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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두 기둥, 교회력과 해석학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
예전과 예배
언제부터인가 전통적 예배의 엄숙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국교회에 도입되기 시작한 소위 ‘열린 예배’의 특징은 청중의 참여도를 극대화한다는 데에 있다. 예배 인도자의 평상복 착용과 애드 립, 감각적인 복음찬송가와 전자악기, 율동을 곁들인 성가대의 찬양, 멀티 시청각 도구 등등이 그런 흔적들이다. 주로 청중들의 감수성에 호소함으로써 예배의 영성을 고취하겠다는 그런 시도가 과연 신학적으로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핵심적인 문제를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그들이 극복하려고 한 기존의 전통적 예배가 청중을 소외시켰다면, 새로운 열린 예배는 하나님을 소외시켰다.
예배의 소외 문제는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은 그 심각성을 눈치 채기 어렵다. 특히 청중들의 소외 현상은 어느 정도 드러났지만, 하나님이 소외되는 열린 예배의 문제점은 묻혀 있거나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와전되어 있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영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크게 왜곡되어 있기 때문인데, 다른 건 접어두고 열린 예배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복음찬송에 대해서 한 마디 하자. 복음찬송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 행위보다는 신자들의 주관적인 신앙경험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예배의 주체성에 혼란을 초래한다. 청중들의 은혜가 하나님의 영광을 대체한다는 말이다. 마르바 던의 아래와 같은 지적은 옳다.
슬프게도 많은 ‘현대적’ 예배 인도자들이 ‘참된 찬양’과 ‘기쁜 노래’를 혼동하여 하나님의 속성과 행동을 말하는 대신 개인적인 재미나 위로나 행복을 대상으로 삼는다. 때로는 더 오래 된 찬송가들도 똑같은 실수를 하지만(“저 장미꽃 위에 이슬”과 같은 찬송들), 더 공동체 지향적이고 신학적으로 내용이 더 깊었던 예전의 찬송에서는 이러한 자기중심주의(narcissism)를 찾아보기가 훨씬 힘들었다.(마르바 던, 고귀한 시간 ‘낭비’, 이레서원, 251 쪽)
평자가 인터넷으로 참여한 경동교회의 예배는 청중들의 종교적 나르시시즘에 매몰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청중들의 영성을 왜소화하는 정숙주의에 빠지지도 않았다. 대중추수(大衆追隨)주의가 교회 예배마저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 신학적으로나 영성적으로 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건 다행한 일이다. 경동교회의 예배가 이렇게 중심을 잡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예전(liturgy)에 철저했기 때문이다. 이런 예전적 예배는 열린 예배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새로운 대안적 예배가 아니라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와 영적으로 소통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통적 예배’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예전 예배를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는 분들도 제법 있는 것 같다. 청중들을 예배의 감격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일정한 형식에 의해서 진행되는 예배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 염려를 구체적으로 나누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전 예배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미사처럼 일종의 형식주의나 권위주의로 흐를지 모른다는 것이다. 청중의 영성을 건조하게 만드는 형식주의는 경계해야 하겠지만 예전 예배가 형식주의와 일치한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예배의 주체이신 성령은 자유로운 영이면서 동시에 질서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예전 예배가 자칫 지성주의나 엘리트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염려이다. 물론 엘리트주의는 예배의 영성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높지만, 그리스도교의 예배가 소비자 대중들의 상품 구매욕을 높이기 위한 종교 쇼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행위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런 염려를 일단 옆으로 제쳐놓아야 한다. 평자의 생각에 예전 예배는 청중들의 영성을 부박한 감각의 표층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신비로운 생명의 심층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생명의 영으로 찾아오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예전 예배가 꾸준히 수행된다면 비록 지성적이지 않은 신자라고 하더라도 예배의 영적 깊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교회력과 설교
경동교회의 예배가 예전적이라는 사실에서 예측할 수 있듯이 박종화 목사의(이하 ‘박 목사’) 설교 역시 교회력에 충실하다. 성공회 신부들과 일부 루터교회 목사들을 제외한다면 경동교회의 박 목사가 우리 프로테스탄트 교회 설교자 중에서 가장 철저하게 교회력 중심의 설교를 하는 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반적인 대다수의 목사들은 교회력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절기감사헌금을 드리는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은 떠들썩하게 지키지만 그 이외의 절기는 건성이다. 심지어 대림절마저 못 본 체 하는 설교자들이 비일비재한 실정이니 한국교회에서 교회력이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는지는 불을 보듯 분명하다.
설교가 왜 교회력에 의존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긴 말은 하지 않겠다. 개인 설교자보다 지난 2천년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교회의 역사가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게 그 대답이다. 거꾸로 교회력을 무시한 채 설교자가 원하는 주제에 치우쳐서 설교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영성이 역사적 교회의 영성보다 뛰어나다는 자만심의 발로다. 청중의 영혼 구원에 대한 절박성 때문에 자유로운 주제로 설교한다고 변호하실 분들이 있을 것이다. 영혼구원의 절박성은 나름으로 호소력이 있지만, 그런 생각은 기본적으로 구원의 신비를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 안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평자가 보기에 교회력을 무시하는 설교자들은 대개가 섹트(sect) 기질이 강했다. 그런 열정으로 일정 부분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긴 역사 과정에서는 생명력을 유지하기 힘들다.
얼마 전에 나온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10년 전(1995년)에 비해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약간 줄어서 8백6십2만 명이고, 로마 가톨릭 신자는 75%가 늘어서 5백 1십4만 명이라고 한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는 교회력을 무시하는 스타 설교자들과 거기에 몰려드는 청중들의 열기가 하늘을 찌를듯한데 비해서 가톨릭교회에는 강론으로 이름을 낸 신부가 없고 특별한 대형 성당도 없다. 그런데도 교회 성장에 관해서 지난 10년간의 현상만 놓고 본다면,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과 게임이 안 되었다. 앞으로 이런 추세로 10년이 지난다면 절대적인 숫자에서도 아마 가톨릭교회가 프로테스탄트를 앞지를 것이다. 지금 평자는 교회성장 자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게 아니라, 교회력에 의한 설교와 즉흥적인 설교 사이에 모종의 역학관계가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교회력에 의한 설교를 꾸준하게 밀고나가는 것이 곧 개 교회와 개인 설교자를 초월하시는 성령을 의존하는 태도이며, 그것이 곧 교회와 설교자가 사는 길이라는 말이다.
박 목사는 거의 완벽하게 교회력을 중심으로 설교하는 목사이다. 기본적인 절기는 물론이고, 연초의 주현절이나 9월로부터 거의 세 달에 이르는 창조절까지, 한해의 모든 교회력을 일일이 챙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의 설교가 얼마나 진지하게 교회력 지향적인가를 알 만하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그의 설교가 성서일과에 철저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설교의 내용 또한 교회력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이 박 목사의 설교에 어떻게 드러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이제 그의 설교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평자는 2005년 1월2일 첫 주일 부터 12월 마지막 주일인 성탄절 예배까지 박 목사가 경동교회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설교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 이 자료는 경동교회 홈페이지에서 얻은 것이며, 평자가 설교내용을 인용할 때 표시한 월과 일은 모두 2005년을 가리킨다.
박 목사의 설교는 교회력의 성서일과에 따라서 주어진 구약성서, 서신서, 복음서를 모두 설교 본문으로 삼는다. 아무리 교회력을 따르는 설교자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세 본문을 설교구성의 확실한 근거로 삼는 경우는 드문 법인데, 박 목사는 이런 점에서 매우 철저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구약과 서신서와 복음서를 설교의 주제에 따라서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설교는 자칫 아전인수로 떨어지거나 짜깁기에 불과할 경우가 많은데, 박 목사의 설교에는 그런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구약 전체의 통전성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였다. 설교학 교수들께서는 신대원 설교학 수업 시간에 박 목사를 특별강사로 초청하는 건 어떨는지.
한 대목만 살펴보자. 1월23일 설교 “사마리아의 샘물”은 문둥병을 치료받은 나아만 장군 이야기(열왕기하 5:9-15)와 믿음을 통한 구원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롬 1:16,17), 그리고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 이야기(요 4:7-14)를 본문으로 한다. 박 목사의 설교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아만 장군은 사마리아에 사는 엘리사에게 가서 병을 치료받았다. 그가 요단강에서 몸을 씻고 저주스러운 병에서 놓임을 받을 수 있었다는 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다. 그는 “병을 고쳐 주시는 분은 사마리아 땅에 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 분인 것을 알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80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사마리아 땅에서 이전에 다섯 명의 남편을 두었던 한 여자를 만난다. 절망하고 있던 이 여자는 예수에게서 생명의 물을 얻는다. 놀랍지 않은가? 박 목사는 800년의 시차를 두고 사마리아 땅에서 일어났던 두 역사적 사건을 하나로 묶어내고 있다. 나아만 장군은 요단강 물에서, 이 여자는 예수의 영적인 샘물에서 구원을 얻었다. 이렇듯 그의 설교에는 성서 텍스트에 대한 통시적 관점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박 목사는 로마서 말씀을 이렇게 연결했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 받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라는 사람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여섯 번이 아니라 열 번 시집갔던 사람도, 따돌림을 당했던 사람들도, 아무리 흉악한 죄인도 용서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오면 율법과 이념과 인종과 성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든지 구원을 베푸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설교에서 구약과 서신과 복음서가 “사마리아의 샘물”이라는 주제 안에서 일치를 이루었다. 서로 다른 세 물줄기가 한 군데로 모여 큰물을 이루듯이, 그의 설교에서 세 본문의 고유한 세계가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가다머의 해석학적 개념을 빌려 설명한다면 ‘지평융해’를 일으킴으로써 생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모든 설교는 거의 이런 구조로 진행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예를 들지는 않겠다. 대신 세 본문을 통합적인 시각으로 다룰 수 있는 그 저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살펴보는 게 좋겠다.
성서 텍스트와 해석학
평자의 생각에는 박 목사가 성서 텍스트를 다각적이고 중층적인 시각으로 접근한다는 게 핵심이다. 박 목사는 6월12일 설교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진술한 적이 있다.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 깊이도 생각해보고 행간도 살펴보고 문서도 비판해보고 영적으로 해석도 해 보고 쓰신 분들의 의도도 생각해보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박 목사의 성서 텍스트 읽기는 말씀의 깊이, 행간, 문서비평, 영적 해석, 저자의 집필의도와 연관되어 있다. 물론 이런 요소들은 모든 목사들이 신학교에서 어느 정도 배운 것들이지만 교회 현장에서는 완전히 망각된다. 그 이유는 설교자들이 텍스트 자체보다는 청중을 지나치게 의식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들이 교회성장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됨으로써 성서 텍스트에 대한 관심은 축소되고 오직 청중을 다루는 기술에만 마음을 두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설교자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한다. 성서 텍스트인가, 아니면 청중인가? 그게 그거 아니냐, 청중을 제외한 설교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청중이 은혜 받는 게 곧 설교의 목적이 아니냐,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평자는 그런 주장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설교자는 철저하게 성서 텍스트에만 자신의 운명을 걸어야 한다. 왜 그런가?
성서 텍스트는 초등학생들의 국어교과서처럼 어떤 하나의 표면적인 사실전달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지평에서 해석되어야 할 하나님의 구원론적 언어 사건이다. 그 사건은 이미 완료된 상품이 아니라 늘 새롭게 움직이는 세계이다. 우리가 도구적으로 이용할 수 없고, 종교적으로 소비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세계라는 말이다. 예술작품과 명작들도 이와 비슷한 세계를 갖고 있다. 예컨대 렘브란트의 그림은 렘브란트의 손을 떠난 뒤에 자신의 길을 간다. 그 길은 곧 사건이며, 세계이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저자의 손을 떠난 다음에 자기의 고유한 길을 간다. 톨스토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정신세계가 그 작품에서 새롭게 열린다. 성서 텍스트도 이처럼 전승과 집필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 다음에는 그것이 형성된 역사를 초월하여 자신의 길을 간다. 만약 성서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성서는 은폐되었던 영적인 세계를 드러낼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성서 텍스트의 세계를 해석할 수 없는 사람 앞에서 성서는 침묵한다. 성서가 말을 걸지 않는다는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설교자들은 결국 청중들을 닦달하는 것에 설교의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 성서 텍스트의 침묵과 청중 닦달은 정비례한다.
