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바울의 변증 (3)
(26:1-32)      
6월5일

바리사이파의 신앙(1-11)
예수님의 수난설화와 비슷한 구조로 묘사된 바울의 체포와 재판 이야기는 22장, 24장, 그리고 26장에 나오는 바울의 변증에서 그 특징을 보인다. 22장의 변증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당한 바울이 파견대장의 병영 안으로 끌려들어가기 직전에 행해진 것이며, 24장은 가이사리아의 펙릭스 총독이 주관한 정식 재판에서, 26장은 2년여의 세월이 흐른 다음 페스도 총독과 아그리빠 왕 앞에서 행해진 것이다. 특히 26장의 변증은 바울과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려는 누가의 의도가 총체적으로 그려진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바울은 자신이 바리사이파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연다. 그 사실은 바울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4-6) 그는 여기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유대교의 전통을 가장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유대교적 전통을 훼손하고 있다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고소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 셈이다. 이런 생각이 바로 6,7절의 진술에 그대로 담겨 있다. “지금 제가 여기에 서서 재판을 받고 있는 것도 하느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언약에 희망을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열 두 지파는 밤낮으로 오로지 하느님을 섬기면서 그 언약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전하, 저는 바로 그 희망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고발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바리사이파의 가장 중요한 믿음과 희망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23장에서도 산헤드린 법정에서 바리사이파의 부활신앙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을 고발한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에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한 적이 있다. 과연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부활신앙과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는지, 우리는 여기서 정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이 뜬금없이 나온 게 아니라 유대교적 배경을 두고 있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부활신앙에 놓여 있다면 바리사이파 전통에서 본다 하더라도 고발당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바울의 논리는 정당하다.
“하느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왜 믿을 수 없는 일로 돌려 버리는지 모르겠습니다.”(8)는 바울의 진술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해명에서 매우 중요하다. 첫째, 이 진술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부활신앙에 근거한다는 의미이다. 이 진술이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부활의 리얼리티는 무엇일까? 부활은 현재적인가, 미래적인가? 부활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가, 아니면 다른 동물들에게도 해당되는가? 부활의 생명에서 지금의 인격이 유지되는가, 폐기되는가? 많은 질문들이 이 부활신앙에 포함된다. 둘째, 이 진술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셋째, 오늘 본문의 맥락에서 볼 때 이 질문은 부활사상이 바리사이파의 전통과 연결된다는 의미이다. 어쨌든지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교의 가장 본질적인 신앙과 바리사이파의 신앙이 부활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는 사실을 논증한 셈이다.

바울의 개종 이야기(12-18)
바울은 자신도 원래는 나사렛 예수를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소위 다마스쿠스 회심사건을 거론한다. 이 회심사건은 사도행전에서만 보더라도 9장, 22장에 이어 세 번째로 거론되었다. 이 사건이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거론되어야할 만큼 중요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사도행전의 진행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필요했던 것인지, 또는 저자 누가의 과장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바울의 편지인 고린도후서와 갈라디아서 등에 의하면 바울이 왕년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다가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회심했다는 사실은 명백하지만 사도행전이 묘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극적인 요소는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사도행전에 묘사된 세 번의 회심사건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바울과 동행한 사람들이 9장에서는 하늘로부터 울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빛은 못 본 반면에, 22장에서는 반대로 빛은 보았지만 음성을 듣지 못했다. 26장에서는 이런 사실 자체가 생략되었다. 찬란한 빛이 비출 때 22장에서는 바울이 땅에 거꾸러졌지만, 26장에서는 동행했던 모든 사람들이 거꾸러졌으며, 26장에는 앞서의 구절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에 관한 언급이 없다. 특히 26장에 기록된 “가시 돋친 채찍에다 발길질을 하다가는 너만 다칠 뿐이다.”(14)는 문장은 “나를 반대하는 것은 네게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다.”는 그리스 속담의 채용이라고 한다. 바울의 일대기를 나름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누가는 이 속담의 채용을 통해서 바울이 완전히 예수님의 능력 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헬레니즘적 독자들에게 실감 있게 전달한 셈이다.

