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마술을 넘어서!
(행 13:4-12)  5월17일

키프로스
이스라엘에서 10시 방향으로 소아시아(지금의 터키)가 있는데, 이 소아시아의  남쪽 해상,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서쪽 해상에 키프로스라는 섬이 있다. 키프로스는 북동과 남서 방향으로 비스듬하게 놓여 있는 타원형의 섬으로서 긴 쪽의 길이는 210km라고 하니까 대략 경상북도 정도의 크기는 될 것 같다. 키프로스는 고대 때부터 광물생산으로 유명하고, 섬을 가로지르는 강을 중심으로 비교적 비옥한 평야지역이 있어서 곡물생산도 썩 괜찮은 형편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총독이 임명된 것 같다. 이 키프로스 섬이 바나바의 고향이라는 사실은(행 4:36) 선교 초기에 바나바의 역할을 그만큼 컸다는 사실의 반증인지 모르겠다.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바울과 바나바는 키프로스의 북동쪽 끝에 있는 살라미스에 도착한 다음, 여러 회당에 들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차츰 남서쪽으로 내려왔다. 키프로스 남서쪽 끝자락 바포에 도착하기까지 대략 열흘은 걸렸을 것이다. 키프로스의 총독이 바포에 거주했다는 것은 이 바포가 키프로스에서 제일 큰 도시였거나 비교적 로마와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섬을 종단하여 이곳에 올 때까지는 별로 큰 문제가 벌어지지 않았지만, 바포에서 한 유대인 마술사를 만남으로써 문제가 일어난다.
본문에 보면 이 사람의 이름은 ‘바르예수’라고 했다(6절). 바르예수는 아람어로 부를 때의 이름이고, 그리스어로는 ‘엘리마’라고도 불렸다(8절).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 마술사를 거짓 예언자이며, 또한 키프로스 총독 세루기오 바울로의 시종이라고 설명한다. 유대인 마술사, 거짓 예언자, 그리고 총독의 시종. 본문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이 세 가지 정보만으로 우리는 바르예수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해낼 수는 없지만 누가가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충분하게 담겨 있는 셈이다.
‘유대인 마술사’라는 이 표현에서 우리는 일단 이 사람이 로마 사람 총독과 대칭적 구도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훨씬 깊고 가깝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사람인데도 그는 결국 로마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마술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야훼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마술은 가장 꺼림칙한 행위였는데도 이 바르예수는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마술사가 되었다. 그 당시야 점성술이나 마술 같은 행위들이 일반적이긴 했지만 야훼 하나님을 믿던 유대인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었던 일이다.

마술적 신앙
어떤 점에서 마술과 신앙은 양측이 모두 현실 너머의 세계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비슷하며, 다르다고 해도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이 한 장의 차이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마술은 마술사의 속이는 기술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신앙은 그런 사람의 기술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에게 자신을 맡기는 결단이다. 이런 점에서 마술은 우리에게 우리의 열정을 자극할 수 있지만 신앙은 건조하게 보일 수도 있다. 마술은 상자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칼로 잘라도 죽지 않은 채 살아나게 만들기 때문에 흥미진진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는 마술을 신앙인 것처럼, 거꾸로 기독교 신앙을 마술인 것처럼 혼동할 때가 많다. 신앙보다는 마술이 우리를 화끈하게 사로잡을만한 매력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입니다. 마술사의 모자 속에서 무엇이 새로 나올 것인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기독교인들이 그런 수준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기도를 많이 드리면 사업이 잘되고, 자식들이 출세하고, 죽을병이 나을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마술이 아니고 무엇인가. 교회의 관심이 늘 교회 확장에만 있다면 이것 또한 마술사의 모자에서 달걀과 꽃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과 똑같다.
더욱이 결정적인 문제는 우리의 신앙이 마술처럼 사람의 기술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중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을 정도로 마술을 습득하려면 손동작으로부터 시작해서 도구 사용법까지 매우 오랫동안 숙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마술과는 다른데도 그런 기술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다는 욕망이 작동하기 때문인지 기술의 문제로 처리되고 있다.  