성서 텍스트의 침묵현상과 해석학의 문제는 설교자들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예를 들어 조금 더 설명해야겠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텍스트를 중심으로 설교한다고 하자. 설교자는 물론이고 웬만큼 교회생활을 한 평신도들은 이 텍스트에서 무슨 설교가 나올는지 예상할 수 있다.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 믿음을 보시고 다른 제물을 준비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답이다. 좀 심한 설교자들은 이 텍스트에 근거해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청중들을 위협하기도 한다. 인간의 실증적인 논리를 뛰어넘는 믿음의 신비를 신자들에게 설명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성서 텍스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준비가 된 설교자라고 한다면 그 텍스트를 새로운 지평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모리아 산 사건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높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인신(人身)제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일지 모른다. 근동의 여러 종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듯이, 생존에 불안을 느낀 아브라함은 어느 한 순간에 야훼 하나님이 인간의 피까지 원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지 모르며, 성서 기자는 그것의 어리석음을 지적했다는 말이다. 지금 평자는 이런 해석의 신학적 정당성 여부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인간 삶과 역사와 존재의 신비를 안고 성서 텍스트를 해석하지 않으면 성서 텍스트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결과적으로 우리의 설교가 죽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박 목사의 설교는 성서 텍스트의 세계를 새롭게 열기 위한 해석학적 관점이 풍부하다. 몇 대목만 간추려보겠다. 위에서 인용했던 설교 “사마리아의 샘물”(1월23일)에서 박 목사는 우리에게 부정한 여자의 대명사로 일컬어진 이 수가성 우물가의 여자를 전혀 새롭게 해석했다. 이전에 다섯 명의 남자와 살았다가 이제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 이 여자는 “바람둥이라서 수많은 남편과 살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유대 땅이나 사마리아 땅에서의 여성은 율법적으로 지위 보장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아내가 싫으면 이혼 증서만 써 주고 얼마든지 내쫓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강제로 이혼당하고 내쫓김을 당한 여성은 먹고 살 길이 없어서 굶거나 죽기가 일쑤였습니다.” 과부인 이 여자가 최소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남의 남자에게 가서 등록되지 않은 첩의 하나로 사는 것이며, 그렇게 살다가 다시 쫓겨나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에 나오는 과부도 다섯 번째 남편한테 갔다가 구박당하고 다시 여섯 번째 남편과 살지만 법적인 남편일 리가 없습니다. 그냥 목에 풀칠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박 목사의 해석에 의하면 이제 이 여자를 향한 기존의 시각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남자를 밝히는 여자가 아니라 생존의 위기에 봉착한 여자일 뿐이다. 이런 새로운 시각이 주어진다면 구원이 누구에게 가장 절실한지에 대한 대답도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처음으로 읽으신 이사야의 예언인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도(눅 4:18) 이에 해당될 것이다.
“밀과 가라지”라는 설교(2월6일)는 예수님의 그 유명한 비유(마 13:24-30)를 주제로 한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솎아내지 않는 이유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헤칠까 염려되기 때문이라는 정형화한 대답을 알고 있다. 우리 주변의 악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 비유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 목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곡식과 가라지의 판단이 마지막 때까지 유보되어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새롭게 해석했다.
이런 예수의 말씀은 역설적입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은 빨리 복음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지만, 유대교인들, 당신들은 율법에 매여서, 율법을 이념화하고, 화석화함으로써 개방성을 잃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당신들이 마지막에는 가라지가 된다. 예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이 설교는 세상을 선악이원론으로 재단하던 기존의 사고방식을 뒤집는다. 종말론적 시각에서 기존의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판단을 뚫고 나감으로써 성서 텍스트의 고유한 영적인 지평을 우리에게 새롭게 열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박 목사의 해석학은 종말론적이라 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진술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인간은 머리로 아는 것과 삶으로 경험한 것을 기준으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판단합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사실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세계는 우리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우리의 자그마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판단할 때에는 엄청난 오류를 범합니다. 하나님은 지식 속에도 있고 우리의 경험 속에도 존재하시지만, 동시에 미지의 세계의 주인이시고 미경험의 세계의 주인이시기도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2월6일)
미래의 시간까지 통치하시는,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미래의 힘으로 오늘의 역사를 규정하시는 야훼 하나님이 곧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다. 종말론은 휴거로 표상되는 초월적 피안에 관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일어난다는 기계적인 역사관을 뛰어넘어 전혀 새롭게 열리는 생명의 세계를 지시하는 가르침이다. 박 목사의 설교에 내재해있는 종말론적 해석학은 그의 대림절 설교에서 정점을 이룬다.
오시는 하나님
박 목사는 2005년 대림절 동안 “오시는 하나님”이라는 오직 한 가지 주제에 매달리고 있었다. 대림절 첫째주일의 설교 “생명의 나팔소리”(11월 27일)에서 그는 아래와 같은 언급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우리는 미래가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너무나 멀리 있는 미래를 향하여 우리가 힘들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미래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고 계신 하나님, 그리고 그 분의 미래. 이제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하고 미래를 담을 그릇을 만들기 위한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림절을 맞이하는 우리가 꼭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은 강원룡 목사님이 설교하셨다. 셋째 주일(12월 11일)의 설교 제목은 “오신 분-오실 분”이었다. 여기서 박 목사는 2천 년 전, 역사 안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와 앞으로 심판주로 오실 재림주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해명하면서, 하나님의 비밀이 미래의 힘에 놓였다는 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조상은 살았다가 없어지고 회상해서 다시 가져올 수 있지만, 하나님은 거꾸로 우리가 가야할 머나먼 미래, 내일의 주인이 이미 과거에 왔고 오늘도 오시게 하십니다. 우리는 역사가 미래를 향하여 사는 능력을 가졌지만, 하나님은 거꾸로 미래가 역사에 오고 과거에 오고 현재에 오고 미래가 오게 하는 역사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넷째주일(12월18일)의 설교 “곧 오신다.”의 본문은 사 52:7-10, 빌 4:4-7, 눅 1:46-55였다. 이 설교는 단지 대림절 절기를 기리는 설교로서만이 아니라 박 목사의 신학과 삶, 그리고 목회 전반을 담고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다. 여기서 박 목사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해방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해서 간략하면서도 소상하게 설명하면서 “곧 오신다.”는 이 예언의 신학적 의미를 정확하게 풀어냈다.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해서 해방을 맞고 예루살렘 성전을 새롭게 수축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지만 고레스가 그들에게 메시아는 아니었다.
세월이 지나서 한참 후에 보니 이사야가 예언했던 놀랍고도 반가운 희소식을 전하는 메시야, 그 분은 곧 온다고 약속을 했는데 고레스 왕이 온 뒤에도 완벽하게 메시야는 못 왔고, 그 뒤 500년이 지난 베들레헴 한 말구유간에 예수란 이름으로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곧 오신다던 메시야의 “곧”이 500년 걸렸습니다.
박 목사에 의하면 메시아가 곧 오신다는 이사야의 예언이 5백년이나 지체된 것처럼 곧 다시 오신다던 예수의 약속도 역시 2천년이나 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곧이 얼마나 걸리면 되겠습니까?” 지금 박 목사는 청중들에게 신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그리고 일상적으로 아주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중이다. 왜 예수의 재림이 지체되는가, 도대체 시간은 무엇인가, 현재 우리 삶과 역사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박 목사에게 종말론적 시간은 넓이가 아니라 깊이이며, 속도가 아니라 느림이며, 소유가 아니라 존재이고, 양이 아니라 질이며, 형식이 아니라 의미이다.
제가 신문에서 성경 66권을 단시일 내에 다 섭렵할 수 있는 속도 읽기라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성경 한 구절이 내 삶을 주장하고, 내가 성경말씀과 대화해서 의미를 찾고 싶은데 66권을 빨리 읽으면 무엇 합니까? 의미도 없이 가볍게 스쳐가는 말씀을 무엇 때문에 읽습니까? 왜 이렇게 빨리 읽어야 합니까? 왜 스쳐지나가야 합니까? 인간의 진지함은 어디 있으며, 그 속에 있는 삶의 의미는 어디 있습니까? 속도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은 삶 속에,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우리 인생 속에 들어 있는 진한 삶의 가치와 의미는 어디론가 가고, 그냥 빨리 빨리 가려는 것입니다. 저는 속도 대신 삶과 시간 속에 주어진 아름다운 창조주의 가락을 따라, 박자를 따라, 리듬을 따라 즐기고 웃고 울며 아름다운 삶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는 여유를 원합니다. 이것이 메시아가 바라는 삶의 여유입니다.
삶의 깊이에서 만날 수 있는 이 하나님의 시간은, 즉 하나님의 오심은 현재적 종말 사건이다. 그래서 박 목사는 성서일과에 제시된 마리아의 찬양을 그의 설교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오시는 하나님의 그 시간은 가난한 자, 눌린 자, 포로로 잡힌 자들이 해방을 맞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는 순간이다. 이런 점에서 성탄은 낭만적인 즐거움에 몰두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오시는 하나님을 현재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도전의 시간이요, 위기의 시간이기도하다.
하나님이 곧 오신다는 의미는 모두에게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심을 반가워할 줄 아는 회개와 자기결단이 없이 왜 메시야가 즐겁습니까? 성탄이 왜 즐겁습니까? 성탄은 무서운 도전입니다. 불의한 사이에 예수님이 오시면 불의를 고친다는데, 불의에 희희낙락하는 사람이 왜 메시야를 좋아합니까.
이제 우리는 박 목사의 종말론적 해석학을 어느 정도 따라잡은 셈이다. 본인이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평자가 보기에 박 목사의 종말론적 해석학은 실존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미래적 종말론, 또는 우주론적 종말론의 지평을 포기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고 마지막 다 뒤집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드실 것을 압니다. 우주의 역사의 종말이 올 것을 압니다. 역사도 끝나고 우주도 끝나는 것을 압니다.”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하나님의 우주론적 심판과 통치가 현실화할 그 종말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설교의 무게는 역시 “마리아를 객관화하지 마십시오. 오늘 내가 마리아입니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의 찬가가 여러분의 노래가 되시기를 바랍니다.”는 결론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여기”의 실존에 놓여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케리그마와 프락시스
박 목사의 설교에 내재하는 종말론적 해석학의 실존론적 특징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독론적 성격이며, 다른 하나는 실천적인 성격이다. 전자는 그의 설교에 케리그마가 매우 명확한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며, 후자는 프락시스가 강조된다는 뜻이다. 이 두 요소가 한 설교자에게서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의 설교자들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다. 그뿐만 아니라 아예 기독론의 신학적 개념조차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설교의 케리그마적 토대가 부실하다. 예수를 믿고 죄 용서 받아 구원받는다는 기초적인 케리그마가 단지 장광설로만 작용할 뿐이지 실제로 설교에서 해석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프락시스의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종교적인 행위와 도덕적인 행위를 거의 목적론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들이 케리그마를 단순히 독단적인 교리로만 선포함으로써 신자들을 교리적 독선에 빠지게 하고, 청교도적 모범을 강요함으로써 도덕주의에 빠지게 하는 이유는 케리그마와 프락시스의 신학적 의미와 그것의 연관성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 목사가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에 펴낸 <평화신학과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주로 민족통일, 인간 존엄성에 근거한 교회의 과제, 교회일치 문제에 관심이 크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강원룡 목사님이 오랫동안 설교한 경동교회의 화려한 역사를 전제한다면 박 목사의 설교에서 케리그마가 중심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평자에게 의외(?)였다. 그는 보수적인 성향의 설교자들보다 훨씬 진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에 설교의 무게를 두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에게 프락시스는 그것 자체로 또 하나의 중심 주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십자가와 부활 신앙에 의한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점에서만 본다면 그의 설교는 근본주의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근본주의는 축자영감설과 성속이원론에 근거한 수구적 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역사와 종말의 변증법적 긴장관계로 해석함으로써 참된 생명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려는 2천년 기독교 역사의 메인 스트림과 연결되는 정통적 신앙을 말한다.
“잃은 것-찾는 것”(6월 5일)이라는 설교는 주로 잃은 양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박 목사에 따르면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인데, 그것은 일상의 자리와 순간인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야 한다. 바로 지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기쁨이 현실화해야 한다.
“생명의 만나”(7월 3일)에서 박 목사는 한 가족이 하루 먹을거리만 거두어들여야지 더 이상을 거두어들였을 경우에 썩고 만다는 성서 텍스트의 보도를 설명하면서 경제정의를 역설했다. 그의 설교에서는 이 만나사건도 역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과 만난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공유하시는 생명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것도, 십자가에 죽는 것도, 부활의 축복도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이 만나를 오늘 받으십시오. 하나님과 공유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베풀어 주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십시오. 생명의 축제. 이것이 오늘 여러분의 성만찬 축제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한 편의 설교만 더 살피자. “오늘 속에 내일을”(11월 6일)은 노아 홍수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박 목사는 앞으로 더 이상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징표인 무지개를 바로 예수의 십자가와 연결시키고 있다.
오늘날의 무지개는 무엇일까요. 힘든 과거를 지난 후에 아름다운 미래를 약속해주는 오늘날의 상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갈보리 언덕에 달린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합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끌어내서 오늘의 삶에 현재화시킵니다. 그리고 십자가 속에 잉태한 부활의 생명, 하늘나라 축복을, 즉 내일을 미리 끌어다가 맛볼 수 있습니다.
박 목사처럼 십자가와 부활을 일관되게 설교의 중심에 두고 있는 설교자는 드물다. 꽤나 보수적인 설교자들도 허울만 십자가와 부활이지 실제로는 그것을 설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축복받고 잘 살기 위한 주문이나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구호 역할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오용과 남용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을 언급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케리그마를 살리는 설교는 결코 아니다. 그 주제가 실제로 설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리얼리티와 그 의미가 해석되어야 하며, 부활의 리얼리티와 그 의미가 종말론적인 지평과 실존적 지평에서 늘 해석되어야 한다. 평자가 보기에 박 목사의 설교에는 이런 기독론적 해석학이 아주 또렷하게 살아있었다. 이런 해석학적인 접근으로 인해서 그의 실천 강조는 단순한 행동주의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구원론의 차원으로 승화한다.
