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로마 시민권 (22:22-29)   4월17일

유대인들의 분노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군중들에 의해 일종의 테러를 당하던 바울은 지금 파견대장에 의해서 구출을 받고 병영으로 끌려가던 중에 파견대장의 허락을 얻어 군중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중이다.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낼 터이니 어서 가거라.” 하는 말씀을 들었다고 말하는 대목에 이르자 유대 군중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소동을 일으킨다. 그들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이런 놈은 아예 없애 버려라. 죽일 놈이다.”(22절) 그리고 그들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옷을 내던지며 공중에 먼지를 날렸다고 한다. 일반적인 이야기의 진행에서 본다면 이들의 이런 소동은 두 가지 점에서 적절하지 않다.
1) 바울의 이야기는 아직 완료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는 자신이 유대교에 철저했던 사람이라는 사실과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했다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이방인 선교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언급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카이아, 마케도니아, 소아시아에서 벌어진 선교활동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설명하지 못했다. 더구나 누가가 21장28절에서 언급한대로 지금 바울이 고발당하게 된 이유가 율법과 성전을 반대하고 이방인을 성전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바울의 연설은 자신의 신앙에 관한 일반론에 떨어지고 말았다.
2) 그런데 바울의 연설은 유대인의 감정을 특별히 자극할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바울의 이야기는 이제 본격적으로 중요한 내용으로 들어가야 할 순간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 모였던 유대 군중들이 바울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면 “이방인에게 보낼 터이니” 이후에 실제로 바울이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실제로 율법과 성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관해서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는데, 의외로 그들은 연설의 허리를 자르고 들어와서 소동을 일으켰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연설이 누가의 고유한 신학적 착상에 의해서 고도로 편집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누가는 당시의 그리스도교가 예루살렘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판단으로 바울이 의도적으로 유대교를 거부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서 변증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앞서 55과 공부의 결론에서 지적했듯이 누가의 이런 신학적 판단에 의해서 보도된 바울에 관한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닐 뿐만 아니라 그걸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두 흐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는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일어났던 선교의 역사를 가능한 대로 객관적인 사실성에 근거해서 찾아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처한 삶의 자리를 읽는 것이다. 첫 번째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의 편지가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이며, 두 번째의 흐름에서는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에(기원 70년) 벌어진 시오니즘의 부흥 운동과 연관된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가 도움을 줄 것이다.
최소한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바울의 연설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면서 소동을 일으킨 군중들을 옹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는 지금 유대인들의 동정을 얻어내기 위해서 이 연설 장면을 훨씬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동정심을 획득할 수만 있다면 누가 시대의 그리스도교를 향한 유대교의 적대감을 완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의 이런 이야기가 허무맹랑하다고 말할 필요는 전혀 없다. 비록 과장되긴 했지만 유대인들의 이런 태도는 그 당시에 일상적으로 일어날만한 개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폭력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처한 상황은 성전에서 체포되던 그 위험한 순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체제 안정의 책임이 있는 파견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는 바울에게 채찍질을 해서라도 실상에 관해서 자백을 받아내려고 했다. 누가의 이 짤막한 묘사에도 국가권력의 속성이 잘 드러난다. 로마 권력은 일단 국가 체제의 안정을 최고의 목표로 하기 때문에 소수자를 박해하기 마련이다. 그 당시 예루살렘 주민의 대부분이었던 유대인들의 심사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바울을 억압하는 게 최선이었다. 로마 권력은 ‘폭력’을 통해서도 자신들의 목표를 성취한다. 지금도 완전히 민주화가 정착되지 않은 나라에서나, 또는 특별한 상황에서는 최고의 민주국가에서도 역시 이런 비인간적인 폭력은 자주 일어난다.
국가 권력이 국민들에게 행사하는 폭력만이 아니라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행사하는 폭력, 그리고 가부장적 질서에서 행해지는 폭력, 생태계를 향한 인간의 폭력, 정치와 경제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에 이르기 까지 폭력의 양상과 깊이는 실로 다양하다. 최근에는 성폭력이라는 용어가 우리의 일상에 침투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행사하는, 그리고 부부 사이에 벌어지는 가정 폭력도 위험한 수준에 도달한 것 같은데, 여기에는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폭력도 역시 매우 중요하다.
