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바울의 설교 (1)
(행 13:13-41)
5월24일

사도행전의 바울 설교
사도행전 앞부분에는 대표적으로 베드로와 스테파노의 설교가 실려 있고, 뒷부분에는 바울의 설교가 실려 있는데, 바울의 설교는 서로 다른 상황에서 여러 번에 걸쳐 행해진 것이다. 첫째는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의 회당에서 행한 설교로서 오늘 본문이고, 둘째는 아테네의 아레오파고 광장에서 행한 설교(17:16 이하), 세 번째는 에베소 원로들 앞에서 행한 설교(20:17 이하), 네 번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하는 순간에 행한 설교(22:1 이하)이다. 그 이외에서 작은 설교들과 심문과정에서 행한 비교적 긴 설교들도 있다.
누가는 이 바울의 설교를 어디서 입수한 것일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바울의 선교를 수행한 의사로서 바울의 설교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그것을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수행의인 누가가 아니라 훨씬 후대의 어떤 저자에 의해서 집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을 수행한 누가의 기록이 후대까지 그대로 전해졌을 가능성은 없을까? 바울이 아무리 철저한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또는 그를 수행한 누가가 아무리 역사적 안목이 있던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후대를 위해서 바울의 설교를 직접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도행전이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고 있기는 하지만 초기 기독교에서는 그런 의식이 전혀 없었으며, 더 근본적으로 바울의 선교행위가 오늘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건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이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텍스트의 역사성이 전혀 없다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무게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는 가능성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설교를 창작했거나, 또는 그 당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일반적인 설교 형식을 그대로 인용했다는 것이다. 바울 이전에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바울도 그들 못지않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팔레스틴 공동체가 세력을 잃어가고 헬라파 공동체가 초기 기독교의 주류로 등장하는 시기에 바울의 편지들과 구전 형식의 그의 설교가 새롭게 부각되었으리라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자신이 수집할 수 있는 모든 바울의 자료와 그 당시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게 된 교회의 케리그마를 근거로 해서 바울의 입을 빌려 여러 편의 설교를 진술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의 설교는 완벽하게 바울의 설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의 생각을 충분하게 담은, 더구나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정확하게 담은 설교임에는 틀림없다.
세 번에 걸쳐서 ‘여러분!’을 부르는 오늘의 설교는 세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이집트로부터 세례 요한까지(16-25)
지금 바울이 설교하고 있는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의 회당에는 주로 유대인 디아스포라, 또는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이방인들이 모였을 것이다. 1세기 회당예배는 쉐마와 (18개의 간구) 기도, 사제의 축복, 율법서와 예언서 낭독, 그리고 지방언어로 번역, 마지막으로 권면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물론 예배가 시작하기 전에 회당의 책임자는 바울에게 권면을 부탁했을 것이며, 이를 좋은 기회로 알고 바울은 기꺼이 응했을 것이다. 그런데 회당에서 행해진 권면은 앉아서 조용하게 이루어진데 반해서 누가는 흡사 그리스 웅변가들의 모습처럼 바울이 일어나서 손짓을 했다고 묘사한다. 어쨌든지 이제 바울은 거의 예루살렘 유대인들과 비슷한 정도로 율법을 지키며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에게 설교를 시작했다.
바울은 이집트 이야기로부터 설교의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자신들의 역사에 개입한 하나님의 가장 큰 사건이 바로 출애굽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는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이집트 이야기로 시작되는 바울의 설교에 호감을 가졌을 것이다. 바울은 광야생활과 판관시대, 뒤를 이어 사울과 다윗왕조를 언급한다. 바울 스스로 베냐민 지파였기 때문에 사울이 베냐민 지파출신이었다는 사실은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 같다. 다윗은 곧 이스라엘을 구원한 예수의 조상이었다. 아주 짤막한 요약이지만 구약의 전체 역사를 총괄하는 대목이다. 결국 설교 초반부에서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출애굽의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예수를 구원자(메시야)로 보내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지금 출애굽 사건을 민족적인 구원으로 생각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다.
