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강

투쟁하는 복음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6-10)


바울의 투쟁


바울은 간단하게 인사를 끝낸 뒤에 뜸도 들이지 않고 직접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를 지적한다. 웬만하면 에둘러 말함직도 한데, 바울은 아주 노골적인 표현을 마다하지 않는다. 6절을 보라.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그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이렇게 초장부터 과격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갈라디아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는 데에 있다. 그 상황을 조금 실감나게 설명하기 위해 오늘 우리의 경우에서 예를 든다면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게 교회가 흔들리는 상황이라고 봐도 좋다.

그런 상황이 ‘다른 복음’이라는 단어에 압축되어 있다. 복음이면 복음이지 무슨 다른 복음이 있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만, 바울의 이런 표현은 아주 정확한 말이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 또는 다른 복음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앞으로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반복적으로 설명하게 될 테니까 오늘 우리는 그 사태 안으로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 말고 그 상황의 전반적인 윤곽을 짚는데 만족하기로 하자. 이를 위해서 필요한 질문은 “복음(유앙겔레온)은 무엇인가?”이다.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이 복음이며, 궁극적으로는 예수님 자체가 복음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그가 누구인지는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을 대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도대체 오늘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며, 오늘 그게 타당한 기독교 윤리인지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가르침이야 그렇게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도 우리가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심각하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불확실하다거나 절대적이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의 실증적이고 실질적인 사태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우선 십자가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 당시에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구원의 길로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유대인들도 그렇고, 헬라인들도 그렇다. 십자가는 명실상부한 실패였으며, 생명을 잃는 사건이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걸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아니다. 아마 모든 실체가 드러날 종말이 되어야만 우리는 그것의 속사정을 명백하게 알게 될 것이다.

부활의 사정은 더 깊고 신비롭다. 십자가 처형은 일단 다른 사람들도 알아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부활은 오직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경험된 사건이었다. 부활의 주님은 빌라도 총독이나 가야바 제사장, 또는 유대 민중들에게 나타나지 않고 오직 그를 따르거나 따르게 될 사람들에게만 나타났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논의되어야하지만, 우리는 그것보다는 부활이 모든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이 세상의 사건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 한다는 것만 확인하면 충분하다. 여기에는 초기 기독교의 고유한 예수 경험, 따라서 복음의 형성과정이 개입되었다는 뜻이다. 

초기 기독교의 궁극적인 생명 경험인 부활 문제를 약간 다른 각도에서 보충적으로 설명해야겠다. 필자가 2008년 1월13일 샘터교회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설교 제목은 “하늘이 열린다!”였다. 본문은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 관한 묘사인 마태 3:13-17절이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는 순간에 “하늘이 열렸다.”고 한다. 여기서 하늘이 열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라. 하늘은 열리거나 닫히는 게 아니다. 단순히 물리적 사실에 따른다면 하늘은 늘 열려 있다. 120억 년 전에 빅뱅으로 시작한 우주는 지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은 세계로 확장되었다. 그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물리적 진술이 아니라 영적인 진술이다. 설교에서 설명한 내용을 조금 더 보충한다면 다음과 같다. 하늘은 은폐된 생명의 세계이다.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실증적으로 담아낼 수 없는 생명의 깊이이다. 생명의 깊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성서가 말하는 하늘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생명을 표면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하늘을 단순히 공간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할 것이다. 1990년대 초에 한국 기독교와 사회를 소란하게 했던 다미선교회에 속한 사람들처럼 예수님이 재림하면 실제로 공중으로 휴거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늘은 생명의 심층이며,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렸다는 건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생명의 중심이다. 이런 말을 교리적인 어투로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예수 사건, 예수 운명이 생명의 궁극적인 현실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일상에서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경험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늘이 열린다는 성서의 진술은 우리가 아직 실증적으로 파악하기 힘들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의 가르침이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다면 복음도 분명히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으며, 결국 역사 안에서는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논쟁은 초기 기독교부터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어느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복음은 평화와 사랑인데 무슨 논쟁이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복음이 논쟁적이라는 사실은 아주 명백하다. 바울 이전에 예수의 삶에서도 우리는 복음의 이런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복음이 무조건 화해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싸울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이 싸움의 결과가 바로 십자가 처형이었다.

