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바울의 상소
(25:1-27)      
5월29일

페스도의 재판
펠릭스의 뒤를 이어 부임한 페스도 총독은 자신의 업무를 매우 신속하고 불편부당하게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고위 관리였다. 사도행전의 저자에 의하면 일단 그렇게 묘사된다. 부임한지 사흘 만에 그가 초도순시 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자 대사제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다시 바울을 고발하면서 바울의 신병을 요구한다.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달라는 간청이 오늘 본문의 설명처럼 바울을 암살하기 위한 음모였는지, 아니면 바울을 더 이상 로마법이 아니라 율법으로 처리하겠다는 의도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바울 문제를 주도적으로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만은 분명하다. 페스도가 부임한지 며칠 되지 않은 상황이니까 그들이 이렇게 닦달하면 어느 정도 통할 것이라는 계산이 나왔을 수도 있다.
제사장과 유대 지도자들의 요구에 대한 페스도의 반응은 그가 원칙주의자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페스도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그들의 요구를 우회적으로 거절했다. 우선 바울이 가이사리아에 감금되어 있다는 말은 바울의 신병이 이미 로마 정부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내줄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더구나 페스도는 예루살렘 순시를 이제 곧 끝내고 다시 가리사리아도 돌아갈 예정이었다. 만약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온다면 페스도의 일정을 바꾸거나 아니면 페스도가 재판에 참석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런 일을 페스도는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은 고발인들이 가리사리아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페스도의 주장은 누가 보더라도 논리성이 확보되어 있었는데, 이런 조치는 앞서 그의 선임자 펠릭스에게 바울을 호송한 예루살렘의 파견대장 글라우디오 리시아가 내린 조치와 똑같다.(23:23-30) 드디어 신임 총독의 주재로 바울의 재판이 열리게 되었는데, 길게 잡아 총독이 부임한지 14일 만에 열린 재판이라는 건 지난 2년 동안 지지부진하던 바울의 재판이 페스도 덕분으로 속도를 얻게 되었다는 뜻이다.
누가는 재판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이렇다 할 긴 설명이 없다. 유대의 대표자들은 여러 죄목을 제시했지만 “확실한 증거는 하나도 대지 못하였다.”(7절) 고발자들의 주장은 간접 화법으로 진술되는 반면에 이에 대한 피고인 진술은 직접 화법으로 다루어진다. “나는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카이사르에 대해서 아무 잘못도 한 일이 없습니다.”(8절) 양측의 공방이 끝나면 재판관의 선고가 내리기 마련인데 웬일인지 페스도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대신 바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대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 내 앞에서 이 사건에 관한 재판을 받는 것이 어떻겠는가?”(9절) 누가의 판단에 따르면 페스도가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페스도가 일전에 예루살렘을 순시할 때 그들이 이런 요청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더 속사정을 살핀다면 페스도의 이 질문은 곧 바울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의미인지 모른다. 물론 페스도가 예루살렘에서 재판이 열린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관할한다는 단서를 붙이기는 했지만 바울의 신병을 예루살렘으로 옮긴다는 건 결국 유대인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더 결정적인 근거는 총독의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에서 발견할 수 있다.