설교의 완성도에 관해서
평자는 지금까지 박 목사의 설교에 교회력과 해석학이 두 기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 교회력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말은 그가 지난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와 소통하고 있다는 뜻이며, 해석학적인 특징을 보인다는 말은 그가 오늘의 세계와 부단히 대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평자는 이런 방식의 설교가 바로 개신교 설교자들이 따라야 할 가장 모범적인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설교의 완성도가 경우에 따라서 느슨해진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1월9일 주현절에 박 목사는 “하나님의 얼굴 빛”이라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예민한 설교를 했다. 한국교회 강단에서 이런 주제의 설교는 경동교회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는 교회력에 따른 세 텍스트를 중심으로 예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빛을 보아야 한다는 점을 설명해나갔다. 예수의 십자가는 고통의 빛이며 부활은 영광의 빛이다. 고통과 영광은 모두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빛이다. 평자는 숨을 죽이고 그의 설교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이큐(IQ)와 이큐(EQ)가 등장했다. 박 목사는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빛을 아는 것은 아이큐로 가능하지만 함께 느끼는 건 이큐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율법에 대해서 비슷한 해석을 내렸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아이큐로만 지켰을 뿐이지 감동을 자아내는 이큐로 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려는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그 지식이 감동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는 진술이 말하듯 그는 이 대목에서 지성과 감동이 결합된 신앙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현대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설명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얼굴 빛”이라는 전체 주제와 별로 상관이 없다. 우회적으로는 연결이 되겠지만 직접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주제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삼위일체론적 신비 안으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야 할 바로 그 순간에 지성과 감정의 결합을 강조했다는 것은 박 목사가 그날의 주제를 나이브하게 대했거나 아니면 작위적으로 대했다는 증거이다. 평자의 생각에 박 목사는 그날 두 편의 설교를 한 셈이다.
“살아있는 기도”(7월31일)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에 대한 예수의 비유(눅 18:9-14)를 본문으로 한다. 박 목사는 기도의 당위성을 매우 호소력 있게 전달했다. 하나님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받지 않은 이유가 그의 기도가 자기 의에 사로잡힌 ‘혼잣말’이었다는 박 목사의 설명은 예리한 통찰이다. 물론 ‘혼잣말’이라는 단어가 본문 비평적으로 얼마나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다. 참고적으로 개역성서나 공동번역에는 그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바리새인이 자기 의에 사로잡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혼잣말에 대한 박 목사의 강조는 크게 문제는 안 될 것이다.
그 뒤로 박 목사는 본문을 정확하게 풀어나갔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업적에 사로잡혔지만, 세리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열었다. 업적보다 인간이 중요하다는 지적은 백번 옳다. 여기에 근거해서 그는 인간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삶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퇴근 후에 공원 앞을 지나면서 잠시 의자에 앉아서 하늘도 보고, 나무도 바라보면서 “나는 누구이며 하나님께서는 누구신지” 찬찬히 생각해보라고 한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하나님께 여유롭게 기도해보십시다. 거대 담론 속의 작고 짧은 여유. 저는 이 시간이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목사는 이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1993년 5월에 체코의 하벨 대통령을 방문했던 일화를 전했다. 하벨은 대통령의 바쁜 업무 중에서도 경호관이나 비서실도 모르게 혼자 나와서 “해변가 또는 강가, 작은 주막집 등에서 시인 친구들과 만나서 술 한 잔을 기울이거나 파이프 담배를 피면서 음악과 미술과 하늘을 논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평자는 박 목사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심전심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자기 의와 자기 업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훨씬 집요하게 풀어내야 할 대목에서 “한 순간의 여유” 운운은 설교의 긴장감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관한 예수의 비유는 기도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세리처럼 회개하라는 가르침이나 하나님과 진정한 마음으로 대화하라는 권면이 아니라 자기 의에 떨어진 사람들의 허위의식에 대한 통렬한 풍자다. 안타깝게도 평자는 그 설교에서 이런 주제가 심화해나가는 영적 동력을 느끼지 못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왜 자신을 심정적으로는 세리와 일치하면서도 실제로는 바리새인처럼 사는지에 대한 문제를 기도의 본질과 더불어서 심층적이고 통합적으로 해명하려는 치열성이 부족해보였다는 말이다. 박 목사의 아래와 같은 결론은 결국 신앙의 일반론으로 떨어진 게 아닐는지.
십자가를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실 때에 그 뒤에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부활과 새 생명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의 대화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정리한다면, 평자는 박 목사에게 설교의 완성도가 간혹 떨어지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별로 밀접한 연관성이 없는 주제가 결합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설교가 앞으로 치고 나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그의 설교에서 벌어졌는지에 관해서 분석할만한 능력이 평자에게는 없다. 단순히 직관적인 느낌으로만 간단히 말한다면, 이것은 교회력에 의해서 주어진 텍스트를 종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에게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세 성서일과를 어떻게 해서라도 한편의 설교에 구겨 넣으려는 의욕을 보이다보면, 한 텍스트의 움직이는 신학적 동선(動線)을 추적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어쩌면 설교의 완성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순전히 평자의 주관적인 관점일지 모르며, 더구나 목회적인 측면을 감안하지 못한 평자의 단견일지 모른다.
끝으로, 이번 설교비평은 평자에게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주었다. 즐거움은 실로 오랜만에 설교다운 설교를 접했다는 데에 있다. 고통이라는 건 어느 한편의 설교도 그냥 흘려버릴 수 없을 정도로 신학적 깊이와 자신의 신앙적 실존을 충실하게 담고 있기 때문에 설교읽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 있다. 한국교회의 강단개혁을 위해서라도 박 목사의 설교가 속히 책으로 묶여 나왔으면 한다. 2005년은 경동교회 창립 60주년이자 박 목사 회갑 되는 해였다고 하니, 양쪽 모두 천생연분인 해방둥이인 셈이다. 예언자적 소임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경동교회와 말씀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박 목사에게 내리는 주님의 은총이 늘 7월의 숲 같기를 기도한다. (기독교사상, 2006년7월호)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
예전과 예배
언제부터인가 전통적 예배의 엄숙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국교회에 도입되기 시작한 소위 ‘열린 예배’의 특징은 청중의 참여도를 극대화한다는 데에 있다. 예배 인도자의 평상복 착용과 애드 립, 감각적인 복음찬송가와 전자악기, 율동을 곁들인 성가대의 찬양, 멀티 시청각 도구 등등이 그런 흔적들이다. 주로 청중들의 감수성에 호소함으로써 예배의 영성을 고취하겠다는 그런 시도가 과연 신학적으로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핵심적인 문제를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그들이 극복하려고 한 기존의 전통적 예배가 청중을 소외시켰다면, 새로운 열린 예배는 하나님을 소외시켰다.
예배의 소외 문제는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은 그 심각성을 눈치 채기 어렵다. 특히 청중들의 소외 현상은 어느 정도 드러났지만, 하나님이 소외되는 열린 예배의 문제점은 묻혀 있거나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와전되어 있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영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크게 왜곡되어 있기 때문인데, 다른 건 접어두고 열린 예배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복음찬송에 대해서 한 마디 하자. 복음찬송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 행위보다는 신자들의 주관적인 신앙경험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예배의 주체성에 혼란을 초래한다. 청중들의 은혜가 하나님의 영광을 대체한다는 말이다. 마르바 던의 아래와 같은 지적은 옳다.
슬프게도 많은 ‘현대적’ 예배 인도자들이 ‘참된 찬양’과 ‘기쁜 노래’를 혼동하여 하나님의 속성과 행동을 말하는 대신 개인적인 재미나 위로나 행복을 대상으로 삼는다. 때로는 더 오래 된 찬송가들도 똑같은 실수를 하지만(“저 장미꽃 위에 이슬”과 같은 찬송들), 더 공동체 지향적이고 신학적으로 내용이 더 깊었던 예전의 찬송에서는 이러한 자기중심주의(narcissism)를 찾아보기가 훨씬 힘들었다.(마르바 던, 고귀한 시간 ‘낭비’, 이레서원, 251 쪽)
평자가 인터넷으로 참여한 경동교회의 예배는 청중들의 종교적 나르시시즘에 매몰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청중들의 영성을 왜소화하는 정숙주의에 빠지지도 않았다. 대중추수(大衆追隨)주의가 교회 예배마저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 신학적으로나 영성적으로 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건 다행한 일이다. 경동교회의 예배가 이렇게 중심을 잡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예전(liturgy)에 철저했기 때문이다. 이런 예전적 예배는 열린 예배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새로운 대안적 예배가 아니라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와 영적으로 소통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통적 예배’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예전 예배를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는 분들도 제법 있는 것 같다. 청중들을 예배의 감격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일정한 형식에 의해서 진행되는 예배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 염려를 구체적으로 나누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전 예배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미사처럼 일종의 형식주의나 권위주의로 흐를지 모른다는 것이다. 청중의 영성을 건조하게 만드는 형식주의는 경계해야 하겠지만 예전 예배가 형식주의와 일치한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예배의 주체이신 성령은 자유로운 영이면서 동시에 질서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예전 예배가 자칫 지성주의나 엘리트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염려이다. 물론 엘리트주의는 예배의 영성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높지만, 그리스도교의 예배가 소비자 대중들의 상품 구매욕을 높이기 위한 종교 쇼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행위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런 염려를 일단 옆으로 제쳐놓아야 한다. 평자의 생각에 예전 예배는 청중들의 영성을 부박한 감각의 표층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신비로운 생명의 심층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생명의 영으로 찾아오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예전 예배가 꾸준히 수행된다면 비록 지성적이지 않은 신자라고 하더라도 예배의 영적 깊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교회력과 설교
경동교회의 예배가 예전적이라는 사실에서 예측할 수 있듯이 박종화 목사의(이하 ‘박 목사’) 설교 역시 교회력에 충실하다. 성공회 신부들과 일부 루터교회 목사들을 제외한다면 경동교회의 박 목사가 우리 프로테스탄트 교회 설교자 중에서 가장 철저하게 교회력 중심의 설교를 하는 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반적인 대다수의 목사들은 교회력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절기감사헌금을 드리는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은 떠들썩하게 지키지만 그 이외의 절기는 건성이다. 심지어 대림절마저 못 본 체 하는 설교자들이 비일비재한 실정이니 한국교회에서 교회력이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는지는 불을 보듯 분명하다.
설교가 왜 교회력에 의존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긴 말은 하지 않겠다. 개인 설교자보다 지난 2천년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교회의 역사가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게 그 대답이다. 거꾸로 교회력을 무시한 채 설교자가 원하는 주제에 치우쳐서 설교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영성이 역사적 교회의 영성보다 뛰어나다는 자만심의 발로다. 청중의 영혼 구원에 대한 절박성 때문에 자유로운 주제로 설교한다고 변호하실 분들이 있을 것이다. 영혼구원의 절박성은 나름으로 호소력이 있지만, 그런 생각은 기본적으로 구원의 신비를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 안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평자가 보기에 교회력을 무시하는 설교자들은 대개가 섹트(sect) 기질이 강했다. 그런 열정으로 일정 부분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긴 역사 과정에서는 생명력을 유지하기 힘들다.
얼마 전에 나온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10년 전(1995년)에 비해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약간 줄어서 8백6십2만 명이고, 로마 가톨릭 신자는 75%가 늘어서 5백 1십4만 명이라고 한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는 교회력을 무시하는 스타 설교자들과 거기에 몰려드는 청중들의 열기가 하늘을 찌를듯한데 비해서 가톨릭교회에는 강론으로 이름을 낸 신부가 없고 특별한 대형 성당도 없다. 그런데도 교회 성장에 관해서 지난 10년간의 현상만 놓고 본다면,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과 게임이 안 되었다. 앞으로 이런 추세로 10년이 지난다면 절대적인 숫자에서도 아마 가톨릭교회가 프로테스탄트를 앞지를 것이다. 지금 평자는 교회성장 자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게 아니라, 교회력에 의한 설교와 즉흥적인 설교 사이에 모종의 역학관계가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교회력에 의한 설교를 꾸준하게 밀고나가는 것이 곧 개 교회와 개인 설교자를 초월하시는 성령을 의존하는 태도이며, 그것이 곧 교회와 설교자가 사는 길이라는 말이다.
박 목사는 거의 완벽하게 교회력을 중심으로 설교하는 목사이다. 기본적인 절기는 물론이고, 연초의 주현절이나 9월로부터 거의 세 달에 이르는 창조절까지, 한해의 모든 교회력을 일일이 챙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의 설교가 얼마나 진지하게 교회력 지향적인가를 알 만하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그의 설교가 성서일과에 철저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설교의 내용 또한 교회력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이 박 목사의 설교에 어떻게 드러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이제 그의 설교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평자는 2005년 1월2일 첫 주일 부터 12월 마지막 주일인 성탄절 예배까지 박 목사가 경동교회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설교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 이 자료는 경동교회 홈페이지에서 얻은 것이며, 평자가 설교내용을 인용할 때 표시한 월과 일은 모두 2005년을 가리킨다.
박 목사의 설교는 교회력의 성서일과에 따라서 주어진 구약성서, 서신서, 복음서를 모두 설교 본문으로 삼는다. 아무리 교회력을 따르는 설교자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세 본문을 설교구성의 확실한 근거로 삼는 경우는 드문 법인데, 박 목사는 이런 점에서 매우 철저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구약과 서신서와 복음서를 설교의 주제에 따라서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설교는 자칫 아전인수로 떨어지거나 짜깁기에 불과할 경우가 많은데, 박 목사의 설교에는 그런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구약 전체의 통전성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였다. 설교학 교수들께서는 신대원 설교학 수업 시간에 박 목사를 특별강사로 초청하는 건 어떨는지.
