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례 요한
(길을 내는 사람)
본문3:1-20, 참조7:18-35, 9:7-9


요한은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한 어둠의 시대에 등장한 마지막 예언자였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서 제2대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 재위 15년은 대충 기원후 25-29년이 된다. 실권은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에게 있었지만 헤롯의 아들들이 이 지역을 분할 통치하고 있었으며, 가야바가 대제사장 직에 있었다. 요한은 예수에 앞서서 요단 동편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설교를 하다가 헤롯 안티파스의 부도덕성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투옥된 다음, 헤로디아 건으로 인해서 참수 당한다.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연명하면서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한 요한은 에쎄네파(쿰란공동체)의 일원이었을지 모른다. 그 요한이 광야에서 한 일은 세례와 설교였다.

요한의 세례
수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에 몰려들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일반 민중만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까지 그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도 역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예수의 세례 시에 하늘로부터 울린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소리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징표(3절)였다. 회개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예수와 요한은 같은 노선에 서 있다. 그러나 요한의 회개는 도덕적인 변화에 초점이 있다면, 예수의 회개는 가치전도에 초점에 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7절) 부르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그들의 자부심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가를 경고한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있듯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심판의 설교였다. 따라서 요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8절)를 맺으라고 설교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소유의 분배(11), 경제적인 정의(13), 구조악으로부터 벗어남(14)이었다. 반면에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라고 보았다. 전혀 다른 현실성에 근거해서 살아가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사랑이 우선했다.
오늘 우리도 세례를 받는다. 그것은 죄에서 죽고 의에서 산다는 뜻인데, 회개의 징표임에 틀림없다. 회개(메타노이아)는 방향전환이다. 이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영적인 힘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하나님에게 우리를 맡기는 결단이 곧 회개다.

요한의 정체성
이런 점에서 요한의 위치는 분명했다. 메시아가 아니라 그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요한을 메시아라고 생각했지만 요한은 그것을 부인한다. 오히려 그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가 메시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7:18이하)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낸 일도 있다. 누가는 이 요한의 사명을 가리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사40,3-5). 그의 정체는 길을 내는 자였다.
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진리를 가리키는 메타포로 사용되었다. 노장은 만물의 근원과 본질을 길(道)이라고 했다. 道可道 非常道(도덕경 1장). 하이데거는 철학을 가리켜 사유의 길이라고 했다. 노장에게는 이 세계가 불확실하다는 사실만 확실했기 때문에 도를 규정할 수 없었다. 하이데거는 불확실한 세계 안에서 인간 실존이 사유하는 방식을 나름대로 명쾌하게 제시할 뿐이지 길 자체에 대해서는 노콤멘트 했다. 기독교는 예수가 바로 그 길이라고 믿는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해서, 그렇다면 왜 타당한지에 대해서 답변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묵상제목
1) 광야: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진리를 외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이런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진리에 대한 열망이 강렬한가?
2) 길닦기: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정체성을 길 닦는데서 확인했다는 사실은 자기를 철저하게 비웠다는 뜻이다. 우리는 스스로 길이라고 자처하는가, 길이 길 되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비워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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