예수의 삶이 투쟁적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예를 하나 더 들자. 예수님은 어느 안식일에 장애인을 치료하신 적이 있다. 예수님을 향해 색안경을 끼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예수님이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그를 고쳤다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면서도 병든 자의 구원이라는 주님의 뜻도 실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안식일에 그를 고침으로 결국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분노를 샀다. 투쟁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의 투쟁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그렇게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 그의 복음은 평화 지향적인 게 분명하다. 문제는 복음의 변질에 있다. 하나님의 구원을 좌지우지하는 인간들의 교권을 강 건너 불처럼 구경하고 만다면 그것은 결코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일들은 종교 개혁 시대에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루터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로마 교황청과 일전을 불사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한국교회도 교권이 복음을 억압하고 있다. 한기총 신임 회장은 후보로 나섰을 때 10억을 헌금하겠다고 약속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왕 누구라도 회장 역할을 해야 하는 마당이니 10억 헌금을 하는 사람이 회장이 된다면 모두가 좋은 일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이라고 한다면 교황청의 면죄부 행위나 성직 매매도 얼마든지 합리화된다.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공동체에 속한 교우들이 다른 복음을 따라가고 말았다는 바울의 진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생각해보자. 초기 기독교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크게는 세 분파이다. 첫째는 팔레스틴 기독교인, 둘째는 디아스포라 기독교인, 셋째는 이방인 기독교인이다. 지역에 따라서 그 안에서도 또 세부적인 분파로 나뉘었다. 예컨대 고린도 교회에는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그리스도파가 있었다. 각각의 신앙적 특징에 따라서 이런 파가 나뉘면서 복음의 정체성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위의 내용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 내부를 기준으로 하는 구분이라고 한다면, 유대교와의 관계에 따르는 구분은 공동체 외부를 기준으로 하는 구분이다. 유대교와의 관계를 돈돈히 하는가, 아니면 느슨하게 하는가, 또는 완전히 단절하는가에 따라서 서로 달라졌다.

이렇게 아주 복잡한 분파 과정에서 바울은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그 당시에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율법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병행해서 율법을 받아들이자는 절충주의자들을 날카롭게 공격했는데, 갈라디아서는 바로 그런 공격을 위한 격문과 같다. 갈라디아서만 본다면 바울은 전투적인 사람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평가는 현재 그가 처한 형편을 감안하지 않은 데서 오는 오해이다. 그는 심한 배신감에 빠져 있는 상태이다. 그가 개척한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유대-기독교인들이 들어와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훼손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로 상당히 많은 교우들이 유대-기독교인들이 전한 ‘다른 복음’을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복음의 왜곡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갈라디아 교우들을 “교란시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는 사람들과 타협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보기에 따라서 이런 말은 자기만 잘난 체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게 아니라 다만 토라와 할례가 더불어서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장했을 뿐이다. 이들도 당연히 기독교인들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유대-기독교인으로서 여전히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기는 했지만, 기독교적인 특색을 강하게 보이고 있었다는 점에서 큰 틀에서 기독교인이라고 봐도 좋다. 아마 그쪽 사람들은 바울을 향해서 “너만 잘났냐? 왜 그렇게 팍팍하냐? 우리 모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데, 좋은 타협점을 찾아보자.” 하고 말했을지도, 또는 “별 것도 아닌 주제에 웬 말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제 삼자가 복음의 왜곡이라는 바울의 표현을 듣는다면 바울에게 극단주의자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갈라디아서가 기록되던 그 당시의 교회 형편을 완벽하게 아는 게 아니기 때문에 누가 옳은지에 관해서 판단하기는 어렵다. 바울이 반박하는 유대-기독교인들도 어디까지나 기독교인 것만은 분명한 마당에 그들을 무조건 배격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궁극적인 판단은 종말에 재림하실 주님이 하실 터이니 그때까지 유보하기로 하고, 지금 우리는 주어진 정보 안에서 나름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 판단의 기준은 바울이 말한 복음의 왜곡이다. 복음의 왜곡을 우리는 용납할 수는 없다. 단지 복음의 형식이 다르다는 것이라면 대립적이지 말아야 하겠지만 본질이 왜곡된다면 그때는 말이 달라진다.

