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머리를 푼 여인
-죄와 사랑-
본문7:36-50

누가가 흡사 한폭의 그림처럼, 혹은 연극의 한 장면처럼 묘사해주고 있는 오늘의 이야기는 어느 소설의 주제가 될만큼 감동적이고 사실적이다. 바리새인으로서 집주인인 시몬과 그의 초청을 받은 예수를 중심으로 식탁이 꾸며졌다. 그 당시 사람들은 왼팔을 받침대 삼아 비스듬히 앉아서 오른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랍비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그 동네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것이다. 그런데 한 여자가 예수의 발치께로 와서 눈물을 흘리고 머리를 풀어 예수를 발을 씻었다. 뿐만 아니라 발에 입을 맞추면서 향유를 부었다. 이런 돌발 상황에서 이제 문제가 발생한다. 집주인인 바리새인의 속마음을 꿰뚫어본 예수가 한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죄가 많은 이 여자에게 사랑이 많다고 말씀하신다. 이어서 예수는 이 여자에게 직접 세 마디 말씀을 하신다.

1)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48).
예수는 과감하게 이 여자에게 사죄선언을 주신다. 그러자 사람들이 해괴하게 생각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서슴없이 하는 저 자가 누군가? 이미 앞서 중풍병자 사건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했었다. 예수가 중풍병자게에게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시자 바리새인들이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냐?”고 했다(5:20,21). 예수는 사람들을 해방과 자유로 끌어내는 데에 관심이 있었고,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죄의식 안에 묶어두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이 여자는 창녀였다고 한다. 첩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이 여자가 어떤 연유로 이렇게 몸을 파는 일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인생이 그렇게 평탄하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여자가 몸을 팔게되는 경우는 대개가 어쩔 수 없는 형편 때문이다. 갑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난다거나, 남편이 죽게 되면 살아나갈 길이 막막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몸을 팔게 된다. 또는 친구의 꼬임에 빠진다거나 단순한 호기심에 못이겨서 이런 세계로 들어선다.
이 여자는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심한 자책감을 갖고 있었다. 일종의 죄의식이다. 이런 죄의식이 인간을 파괴한다. 그러나 역으로 이 여자를 죄인이라고 냉소하던 바리새인의 자기의(義)도 역시 인간을 파괴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여자는 그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야했고, 이 바리새인은 자기의로부터 돌아서야만 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기의를 통한 교만은 인간을 돌아서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예수는 이 여자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한다. 그녀의 잠재의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죄의식을 제거해버렸다. 복음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모든 죄의식의 뿌리를 잡초 뽑아내듯이 제거하는 일이다. 그것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심는 일이다. 오늘 현대인의 영적인 세계를 질식시키고 있는 죄의식은 무엇인가?
물질만능적 사고방식이 가장 근본적인 게 아닐까 생각한다. 부와 자본만이 절대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이 시대정신이 우리에게 일종의 죄의식처럼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는 가난한 게 죄로, 무능력으로 인식되고 있다. 너무나 노골적으로 우리의 가치관을 드러내주고 있는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가 우리 사회에 잘 먹히고 있다. 박찬호, 박세리는 돈을 많이 버는 운동선수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환호한다. 월드컵도 역시 거의 돈과 연관된, 일종의 초국가 기업이지 원래의 스포츠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 민중은 그런 기업가들의 상품판매술에 따라다닐 뿐이다.
교회도 역시 늘 이런 생각에 젖어 있다.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을 모아야하고, 교회당을 더 크고 아름답게 건축해야하고, 어느 정도 수준의 교회로 성장했는데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확대 재생산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죄많은 여자처럼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현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