한 대목만 살펴보자. 1월23일 설교 “사마리아의 샘물”은 문둥병을 치료받은 나아만 장군 이야기(열왕기하 5:9-15)와 믿음을 통한 구원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롬 1:16,17), 그리고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 이야기(요 4:7-14)를 본문으로 한다. 박 목사의 설교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아만 장군은 사마리아에 사는 엘리사에게 가서 병을 치료받았다. 그가 요단강에서 몸을 씻고 저주스러운 병에서 놓임을 받을 수 있었다는 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다. 그는 “병을 고쳐 주시는 분은 사마리아 땅에 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 분인 것을 알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80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사마리아 땅에서 이전에 다섯 명의 남편을 두었던 한 여자를 만난다. 절망하고 있던 이 여자는 예수에게서 생명의 물을 얻는다. 놀랍지 않은가? 박 목사는 800년의 시차를 두고 사마리아 땅에서 일어났던 두 역사적 사건을 하나로 묶어내고 있다. 나아만 장군은 요단강 물에서, 이 여자는 예수의 영적인 샘물에서 구원을 얻었다. 이렇듯 그의 설교에는 성서 텍스트에 대한 통시적 관점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박 목사는 로마서 말씀을 이렇게 연결했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 받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라는 사람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여섯 번이 아니라 열 번 시집갔던 사람도, 따돌림을 당했던 사람들도, 아무리 흉악한 죄인도 용서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오면 율법과 이념과 인종과 성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든지 구원을 베푸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설교에서 구약과 서신과 복음서가 “사마리아의 샘물”이라는 주제 안에서 일치를 이루었다. 서로 다른 세 물줄기가 한 군데로 모여 큰물을 이루듯이, 그의 설교에서 세 본문의 고유한 세계가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가다머의 해석학적 개념을 빌려 설명한다면 ‘지평융해’를 일으킴으로써 생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모든 설교는 거의 이런 구조로 진행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예를 들지는 않겠다. 대신 세 본문을 통합적인 시각으로 다룰 수 있는 그 저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살펴보는 게 좋겠다.
성서 텍스트와 해석학
평자의 생각에는 박 목사가 성서 텍스트를 다각적이고 중층적인 시각으로 접근한다는 게 핵심이다. 박 목사는 6월12일 설교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진술한 적이 있다.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 깊이도 생각해보고 행간도 살펴보고 문서도 비판해보고 영적으로 해석도 해 보고 쓰신 분들의 의도도 생각해보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박 목사의 성서 텍스트 읽기는 말씀의 깊이, 행간, 문서비평, 영적 해석, 저자의 집필의도와 연관되어 있다. 물론 이런 요소들은 모든 목사들이 신학교에서 어느 정도 배운 것들이지만 교회 현장에서는 완전히 망각된다. 그 이유는 설교자들이 텍스트 자체보다는 청중을 지나치게 의식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들이 교회성장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됨으로써 성서 텍스트에 대한 관심은 축소되고 오직 청중을 다루는 기술에만 마음을 두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설교자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한다. 성서 텍스트인가, 아니면 청중인가? 그게 그거 아니냐, 청중을 제외한 설교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청중이 은혜 받는 게 곧 설교의 목적이 아니냐,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평자는 그런 주장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설교자는 철저하게 성서 텍스트에만 자신의 운명을 걸어야 한다. 왜 그런가?
성서 텍스트는 초등학생들의 국어교과서처럼 어떤 하나의 표면적인 사실전달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지평에서 해석되어야 할 하나님의 구원론적 언어 사건이다. 그 사건은 이미 완료된 상품이 아니라 늘 새롭게 움직이는 세계이다. 우리가 도구적으로 이용할 수 없고, 종교적으로 소비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세계라는 말이다. 예술작품과 명작들도 이와 비슷한 세계를 갖고 있다. 예컨대 렘브란트의 그림은 렘브란트의 손을 떠난 뒤에 자신의 길을 간다. 그 길은 곧 사건이며, 세계이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저자의 손을 떠난 다음에 자기의 고유한 길을 간다. 톨스토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정신세계가 그 작품에서 새롭게 열린다. 성서 텍스트도 이처럼 전승과 집필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 다음에는 그것이 형성된 역사를 초월하여 자신의 길을 간다. 만약 성서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성서는 은폐되었던 영적인 세계를 드러낼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성서 텍스트의 세계를 해석할 수 없는 사람 앞에서 성서는 침묵한다. 성서가 말을 걸지 않는다는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설교자들은 결국 청중들을 닦달하는 것에 설교의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 성서 텍스트의 침묵과 청중 닦달은 정비례한다.
성서 텍스트의 침묵현상과 해석학의 문제는 설교자들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예를 들어 조금 더 설명해야겠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텍스트를 중심으로 설교한다고 하자. 설교자는 물론이고 웬만큼 교회생활을 한 평신도들은 이 텍스트에서 무슨 설교가 나올는지 예상할 수 있다.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 믿음을 보시고 다른 제물을 준비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답이다. 좀 심한 설교자들은 이 텍스트에 근거해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청중들을 위협하기도 한다. 인간의 실증적인 논리를 뛰어넘는 믿음의 신비를 신자들에게 설명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성서 텍스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준비가 된 설교자라고 한다면 그 텍스트를 새로운 지평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모리아 산 사건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높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인신(人身)제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일지 모른다. 근동의 여러 종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듯이, 생존에 불안을 느낀 아브라함은 어느 한 순간에 야훼 하나님이 인간의 피까지 원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지 모르며, 성서 기자는 그것의 어리석음을 지적했다는 말이다. 지금 평자는 이런 해석의 신학적 정당성 여부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인간 삶과 역사와 존재의 신비를 안고 성서 텍스트를 해석하지 않으면 성서 텍스트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결과적으로 우리의 설교가 죽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박 목사의 설교는 성서 텍스트의 세계를 새롭게 열기 위한 해석학적 관점이 풍부하다. 몇 대목만 간추려보겠다. 위에서 인용했던 설교 “사마리아의 샘물”(1월23일)에서 박 목사는 우리에게 부정한 여자의 대명사로 일컬어진 이 수가성 우물가의 여자를 전혀 새롭게 해석했다. 이전에 다섯 명의 남자와 살았다가 이제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 이 여자는 “바람둥이라서 수많은 남편과 살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유대 땅이나 사마리아 땅에서의 여성은 율법적으로 지위 보장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아내가 싫으면 이혼 증서만 써 주고 얼마든지 내쫓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강제로 이혼당하고 내쫓김을 당한 여성은 먹고 살 길이 없어서 굶거나 죽기가 일쑤였습니다.” 과부인 이 여자가 최소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남의 남자에게 가서 등록되지 않은 첩의 하나로 사는 것이며, 그렇게 살다가 다시 쫓겨나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에 나오는 과부도 다섯 번째 남편한테 갔다가 구박당하고 다시 여섯 번째 남편과 살지만 법적인 남편일 리가 없습니다. 그냥 목에 풀칠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박 목사의 해석에 의하면 이제 이 여자를 향한 기존의 시각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남자를 밝히는 여자가 아니라 생존의 위기에 봉착한 여자일 뿐이다. 이런 새로운 시각이 주어진다면 구원이 누구에게 가장 절실한지에 대한 대답도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처음으로 읽으신 이사야의 예언인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도(눅 4:18) 이에 해당될 것이다.
“밀과 가라지”라는 설교(2월6일)는 예수님의 그 유명한 비유(마 13:24-30)를 주제로 한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솎아내지 않는 이유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헤칠까 염려되기 때문이라는 정형화한 대답을 알고 있다. 우리 주변의 악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 비유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 목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곡식과 가라지의 판단이 마지막 때까지 유보되어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새롭게 해석했다.
이런 예수의 말씀은 역설적입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은 빨리 복음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지만, 유대교인들, 당신들은 율법에 매여서, 율법을 이념화하고, 화석화함으로써 개방성을 잃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당신들이 마지막에는 가라지가 된다. 예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이 설교는 세상을 선악이원론으로 재단하던 기존의 사고방식을 뒤집는다. 종말론적 시각에서 기존의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판단을 뚫고 나감으로써 성서 텍스트의 고유한 영적인 지평을 우리에게 새롭게 열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박 목사의 해석학은 종말론적이라 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진술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인간은 머리로 아는 것과 삶으로 경험한 것을 기준으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판단합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사실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세계는 우리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우리의 자그마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판단할 때에는 엄청난 오류를 범합니다. 하나님은 지식 속에도 있고 우리의 경험 속에도 존재하시지만, 동시에 미지의 세계의 주인이시고 미경험의 세계의 주인이시기도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2월6일)
미래의 시간까지 통치하시는,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미래의 힘으로 오늘의 역사를 규정하시는 야훼 하나님이 곧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다. 종말론은 휴거로 표상되는 초월적 피안에 관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일어난다는 기계적인 역사관을 뛰어넘어 전혀 새롭게 열리는 생명의 세계를 지시하는 가르침이다. 박 목사의 설교에 내재해있는 종말론적 해석학은 그의 대림절 설교에서 정점을 이룬다.
오시는 하나님
박 목사는 2005년 대림절 동안 “오시는 하나님”이라는 오직 한 가지 주제에 매달리고 있었다. 대림절 첫째주일의 설교 “생명의 나팔소리”(11월 27일)에서 그는 아래와 같은 언급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우리는 미래가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너무나 멀리 있는 미래를 향하여 우리가 힘들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미래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고 계신 하나님, 그리고 그 분의 미래. 이제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하고 미래를 담을 그릇을 만들기 위한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림절을 맞이하는 우리가 꼭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은 강원룡 목사님이 설교하셨다. 셋째 주일(12월 11일)의 설교 제목은 “오신 분-오실 분”이었다. 여기서 박 목사는 2천 년 전, 역사 안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와 앞으로 심판주로 오실 재림주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해명하면서, 하나님의 비밀이 미래의 힘에 놓였다는 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조상은 살았다가 없어지고 회상해서 다시 가져올 수 있지만, 하나님은 거꾸로 우리가 가야할 머나먼 미래, 내일의 주인이 이미 과거에 왔고 오늘도 오시게 하십니다. 우리는 역사가 미래를 향하여 사는 능력을 가졌지만, 하나님은 거꾸로 미래가 역사에 오고 과거에 오고 현재에 오고 미래가 오게 하는 역사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넷째주일(12월18일)의 설교 “곧 오신다.”의 본문은 사 52:7-10, 빌 4:4-7, 눅 1:46-55였다. 이 설교는 단지 대림절 절기를 기리는 설교로서만이 아니라 박 목사의 신학과 삶, 그리고 목회 전반을 담고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다. 여기서 박 목사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해방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해서 간략하면서도 소상하게 설명하면서 “곧 오신다.”는 이 예언의 신학적 의미를 정확하게 풀어냈다.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해서 해방을 맞고 예루살렘 성전을 새롭게 수축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지만 고레스가 그들에게 메시아는 아니었다.
세월이 지나서 한참 후에 보니 이사야가 예언했던 놀랍고도 반가운 희소식을 전하는 메시야, 그 분은 곧 온다고 약속을 했는데 고레스 왕이 온 뒤에도 완벽하게 메시야는 못 왔고, 그 뒤 500년이 지난 베들레헴 한 말구유간에 예수란 이름으로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곧 오신다던 메시야의 “곧”이 500년 걸렸습니다.
박 목사에 의하면 메시아가 곧 오신다는 이사야의 예언이 5백년이나 지체된 것처럼 곧 다시 오신다던 예수의 약속도 역시 2천년이나 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곧이 얼마나 걸리면 되겠습니까?” 지금 박 목사는 청중들에게 신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그리고 일상적으로 아주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중이다. 왜 예수의 재림이 지체되는가, 도대체 시간은 무엇인가, 현재 우리 삶과 역사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박 목사에게 종말론적 시간은 넓이가 아니라 깊이이며, 속도가 아니라 느림이며, 소유가 아니라 존재이고, 양이 아니라 질이며, 형식이 아니라 의미이다.
제가 신문에서 성경 66권을 단시일 내에 다 섭렵할 수 있는 속도 읽기라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성경 한 구절이 내 삶을 주장하고, 내가 성경말씀과 대화해서 의미를 찾고 싶은데 66권을 빨리 읽으면 무엇 합니까? 의미도 없이 가볍게 스쳐가는 말씀을 무엇 때문에 읽습니까? 왜 이렇게 빨리 읽어야 합니까? 왜 스쳐지나가야 합니까? 인간의 진지함은 어디 있으며, 그 속에 있는 삶의 의미는 어디 있습니까? 속도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은 삶 속에,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우리 인생 속에 들어 있는 진한 삶의 가치와 의미는 어디론가 가고, 그냥 빨리 빨리 가려는 것입니다. 저는 속도 대신 삶과 시간 속에 주어진 아름다운 창조주의 가락을 따라, 박자를 따라, 리듬을 따라 즐기고 웃고 울며 아름다운 삶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는 여유를 원합니다. 이것이 메시아가 바라는 삶의 여유입니다.
삶의 깊이에서 만날 수 있는 이 하나님의 시간은, 즉 하나님의 오심은 현재적 종말 사건이다. 그래서 박 목사는 성서일과에 제시된 마리아의 찬양을 그의 설교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오시는 하나님의 그 시간은 가난한 자, 눌린 자, 포로로 잡힌 자들이 해방을 맞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는 순간이다. 이런 점에서 성탄은 낭만적인 즐거움에 몰두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오시는 하나님을 현재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도전의 시간이요, 위기의 시간이기도하다.
하나님이 곧 오신다는 의미는 모두에게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심을 반가워할 줄 아는 회개와 자기결단이 없이 왜 메시야가 즐겁습니까? 성탄이 왜 즐겁습니까? 성탄은 무서운 도전입니다. 불의한 사이에 예수님이 오시면 불의를 고친다는데, 불의에 희희낙락하는 사람이 왜 메시야를 좋아합니까.