도대체 인간은 왜 폭력을 행사하는가? 이 문제는 사회과학, 심층심리학, 범죄철학 등, 많은 부분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몇 가지만 짚도록 하자. 성서에 의하면 인간의 폭력은 본질적이다. 카인의 아벨 살해 사건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성서는 이 사건을 제사행위와 연결시키고 있지만, 그 근본에는 인간의 보편적인 경쟁심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으로 진화하기 이전의 유인원 시절부터 다른 동물과의 경쟁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다는 무의식이 호모 사피엔스 이후의 인간에게도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폭력이 인간의 본질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강도는 문명과 정비례한다는 게 에릭 프롬의 진단이다. <인간은 파괴적인 동물인가?>에서 프롬은 문명 이전의 고대인들에 비해서 문명이 발달한 시대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훨씬 파괴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고고학적 증거나 역사학적 근거로 정확하게 논증한 적이 있다. 녹색평론사에서 출판된 <오래된 미래>는 라다크 사람들의 삶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곳의 삶은 전적인 평화가 지배한다. 간혹 서로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에는 그 자리에 있던 제삼자가 판결을 내린다. 그 삼자가 어린이라고 하더라도 누구나 그 판결대로 따른다고 한다. 그것은 곧 고대의 삶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그들이 오늘 문명사회의 사람들에 비해서 월등하게 평화적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합리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폭력적이었던 로마 권력의 폭력을 사도 바울은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내세움으로써 피했다. 군인들이 자기를 결박하려고 하자 바울은 백인대장에게 이렇게 항의했다.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고 매질하는 법이 어디에 있소?”(25절) 지금 바울이나 그를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누가는 아직 이런 권력의 속성을 절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시대는 가부장주의가 당연했듯이 제국주의도 당연했기 때문에 사도행전이 로마 정권에 대해서 심각하게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과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내세웠다는 것을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비난할 필요는 없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 운운하자 백인대장은 파견대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으며, 파견대장은 바울을 결박했었다는 사실이 걱정되어 현장으로 다시 출동한다. 그런데 파견대장과 바울이 나눈 대화가 매우 한가하게 들린다. 파견대장은 시민권을 돈으로 샀다고 했으며,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라고 했다. 고문을 통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도로 시급한 상황에서 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건 바울의 로마 시민권을 강조하기 위한 누가의 조치였을 것이다. 어쨌든지 바울은 로마의 폭력을 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파견대장과의 관계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법과 율법
로마의 폭력이 오랫동안 유럽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합법적이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지금 바울이 그 폭력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로마 시민을 보호하는 로마의 법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법은 말이 좋아서 법이지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운용될 때가 많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로마의 법은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를 위한 법이었다. 로마의 평화를 인정하는 민족과 종교는 로마에 의해서 보호받을 수 있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민족과 종교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로마의 평화라는 게 다른 민족과의 충돌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로마 제국이 유지되는 한 다른 나라의 평화는 가능하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은 로마법에 어느 정도 정통했기 때문에 율법의 문제도 정확하게 뚫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율법도 매우 합리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다. 로마법이 로마 제국을 가장 효율적으로 견인해낼 수 있는 규칙이었던 것처럼 율법도 역시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을 가장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는 규칙이었다.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안식일 법을 보자. 그들은 안식일에 모든 노동을 멈추었다. 실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 노동만이 아니라 먹기 위한 최소한의 노동이나 거리 이동에 필요한 노동도 금지시켰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 나그네, 종, 심지어 집짐승들에게까지 노동을 금지시켰다. 그들은 이렇게 강제 규정을 통해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를 평화롭게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로마법이 합리적이었지만 현실의 역사에서는 패권의 수단으로 작용했듯이 유대인들의 율법도 역시 그들의 역사에서 종교적 억압 수단으로 작용했다. 생명의 현실을 담아내야 할 율법이 오히려 생명을 파괴하게 되었으며, 더불어서 샬롬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할 율법이 종교적 독선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즉 율법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됨으로써 율법의 근본정신은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한 율법은 결코 폐기될 수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서 율법의 이중성이 노출되었지만 율법은 여전히 이 땅의 삶에 필요한, 일종의 필요악이다. 바울은 오늘 그 필요악인 로마 시민권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아무리 하늘의 생명에 의존해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이 땅의 질서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은 늘 상대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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