카이사르에게 상소합니다!
바울의 첫 마디는 이렇다. “나는 지금 카이사르의 법정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한번 짚은 것처럼 바울의 운명은 두 질서 앞에서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 있었다. 유대의 종교질서는 그를 위험에 빠뜨렸으며, 로마의 정치질서는 그의 안전을 보장했다.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이후(21:27-36) 이런 긴장은 계속되었다. 바울을 종교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의도를 꿰뚫어 본 바울은 총독에게 로마의 질서를 유지하라는 뜻으로 이렇게 입을 연 것이다. 카이사르의 법정에 선 사람은 유대교의 압력에 굴복할 수 없다고 말이다. “이 사람들의 고발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넘겨 줄 수는 없습니다.”(11b)
바울이 지금 이렇게 총독을 압박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이유는 그의 신상에 심상치 않은 조짐이 감지되었다는 뜻이다.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겠느냐, 하는 총독의 질문이 바로 그것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유대 대표자들의 고발이 있는 뒤에 바울의 피고인 진술에 율법, 성전과 더불어 ‘카이사르’가 언급되었다는 사실도(8절) 중요하다. 11a절의 진술에서도 역시 우리는 바울의 비장미를 느낄 수 있다. “만일 내가 무슨 법을 어기거나 죽을죄를 지었다면 사형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자기 신변에 위험을 느낀 바울은 이제 배수진을 치는 심정으로 이렇게 선포한다. “나는 카이사르에게 상소합니다.” 본문은 페스도 총독이 선고를 내리지 않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바울이 상고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분명히 선고를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누가는 왜 총독의 선고를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고, 질문 형식으로 암시만 했을까? 사도행전의 일관된 생각은 로마 정부와 기독교의 우호적인 관계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바울의 유죄선고를 노골적으로 기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이런 텍스트의 행간에서 바울이 감지했을 생명의 위협을 읽을 수는 있다. 오죽 했으면 그가 카이사르에게 상소했겠는가?
그런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바울이 카이사르에게 상소한 사건은 매우 복잡한 법적인 문제와 연관된다고 한다. 상소를 제기했다는 건 실제로 바울이 총독의 선고를 거부했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바울을 대표로하는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만이 아니라 로마 정권과도 상당한 갈등관계에 접어든 셈이다. 물론 이런 속사정을 텍스트는 숨기고 있다. 또한 아무리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총독의 뜻을 반대하면서까지 상소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역사적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카이사르에게 상소하기까지에 이르는 이 재판과정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바울이 처한 비상사태를 부각시키기 위한 누가의 추측보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의 역사적 신빙성이 떨어지는 대목으로 인해서 신앙적인 부담을 느끼는 분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역사적으로 비평하면 결국 아무 것도 남을 게 없는 거 아닌가, 하고 염려할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부담과 염려는 덜어놓아도 좋다. 성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설령 그 손가락에 상처가 있다 하더라도 달을 가리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에게 정작 요구되는 것은 그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볼 줄 아는 해석학적 능력이다.
바울의 상소 선언을 들은 페스도는 배석판사들과 협의한 후에 상소를 허락한다. 이런 묘사로만 본다면 페스도는 분명히 바울에게 호의적인 사람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사건 처리에서도 그는 바울에게 불리한 일을 하지 않았다. 여기에 바로 사도행전을 자신의 저술 목표에 맞도록 진술해야 할 누가의 고충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는 바울의 신변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판정을 내린 사람이,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 페스도였지만, 누가는 그를 끝까지 호의적인 사람으로 남겨두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바울의 무죄를 증언해 주어야 할 사람은 당연히 성실한 관리로 남아 있어야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구체적인 실정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 않은 누가로서는 글쓰기 구성의 모순을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만 했다. 다만 유대교와 로마정부 사이에서 그리스도교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대목에서만 일관성을 잃지 않으면 사도행전 저술 목표는 달성되는 셈이다.

아그리빠 왕과 베르니게
누가는 이제 바울에게 보여주는 페스도 총독의 호의와 위기에 빠진 바울의 정당성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특이한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는 헤로데 대왕의 증손인 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리빠와 한 살 어린 누이 베르니게(라틴어 발음으로는 베로니카)이다. 베르니게는 첫 남편이자 숙부인 칼키스의 헤로데가 죽자 오빠 아그리빠의 집에서 살았다. 이들 사이에 근친상간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지역의 왕이었던 아그리빠는 신임 총독을 예방하기 위해서 방문했다. 페스도는 바울 재판 건을 아그리빠에게 보고했다. 그 내용은 앞의 진행에 대한 요약인데, 특이한 것은 예수의 부활을 언급했다는 사실이다.(19절) 아그리빠는 바울 사건에 관심을 보였고, 심문 일정이 다음날로 잡혔다.
본문 23-27절은 로마의 공식적인 재판 분위기를 그럴듯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그리빠와 베르니게는 왕을 상징하는 장신구를 비롯해서 정식 예복을 차려 입고 많은 고위 인사와 더불어 재판정에 들어섰다. 그러자 페스도 총독은 근엄한 어조로 심문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는 바울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황제에게 보내기로 작정했다는 사실과 상소하기 위한 죄목을 얻기 위해서 아그리빠 왕 앞에서 다시 심문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이미 끝난 재판을 단지 상소문의 죄목 사항을 얻기 위해서 다시 재개한다는 게 약간 어색하기는 하지만 누가는 이런 방식으로라도 바울의 정당성과 페스도의 진정성을 독자들에게 알리려고 한다.
페스도의 진술에 특이한 단어가 나온다. 우리말 성서에는 21,25,26절에 각각 똑같이 ‘황제’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지만 헬라어 성서 26절의 그 단어는 ‘퀴리오스’(주)이다. 26a절은 이렇게 번역되어야한다. “그러나 그에 관해서 나의 주님에게 아뢸 만한 확실한 자료는 하나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 단어가 본격적으로 로마황제에게 사용된 것은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 때였다. 지금 누가가 기술하고 있는 이 심문은 네로(재위 54-68) 시절이라고 한다면, 결국 누가는 도미티아누스 시절의 용어를 네로 시대의 용어로 소급해서 사용한 셈이다. 근친상간의 장본인인 아그리빠 왕을 등장시킨 것과 더불어 용어의 소급 사용은 사도행전 집필자가 이런 역사적 사실성을 결정적인 요소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25장이 끝나면서부터 사도행전 이야기의 주도권은 바울에게 완전히 넘어간다. 아그리빠 왕과 대신들 앞에서 바울은 피고가 아니라 설교자로 나서게 되며, 로마까지의 여정에서도 바울은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한다. 바울의 운명에 관해 마음을 졸이며 글을 읽던 독자들의 인내심이 여기까지라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누가는 전혀 새로운 분위기로 끌어나간다. 그 길목에서 마지막 엑스트라 역할을 한 사람이 곧 페스도 총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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