이제 우리는 박 목사의 종말론적 해석학을 어느 정도 따라잡은 셈이다. 본인이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평자가 보기에 박 목사의 종말론적 해석학은 실존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미래적 종말론, 또는 우주론적 종말론의 지평을 포기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고 마지막 다 뒤집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드실 것을 압니다. 우주의 역사의 종말이 올 것을 압니다. 역사도 끝나고 우주도 끝나는 것을 압니다.”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하나님의 우주론적 심판과 통치가 현실화할 그 종말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설교의 무게는 역시 “마리아를 객관화하지 마십시오. 오늘 내가 마리아입니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의 찬가가 여러분의 노래가 되시기를 바랍니다.”는 결론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여기”의 실존에 놓여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케리그마와 프락시스
박 목사의 설교에 내재하는 종말론적 해석학의 실존론적 특징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독론적 성격이며, 다른 하나는 실천적인 성격이다. 전자는 그의 설교에 케리그마가 매우 명확한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며, 후자는 프락시스가 강조된다는 뜻이다. 이 두 요소가 한 설교자에게서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의 설교자들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다. 그뿐만 아니라 아예 기독론의 신학적 개념조차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설교의 케리그마적 토대가 부실하다. 예수를 믿고 죄 용서 받아 구원받는다는 기초적인 케리그마가 단지 장광설로만 작용할 뿐이지 실제로 설교에서 해석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프락시스의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종교적인 행위와 도덕적인 행위를 거의 목적론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들이 케리그마를 단순히 독단적인 교리로만 선포함으로써 신자들을 교리적 독선에 빠지게 하고, 청교도적 모범을 강요함으로써 도덕주의에 빠지게 하는 이유는 케리그마와 프락시스의 신학적 의미와 그것의 연관성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 목사가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에 펴낸 <평화신학과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주로 민족통일, 인간 존엄성에 근거한 교회의 과제, 교회일치 문제에 관심이 크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강원룡 목사님이 오랫동안 설교한 경동교회의 화려한 역사를 전제한다면 박 목사의 설교에서 케리그마가 중심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평자에게 의외(?)였다. 그는 보수적인 성향의 설교자들보다 훨씬 진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에 설교의 무게를 두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에게 프락시스는 그것 자체로 또 하나의 중심 주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십자가와 부활 신앙에 의한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점에서만 본다면 그의 설교는 근본주의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근본주의는 축자영감설과 성속이원론에 근거한 수구적 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역사와 종말의 변증법적 긴장관계로 해석함으로써 참된 생명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려는 2천년 기독교 역사의 메인 스트림과 연결되는 정통적 신앙을 말한다.
“잃은 것-찾는 것”(6월 5일)이라는 설교는 주로 잃은 양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박 목사에 따르면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인데, 그것은 일상의 자리와 순간인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야 한다. 바로 지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기쁨이 현실화해야 한다.
“생명의 만나”(7월 3일)에서 박 목사는 한 가족이 하루 먹을거리만 거두어들여야지 더 이상을 거두어들였을 경우에 썩고 만다는 성서 텍스트의 보도를 설명하면서 경제정의를 역설했다. 그의 설교에서는 이 만나사건도 역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과 만난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공유하시는 생명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것도, 십자가에 죽는 것도, 부활의 축복도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이 만나를 오늘 받으십시오. 하나님과 공유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베풀어 주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십시오. 생명의 축제. 이것이 오늘 여러분의 성만찬 축제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한 편의 설교만 더 살피자. “오늘 속에 내일을”(11월 6일)은 노아 홍수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박 목사는 앞으로 더 이상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징표인 무지개를 바로 예수의 십자가와 연결시키고 있다.
오늘날의 무지개는 무엇일까요. 힘든 과거를 지난 후에 아름다운 미래를 약속해주는 오늘날의 상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갈보리 언덕에 달린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합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끌어내서 오늘의 삶에 현재화시킵니다. 그리고 십자가 속에 잉태한 부활의 생명, 하늘나라 축복을, 즉 내일을 미리 끌어다가 맛볼 수 있습니다.
박 목사처럼 십자가와 부활을 일관되게 설교의 중심에 두고 있는 설교자는 드물다. 꽤나 보수적인 설교자들도 허울만 십자가와 부활이지 실제로는 그것을 설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축복받고 잘 살기 위한 주문이나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구호 역할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오용과 남용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을 언급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케리그마를 살리는 설교는 결코 아니다. 그 주제가 실제로 설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리얼리티와 그 의미가 해석되어야 하며, 부활의 리얼리티와 그 의미가 종말론적인 지평과 실존적 지평에서 늘 해석되어야 한다. 평자가 보기에 박 목사의 설교에는 이런 기독론적 해석학이 아주 또렷하게 살아있었다. 이런 해석학적인 접근으로 인해서 그의 실천 강조는 단순한 행동주의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구원론의 차원으로 승화한다.
설교의 완성도에 관해서
평자는 지금까지 박 목사의 설교에 교회력과 해석학이 두 기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 교회력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말은 그가 지난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와 소통하고 있다는 뜻이며, 해석학적인 특징을 보인다는 말은 그가 오늘의 세계와 부단히 대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평자는 이런 방식의 설교가 바로 개신교 설교자들이 따라야 할 가장 모범적인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설교의 완성도가 경우에 따라서 느슨해진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1월9일 주현절에 박 목사는 “하나님의 얼굴 빛”이라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예민한 설교를 했다. 한국교회 강단에서 이런 주제의 설교는 경동교회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는 교회력에 따른 세 텍스트를 중심으로 예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빛을 보아야 한다는 점을 설명해나갔다. 예수의 십자가는 고통의 빛이며 부활은 영광의 빛이다. 고통과 영광은 모두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빛이다. 평자는 숨을 죽이고 그의 설교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이큐(IQ)와 이큐(EQ)가 등장했다. 박 목사는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빛을 아는 것은 아이큐로 가능하지만 함께 느끼는 건 이큐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율법에 대해서 비슷한 해석을 내렸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아이큐로만 지켰을 뿐이지 감동을 자아내는 이큐로 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려는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그 지식이 감동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는 진술이 말하듯 그는 이 대목에서 지성과 감동이 결합된 신앙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현대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설명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얼굴 빛”이라는 전체 주제와 별로 상관이 없다. 우회적으로는 연결이 되겠지만 직접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주제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삼위일체론적 신비 안으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야 할 바로 그 순간에 지성과 감정의 결합을 강조했다는 것은 박 목사가 그날의 주제를 나이브하게 대했거나 아니면 작위적으로 대했다는 증거이다. 평자의 생각에 박 목사는 그날 두 편의 설교를 한 셈이다.
“살아있는 기도”(7월31일)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에 대한 예수의 비유(눅 18:9-14)를 본문으로 한다. 박 목사는 기도의 당위성을 매우 호소력 있게 전달했다. 하나님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받지 않은 이유가 그의 기도가 자기 의에 사로잡힌 ‘혼잣말’이었다는 박 목사의 설명은 예리한 통찰이다. 물론 ‘혼잣말’이라는 단어가 본문 비평적으로 얼마나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다. 참고적으로 개역성서나 공동번역에는 그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바리새인이 자기 의에 사로잡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혼잣말에 대한 박 목사의 강조는 크게 문제는 안 될 것이다.
그 뒤로 박 목사는 본문을 정확하게 풀어나갔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업적에 사로잡혔지만, 세리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열었다. 업적보다 인간이 중요하다는 지적은 백번 옳다. 여기에 근거해서 그는 인간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삶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퇴근 후에 공원 앞을 지나면서 잠시 의자에 앉아서 하늘도 보고, 나무도 바라보면서 “나는 누구이며 하나님께서는 누구신지” 찬찬히 생각해보라고 한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하나님께 여유롭게 기도해보십시다. 거대 담론 속의 작고 짧은 여유. 저는 이 시간이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목사는 이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1993년 5월에 체코의 하벨 대통령을 방문했던 일화를 전했다. 하벨은 대통령의 바쁜 업무 중에서도 경호관이나 비서실도 모르게 혼자 나와서 “해변가 또는 강가, 작은 주막집 등에서 시인 친구들과 만나서 술 한 잔을 기울이거나 파이프 담배를 피면서 음악과 미술과 하늘을 논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평자는 박 목사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심전심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자기 의와 자기 업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훨씬 집요하게 풀어내야 할 대목에서 “한 순간의 여유” 운운은 설교의 긴장감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관한 예수의 비유는 기도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세리처럼 회개하라는 가르침이나 하나님과 진정한 마음으로 대화하라는 권면이 아니라 자기 의에 떨어진 사람들의 허위의식에 대한 통렬한 풍자다. 안타깝게도 평자는 그 설교에서 이런 주제가 심화해나가는 영적 동력을 느끼지 못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왜 자신을 심정적으로는 세리와 일치하면서도 실제로는 바리새인처럼 사는지에 대한 문제를 기도의 본질과 더불어서 심층적이고 통합적으로 해명하려는 치열성이 부족해보였다는 말이다. 박 목사의 아래와 같은 결론은 결국 신앙의 일반론으로 떨어진 게 아닐는지.
십자가를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실 때에 그 뒤에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부활과 새 생명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의 대화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정리한다면, 평자는 박 목사에게 설교의 완성도가 간혹 떨어지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별로 밀접한 연관성이 없는 주제가 결합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설교가 앞으로 치고 나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그의 설교에서 벌어졌는지에 관해서 분석할만한 능력이 평자에게는 없다. 단순히 직관적인 느낌으로만 간단히 말한다면, 이것은 교회력에 의해서 주어진 텍스트를 종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에게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세 성서일과를 어떻게 해서라도 한편의 설교에 구겨 넣으려는 의욕을 보이다보면, 한 텍스트의 움직이는 신학적 동선(動線)을 추적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어쩌면 설교의 완성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순전히 평자의 주관적인 관점일지 모르며, 더구나 목회적인 측면을 감안하지 못한 평자의 단견일지 모른다.
끝으로, 이번 설교비평은 평자에게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주었다. 즐거움은 실로 오랜만에 설교다운 설교를 접했다는 데에 있다. 고통이라는 건 어느 한편의 설교도 그냥 흘려버릴 수 없을 정도로 신학적 깊이와 자신의 신앙적 실존을 충실하게 담고 있기 때문에 설교읽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 있다. 한국교회의 강단개혁을 위해서라도 박 목사의 설교가 속히 책으로 묶여 나왔으면 한다. 2005년은 경동교회 창립 60주년이자 박 목사 회갑 되는 해였다고 하니, 양쪽 모두 천생연분인 해방둥이인 셈이다. 예언자적 소임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경동교회와 말씀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박 목사에게 내리는 주님의 은총이 늘 7월의 숲 같기를 기도한다. (기독교사상, 2006년7월호)
2006.06.28 12:45:08
개신교에서 초대교회의 전통인 교회력을 소홀하게 여긴다는 것에 동감합니다.대림절이 있다는 것도 성공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에요..
2006.06.28 16:06:41
목사님, 감사합니다. 바르지 못한 설교를 통해서도 얻는 것이 많았지만, 모범적인 설교를 이렇게 평가를 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절대로 사깃군이나 거짓말장이는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지만, 좋은 설교자가 될 자신이 없었는데, 좋은 모범을 알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목사님의 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가까와 지기를!
목사님의 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가까와 지기를!
2006.06.29 16:26:29
오늘은 너무 감동 적 이였습니다.
찬찬히 읽어가면서 느껴지는 감동에 여운은
암담한 교계 현실에 한줄기 빛과 같이 답답하고 우울했던
내 가슴속 어두움에, 희망에 빛으로 이여지 는 뭉클한 시간 이였습니다.
이 글을 쓰시기까지 그토록 심혈을 기울려 주님의 생명과 연관 시키려는
목사님 의 노고에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같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꼭 알아야 할 예배 형식에 대하여 너무 무식하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설령 한두 사람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담임목사의
한계를 넘을 수 없는 것이 교회 조직이 현실이고 보면 그저 답답합니다.
설교의 두 기둥, 교회력과 해석학
란 주제로 저 같은 사람도 납득이 갈수 있도록 쉽게 글을 써주셔서
더 더욱 감사를 드리고요,
이와 같이 모두가 색 여야 하고 알아야 할 귀중 한 성서 텍스트와 해석의 흐름을
이해 할 수 있도록 일 께 워 주시니 말입니다.
예전과 예배
교회력과 설교
성서 텍스트와 해석학
오시는 하나님
케리그마와 프락시스
설교의 완성도에 관하여 등
나누워 찬찬히 깊이로 인도하시고
끝으로, 이번 설교비평은 평자에게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주었다.
즐거움은 실로 오랜만에 설교다운 설교를 접했다는 데에 있다.
고통이라는 건 어느 한편의 설교도 그냥 흘려버릴 수 없을 정도로 신학적 깊이와
자신의 신앙적 실존을 충실하게 담고 있기 때문에 설교읽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 있다. 한국교회의 강단개혁을 위해서라도 박 목사의 설교가
속히 책으로 묶여 나왔으면 한다.
한마디로 은혜 받았습니다.
이 글은 복사해 서 많은 지인들에게 돌려 함께 한국교회 강단 개혁을 위해 미력이나마
참여 하겠습니다.
목사님 가는 길에 항상 주님이 동행하시길 기원 하겠습니다.
무더운 여름철 몸 건강하십시요
찬찬히 읽어가면서 느껴지는 감동에 여운은
암담한 교계 현실에 한줄기 빛과 같이 답답하고 우울했던
내 가슴속 어두움에, 희망에 빛으로 이여지 는 뭉클한 시간 이였습니다.
이 글을 쓰시기까지 그토록 심혈을 기울려 주님의 생명과 연관 시키려는
목사님 의 노고에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같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꼭 알아야 할 예배 형식에 대하여 너무 무식하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설령 한두 사람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담임목사의
한계를 넘을 수 없는 것이 교회 조직이 현실이고 보면 그저 답답합니다.
설교의 두 기둥, 교회력과 해석학
란 주제로 저 같은 사람도 납득이 갈수 있도록 쉽게 글을 써주셔서
더 더욱 감사를 드리고요,
이와 같이 모두가 색 여야 하고 알아야 할 귀중 한 성서 텍스트와 해석의 흐름을
이해 할 수 있도록 일 께 워 주시니 말입니다.