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0).
이 여자는 자기 동네의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예수가 들어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집으로 찾아갔다. 그 여자는 일찌감치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타가 죄인이라고 여기고 있는 이 여자가 그래도 한 사람쯤 자기를 인간으로 인정해줄만한 사람을 만나본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보통 때 같았으면 언감생심 죄인이 바리새인의 집에 출입할 마음을 먹을 수 없었겠지만 오늘은 작은 축제같은 날이라서 이 여자도 용기를 냈다.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 랍비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다. 위에서 잠시 설명한대로 이 여자는 어느 순간에 예수의 발치께로 가서 눈물을 흘리고, 머리를 풀고, 향유를 부었다. 이 여자의 이런 행동이 믿음이라는 말씀인가? 이 여자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예수가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 여자의 행위는 비록 기독론적인 교리를 담고 있지는 않았지만 훨씬 근본적인 내용과 맞닿아 있었다. 사랑! 예수는 이 여자의 행동에 대해서 못마땅해하는 시몬에게 탕감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보다는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훨씬 채권자를 사랑한다는, 아주 일반적인 이야기였다. 이어서 크게 용서받은 이 여자는 크게 사랑하고, 적게 용서받은 사람(바리새인)은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여자의 믿음은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진실히 믿는 사람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남에게 동정을 베풀거나 인격적으로 대하는, 일종의 휴매니즘을 사랑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전13장에서 사랑을 인간의 모든 노력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는 은사들과 엄격하게 구분한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3). 사랑은 우리 인간의 선행이나 연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 인간에게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흘러나온다. 따라서 사랑은 우리의 인간적 노력으로 달성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자기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방식이다. 따라서 이 사랑 사건에서 우리 인간은 사실상 완전히 무능력하다. 다만 우리는 그 사랑의 능력에 우리 자신을 의존시킬 수 있을 뿐이다. 성령이 바람처럼 불고 싶은 대로 불 듯이 사랑의 능력이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통해서 활동하도록 맡길 뿐이다.
오늘 우리는 교회 안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한다. 조금 더 나아가서 헌금을 잘 드리고 교회에 봉사를 많이 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또는 믿음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게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명확하지 않다. 믿음은 어떤 고정된 교리를 알아듣고 확신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사랑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사랑으로 존재하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완전히 자기를 맡기는 우리의 결단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실존적인 믿음 행위가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의 세계 자체이다. 만약 그 하나님의 나라를 오해하고 있다면 수많은 사이비 종파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 광신이다. 인간의 믿음은 그것이 옳든 그르든지 모든 인간의 삶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믿음 자체보다는 그 믿음이 근거해야할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생명, 사랑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사랑의 능력에 자기를 맡긴 이 여자의 믿음이 이 여자의 정신적(영적)인 병을 치료했다. 그게 이 여자에게 구원이었다.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사랑의 세계를 훨씬 심원하게 알게 되고 그 세계에 자기를 맡긴 이 여자는 이제 모든 죄의식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되고 자유롭게 되었다. 이런 차원에서 이 여자에게는 구원이 임했다.

3. 평안히 가라(50).
오늘 이야기의 현장에서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저 눈물과 향유와 입맞춤이라는 몇 행동으로만 묘사되고 있는 이 여인에게 준 예수의 마지막 말은 <평안>이었다. 원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평화가 그대의 것이다”(삿18:6, 삼상1:17, 삼하15:9, 왕상22:17, 행16:36...)라고 인사했다.
이 여자의 삶은 평화와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창녀였다고 한다면 가족도 없었을 것이며 다른 이들과의 인간관계도 별로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단란한 가정이 있고 원만한 이웃관계와 적당한 정도의 물질이 있어야 몸과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여자에게는 이런 조건들이 없었다. 또한 예수로부터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당장 이런 조건들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에게 허락한 평화는 우리들이 찾아내려는 이런 조건들과는 전혀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이야말로 참된 평화의 전제조건이다. 이것이 없는한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자기기만이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4. 명상주제
오랜 전에 읽은 모파상의 <비계덩어리>는 창녀의 순수성과 사회지도층의 위선을 고발하고 있다. 톨스토이의 <부활>도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다. 소설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 삶에서도 역시 자신의 죄성을 깊이 인식하고 실제로는 사랑에 참여해서 사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작은 교양에 도취되어 사랑의 문을 막아놓고 사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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