복음이 왜곡되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실은 이게 어려운 작업이다. 아마 바울의 적대자들도 자신들의 복음이 왜곡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복음의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배우게 되겠지만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훼손하는 이들이 복음을 왜곡했다는 바울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계시에 근거한다.(1:12) 이런 주장은 일방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상대방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배타적인 신앙 경험을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건 쉽지 않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우리의 주장도 다른 종교인들의 눈에는 일방적인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이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우리의 주장이 왜 타당한지를 고유하면서도 보편적인 차원에서 해명해나갈 수 있을 뿐이다.

바울에게는 이에 대한 해명의 근거가 자유였다. 바울은 유대-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왜곡시켰다는 사실을 그들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갈라디아 신자들이 자유를 상실했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었다.(5장 이하) 만약 그들의 가르침이 갈라디아 신자들의 영혼을 자유하게 했다면 바울은 아무 소리도 못했을 것이다. 자유의 상실과 복음의 왜곡은 정비례한다. 복음이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면 그것을 추종하는 사람의 영혼이 자유로운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참된 복음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사실 오늘도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많은 부분에서 영적인 자유를 상실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이 자유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이들도 많지 않다. 오히려 자유를 잃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형편이다. 이런 자유의 상실은 곧 불안으로 나타난다. 신앙생활 자체에서도 그렇고, 세상살이에서도 그렇다. 교회의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무언가 잘못하는 게 아닌가 해서 불안해한다. 심지어 십일조 헌금, 주일성수나 새벽기도 같은 것들이 모두 신앙적인 불안 요소가 된다. 그들은 한평생 교회의 이런 틀을 조심스럽게 지켜나가는 것으로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불안은 이 세상살이에서 무언가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이어진다.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일들이 성취되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물론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살이를 뻔뻔스럽게 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매사에 불안하게 살아가는 것도 큰 문제이다.

한국 교회의 영성이 죄책감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복음의 왜곡에 대한 방증이다. 이 죄책감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런 불안 심리를 자극하고, 그것을 심리적으로 벗어나게 하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접근하는 일단의 흐름을 가리켜 청교도, 각성운동, 부흥운동이라고 한다. 이런 큰 흐름이 수세기에 걸쳐서 유럽과 미국에서 크게 일어났다. 감리교 창시자인 영국의 존 웨슬리, 미국 부흥운동의 선구자인 요나단 에드워즈 같은 이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신앙운동의 특징은 여럿인데, 그 중에 세 가지만 뽑는다면, 개인주의적 영성과 도덕주의, 그리고 회심이다. 이런 청교도적 영성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18,19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필요로 했던 영성이 20세기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건 접어두고, 기독교 신자들이 계속해서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것이며, 역설적으로 윤리적 책임감이 결핍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로 한국교회에서 교회성장 이데올로기는 모든 신학적, 윤리적 책임감을 피할 수 있는 도피처가 되고 말았다. 이런 정신적 상태에서는 교회만 부흥시키면 목사의 모든 부도덕성이 묻히고, 경제만 부흥시키면 대통령의 모든 부도덕성도 묻히고 만다. 

복음의 왜곡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전(全)방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신자들이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게 훨씬 심각한 문제일 텐데, 그 중에 한 가지만 짚자. 위에서 언급된 불안과는 상반된 현상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동일한 현상인 예배의 왜곡이 바로 그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 “열린 예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마 그것도 모두 미국의 잘나가는 교회로부터 벤치마킹 한 것이겠지만, 웬만한 교회는 모두 이런 방식으로 예배를 도입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수년전에 열린 예배라는 트렌드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온누리교회의 예배를 인터넷으로 참석한 뒤에 받은 느낌을 “열린 예배, 닫힌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기독교 사상>에 게재한 적이 있다. 필자는 그 예배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사람들끼리 종교적으로 즐거워하는, 일종의 열린 음악회와 같았다. 조금 세련됐는지, 아니면 거친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이런 열린 예배는 한결같이 종교적 엔터테인먼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예배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엄숙하게 드려야만 된다는 말인가, 하고 반론을 제기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신자들이 지루해하든지 않든지, 졸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냐, 하고 말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청중들이 종교적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조는 예배가 낫다. 왜냐하면 예배는 우리의 즐거움, 다른 말로 은혜를 받아야 할 우리가 아니라 영광을 받아야 할 하나님이 주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배에서 은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준비가 된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일 뿐이지 우리가 억지로 생산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예배에서는 일단 은혜 만능론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제사를 드릴 때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즐거움보다도 조상에 대한 예의가 핵심이듯이 예배에서는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의 종교적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배(doxology)*가 중심이다.


