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바울의 변증 (2)
(24:1-27)        
5월15일

데르딜로의 논고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바울 살해 기도가 파견대장 글라우디오 리시아의 완벽한 조치로 헛수고로 끝난 다음, 바울은 훨씬 안전한 총독의 손에 넘겨졌다. 이제 바울은 유대교의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처리될 수 있는 그런 위험 지역을 벗어난 셈이다. 종교보다는 정치가 훨씬 안전하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게 바로 초기 그리스도교가 처한 삶의 자리였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가 열광주의 형태를, 정치가 합리주의 형태를 지닐 때라는 전제가 놓여 있다.
펠릭스 총독이 주관하는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은 완전히 로마 정치 체계가 지배한다는 점에서 예루살렘의 파견대장이 소집한 산헤드린 공의회와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그래서 그런지 대사제는 전문적으로 법을 다루는 데르딜로 법관(변호사)을 대동했다. 데르딜로는 2,3절에서 우선 총독에게 아부에 가까운 발언으로 이 논고를 시작한다. “펠릭스 각하, 우리는 각하의 덕분으로 크게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각하의 선견지명으로 개선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각하를 환영하며 감사하여 마지않습니다.” 아첨에 가까운 발언 후에 그가 제시한 구체적인 고발 내용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이다. 1) 바울은 몹쓸 전염병 같은 자로서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이며, 나자렛 도당의 괴수이다. 2)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려고 했다.
이 고발은 그 당시 유대교 지도층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발 연설로도 뛰어난 것이다. 두 내용을 한데 묶어 중요한 개념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전염병, 반란, 나자렛 도당, 성전 훼손. 그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교를 페스트 같은 전염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매우 모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별 볼일 없는 사람들로 생각했던 그리스도인들이 기원후 80년대에 상당한 정도로 불어난 사실에 대한 유대교의 놀라움도 반영된 게 아닐까 모르겠다. 정치적인 성격이 강한 ‘반란’이라는 단어는 총독이 가장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는 요소인데, 만약 총독에게 이런 느낌을 강하게 줄 수 있다면 이 고발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나자렛 도당’이라는 단어도 역시 그들의 불쾌한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누가가 데르딜로의 입을 통해서 열두 사도를 제쳐놓고 바울을 나자렛 도당의 괴수라고 설명한 건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누가 자신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누가의 이런 판단은 두 가지 배경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는 누가가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반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누가가 활동하던 80년대는 예루살렘 그리스도교가 몰락하고 바울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된 헬라, 즉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그리스도교가 주류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바울의 자기변론
데르딜로의 논고 후에 총독의 허락을 받아 바울이 자기변호에 나선다. 바울은 데르딜로가 제시한 죄목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을 중심으로 변론을 시작한다. 그 핵심은 ‘대중선동’에 관한 것이었다. 바울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해명한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로마 정권이 가장 심각하게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전, 회당, 거리에서 아무와도 논쟁을 벌이지 않았으며 군중을 선동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런 사실의 근거는 두 가지이다. 1)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지 겨우 12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약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날짜는 이렇게 계산된다. 첫째 날: 예루살렘 도착, 둘째 날: 야고보 및 장로들과의 회의, 셋째-아홉째 날: 정결예식, 열째 날: 산헤드린 의회, 열한째 날: 살해음모, 열 이틀째 날: 가이사리아 이송. 이런 짧은 기간에 바울이 사회를 소란하게 할 만한 사건을 저지를 수 없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2) 바울에 대한 산헤드린의 고발은 아무런 증거가 없다.