바울이 요약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몇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사무엘, 사울, 다윗,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이 거론된다. 특히 그는 세례 요한이 예수와의 관계에서 모종의 긴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한이 스스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라고 알렸다는 것은 곧 그를 그리스도로 생각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이미 복음서에도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경쟁관계가 형성되었다는 점이 암시되었다.

죽음과 부활의 복음(26-37)
이집트 이야기로부터 세례 요한을 거쳐 예수에 이르는 구원사의 줄기에 관한 해명은 유대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설교의 두 번째 항목에 해당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매우 낯설게 들려졌을 것이다. 이는 곧 잔잔하게 흐르던 개울이 낭떠러지를 만나 갑자가 폭포로 변한 듯한 느낌이다. 이 대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세례 요한이 증언한 예수를 예루살렘 사람들과 지도자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다. 그들은 예수를 죽일만한 아무런 근거도 찾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 그 예수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다.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한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범한 잘못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의도적으로 (빌라도에게 무고하여) 예수를 죽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앞의 행위는 의도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별로 대수롭지 않은 잘못이라고 생각될 수 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는 인식의 부족으로 인해서도 얼마든지 악한 결과를 빚을 수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바울이 여러 번 강조하듯이 이 예수 사건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것이기 때문에 그 구약 텍스트를 바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면 예수를 몰라볼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신학적인(영적인) 통찰력의 결여로 예수를 죽인 셈이다.
인간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렸다는 주장에 그리스도교의 역사관이 담겨 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생명 지향적이지 않고 오히려 파괴적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인간과 역사를 본다. 선악과를 통한 불순종, 형제 살해, 바벨탑, 그 이후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발생한 우상숭배,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 살해에서 우리는 성서가 바라보는 인간을 읽을 수 있다. 에릭 프롬이 <인간은 파괴적인 동물인가>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문명과 전쟁은 비례한다는 말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아무리 인간이 파괴적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생명 지향성을 방해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의 역사에서 아무리 생명 파괴적인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성서의 가르침을 믿는 우리는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인 생명의 선취라 할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다. 이 부활은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용서의 복음(38-41)
‘이스라엘 동포’(16)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의 후손과 경건한 사람들’(26)을 거쳐 세 번째 단락에서 바울은 청중을 ‘형제’라고 부른다.(38). 그만큼 그의 설교가 친밀감을 나타내고 있다는 의미일까? 설교가 죄의 용서라는 매우 실존적인 단계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호칭의 변화도 일관성이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그리스도교 교리와 만난 셈이다. 바울은 앞에서 구약의 다윗에 관한 인용문을 다루면서 예수가 썩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 다음에 죄의 용서라는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우리의 일반적인 신앙 상식에 의하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곧 우리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사건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한동안 소위 ‘배상만족설’이 정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으며, 이 진노를 풀기 위해서는 죄에 해당한 값을 치러야 하는데, 인간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그 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교리가 곧 그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의해서 우리는 늘 십자가를 죄와 연관해서 생각하고, 심지어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자기의 죄책감에 시달리는 일도 있다. 그러나 배상만족설은 지나치게 ‘신인동성동형론’의 구도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해석의 오류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주장은 우리 인간의 역사에 발생한 훨씬 근원적인 사태를 소급해서, 혹은 원인론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지 인간 구원을 위해서 결정된 사건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근원적인 사태는 곧 인간 구원이 인간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죽음의 힘을 무력화하는 예수의 부활이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죄에서 풀려날 수 없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풀려날 수 있다(38,39)는 바울의 설명은 인간의 현실을 정확하게 뚫어본 사람의 말이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 현실은 인간이 죽어야만 죄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모범적으로 만드는 모세의 율법은 결국 죽음으로 모든 게 끝장나기 때문에 아무런 해결책이 못되며,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만이 해결책이 된다는 말이 된다.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제 죄의 세력이 활동할 수 없는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긴장이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죽어야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만, 살아있는 지금도 이미 죽음 이후의 생명인 부활을 경험하고 믿는다면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인 셈이다. 그래서 루터는 우리가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며, 의인이면서 죄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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