예전과 예배
교회력과 설교
성서 텍스트와 해석학
오시는 하나님
케리그마와 프락시스
설교의 완성도에 관하여 등
나누워 찬찬히 깊이로 인도하시고
끝으로, 이번 설교비평은 평자에게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주었다.
즐거움은 실로 오랜만에 설교다운 설교를 접했다는 데에 있다.
고통이라는 건 어느 한편의 설교도 그냥 흘려버릴 수 없을 정도로 신학적 깊이와
자신의 신앙적 실존을 충실하게 담고 있기 때문에 설교읽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 있다. 한국교회의 강단개혁을 위해서라도 박 목사의 설교가
속히 책으로 묶여 나왔으면 한다.
한마디로 은혜 받았습니다.
이 글은 복사해 서 많은 지인들에게 돌려 함께 한국교회 강단 개혁을 위해 미력이나마
참여 하겠습니다.
목사님 가는 길에 항상 주님이 동행하시길 기원 하겠습니다.
무더운 여름철 몸 건강하십시요
2006.06.29 20:38:03
정 목사님 이번에도 큰 일을하셨군요. 목사님의 직접적인 언급처럼 이번 설교비평에서 그 내밀한 즐거움과 고통이 전달됩니다. 감사하구 또 뛰어난 비평에 애쓰셨습니다. 한국교회 아니 기독교의 본질을 엿볼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렇잖아도 경동교회를 인터넷으로 들락거리면서 오랫만에 해석의 통찰이 엿보이는 설교다 싶어 설교비평으로 다루어 주셨으면 했는데 때마침 다루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이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텍스트와 역사 안에 서 있는 설교자로서의 긴장감을 배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이번 여름 방학내내 찬찬히 들여다 볼 생각입니다. 중국어문장이라 어려움이 더하겠지만 외대의 이기상 교수의 도움도 좀 받으면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정목사님의 이번 비평이 저로 하여금 성서 해석자로서 신발끈을 동여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 그리고 대중추수의 추수가 秋收로도 해석될수 있나요 ,아니면 원래대로 쓰신 追隨라면 대중추종주의라 볼수 있을것 같은데요?
2006.06.29 23:53:39
민들래 님,
제 글을 통해서 예배, 설교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가깝게 경험하신 것 같아서
저도 기쁩니다.
아마 기본적으로 저의 글을 좋게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에
더 크게 느끼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민들래 님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으셨는데도
기본적으로 신학적인 글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으신 걸 보니
기본적으로 진리에 대해서 열려계신 것 같습니다.
월간지 <기독교 사상>을 한번 구독해보시면 어떨까요.
읽을거리를 많이 발견하실 것 같습니다.
용기를 주는 콤멘트 감사드립니다.
제 글을 통해서 예배, 설교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가깝게 경험하신 것 같아서
저도 기쁩니다.
아마 기본적으로 저의 글을 좋게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에
더 크게 느끼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민들래 님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으셨는데도
기본적으로 신학적인 글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으신 걸 보니
기본적으로 진리에 대해서 열려계신 것 같습니다.
월간지 <기독교 사상>을 한번 구독해보시면 어떨까요.
읽을거리를 많이 발견하실 것 같습니다.
용기를 주는 콤멘트 감사드립니다.
2006.06.29 23:58:00
이동주 님,
한국 인문학에서 대중추수주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중추종주의는 조금 어색하지요.
중국어로는 그게 더 맞는지도 모르지만요.
포퓰리즘은 대중秋收가 아니라 대중追隨주의입니다.
더 정확한 건 다시 확인해보아야겠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으시겠다구요?
멋지군요.
저도 시간만 되면 책을 더 읽고 싶은데,
요즘 여유가 없이 지냅니다.
주의 은총이.
한국 인문학에서 대중추수주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중추종주의는 조금 어색하지요.
중국어로는 그게 더 맞는지도 모르지만요.
포퓰리즘은 대중秋收가 아니라 대중追隨주의입니다.
더 정확한 건 다시 확인해보아야겠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으시겠다구요?
멋지군요.
저도 시간만 되면 책을 더 읽고 싶은데,
요즘 여유가 없이 지냅니다.
주의 은총이.
2006.06.30 00:00:24
김성용 님,
해석학에 관한 책과 교수를 소개해달라고 했지요?
다비아 온라인 강의실에 <기독교 해석학>을 찾아가면
강의 안내에 잘 나와있습니다.
신학대학교에서 해석학이 개설되어 있는 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해석학에 관한 책과 교수를 소개해달라고 했지요?
다비아 온라인 강의실에 <기독교 해석학>을 찾아가면
강의 안내에 잘 나와있습니다.
신학대학교에서 해석학이 개설되어 있는 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2006.07.03 22:14:44
비평의 날카로운 칼날이 왜 이리도 무디어 졌는가?
경동교회 박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한 정목사님의 글은 매우 실망 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이 에큐메니컬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까지 많은 날카로운 비평의 칼날은 찾아볼길이 없습니다.(본인은 에큐메니컬 운동을 열열히 반대 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진리와 비진리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사랑과 통합이라는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단어들로 비진리를 진리로 구원받을 수 없는 신앙의 길을 참 신앙의 길로 포장할 수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력 과 설교]
정 목사님은 교회력애 따르는 설교의 중요성을 본 단락에서 주장하고 있으며 그 근거로 2천년의 교회 역사의 우월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잘 살펴보고 알고 있는 분이라면 2천년의 교회 역사의 우월성은 그 근거가 되지 못함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 생각 합니다.(교회력의 중요성 여부가 아니라 2천년의 교회 역사가 근 근거가 되는가 ? 하는 질문이다)
사도 요한은 AD 100년경 주님께서 친히 보여준 환상을 통하여 교회의 실상을 보고 일곱교회중 5교회가 이미
구원의 도상에서 버림받을 것을 경고의 편지로 기록하고 있음을 보아 우리는 교회의 세속화가 얼마나 많이 진행 되었는 가를 보여 주고 있으며 , 그 이전 부터 이미 교회내에서 복음이 변질되고 있음을 우리는 서신서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이후의 2000년 교회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에 끼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음을 교수님도 잘 아시리라 생각 합니다.
[교회력은 복음 이다]
사실 교회력의 직접적인 근거는 구약에서도 찾을 수 없고 초대교에서 신약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생각 입니다. 굳이 절기와 그 그 의미를 찾는 다면 구약텍스트에서 하나님이 율법으로 주신 절기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만 하는 것이라 생각 합니다. 왜냐면 구약의 절기 자체가 하나님의 구속사 자체를 의미하며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기 때문 이라 봅니다.
구약의 칠대 절기는 잘 알려진 대로 / 유월절-무교절-초실절-오순절-나팔절-속죄일-초막절 /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금의 교회력은 / 대강절-성탄절-주현절-유월절-무교절-초실절-오순절-삼위일체주일 /로 나누어져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장한 의미에서 교회력에 따르는 설교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딸은 설교자라면 구약교회가 지켜야 했던 유월절의 규례가 지금의 크리스쳔에게 의떠한 의미로 전달되어야 하는지 그 본질을 깊이 있게 파고 들어야하는데 박목사님의 설교중 그 본질에 접근하는 설교를 들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박목사님의 설교는 주제만 교회력이나 절기일뿐 절기에 관련된 몇몇의 성경구절들을 자신이 주장하고자하는 몇몇 가치에 맞추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대강절은 구약절기의 나팔절, 속죄일, 나아가서는 초막절의 절기와 연관된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대강절의 의미를 성도들 에게 바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나팔절의 규례와 대 속죄일의 규례와 초막절의 규례에 관한 설명과 그것이 재림을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는 성도들에게 주는 의미를 명확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모세 오경의 여러 부분과 이를 재해석 하였던 신약성경의 사도들의 성서 텍스트들이 인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단 한번도 본질을 알게 할 수 있는 성격텍스트들이 인용되지 않는 것을 보며 박목사의 설교는
형식만 교회력을 따를 뿐이지 그 본잘은 정목사님의 살날한 비평을 피해 갈 수 없었던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와 별반 다를게 없다는 생각 입니다.
설교의 형식을 교회력에 따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교회력 즉 하나님이 명하신 율법의 절기속에 나타난 말씀의 본질을 따르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1월 23일 사마리아의 샘물]
구약과 복음서 그리고 서신서를 구분하여 본문을 찾고 그 의미를 연결하는 설교의 방식은 매우 훌륭한 방식이라 동감 합니다. 그러나 정목사님으로 부터 매우 훌륭한 설교로 평가 받은 2005년 1/23일자 설교의 본문은 그 개연성을 주장하기에는 합리성이 떨어진다는 생각 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과연 구원을 받았을 까요? 성경적으로 볼때 구원 받지 못했을 거라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나아만은 하나님의 은혜로 병고침을 받았을 뿐이지 구원받은자로 볼 근거는 없습니다. 따라서 나아만과 수가성의 여인을 연결시켜 구원의 본질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을 것 이라 봅니다.
인용된 본문은 왕하 5:9~15, 요 4:7~14, 그리고 로마서 1:16~17 절의 말씀입니다. 위의 본문의 연관성을 통하여 박목사님은 '생수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 이방인 누구 에게나 배풀어진 구원'이란 주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이 주제를 보다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다른 부분들이 인용되는 것이 그 본질을 전달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 생각 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과연 구원을 받았을 까요? 성경적으로 볼때 구원 받지 못했을 거라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나아만은 하나님의 은혜로 병고침을 받았을 뿐이지 구원받은자로 볼 근거는 없습니다. 따라서 나아만과 수가성의 여인을 연결시켜 구원의 본질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을 것 이라 봅니다.
로마서의 1:16~17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 다는 사도바울의 텍스트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하박국서 인용되어야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 입니다. 왜냐면 바울이 그 텍스트를 하박국서에서 인용 하였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로마서 1:16~17의 본질을 전하기 위해서는 글을 적은 자의 마음에 있는 믿음이 어떤 믿음일 까 하는 것을 명확히 성도 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 우선이지않나 생각 합니다. 하박국은 믿음에 대해 노래 합니다. "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 이것이 로마서 1:16,7 절이 노래하는 믿음의 본질 인 것 입니다.
[성서 텍스트와 해석학]
성서에 관해서 이야기 하자면 "해석"이란 단어는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 입니다. 성서 텍스트와 해석학이란 단락에서 정목사님이 사용하신 "해석"이란 언어를 설명하면서 톨스토이의 문학 해석의 방식을 예로 든것은 저로서는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입니다.
기독교란 "성경"이라는 것을 진리의 근본으로 삼는 것 이며 성경 자체가 성경이 진리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톨스도이의 문학은 톨스토이의 문학자체가 톨스토이의 생각과 사고가 나타난 문학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기에 "진리"인 성경과 진리의 범주가 아닌 톨스토이의 문학을 해석하는 방식은 전혀 별개인 것이라 생각 합니다. 성경해석학을 설명하기 위해 예로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을 해석하는 정목사님의 방식이 과연 합리적인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목사님의 추론적인 해석은 아래와 같습니다.
"모리아산 사건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높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인신(人身)제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일지 모른다. 근동의 여러 종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듯이, 생존에 불안을 느낀 아브라함은 어느 한 순간에 야훼 하나님이 인간의 피까지 원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지 모르며, 성서 기자는 그것의 어리석음을 지적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추론적 해석을 보며 본인은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모릅니다.
기독교란 무었인가요?
저는 "구약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나사렛 예수와 그 사도들의 해석을 진리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면 나사렛 예수와 그 분으로부터 구약을 배웠던 사도들이 본문을 보는 해석은 어떠할까요? 아래의 성경구절들을 보면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행위에대해 사도 바울은 한결같이 "믿음" 관해 말씀하시고 계시지 정목사님 처럼 "인신제물"에 관해 언급한 구절이 한 구절도 없는 것은 정목사님의 합리성에 근거하지않은 합리적 해석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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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 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갈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히 11: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약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 2:23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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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후세대의 성도들에게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라고 권면 하셨습니다. 성경의 텍스트를 정목사님처럼 상상력을 동원해서 지금 이땅에 사는 현대인의 방식대로 해석한다면 과연 성경을 작위적으로 해석하는 잘못된 분들과 다를 것이 무었인가 하는 것 입니다.
[2월 26일자 밀과 가라지]
성경을 작위적으로 해석하는것도 어느 정도지^^ 2월 26일자 박목사님의 설교는 실로 그 정도가 심하게 넘어가지 않나 십습니다 "사람에게 추수 때가 한번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고비 고비마다 추수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택하신 밀이라고 할 때, 설령 가라지와 같은 악조건과 악한 영들과 악한 사건들이 우리를 엄습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 위하여, 악한 것들을 내버려 두십니다. 이 말을 바꾸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도, 자신의 열매를 맺어서 마지막 곳간에 들어갈 때까지는 가라지라고 부르는 수많은 고난과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가리지를 인생의 고난으로 해석하는 이러한 해석은 실로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라지=악한자의 아들들 이라고 직접 설명해 주셨는데도 이러한 비유를 배푼 주체이신 주님의 해석은 도왜시 한체 나름대로 상상해서 가라지를 인생의 고난이라고 같다붙이는 해석실력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됩니다. 엉뚱한 얘기가 아닙니다. 먼저 됐지만 복음의 깊이를 깨닫지 못한 채, 자기들이 만든 역사적 사건이나 이념이나 체제에 탐닉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라지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은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유대교 지도자 여러분 당신들이 회개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기다리겠다. 자비의 말씀, 은총과 사랑의 말씀입니다"
위의 박목사님의 글도 마찬 가지 입니다. 도대체 예수의 말씀을 마음대로 왜곡해도 정도가 있지 "사랑하는 유대교 지도자 여러분"이라니 참 이상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독사의 자식"라는 말은 들어 보았어도 주님이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주님의 입장을 박목사님 처럼 추론할 어떤 근거도 성경은 가지고 있지않다고 봅니다.
