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귀신들린 사람
-자유와 이성-
눅 8:26-39

고대인들은 정신병을 귀신들린 현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귀신들렸다는 말이 완전히 틀렸는지 아닌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단지 뇌의 이상으로 정신이 비정상적인지, 정말 악한 영이라는 실체가 입력되어서 그런 건지 단적으로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물론 오늘의 신경정신과에서는 뇌의 물리적 현상으로 생각하겠지만 뇌의 작용이, 그리고 인간 전체에 연관된 작용이 과학지식의 범주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쨌든지 오늘 우리는 정신 이상되었던 사람이 예수를 만나서 치료되었다는 누가복음의 보도를 접하게 된다. 이보도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1. 자유
거라사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악령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옷도 입지 않고, 집에 살지도 않고, 공동묘지에 살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사람의 난동을 막기 위해서 쇠사슬로 묶어놓았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는 이 사람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군대라는 뜻의 “레기온”이었다. 6천명 정도의 병력을 가진 사단급 군대였다. 아마 이 사람은 로마 군인들이 그 마을에 주둔하면서 행한 잔인한 행위 때문에 정신질환에 걸린 게 아닌가 생각된다. 어렸을 때의 나쁜 경험은 평생 간다. 특히 심리적으로 예민한 사람에게는 그런 작용이 심하다. 가정 폭력에 시달린 아이들이나 성폭력을 당한 아이들은 어른이 된 다음에도 정신적인 후유증을 앓는다.
이런 점에서 이 사람은 과거의 나쁜 경험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을 대표한다. 미래지향적이어야 할 삶이 일정한 과거의 사건에 완전히 묶여버린 사람이다. 인간은 나쁜 경험을 오래 기억하는 것같다. 잊을 것을 잊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는데 그것을 잊지 못하고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다보니 그게 병이 된다. 이 문제는 실제로 나쁜 경험만이 아니라 자기가 이룬 과거의 업적에도 해당된다. 오늘 우리의 삶은 대개가 자신이 이룬 업적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평이며 시위이다. 이렇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이 세상은 접어두고, 사실 종교 안에서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병이며, 일종의 악한 영에 사로잡힘이다.
이 사람은 그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된 상태에 있었다. 공동묘지에 살고 있었으며,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신질환자는 세상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난폭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의 일반적 교양인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니까 난폭한 것처럼 생각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간단하게 이 사회로부터 격리시켜버린다. 정신병동에 가두어버리거나 심지어는 손발을 묶어버린다. 이들의 자유를 사회가 강탈해버리는 것이다. 과거의 아픈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이 사람은 오히려 그 사회로부터 훨씬 깊은 억압의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우리는 이 사회 질서와 법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런 질서에 의해서 사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그래야만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런 인간사회의 질서와 법이 얼마나 인간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사회질서는 늘 다수만을 중심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인간사회를 완전히 건강하게 만들 수는 없다. 늘 제한적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양심적 병역 거부자” 문제만 해도 그렇다. 오늘 우리의 법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감옥에 가야한다. 오늘 본문의 귀신들린 사람처럼 쇠사슬로 묶여야 한다. 반면에 이번 월드컵 축구시합에 참가한 선수들은 법을 바꿔가면서 실제적으로 군복무에서 면제시켰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오늘 이 사회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사회가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쇠사슬로 묶어놓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장애인, 외국인노동자, 양심적 공산주의자, 동성애자들, 매춘부들의 자유를 위해서 교회가 얼마나 치열하게 투쟁했는가? 교회도 여전히 이 사회의 주류만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신자들이 아주 줄기차게 사회의 주류에 편입되기 위해서 애를 쓴다. 좋은 학벌과 재산, 사회적 신분이 신앙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소위 오늘의 중산층들이 내면적으로도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소유가 많아지만 자유로울 것 같은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있어야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소유지향적 삶은 늘 그런 탐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기독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좀더 철저하게 접근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 한국이라는 공동체가 지나치게 돈을 신처럼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2. 이성
악령에 사로잡혔던 오늘의 주인공이 예수를 통해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 과정은 약간 해학적이다. 악령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서 호수에 빠져죽었다. 원래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금기 동물이다. 아마 여기서 사육되고 있던 돼지는 이방인들의 먹거리였을텐데, 그것이 악한 영의 거주지라 할 물속으로 달려들어 몰사했다. 이 이야기를 읽은 유대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이 과정에 진정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 시대에는 악령의 실체가 공간적으로 이동한다는 이야기가 매우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가서 이 사실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 현장으로 달려나왔다. 그들은 놀라운 현상 앞에 섰다. 악령이 들려 광란하던 이 사람이 이제 정신을 차리고 옷을 단정히 입은 상태로 예수 앞에 앉아 있었다.