*한국교회에서 예배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겠다. 한국교회의 신앙적 특징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아마 예배가 자주 드려진다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모이기에 힘쓰라는 가르침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며, 신앙적 열정의 발로이기도 하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보다야 자주 드리는 게 낫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도 예배가 바르게 드려진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조금 비판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너무 많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참된 예배를 드리지 않는데서 오는 역작용인지 모르겠다. 주일에 진정한 마음으로 한번 예배를 드렸다면 사실 더 이상의 예배는 필요하지 않다. 군것질을 많이 하는 아이들은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줄 모르고,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하니까 결국 자주 군것질을 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지나치게 자주 드리는 예배행위와 잘못된 예배는 일종의 악순환인 것 같다.

이런 악순환에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예배 개념의 왜곡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만 참된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에서 신자들의 종교적 욕구인 은혜가 더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예배를 드리러 간다는 말이 “은혜를 받으러 간다.”는 말과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건 분명히 예배에 대한 몰이해이며, 변질에 이르는 첩경이다. 영광을 돌린다는 말과 은혜를 받는다는 말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지평이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면 당연히 은혜를 경험하겠지만,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진정한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예배에서 은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은혜는 예배에서 결코 주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적인 선물일 뿐이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한민족의 전통적 전례인 제사행위를 예로 들겠다. 우리의 전통적 제사행위가 조상신에 대한 숭배이며, 신약의 예배 및 구약의 제사가 야훼 하나님에 대한 경배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형태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양측 모두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모든 걸 집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제사행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조상에게 집중한다. 그들은 제사행위에서 어떤 반대급부를 원하지 않고 최선으로 그 행위에 천착할 뿐이다.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요구를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만 집중해야 한다.

제사는 엄격한 절차와 의식에 따라서 진행된다. 제상에 음식을 올리는 방법이나 술 따르는 방법도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는다. 제사의 방식이 이렇게 일정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조상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드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배도 역시 그런 방식을 따라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예전이라고 한다. 그 예전은 지난 2천년동안 교회가 하나님에게 최대한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선택한 종교적 의식이다. 기도, 찬송,  말씀봉독, 교독, 성찬, 설교 등등, 예배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순서는 오직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에게 맞춰져 있다.

그런 모든 예전도 역시 역사 과정에서 사람들이 결정한 것이니까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그래서 그 시대에 맞도록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 말은 옳다. 그러나 전통적 예전 예배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완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쉽게 상대화하지도 말아야한다.

오늘 소위 <열린 예배>라는 방식의 예배는 이런 전통적 예전을 상대화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위험하다. 이런 예배의 무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은혜에 놓인다. 예배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의 영적 만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은혜 지상주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의 근본을 허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은혜까지도 세속화한다. 은혜의 주체인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은혜에 종속되어야 할 인간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조금 더 심각하게 말해서, 은혜를 인간의 종교 심리적 차원으로 끌어내릴 위험성마저 보이고 있으니, 은혜의 세속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우리가 지금 로마 가톨릭의 미사가 빠지기 쉬운 형식주의나 엄숙주의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예배의 주체를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 돌려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단순히 청중들의 종교적 친교 모임인지, 아니면 참되게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송영(doxology)인지 조금만 세심하게 살펴보라. 모든 실상이 금방 눈에 들어올 것이다.(다비아, ‘신학단상’에서. 마르바 던의 <고귀한 시간 낭비>를 참조할 것)