자신을 향한 고발 내용을 원천적으로 부정한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더 규정한다. 물론 이 내용은 누가의 해석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14절을 보자. “다만 제가 각하 앞에서 시인하는 것은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를 따라 우리 조상의 하느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몇 번 확인했듯이 80년대에 그리스도교는 이단, 또는 소종파라는 이름으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누가는 지금 그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누가에 의한 바울의 변론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를 따르는 사람은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는다. 구약은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울은 지금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두 부분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중이다. 구약성서가 최종적으로 유대교의 경전으로 결정된 때는 사도행전이 기록되기 10여 년 전인 기원후 70년(얌니야 회의)이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경전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구약성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오히려 도움을 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는다.”는 오늘 본문의 진술은 바로 이런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왜 유대교로부터 분리 독립된 것일까? 여기에는 역사의 우연성이 작용한다. 정치, 종교, 사회적 충돌 사이에서 스스로 독립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리스도교의 운명이 우연하게 작동되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의 출현이 우연하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동시에 필연성도 작용한다. 그것은 곧 예수 사건, 즉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오늘 본문은 주로 부활을 다루고 있는데, 부활이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해명하는 키워드인 것만은 분명하다. 예수의 부활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인간 구원과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아무리 유대교와 그 뿌리를 같이 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같이 갈 수는 없었다. 예수의 부활은 곧 구원이 율법의 성취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특히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라 할 십자가 사건에서 일어난 부활 사건은 인간의 모든 행위와 업적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사실에 자신들의 모든 희망을 걸어둔 공동체였기 때문에 율법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유대교와 불편한 동거생활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런 뉘앙스와 약간 차이가 나는 논리로 전개된다. 바울은 본문에서 예수의 부활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고 부활 일반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15절 말씀을 보자. “그리고 저를 고소하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하느님을 믿으며 올바른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같이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들리는 이런 진술은 누가가 처한 삶의 자리를, 즉 유대교로부터의 박해를 피해야 한다는 위기상황을 전제하지 않으면 오해받기 안성맞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의 토대는 기본적으로 예수의 부활에 놓여 있는데, 이 사실이 오늘 본문에서는 강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 우리도 역시 죽은 자로부터의 보편적인 부활을 믿는다.
오늘 바울의 변론은 핵심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신이 유대인들을 선동한 적이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다. 데르딜로가 마지막으로 논고한 성전 훼손 문제는 아예 언급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 문제는 자신이 유대인을 선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포함된 것으로 보았는지 모른다. 이렇게 보면 바울은 지금 산헤드린 의회로부터 고소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셈이다. 신앙의 본질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행위라는 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가는 지금 바울의 재판을 통해서 당시 그리스도교의 결백을 사람들에게 변론하고 있는 중이다.

총독 펠릭스
논고와 변호가 끝난 다음에 내려져야 할 총독의 선고가 유보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파견대장 리시아가 내려 온 다음에 공판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누가에 따르면 그 이유는 펠릭스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교를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가가 설명하지 않지만 그런 주장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총독은 치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신흥 종교인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여러 정보망을 통해서 얻어들은 게 있었을 것이며, 더구나 며칠 후에 펠릭스와 함께 바울로부터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그의 아내 드루실라가 유대 여자라는 사실은(24절) 펠릭스의 종교적 취향을 어느 정도 암시한다. 그러나 신약학자들은 누가의 이런 글쓰기는 재판연기를 설명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라고 한다.
어쨌든지 펠릭스는 공판과 선고를 연기하면서 피고인 바울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바울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주고 친지들의 뒷바라지를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렇다면 펠릭스는 비교적 사태를 원만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는 고위 관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유대인 로마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따르면 펠릭스는 부패한 총독이었다. 아내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드루실라는 처음에 코마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약혼을 했다가, 나중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수락한 에메사의 왕 아치스와 결혼했다. 펠릭스는 키프로스 출신의 유대인 마술사 아토모스를 통해서 이 여자로 하여금 남편을 버리고 자신과 결혼하게 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가 뇌물을 좋아하는 관리였다는 것도(26절 참조) 사실이다.
누가는 펠릭스 총독이 공판을 연기한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는지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그는 후임 총독 보르기오 페스도가 부임할 때까지 2년 동안 바울을 감옥에 가두었다. 펠릭스는 뇌물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또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바울을 풀어주지 않았던 것 같다. 누가는 펠릭스의 상을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으로 구별한다. 이게 모순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실제 모습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의로운 사람인 바울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게 역사의 비극이며, 현실이다. 바울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제 펠릭스를 역사에서 퇴장시키고 페스도를 등장시킨다. 그는 바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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