광란에 빠져 있던 사람의 정신이 말짱해졌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수와의 참된 만남이야말로 우리를 이성적인 인간으로 만든다고 말이다. 이성은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인간의 속성인데, 이것은 어떤 악한 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만이 갖게 되는 능력이다. 이 사람은 예수에 의해서 자기를 사로잡고 있던 파괴적 힘으로부터 벗어났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 이상 옷을 벗어버리거나 억지로 쇠사슬을 벗어내려고 발버둥치지 않는다. 자기를 알아달라고 이상한 행동을 할 필요도 없다. 바른 정신으로 예수 앞에 앉아있으면 되었다.
우리의 모든 삶을 창조하고 이끌어 가는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우리가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참된 이성은 다른 헛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참된 것에 마음을 두는 힘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이야말로 가장 이성적인 태도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요령껏 처세술을 배우고 남보다 앞서는 것에 삶을 걸어두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하나님에게만 삶을 걸어둔다. 이런 사람들은 더 이상 세상사람들을 향해서 인정해달라고 시위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길에만 절대적으로 의지한다. 이렇듯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삶이 가장 이성적인 것이다.
광란에 빠졌다가 이성을 차리고 예수 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을 본 동네 사람들은 예수에게 자기네 마을에서 떠나달라고 요청한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의하면 고대사회에서 이렇게 신기한 일을 행한 스승들에게는 오히려 자기네 마을에 머물게 해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은 예수를 내몰았다. 외눈박이 원숭이 마을에 두눈박이 원숭이가 내쫓겼다는 우화가 있듯이 이성적이지 않는 사람들은 이성적인 사람을 귀찮게 생각하게 마련이다. 미쳤다고 생각되었던 사람은 이제 이성을 차린 반면에 정신이 말짱하다고 생각하던 동네 사람들은 반이성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인간은 겉으로는 이성적인 것 같지만 속으로는, 그리고 실제로는 반이성적으로 살아간다.
이번 월드컵 축구경기에 연관된 현상을 바라보면서 광기가 이성을 몰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붉은 악마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열광적인 응원을 보면서 2천년 전 콜로세움의 그 광기를 보는 듯하다. 로마의 귀족들과 시민들은 정기적으로 콜로세움 경기장에 모여 프로 격투사들이 생명을 담보로 벌이는 싸움을 관전하며 환호작약했다. 평소에 유랑시인들이 낭송하는 시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감상에 젖어 있던 로마의 귀부인들이 이제는 격투사들이 흘리는 붉은 피를 보며 즐거워했다. 요즘 경기장에서 시합하고 있는 선수들의 행동과 표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간에 적대감으로 가득차 있다. 칼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서로 죽이고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싸운다. 월드컵 축구시합은 우리가 함께 잠시 모여 즐겁게 노는 오락이나 축제에 불과하다. 그런데 마치 우리 민족의 미래가 달려있기라도 한 듯 온 국민이 매어 달린다는 것은 분명히 비이성적인 태도다. 2천년전 콜로세움에 모여 고함을 지르던 로마시민들처럼 말이다. 특히 초기 기독교인들이 콜로세움에서 프로 격투사들이나 맹수들과 억지로 싸워야 했던 그 역사를 뒤돌아본다면 우리는 인간의 광기와 반이성이 가져오는 폭력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오늘 우리의 주인공은 마을의 유지들이 쫓아낸 예수를 따라나서려고 했다. 예수에게서 구원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집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는 비록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도는 아니었지만 마을로 돌아가서 자기에게 벌어진 사건을 전했다. 하나님의 일은 어떤 성직자의 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처한 삶의 길에서 일어난다. 이게 바로 악령에 사로잡혔다가 자유와 이성을 찾은 사람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자기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큰 일”(39)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그것이다. 우리는 자유한가? 이성적인가? 하나님의 큰일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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