또한 "회개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기다리겠다"라는 언급도 주님의 말씀과는 다르다. 주님께서 가라지는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 " 마 15: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라고 명확히 말씀 하시고 계신 것 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회심치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며 멸망받을 줄 알고 계셨습니다. 왜냐면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것을 예언하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또 본 설교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을 보는 시각이 다소 왜곡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 박목사님은 그들에 관해 "율법교사 또는 바리새파 사람 제사장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알곡이므로 주변의 가라지들, 이방인과 유대교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모든 불의한 사람들이 뿌리 뽑히기를 위하여 기도한 사람들입니다." 설교 본문에서 언급 하고 있는데 바리세인들과 서기 관들을 다른 민족은 멸망하고 유대인만 생존하고 축복받는 세상을 꿈꾸는 비인간적인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는데 아는 그들이 얼마나 경건하고 인간의 시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못하고 성경을 이해 하고 있는지를 반증해준다고 생각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의 기도문 들을 읽어보면 노예된 국가의 독립을 염원한 민족 주의자들 이었던건만은 분명하나 박목사님이 묘사한 것 처럼 비인간적인 사람이었음을 반증하는 문서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주님도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세인 보다 낮지 않으면 ~~~~"그많큼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은 의로운 사람들 이었던 것 입니다.
박목사님의 설교는 인본적이고 그저 듣기에 고급스런 말들로 가득차 있으나 주님의 복음의 핵심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 입니다.
[11/27 생명의 나팔소리]
"생명의 나팔소리" 실로 아름답고 장대한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을 읽으며 매우 기대 감을 가지고 박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박목사님의 설교 초반부 상당부분이 베트남 선교에 관한 이야기들로 할당되어 있는데 별로 주제와 관련이 없는 내용들일 뿐만 아니라 '잘 살수 있다, 행복해 질 수 있다, 희망이 있다 웰빙"등등 다소 거북스런 언어들도 귀에 들립니다.
설교가 계속 진행되면서도 "나팔소리"의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성경적 고찰은 찾아 보긴 힘들다는 느낌입니다.
대림절기간은 구약의 나팔절과 대 속재일의 규례가 숨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목사님은 성서택스트의 근본을 가르치기에 앞서 현재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만 장황히 설명하고 있는 것입이다.
구약의 텍스트와 복음서의 텍스트 그리고 서신서의 택스트를 재대로 이해하고 있는 설교자라면 나팔소리의 의미는 레위기와 민수기에 나타난 칠대절기인 나팔절의 규례로 부터 복음서 마태복음 24:31 나팔소리를 거쳐 바울의 서신서 곳곳에 나타난 나팔의 의미와 더불어 계시록의 나팔의 의미까지를 정확히 꽤뚫어 보아야 함이 마땅하나 박목사님의 설교는 전혀 그 이해의 깊이가 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12/18 곧 오신다]
본 설교에서 박목사님은 이사야의 예언의 본문을 500년 으로 언급하는데 이는 본 예언을 우시아 왕이 죽던해 (BC 742)에 소명을 받았던 이사야의 년대기에 비추어 볼때 본문은 BC 700년 경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 입니다. 사소한 문제이나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는게 좋아 보입니다.
만약에 일반적인 에큐메니언의 입장에서 이사야서의 하반부를 이사야의 저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글로 보는 입장이라면 설교 본문에서 "오늘 이사야서 말씀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주전 586년에 바빌론이란 국가에게 망했습니다. 그리고 70년 동안 종살이를 하는데 그 중간에 이사야란 선지자가 나와서 예언을 합니다."라는 박목사님의 설교 내용은 당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설교 비평을 하시는 정목사님도 이런 부분은 지적 하셨어야 옳다고 봅니다. 목회자들은 성경에 정통해야 한다는 생각 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얼마전 정목사님이 스스로 구약에 관한 지식이 짧음을 (물론 겸손한 표현 이시겠지만) 언급 하신 내용은 본인은 다소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구약을 모르고 어떻게 신약을 이해 할 수 있을까? 저는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입니다. 신약을 적은 저자들의 사상과 언어 사용 습관 표현 방식등 정신적 모든 바탕이 구약인데 그러한 바탕에서 나온 신약을 어떻께 구약에 대한 이해 없이 신약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것 입니다. 구약의 바른이해 없이 성경을 보는 것은 "콩글리시"를 구사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 입니다.
곧 오신다의 설교는 주님 오심의 현재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곧 오신다는 말을 현재 오셔있다는 말과 착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주님의 나라 즉 천국은 초림과 함께 오셔서 우리속에 현존 하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재림과 함께 완성 될 것 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나라가 완성 되었나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시작과 현재와 완성 모두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완성 입니다. 곧 오신다는 말씀은 신약성경의 자자들에게서 "재림"을 의미하며 완성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극한 가난과 , 핍박과 , 고통당하던 성도들에게 사도바울이 위로로 하신 말씀이 "곧 오신다"는 것 입니다. 과연 바울이 곧 오신다의 의미를 박목사님의 말씀 처럼 현재적인 의미로 내맘에 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로 사용 하셨을 까요? 과연 그러한 해석이 초대교회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위로의 말씀이 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물질문명의 풍요함에취에 신앙의 첫사랑이 식어버린 성도들에게는 박목사님의 해석이 위로가 될찐 모르겟습니다만 ^^ . 본문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것 입니다.
히브리서기자는 아래와 같이 교인들에게 닥친 고난을 말씀하십니다
히 10: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히 10: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히 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리고 그 후에
히 10: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도들을 위로하는 것 입니다. 곧 오신다는 의미는 내세적인 위로의 말씀인 것 입니다
빌립보서의 본문의 이해를 위해서 빌립보서 전체를 읽어보면 얼마나 간절 하게 바울이 주님이 다시오시길
학수 고대하고 있는지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박모사님은 바울의 이러한 간절한 기다림을 현재의 내제적 만족의 언어으로 변질시켜서는 안될 거란 생각 입니다.
이후에도 반론을 재기하고 싶은 부분이 수도 없이 많으나 도저히 피곤해서 할 수가 없군요.
한마디로 박목사님의 설교는 부활과 재림의 의미를 지나치게 현재 지향적인 것으로촛점을 맞추어,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는 마라나타의 소망이 아니라 이땅에서 선을 행함으로 살기좋은 세상을 우리가 만들자는, 기복주의와 반대되는 또나를 형대의 현재지향적 현세 지향적인 설교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죄가없는 온전한 세상은 주님이 오셔야 가능 한 것이지 우리의 선행으로나 완벽한 정치제도나 사회운동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인본주의 적인 사상으로 가득찬 박목사님의 설교 어디에서도 바울과 같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은 찾아볼수 없어서 매우 안타까운 마음 이었습니다..
마라나타 ..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 옵소서..
부산에서 최강영 올림
경동교회 박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한 정목사님의 글은 매우 실망 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이 에큐메니컬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까지 많은 날카로운 비평의 칼날은 찾아볼길이 없습니다.(본인은 에큐메니컬 운동을 열열히 반대 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진리와 비진리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사랑과 통합이라는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단어들로 비진리를 진리로 구원받을 수 없는 신앙의 길을 참 신앙의 길로 포장할 수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력 과 설교]
정 목사님은 교회력애 따르는 설교의 중요성을 본 단락에서 주장하고 있으며 그 근거로 2천년의 교회 역사의 우월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잘 살펴보고 알고 있는 분이라면 2천년의 교회 역사의 우월성은 그 근거가 되지 못함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 생각 합니다.(교회력의 중요성 여부가 아니라 2천년의 교회 역사가 근 근거가 되는가 ? 하는 질문이다)
사도 요한은 AD 100년경 주님께서 친히 보여준 환상을 통하여 교회의 실상을 보고 일곱교회중 5교회가 이미
구원의 도상에서 버림받을 것을 경고의 편지로 기록하고 있음을 보아 우리는 교회의 세속화가 얼마나 많이 진행 되었는 가를 보여 주고 있으며 , 그 이전 부터 이미 교회내에서 복음이 변질되고 있음을 우리는 서신서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이후의 2000년 교회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에 끼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음을 교수님도 잘 아시리라 생각 합니다.
[교회력은 복음 이다]
사실 교회력의 직접적인 근거는 구약에서도 찾을 수 없고 초대교에서 신약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생각 입니다. 굳이 절기와 그 그 의미를 찾는 다면 구약텍스트에서 하나님이 율법으로 주신 절기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만 하는 것이라 생각 합니다. 왜냐면 구약의 절기 자체가 하나님의 구속사 자체를 의미하며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기 때문 이라 봅니다.
구약의 칠대 절기는 잘 알려진 대로 / 유월절-무교절-초실절-오순절-나팔절-속죄일-초막절 /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금의 교회력은 / 대강절-성탄절-주현절-유월절-무교절-초실절-오순절-삼위일체주일 /로 나누어져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장한 의미에서 교회력에 따르는 설교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딸은 설교자라면 구약교회가 지켜야 했던 유월절의 규례가 지금의 크리스쳔에게 의떠한 의미로 전달되어야 하는지 그 본질을 깊이 있게 파고 들어야하는데 박목사님의 설교중 그 본질에 접근하는 설교를 들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박목사님의 설교는 주제만 교회력이나 절기일뿐 절기에 관련된 몇몇의 성경구절들을 자신이 주장하고자하는 몇몇 가치에 맞추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대강절은 구약절기의 나팔절, 속죄일, 나아가서는 초막절의 절기와 연관된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대강절의 의미를 성도들 에게 바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나팔절의 규례와 대 속죄일의 규례와 초막절의 규례에 관한 설명과 그것이 재림을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는 성도들에게 주는 의미를 명확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모세 오경의 여러 부분과 이를 재해석 하였던 신약성경의 사도들의 성서 텍스트들이 인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단 한번도 본질을 알게 할 수 있는 성격텍스트들이 인용되지 않는 것을 보며 박목사의 설교는
형식만 교회력을 따를 뿐이지 그 본잘은 정목사님의 살날한 비평을 피해 갈 수 없었던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와 별반 다를게 없다는 생각 입니다.
설교의 형식을 교회력에 따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교회력 즉 하나님이 명하신 율법의 절기속에 나타난 말씀의 본질을 따르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1월 23일 사마리아의 샘물]
구약과 복음서 그리고 서신서를 구분하여 본문을 찾고 그 의미를 연결하는 설교의 방식은 매우 훌륭한 방식이라 동감 합니다. 그러나 정목사님으로 부터 매우 훌륭한 설교로 평가 받은 2005년 1/23일자 설교의 본문은 그 개연성을 주장하기에는 합리성이 떨어진다는 생각 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과연 구원을 받았을 까요? 성경적으로 볼때 구원 받지 못했을 거라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나아만은 하나님의 은혜로 병고침을 받았을 뿐이지 구원받은자로 볼 근거는 없습니다. 따라서 나아만과 수가성의 여인을 연결시켜 구원의 본질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을 것 이라 봅니다.
인용된 본문은 왕하 5:9~15, 요 4:7~14, 그리고 로마서 1:16~17 절의 말씀입니다. 위의 본문의 연관성을 통하여 박목사님은 '생수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 이방인 누구 에게나 배풀어진 구원'이란 주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이 주제를 보다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다른 부분들이 인용되는 것이 그 본질을 전달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 생각 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과연 구원을 받았을 까요? 성경적으로 볼때 구원 받지 못했을 거라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나아만은 하나님의 은혜로 병고침을 받았을 뿐이지 구원받은자로 볼 근거는 없습니다. 따라서 나아만과 수가성의 여인을 연결시켜 구원의 본질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을 것 이라 봅니다.
로마서의 1:16~17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 다는 사도바울의 텍스트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하박국서 인용되어야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 입니다. 왜냐면 바울이 그 텍스트를 하박국서에서 인용 하였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로마서 1:16~17의 본질을 전하기 위해서는 글을 적은 자의 마음에 있는 믿음이 어떤 믿음일 까 하는 것을 명확히 성도 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 우선이지않나 생각 합니다. 하박국은 믿음에 대해 노래 합니다. "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 이것이 로마서 1:16,7 절이 노래하는 믿음의 본질 인 것 입니다.
[성서 텍스트와 해석학]
성서에 관해서 이야기 하자면 "해석"이란 단어는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 입니다. 성서 텍스트와 해석학이란 단락에서 정목사님이 사용하신 "해석"이란 언어를 설명하면서 톨스토이의 문학 해석의 방식을 예로 든것은 저로서는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입니다.
기독교란 "성경"이라는 것을 진리의 근본으로 삼는 것 이며 성경 자체가 성경이 진리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톨스도이의 문학은 톨스토이의 문학자체가 톨스토이의 생각과 사고가 나타난 문학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기에 "진리"인 성경과 진리의 범주가 아닌 톨스토이의 문학을 해석하는 방식은 전혀 별개인 것이라 생각 합니다. 성경해석학을 설명하기 위해 예로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을 해석하는 정목사님의 방식이 과연 합리적인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목사님의 추론적인 해석은 아래와 같습니다.
"모리아산 사건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높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인신(人身)제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일지 모른다. 근동의 여러 종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듯이, 생존에 불안을 느낀 아브라함은 어느 한 순간에 야훼 하나님이 인간의 피까지 원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지 모르며, 성서 기자는 그것의 어리석음을 지적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추론적 해석을 보며 본인은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모릅니다.
기독교란 무었인가요?
