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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에버하르트 융엘(77-81쪽)

조회 수 135 추천 수 1 2025.01.14 16:29:18


77쪽

따라서 이어지는 절에서 구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구절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래서 이를 배경으로 삼고, 신약성서의 구절들을 근거로 삼아 예수 죽음의 의미를 논의할 것이다. 

성서의 본문들이 죽음에 대해 말하는 바는, 과거와 최근 자료에 나타난 심오한 종교적, 세속적 (죽음에 대한) 표현들과 다르다.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즉 죽음에 대한 물음은 상당히 결정적이지만 완전히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사실 때문에, 성서 본문과 다른 자료의 기술이 다른 것이다. 우리 인생 전체가 죽음에 대한 묵상(혹은 죽음에 대한 연구)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은 성서로부터 도출되는 태도가 전혀 아니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인지 따져보라는 명령과 부유한 농부 비유도 (인생이 죽음에 대한 묵상이라는 견해에 속한다고 이해하면 안 된다.) 


(물론) 죽음이 참혹하며, 그래서 불쾌하다는 사실을 성경이 의심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성서에 주목하기로 한 사람들은 ‘영감을 주는 철학의 정신은 죽음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선언을 철학자들에게 아무런 시기심없이 넘겨줘야 하고 넘겨줄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물음은, 이 땅의 생명의 끝에 대한 매우 실존적인 숙고로서, 마지막[끝]에 대해 묻고 있다. 하지만 이 물음은 <바퀴의 중심>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것은 마치 어두운 안개[장막] 뒤에 있는 시선[불빛]과 같은 것이지만, 이 답변도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만능 열쇠와 같은 것이 전혀 아닐 것이다.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라는 철학의 근본 질문조차, 죽음에 대한 성서의 숙고는 아무런 해답을 주려고 하지 않고 줄 수도 없다. 신앙인(믿는 자)은 죽음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길 뿐이다. 


78쪽


신앙인은 필적할 수 없을 만한 우선권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부여할 것 같다. 하지만 죽음이 가진 냉정한 힘은 (생명의 우선권을) 수용할 수 없다. 물론 신앙인은 죽음의 냉혹한 힘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며 매우 고통스럽게 의식하고 있다. 죽음은 실제로 바울의 말처럼 죄의 대가이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이 구절로부터) 곧바로 돌진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한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ewiges Leben입니다. : 로마서 6장 23절) 철학은 죽음으로부터 나오며 요컨대 죽음의 철학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 철학의 근거는 죽음이므로, 철학은 결국 죽음에 대한 철학일 수 밖에 없다는 뜻: 역주) 그렇지만, 죽음의 신학은 더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신학의) 주제일 수 없다. 신학은 하여간 신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담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앙인은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신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신학의 근거는 아니다. 신학은 죽음의 신학과는 여전히 다른 무엇이다. (**신학의 일차적 대상이 죽음은 아니라는 뜻이다. : 역주) 


  1. 구약성서는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가?


죽음을 죽음과 상관이 있는[관계가 있는] 생명으로 보고, 죽음에 대해 질문하려는 우리의 방법(론)은 구약성서의 본문과 완전히 일치한다. (구약성서의 유대인인) 히브리인들은 죽음을 생명에 대한 항의로 인지한다. 죽음을 이해하려는 자는 구약성서가 생명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이해해야 한다. 



79쪽


  1. 생명은 최상의 선(Guete) 


구약성서는 죽음에 대해 분명하게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도 생명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스라엘인 각자는 죽음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죽을 운명이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생명 존중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운 현상이다. 생명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이 땅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좋은 것이며, 당연히 가장 좋은 것이다. 더 길고 충만한 생명과, 자손을 통해 보존되는 생명은 하나님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다. (** 더 오래 살면서 인생을 완성하고, 자손을 낳아 생명을 이어가는 자는 하나님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받은 것이다. : 역주) 생명은 행복과 대구를 이루지만, 죽음은 저주와 대구를 이룬다. 생명은 생명 안에 있는 기쁨을 뜻하며, 생명 안에 기쁨은 신 안에 있는 정당한 기쁨이다. (** 신 안에서 누릴 자격이 있는 기쁨 : 역주) 하나님을 찾는 자는 생명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빵과 생계수단 뿐만 아니라 특히 신의 말씀도 (일용할) 양식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념 배후에는 하나님 자신이 정확히 살아있는 존재라는 이해[견해]가 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다. (시편 36:10)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전제로 할 때만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비교적 더 후기에 속하는 본문에서 딱 한 번 이렇게 언급한다. “당신의 은혜가 생명보다 더 낫다”(시편 63장, 4절) 은혜로 생명을 능가한다는 발언은 이스라엘인에게 이례적이다. 지금까지 은혜와 생명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은혜는 생명을 뜻한다. 신의 은혜(은총)를 생명의 주인으로서 신을 나누어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허용될 때만, 은총과 생명을 분리하는 것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80쪽

이런 구절들이 있기 때문에, 지복직관을 언급하는 이들이 근거를 가지게 된다. (지복지관이란 천사나 성인이 신을 직접 보는 것을 의미한다. 역주) 또한 [지복직관을 언급하는] 이들은 전적으로 이례적인 사건에 대해 말한다. 심지어 신의 고유한 존재를 (선물로) 받는 것이 신에 의해 보증된다고 말한다. 그래서서 신을 직접 보는[지복직관] 인간의 영혼은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만족할 것”이다. (시편 63장 5절) 


단적으로 살아있는 것으로서 신은 생명의 원천이다. 따라서 신을 지나쳐 버리고, (신을 간과하거나  못본 채 하고 지나간다면,) 생명을 소유할 수 없다. 생명은 신화적인 자립적 척도가 전혀 아니다. 예를 들어 고대 바빌론의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그런 신화적 척도를 찾으려고 시도할 수 있지만, 생명은 그런 척도가 아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조차 (그 자체)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은 생명을 (자의적으로) 처분하지만, 인간에게 생명은 (자의적으로) 처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은 생명을 수여하기도 하고 거두어들이기도 한다. ( 창세기 3장22절, 시편 104장29절; 욥 34장 14절) 신이 인간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었을 때 인간이 생명을 얻을 수 있었듯이, 신은 인간에게 인생lebenszeit도 부여한다. (창세기 6장3절) 인간의 생애는 신의 손 안에 있다. (시편 31장16절, 139장16절) 인간의 생명은 구약성서의 해석에 따르면 선물이다. 따라서 생명은 살아있는 자의 소유물eigentum이 아니다. 


[구약성서의 이런 맥락]을 고려할 때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왜냐하면] (구약성서의 이 맥락이) 최소한 의미하는 바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인) 이웃과, 존재하고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은 인간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유한 특성도, 심지어 자신의 생명도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을 빼앗긴 존재이다.(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존재이다.** :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고유한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있거나, 자신을 빼앗긴 존재라고 볼 수 있다 : 역주)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땅(지구)의 주인으로 지명되었다. (창세기 1장28절)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간학적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은 오직 관계 안에서 살아있을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 


81쪽

즉 인간은 자신을 빼앗긴[자신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신과 항상 이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자신과도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런 논변으로부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인간 존재의 (특성이) 있다. 인간은 <자신 바깥에>, 정확히 신 곁에 있지 않고는 자신 곁에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 자체는 자신 바깥에 있는 존재이다. 설령 이를 전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을 지라도 그러하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25.01.14 20:29:47

끔찍한 자연재해와 야만적인 싸움으로 뒤죽박죽인 요즘

이런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행운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수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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