구원의 빛(19-23)
다마스쿠스 회심사건으로 인해서 바울은 이제 자신의 사명을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게 증명된 셈이다. 그것은 곧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19)인데, 그 내용은 “우선 다마스쿠스 사람들에게, 그 다음은 예루살렘과 유대 온 지방 사람들에게, 나아가서는 이방인들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서 회개한 증거를 행실로 보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20) 이런 표현방식은 행 1:8절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는 말씀과 비슷하다. 누가는 꾸준하게 바울이 행한 선교사역의 타당성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 대목에서도 바울은 자신이 유대교와 다른 걸 전한 게 아니라 예언자와 모세의 예언을 전한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본문에 따른다면 그 예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부활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에게 구원의 빛을 선포하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서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얼마나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작업은 조금 어려운 문제이다. 바울이, 더 정확하게는 누가가 모세의 예언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해석하는 성서적 근거로 제시한다는 것은 구약성서를 매우 광의로 해석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쨌든지 바울의 메시지와 예언자들의 예언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없다면 바울을 향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비난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이다.

바울의 전도(24-29)
바울의 변증이 끝나자 페스도 총독은 이렇게 외쳤다. “바울로, 그대는 미쳤구나!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미쳐 버렸구나!”(24) 페스도는 부활에 관한 바울의 증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로마 고위 관료는 로마의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하더라도 신학적인 문제에서는 문외한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나름으로 전문인이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는 초보자인 채로 신앙생활을 하는 지성인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단지 상식적인 차원의 신앙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신앙의 연륜이 깊어도 신앙의 본질로 들어가지 못한다.
바울은 페스도 총독과 더 이상 신앙적인 주제로 대화가 불가능한 것을 깨닫고 대화의 대상을 경건한 유대인인 아그리빠 왕으로 바꾼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공공연한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것은 어느 한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니 전하께서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26b) 누가가 바울의 입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공공연한 사건으로 진술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이미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일정한 세력을 얻은 시기에 사도행전이 기록되었다는 의미이다. 원래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십자가 처형이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이었다.(고전 1:23) 어쨌든지 바울은 지금 피고인으로 몰린 처지에서도 로마를 대표하는 페스도 총독과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아그리빠 왕에게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하고 있다. 누가가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는 바울의 영웅적인 모습이 여기서도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아그리빠는 바울의 전도를 받아들였을까? 아그리빠는 이렇게 반응한다. “그대는 그렇게 쉽게 나를 설복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28b) 이 말에는 바울의 말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인지 아닌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누가도 그것을 의도한 게 아니었다. 아그리빠는 주후 100년에 죽었으니까(27년 출생)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당시에는 생존해 있었다. 이런 걸 감안한다면, 생존해 있는 인물에 관해서 진술하면서 복음을 실제로 받아들인 것처럼 언급할 수 없었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바울의 무죄(30-32)
재판이 끝나고 왕, 총독, 베르니게, 그리고 고위직 배심원 판사들이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바울이 무죄라고 생각했다. 그 장면을 누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 사람은 사형을 받거나 갇힐만한 짓을 하지는 않았군.”(32b) 이것이 바로 누가가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은 말의 핵심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하고, 결국 로마에 와서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분명하게 알고 있던 누가는 바울의 무죄를 변호하기 위해서 바울의 재판을 예상외로 길게(21-26장) 전하고 있다. 그 이야기의 결론이 바로 로마 총독, 유대 왕, 법관들이 내린 무죄 선고였다. 그러나 이 무죄 선고는 법적인 효력이 없었다. 왜냐하면 32절에 아그리빠 왕의 입을 통해서 거론되다시피 바울이 카이사르에게 상소했기 때문이다. 누가도 그런 공식적인 선고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다만 바울이 무죄라는 사실만 독자들에게 전달하면 충분했다.
누가에 의해서 해석된 바울이 실제의 바울과 어느 정도로 비슷하고, 차이가 나는지 우리로서는 정확하게 구분하기가 힘들다. 다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누가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바울의 치열한 신학적 투쟁을 상당히 완화시켰다. 그 이유는 그런 긴장감을 풀어도 될 만큼 헬라 그리스도교가 자리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80년에 다시 불기 시작한 유대교의 갱신 운동과의 마찰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누가가 중요하게 생각한 주제는 바울이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증인이라는 사실과, 비록 유대교의 고발을 받고 로마의 재판을 받았지만 그들마저 바울의 죄를 증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죄 선고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누가는 이 무죄 선언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역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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