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가버나움의 백부장
-믿음의 본질-
본문7:1-10, 참조 마8:5-13

오늘의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가버나움에 거주하는 백부장이 중병에 걸린 자기의 종을 위해서 예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예수는 이방인인 백부장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들어준다. 마태의 병행구에서는 백부장이 가버나움에 들르신 예수님을 직접 찾아와서 자기의 종을 치료해달라는 요청을 하는 반면에 누가에서는 유대인 장로와 친구들을 보내서 요청한다. 그 이외에는 거의 비슷한 내용이다. 어쨌든지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주변 인물 중에서 오늘 본문의 백부장처럼 노골적으로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이들은 드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9절). 그는 누구인가? 그의 믿음이 어떤 것이었나?

이방인 백부장
백부장이라는 직책은 요즘의 경찰서장쯤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AD44년 이전에는 가버나움에 속한 갈릴리 지역에 로마군이 없었다는 걸 전제한다면 이 사람은 로마 장교가 아니었다. 마샬의 주석에 의하면 헤롯 아티바스에게 속한 장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도 아니다.
이 사람은 평소에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회당을 건축하기도 했다(4절). 아마 지역 치안을 책임 맡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 재산을 사욕에만 충당하지 않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했다.
  백부장의 종이 중병(마태복음에는 중풍)에 걸렸다. 학자들에 따라서 병든 사람이 백부장의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긴 하다. 왜냐하면 7절에는 아들이라는 뜻의 “파이스”로 표현되어 있고 8절에 종이라는 뜻의 “둘로스”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파이스는 자기 종에 대한 애정을 강조한 표현이라고 보는 게 옳다. 어쨌든지 백부장은 자기의 종을 위해서 예수를 기억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이 백부장과 종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을지 우리는 자세하게 모른다.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백부장이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이 종이 생명을 담보하면서 지켜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는 백부장의 가족을 그렇게 보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것에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니라 병든 종을 위해서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이 백부장의 태도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많은 종 중의 하나가 병들었다고 해서 이렇게 백부장 자신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지는 않는다. 종은 물건에 불과하기 때문에 소실되면 대신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된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종을 자기와 똑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대했을 것이다. 자기의 사회적 지위에 묶이지 않고 사람을 사람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목적으로 여기는 삶의 태도가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우리가 해결하기 아주 힘든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개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특히 남을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오늘과 같은 비인간적 시대정신과 그런 사회질서에서는 우리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을 목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기가 힘들다. 더불어서 생존해나가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남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더 우선한다. 예컨대 이번 월드컵 대회만 보더라도 그렇다. 16강을 향한 우리의 염원이 거의 광적인 증상으로 나타난다. 진정한 스포츠 정신이 살아나기보다는 국가간의 극한적 경쟁과 경제논리만이 지배한다. 지난 부활절 연합예배가 흡사 월드컵을 홍보하는 이벤트처럼 보이고, 그게 지나쳐서 우리나라의 16강 진출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을 정도다. 이런 경쟁 일변도의 시대정신이 지배하는 한 우리는 인간을 늘 수단으로 삼게된다.

참된 권위에 대한 인식
예수님 일행이 백부장의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 백부장이 친구들을 보내서 이렇게 말하게 한다.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6절).
경건한 유대인들은 원래 이방인의 집에 출입하지 않는다. 이 백부장도 이런 점을 감안해서 예수님이 자기 집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까? 이런 율법적인 차원보다 그는 훨씬 큰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 “당신은 말씀만으로 내 하인을 고칠 수 있다. 내 부하들이 내 명령을 따르듯이 당신도 그렇게 명령을 내려서 내 종을 고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말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다(9절).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예수의 신적인 권위를 그가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
참된 권위를 알아본다는 것은 귀한 일이다. 사실 종교체험은 역시 어떤 절대적인 힘의 세계에 들어가는 일이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불타는 나무를 통해서 그 어떤 권위를 경험했으며, 이사야도 성전 안에서 스랍들이 노래하는 것을 보면서 여호와의 영광을 체험했다. 욥기서도 역시 인간의 인식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 능력을 진술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절대 권위에 대한 경험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신앙경험이 대개는 율법(윤리)적인 차원이나, 또는 아주 유치한 기복주의에 머물러 있다. 결국 이런 신앙은 명색만 하나님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인간론에 떨어지고 만다. 우리가 교회에서 경험하는 신앙의 차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사실은 너무나 확연하다. 우리의 신앙적 동기가 교회 안에서 어떤 지위를 확보하거나 일거리를 찾는 데에 쏠려 있다. 즉 우리의 모든 인간행위가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절대 권위가 아니라 인간이 노력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어떤 대상만을 목표로 한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말과 말썽이 많다. 인간의 이해타산이 개입해버리고 만다.
절대권위에 대한 경험은 곧 인간이 처리할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예술세계에서 그것을 경험한다. 우리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사건을 바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의 인간행위가 얼마나 가소로운지 절감하게 된다. 이 우주의 시간이 100억년 정도 되었다. 지구는 45억년이다. 앞으로 지구의 모태인 태양이 50억년 정도 더 생존하게 될텐데, 그 이전에 지구는 끝장난다. 이 우주는 얼마나 큰가? 물질의 최소 단위는 얼마나 작은가? 지구 안의 생명사건이 얼마나 놀라운가? 왜 이 지구의 물질은 고체, 액체, 기체로 구성되는가? 인간이 아무리 물리학과 화학을 발전시켜나간다고 하더라도 탄소동화 작용을 기술적으로 작동시킬 수는 없다. 생명과 물질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우리가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사실만 확인된다. 우리에게 숨어있는 이 세계, 그 존재를 창조한 하나님은 신비 자체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신비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없다. 기껏해야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IT 산업이나 또는 전생과 점성술에 대한 호기심에 묶여서 산다. 그것은 말 그대로 호기심에 불과하다. 그런 호기심을 상품으로 만들어서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켜나가는 것에만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교회 생활도 역시 이런 상태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눈여겨볼 틈이 없다. 다만 차이는 누가 조금 더 인간적으로 성실한가 아닌가 하는 것뿐이지 절대의 신비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이들은 별로 없다.

3. 자기낮춤
백부장은 예수님에게서 이를 발견했다. 그가 평소에 예수님과 어떤 접촉을 가졌는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있었다. 직접 만나보지 못했어도 소문만으로로 진리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집에 들어오시는 걸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겸양이 아니라 절대 권위에 직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행동한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죽는다고 했다. 모세나 이사야도 자기의 무능력을 고백했으며, 베드로도 역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고백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 자격이 없다고 했다. 결국 절대 세계에서는 두려움 때문에 말문이 막히게 된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믿음을 이스라엘 중에서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하신다. 이미 6장에서부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안식일 문제를 빌미로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국면에서, 오히려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이 집에 들어오는 걸 “감당치” 못하겠다고 고백했다. 복음서는 왜 이리도 우리의 생각을 반전시키는 것일까? 진리를 추구한다고 자처하던 사람들의 눈은 닫히고 그것에서 소외된 이방인과 죄인들의 눈은 열리는가?
신앙의 본질은 내가 어떤 집단에 속했는가, 즉 선민인 이스라엘 사람인가, 윤리적 인간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절대의 세계에 들어가는 체험에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에게서 그런 절대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자기를 낮춘다. 절대적인 힘을 “감당치” 못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는다.

묵상주제
1) 나는 백부장처럼 평소에 절대의 세계를 의식하며 사는가? 그 절대 세계는 나에게 무엇인가?
2) 또는 바리새인들처럼 종교 형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3)절대 앞에서 나의 무능력을 체험할 때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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