어용 종교
바르예수가 마술사이긴 했지만 요즘 우리가 티브이 같은 데서 보는 그런 전문적인 마술사는 아니었다. 그는 아마 정치인 세루기오 바울로를 종교적으로 보좌하는 예언자, 또는 신학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바르예수를 거짓 예언자라고 설명한다. 그는 거짓 예언을 통해서 총독의 시종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어용 신학자라고 볼 수 있다. 정치가와 예언자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를 맺은 것이다. 정치인들은 그런 종교를 필요로 한다. 자신의 정치 행위를 종교적으로 합리화시켜주는 그런 종교 말이다.
어제(5월16일) 신학 강연이 있어서 전주에 다녀왔다. 5.18을 이틀 앞둔 시점에 전라도를 방문한 탓인지 1980년 어간의 한국정치와 교회의 관계가 잠시 생각났다. 박정희 군사독재에 의해서 꾸려지던 그 시대가 맹목적이었는지, 얼마나 심각하게 미몽의 시대였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되풀이 할 생각이 없다. 그런 군사독재 시대에 기독교가 가장 크게 부흥했으며, 그런 탓인지 국가를 위한 조찬 기도회가 시도 때도 없이 열렸다. 1980년에는 전두환 국보위 의장을 위한 기도회를 열 정도니까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요즘도 보수 교단 중심으로 국가를 위한 기도회가 간혹 열린다. 반 김정일, 반핵, 더 나아가 한미동맹 강화를 위한 기도를 드린다.
종교가 국가를 배척할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호국종교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국가는 자칫 자기를 절대화하는 길로 빠져들기 쉽기 때문에 교회는 국가를 비판하는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히틀러의 나치즘 앞에서 독일 교회가 보인 태도에서 우리가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당시 독일의 개신교회는 ‘고백교회’와 ‘독일기독교인’으로 양분되었다. 고백교회는 히틀러의 나치즘에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독일기독교인은 대충 묵인하는 입장을 취했다. 소수에 머물던 고백교회는 결국 대세에 밀렸고, 결과적으로 독일 교회는 나치즘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수치를 안아야만 했다. 요즘 미국의 근본주의 교회가 부시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호국종교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 원래 그들은 교회당 안에 성조기를 게양한다고 하지만.

마술사의 시력장애
총독 세루기오 바울로는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바나바와 바울을 초청해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했다. 누가도 그를 영리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마술사는 총독의 개종을 막으려고 바나바와 바울을 방해했다. 원래 바울은 논쟁을 즐겨하기는 하지만 상대방을 독선적으로 공격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성령으로 가득 차서 그 마술사를 쏘아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만과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악마의 자식아, 너는 나쁜 짓만 골라 가면서 하는 악당이다. 언제까지 너는 주님의 길을 훼방할 셈이냐? 이제 주님께서 손으로 너를 내리치실 것이다. 그러면 너는 눈이 멀어 한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10.11). 이 말이 떨어지자 이 마술사에게 ‘안개와 어둠’이 내리 덮쳐 앞을 더듬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사건의 역사성은 의문시되고 했다. 학자들에 따라서 이 이야기를 누가의 창작이라고도 하고, 또는 누가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전해들은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헨헨의 설명에 따르면 만약 이 이야기가 누가의 창작이라고 한다면 이 마술사를 ‘바르예수’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아람어인 바르예수는 ‘예수의 아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감히 이런 이름을 붙일 까닭이 없다는 말이다. 어쨌든지 오늘의 이 현상은 이미 바울 스스로 경험한 것이었다고 보는 게 옳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에 눈부신 빛을 보고 쓰러져서 앞을 보지 못하다가 아나니아에 의해서 다시 시력을 회복한 일이 있다(행 9:1-9). 정신적으로 극심하게 불안한 중에 어떤 충격을 받게 되면 일시적으로 시력을 상실할 수 있다. 아마 바울은 바르예수라는 마술사의 정신상태를 꿰뚫어보았을 것이며, 바울 자신에게서 발산되는 어떤 카리스마가 마술사를 순간적으로 쇼크 상태에 빠지게 하지 않았을 생각한다.
우리는 이 텍스트를 신문 기자의 사실보도처럼 읽을 필요는 없다. 거짓 예언자이며 유대인 마술사인 이 바르예수가 성령에 가득 찬 바울에 의해서 굴복 당했다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 결국 마술은 신앙에 의해서 허물어진다고 말이다. 누가는 선교 초장에 이런 사건을 보도함으로써 복음이 마술과 속임수와 사이비 예언으로 무장한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있다.

마술을 넘어서
어떤 점에서 신앙인이 자리를 잡고 있는 이 세상은 바르예수가 지배하는 곳이다. 반드시 남을 속이는 부정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성실한 것으로 평가되는 삶의 모습들도 그것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많다는 점에서 그렇다. 거의 전 세계가 경제만을 부르짖고 있는 이런 시대정신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과 평화를 외면하게 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바르예수와 비슷한 현상이다. 대학사회도 머리 터질 정도로 경쟁하다가 결국 교육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사랑과 평화를 잃어버렸다. 교회의 본질인 단일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대수롭지 않게, 또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교회의 현실도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복음은 결국 이런 세력을 굴복시킬 것이다. 성령이 우리를 감동시킴으로써 과감하게 마술사들이 지배하는, 그래서 물적 토대만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런 세계와 용감하게 싸워나가게 할 것이다. 누가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보도한다. “이 광경을 처음부터 보고 있던 총독은 주님께 관한 가르침에 깊이 감동되어 신도가 되었다.”(12). 마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신 사랑과 평화가 완벽하게 지배하는 그런 세계가 올 것이다. 이런 세상을 향한 희망을 줄기차게 유지하는 것이 곧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의 내면에서 그런 희망이 솟아나고 있는지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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