찍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아직 마음의 정리가 덜 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한다는 것은 사도행전이 매우 분명한 의도로 집필되었다는 의미이다.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사명을 다 마치고 마르코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다시 돌아갔다.”(25). 이 구절은 바르나바와 사울이 안티오키아에서 모금한 구제헌금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왔다는 11장30절을 이어받는다. 그렇다면 결국 누가는 바르나바와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이 살벌한 죽음의 드라마를 끌어들였다는 말이 된다. 사도 야고보의 순교, 베드로의 투옥과 탈옥, 경비병의 처형, 헤로데의 돌연사가 숨 막힐 정도로 전개되는 그 순간에 바르나바와 바울이 예루살렘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면 기독교 역사에서 주변부에 속했던 그들이 이제 사도행전 역사의 중심 무대로 등장할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셈이다.
사도행전이 누가의 편집의도에 의해서 집필되었다고 한다면 누가의 신학만 의미가 있고 그 보도의 내용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바로 여기에 성서읽기의 긴장이 있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과 그것을 해석하는 성서 기자들의 신학과 그 사이에서 활동하는 성령, 그리고 그것을 읽는 오늘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것들이 변증법적으로, 혹은 ‘지평융해’의 방식으로 소통됨으로써 우리는 성서 텍스트를 통해서 하나님이 열어가는 계시의 역사를 내다볼 수 있다. 이런 구도에서 오늘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는 베드로의 탈옥 사건을 조금 더 따라가 보자.

천사는 누구인가?
베드로가 처형당하기 전날 밤에 다음과 같이 일이 일어났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군인 두 사람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감옥 문 앞에는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가 잠을 자고 있었다는 건 베드로가 그만큼 육체적으로 시달린 탓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에 심취해서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 탓인지, 또는 완전히 자포자기에 빠진 탓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쇠사슬에 묶였을 뿐만 아니라 좌우에서 군인이 함께 누워있었고 경비병이 문에 지키고 있는, 그야말로 철통 경비의 상황에서 천사가 나타났다고 한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찔러 “빨리 일어나라.”고 일렀으며, 친절하게도 “허리띠를 띠고 신을 신어라.”고 일렀다. 베드로가 천사의 말대로 따르자 천사는 다시 베드로에게 “겉옷을 걸치고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였다. 얼떨결에 천사를 따라서 감옥을 나오면서 베드로는 꿈을 꾸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정신없이 한 구간을 지난 다음에 천사는 사라졌고, 겨우 정신을 차린 베드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야 사실을 알았다. 주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헤로데의 손에서 나를 건지시고 유다 백성들이 잔뜩 꾸민 흉계에서 나를 벗어나게 하셨다.”(11).
베드로의 탈옥 사건에서 베드로의 역할은 하나도 없고, 거의 천사가 일방적으로 끌어냈을 뿐이다. 고르넬리오 사건에서도 베드로는 철저하게 수동적이었다. 감옥 안에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던 바울 및 실라와 달리 베드로는 잠에 취해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누가가 의도적으로 베드로를 깎아내린다고 볼 수는 없어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행위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베드로의 역할을 최대한으로 축소한 것만은 분명하다. 유대교와 로마 정권에 의해서 박해를 받던 초기 공동체에 하나님의 도움이 초월적으로 임했다는 누가의 해석은 정당하다. 비록 지나칠 정도로 시시콜콜하게 베드로의 행동을 지시하는 천사의 태도에 신화적인 요소가 담겼는지 모르겠지만 영의 손길을 강하게 느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과연 이 탈옥 사건에 개입한 이 천사는 누구일까? 우리가 이 천사의 정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성서 자체가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역사 비평적인 작업을 완벽하게 전개한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의 사건을 사실적으로 재구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우리는 이 사건의 전반적인 윤곽은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헤로데 수하에 있는 고위 관리 중의 한 사람이 경비병들을 매수해서 베드로는 탈옥시켰을 가능성은 없지 않다. 만약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천사가 인간의 역사에 개입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현실은 허물어지고 만다.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 불러다 쓰는 사람이 곧 천사이며, 반대로 악령의 속삭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곧 악마다.  

출옥을 믿지 못한 신자들
탈옥한 베드로는 신자들이 기도하고 있는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베드로가 문을 두드리자 로데라는 심부름 하는 여자아이가 나왔다가 베드로를 발견하고 너무 놀란 나머지 문을 열지 않고 집안으로 들어가 어른 신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로데의 말을 들은 그들은 로데가 장난질을 하거나 베드로의 투옥으로 마음이 어지러워 헛소리를 한다고 나무랬다. 그래도 베드로가 대문 밖에 와 있다고 로데가 우기자 “베드로를 지켜주는 천사겠지.”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자 이들이 나가서 베드로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한 다음에 자초지종을 전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야고보와 다른 교우들에게 알리라고 말한 다음에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다른 교우들이 왜 그곳에 없었는지 본문은 보충 설명을 하지 않는다. 베드로의 투옥으로 인해서 핵심 인물들이 여러 곳으로 피신 한 것 같다. 어쨌든지 이런 장면에서 초기 기독교가 일상적으로 당하던 박해의 위기를 읽을 수 있다.
신도들은 베드로가 문 밖에 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더구나 그들은 기도드리고 있었는데 말이다(12). 그들이 처한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인지, 또는 그들의 신앙이 그만큼 부족했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과 현실은 우리가 명시적으로 드리는 기도와 상관없이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당장, 혹은 언젠가는 실현하겠다는 야망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생각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신앙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영적인 의미를 한 가지만 짚는다면 신도들이 베드로가 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사실이 곧 기독교 신앙의 기초라는 사실이다. 생명의 영인 성령이 일으키는 영적인 심층을 이해, 인식, 경험함으로써 우리의 영성은 진부성에서 벗어나서 영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 단초가 곧 놀람의 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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