그리스도의 종


복음의 왜곡 앞에서 바울은 절망하고 분노한다. 그는 차마 입으로 꺼내기 힘든 말까지 쏟아낸다. “저주를 받을지어다.”(8,9절) 오죽 했으면 그가 반복해서 저주를 받으라고 말하겠는가. 바울이 실제로 자기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필자는 단정적으로 말할 입장이 아니다. 아무리 입장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저주는 좀 심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그 당시 복음에 목숨을 건 바울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의 다른 편지도 감안해서 본다면, 저주 운운은 그 당시에 부정을 강조하는 관용어였을지 모른다. 어쨌든지 바울은 복음의 순수성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조금 옆으로 나가는 이야기지만, 필자의 설교비평에 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주장은 필자가 설교자들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죽인다는 것이다. 서울신학대학교 정인교 교수는 작년 11월 초에 있었던 한국설교학회의 심포지엄에서 발표했고, 12월 기독교 사상에 게재했으며, 요즘(2008년 5월) 뉴스앤조이 인터넷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글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설교학 교수의 눈에 그렇게 비쳤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필자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살리고 죽인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필자는 그에게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는 바울의 독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오늘 한국교회의 많은 문제 중의 하나는 신학자들의 직무유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대중설교자들의 설교에 상찬을 받치는 데만 열을 올린다. 설교학 교수들만이 아니라 조직신학 교수들도 일종의 주례사 수준의 설교비평을 남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한국의 신학교는 거의 교단에 속해 있기 때문에 신학교수들이 교단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둘째, 신학자들이 신학의 중심을 놓치고 있다. “신학은 교회의 기능이다.”는 바르트의 주장처럼 신학은 교회의 현실에서 시작될 뿐만 아니라 교회의 감시 기능도 확보해야하는데, 이것이 한국의 신학교에서는 실종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신학교수들은 지금 일종의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모든 이들을 싸잡아 하는 이야기가 아니니,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신학교수 자리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자리로 떨어져 버린 건 아니까, 하는 불안이 없지 않다. 그중의 단적인 예를 하나 든다면, 신학생 정원 문제가 그것이다. 현재 각 교단마다 목사 후보생들이 넘친다. 지난 7,80년대처럼 교회가 양적으로 부흥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학생들의 등록금 수입을 확보하는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바울은 자신의 과격한 표현이 단순히 감정적인 데서 나온 게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데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두 가지 신앙적 태도를 대비하는 것으로 해명한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사이의 대비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토라와 할례를 받아들이는 신앙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를 향한 믿음에만 천착하는 신앙이다. 전자는 지금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들어와서 원래 바울이 전한 복음을 파괴한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인들의 신앙이며, 후자는 물론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 기독교인의 신앙이다. 이를 조금 풀어서 본다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사람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은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구원의 가능성을 두는 것이다. 이런 대답이 너무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신앙의 아주 엄중한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복음을 따른다고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거꾸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 머물러 있을 때가 많다.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말도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남을 의식하는 신앙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의 종교적 업적에 만족하는 신앙이다. 조금 비판적으로 본다면 한국교회의 교회당 건축에 대한 열정은 바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신앙이다. 새벽기도회로부터 시작해서 지나칠 정도로 많은 집회도 역시 이런 만족의 발로일 경우가 많다. 신앙 공동체가 늘 신앙의 본질에만 천착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가능한대로 최선으로 그런 영적 긴장감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결정적인 왜곡의 위기와 유혹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사람의 기쁨과 환심을 사지 않는 자신의 신앙을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자기 정체성에서 해명한다. 그리스도의 종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복종할 뿐이다. 이런 진술을 단순히 실존적인 신앙고백의 차원으로 돌리면 안 된다. 이건 아주 실질적인 신앙경험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정체성을 실질적인 삶에서 확보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종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이다. 그런 구원론적 인식이 명백한 사람은 무슨 일에서만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이런 신앙에서 그는 투쟁해야 할 바로 그 순간(카이로스)에 배수진을 친 심정으로 투쟁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그에게서 투쟁하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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