저는 "구약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나사렛 예수와 그 사도들의 해석을 진리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면 나사렛 예수와 그 분으로부터 구약을 배웠던 사도들이 본문을 보는 해석은 어떠할까요? 아래의 성경구절들을 보면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행위에대해 사도 바울은 한결같이 "믿음" 관해 말씀하시고 계시지 정목사님 처럼 "인신제물"에 관해 언급한 구절이 한 구절도 없는 것은 정목사님의 합리성에 근거하지않은 합리적 해석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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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 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갈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히 11: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약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 2:23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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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후세대의 성도들에게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라고 권면 하셨습니다. 성경의 텍스트를 정목사님처럼 상상력을 동원해서 지금 이땅에 사는 현대인의 방식대로 해석한다면 과연 성경을 작위적으로 해석하는 잘못된 분들과 다를 것이 무었인가 하는 것 입니다.
[2월 26일자 밀과 가라지]
성경을 작위적으로 해석하는것도 어느 정도지^^ 2월 26일자 박목사님의 설교는 실로 그 정도가 심하게 넘어가지 않나 십습니다 "사람에게 추수 때가 한번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고비 고비마다 추수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택하신 밀이라고 할 때, 설령 가라지와 같은 악조건과 악한 영들과 악한 사건들이 우리를 엄습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 위하여, 악한 것들을 내버려 두십니다. 이 말을 바꾸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도, 자신의 열매를 맺어서 마지막 곳간에 들어갈 때까지는 가라지라고 부르는 수많은 고난과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가리지를 인생의 고난으로 해석하는 이러한 해석은 실로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라지=악한자의 아들들 이라고 직접 설명해 주셨는데도 이러한 비유를 배푼 주체이신 주님의 해석은 도왜시 한체 나름대로 상상해서 가라지를 인생의 고난이라고 같다붙이는 해석실력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됩니다. 엉뚱한 얘기가 아닙니다. 먼저 됐지만 복음의 깊이를 깨닫지 못한 채, 자기들이 만든 역사적 사건이나 이념이나 체제에 탐닉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라지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은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유대교 지도자 여러분 당신들이 회개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기다리겠다. 자비의 말씀, 은총과 사랑의 말씀입니다"
위의 박목사님의 글도 마찬 가지 입니다. 도대체 예수의 말씀을 마음대로 왜곡해도 정도가 있지 "사랑하는 유대교 지도자 여러분"이라니 참 이상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독사의 자식"라는 말은 들어 보았어도 주님이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주님의 입장을 박목사님 처럼 추론할 어떤 근거도 성경은 가지고 있지않다고 봅니다.
또한 "회개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기다리겠다"라는 언급도 주님의 말씀과는 다르다. 주님께서 가라지는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 " 마 15: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라고 명확히 말씀 하시고 계신 것 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회심치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며 멸망받을 줄 알고 계셨습니다. 왜냐면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것을 예언하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또 본 설교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을 보는 시각이 다소 왜곡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 박목사님은 그들에 관해 "율법교사 또는 바리새파 사람 제사장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알곡이므로 주변의 가라지들, 이방인과 유대교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모든 불의한 사람들이 뿌리 뽑히기를 위하여 기도한 사람들입니다." 설교 본문에서 언급 하고 있는데 바리세인들과 서기 관들을 다른 민족은 멸망하고 유대인만 생존하고 축복받는 세상을 꿈꾸는 비인간적인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는데 아는 그들이 얼마나 경건하고 인간의 시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못하고 성경을 이해 하고 있는지를 반증해준다고 생각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의 기도문 들을 읽어보면 노예된 국가의 독립을 염원한 민족 주의자들 이었던건만은 분명하나 박목사님이 묘사한 것 처럼 비인간적인 사람이었음을 반증하는 문서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주님도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세인 보다 낮지 않으면 ~~~~"그많큼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은 의로운 사람들 이었던 것 입니다.
박목사님의 설교는 인본적이고 그저 듣기에 고급스런 말들로 가득차 있으나 주님의 복음의 핵심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 입니다.
[11/27 생명의 나팔소리]
"생명의 나팔소리" 실로 아름답고 장대한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을 읽으며 매우 기대 감을 가지고 박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박목사님의 설교 초반부 상당부분이 베트남 선교에 관한 이야기들로 할당되어 있는데 별로 주제와 관련이 없는 내용들일 뿐만 아니라 '잘 살수 있다, 행복해 질 수 있다, 희망이 있다 웰빙"등등 다소 거북스런 언어들도 귀에 들립니다.
설교가 계속 진행되면서도 "나팔소리"의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성경적 고찰은 찾아 보긴 힘들다는 느낌입니다.
대림절기간은 구약의 나팔절과 대 속재일의 규례가 숨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목사님은 성서택스트의 근본을 가르치기에 앞서 현재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만 장황히 설명하고 있는 것입이다.
구약의 텍스트와 복음서의 텍스트 그리고 서신서의 택스트를 재대로 이해하고 있는 설교자라면 나팔소리의 의미는 레위기와 민수기에 나타난 칠대절기인 나팔절의 규례로 부터 복음서 마태복음 24:31 나팔소리를 거쳐 바울의 서신서 곳곳에 나타난 나팔의 의미와 더불어 계시록의 나팔의 의미까지를 정확히 꽤뚫어 보아야 함이 마땅하나 박목사님의 설교는 전혀 그 이해의 깊이가 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12/18 곧 오신다]
본 설교에서 박목사님은 이사야의 예언의 본문을 500년 으로 언급하는데 이는 본 예언을 우시아 왕이 죽던해 (BC 742)에 소명을 받았던 이사야의 년대기에 비추어 볼때 본문은 BC 700년 경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 입니다. 사소한 문제이나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는게 좋아 보입니다.
만약에 일반적인 에큐메니언의 입장에서 이사야서의 하반부를 이사야의 저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글로 보는 입장이라면 설교 본문에서 "오늘 이사야서 말씀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주전 586년에 바빌론이란 국가에게 망했습니다. 그리고 70년 동안 종살이를 하는데 그 중간에 이사야란 선지자가 나와서 예언을 합니다."라는 박목사님의 설교 내용은 당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설교 비평을 하시는 정목사님도 이런 부분은 지적 하셨어야 옳다고 봅니다. 목회자들은 성경에 정통해야 한다는 생각 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얼마전 정목사님이 스스로 구약에 관한 지식이 짧음을 (물론 겸손한 표현 이시겠지만) 언급 하신 내용은 본인은 다소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구약을 모르고 어떻게 신약을 이해 할 수 있을까? 저는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입니다. 신약을 적은 저자들의 사상과 언어 사용 습관 표현 방식등 정신적 모든 바탕이 구약인데 그러한 바탕에서 나온 신약을 어떻께 구약에 대한 이해 없이 신약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것 입니다. 구약의 바른이해 없이 성경을 보는 것은 "콩글리시"를 구사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 입니다.
곧 오신다의 설교는 주님 오심의 현재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곧 오신다는 말을 현재 오셔있다는 말과 착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주님의 나라 즉 천국은 초림과 함께 오셔서 우리속에 현존 하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재림과 함께 완성 될 것 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나라가 완성 되었나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시작과 현재와 완성 모두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완성 입니다. 곧 오신다는 말씀은 신약성경의 자자들에게서 "재림"을 의미하며 완성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극한 가난과 , 핍박과 , 고통당하던 성도들에게 사도바울이 위로로 하신 말씀이 "곧 오신다"는 것 입니다. 과연 바울이 곧 오신다의 의미를 박목사님의 말씀 처럼 현재적인 의미로 내맘에 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로 사용 하셨을 까요? 과연 그러한 해석이 초대교회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위로의 말씀이 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물질문명의 풍요함에취에 신앙의 첫사랑이 식어버린 성도들에게는 박목사님의 해석이 위로가 될찐 모르겟습니다만 ^^ . 본문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것 입니다.
히브리서기자는 아래와 같이 교인들에게 닥친 고난을 말씀하십니다
히 10: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히 10: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히 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리고 그 후에
히 10: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도들을 위로하는 것 입니다. 곧 오신다는 의미는 내세적인 위로의 말씀인 것 입니다
빌립보서의 본문의 이해를 위해서 빌립보서 전체를 읽어보면 얼마나 간절 하게 바울이 주님이 다시오시길
학수 고대하고 있는지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박모사님은 바울의 이러한 간절한 기다림을 현재의 내제적 만족의 언어으로 변질시켜서는 안될 거란 생각 입니다.
이후에도 반론을 재기하고 싶은 부분이 수도 없이 많으나 도저히 피곤해서 할 수가 없군요.
한마디로 박목사님의 설교는 부활과 재림의 의미를 지나치게 현재 지향적인 것으로촛점을 맞추어,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는 마라나타의 소망이 아니라 이땅에서 선을 행함으로 살기좋은 세상을 우리가 만들자는, 기복주의와 반대되는 또나를 형대의 현재지향적 현세 지향적인 설교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죄가없는 온전한 세상은 주님이 오셔야 가능 한 것이지 우리의 선행으로나 완벽한 정치제도나 사회운동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인본주의 적인 사상으로 가득찬 박목사님의 설교 어디에서도 바울과 같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은 찾아볼수 없어서 매우 안타까운 마음 이었습니다..
마라나타 ..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 옵소서..
부산에서 최강영 올림
2006.07.04 00:05:38
코람 데오 님,
언듯 보기에도 진정성이 담긴 대글이라는 걸 알 수 있군요.
감사합니다.
저에게 많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박종화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저보다 더 깊이 아시네요.
그런데 위에서 코람 데모님이 지적하신 부분이 일정 부분에서는 옳기도 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런 논의는 기본적으로 복음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좁혀질 수도 있고, 더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다른 부분은 접어두고,
톨스토이 작품과 성서를 해석할 때의 문제만 한번 짚지요.
왜냐하면 이번의 주제는 전체적으로 '해석학'의 문제니까요.
나는 텍스트는 모든 게 동일한 해석학적 구도에서 접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반해서
코람 데오님은 그걸 마뜩찮게 생각하시는군요.
성경은 진리이지만 부활은 진리가 아니라구요.
그건 옳은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성서도 역사적 문서이고, 톨스토이의 부활도 역시 역사적 문서입니다.
그건 인정하시지요?
여기서 하나님의 계시다, 그의 영감이다 하는 말은 직접적으로 연관이 안 됩니다.
핵심은 역사와 문서라는 겁니다.
성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지요?
역사과정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럴 역사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박종화 목사님은 그걸 실행했습니다.
코람 데오 님이 보기에 미진할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최선으로 그런 해석학적 작업에 출실한 설교자입니다.
사실 교회력도 역시 역사입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오점이 많이 담겨 있지만,
그 오점까지 않으면서도 교회 역사는
인간 구원와 종말을 교회력과 예전을 통해서 지켜냈습니다.
어쨌든지 저의 비평 글을 자세하게 읽어주셨고,
박종화목사님의 설교까지 읽어주신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만.
<추신> 아브라함의 이삭 사건은 제 글에서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인신제사에 대한 경고라는 사실을 단정적으로 말한 게 아니라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텍스트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이 융해되면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됩니다.
그 지평은 구원과 생명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런 단지 신학과 인문학만이 아니라
물리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봅니다.
이 세계와 역사는 이런 방식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나아갑니다.
그게 곧 진리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진리는 역사적으로 열려있으니까요.
언듯 보기에도 진정성이 담긴 대글이라는 걸 알 수 있군요.
감사합니다.
저에게 많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박종화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저보다 더 깊이 아시네요.
그런데 위에서 코람 데모님이 지적하신 부분이 일정 부분에서는 옳기도 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런 논의는 기본적으로 복음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좁혀질 수도 있고, 더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다른 부분은 접어두고,
톨스토이 작품과 성서를 해석할 때의 문제만 한번 짚지요.
왜냐하면 이번의 주제는 전체적으로 '해석학'의 문제니까요.
나는 텍스트는 모든 게 동일한 해석학적 구도에서 접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반해서
코람 데오님은 그걸 마뜩찮게 생각하시는군요.
성경은 진리이지만 부활은 진리가 아니라구요.
그건 옳은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성서도 역사적 문서이고, 톨스토이의 부활도 역시 역사적 문서입니다.
그건 인정하시지요?
여기서 하나님의 계시다, 그의 영감이다 하는 말은 직접적으로 연관이 안 됩니다.
핵심은 역사와 문서라는 겁니다.
성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지요?
역사과정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럴 역사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박종화 목사님은 그걸 실행했습니다.
코람 데오 님이 보기에 미진할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최선으로 그런 해석학적 작업에 출실한 설교자입니다.
사실 교회력도 역시 역사입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오점이 많이 담겨 있지만,
그 오점까지 않으면서도 교회 역사는
인간 구원와 종말을 교회력과 예전을 통해서 지켜냈습니다.
어쨌든지 저의 비평 글을 자세하게 읽어주셨고,
박종화목사님의 설교까지 읽어주신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만.
<추신> 아브라함의 이삭 사건은 제 글에서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인신제사에 대한 경고라는 사실을 단정적으로 말한 게 아니라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텍스트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이 융해되면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됩니다.
그 지평은 구원과 생명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런 단지 신학과 인문학만이 아니라
물리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봅니다.
이 세계와 역사는 이런 방식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나아갑니다.
그게 곧 진리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진리는 역사적으로 열려있으니까요.
2006.07.04 14:31:44
또 한 편의 설교비평을 통해 설교의 세계를, 진리의 세계를 더욱 분명하게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교회탐방을 하는 동안 저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교회였기에
탐방이 끝난 이후에도 주일예배에 자주 참석했던 교회가 경동교회였습니다.
Show가 아닌 예배. 그리고 설교자의 실존과 고민이 느껴지는 설교에 큰 감명을 받았었지요.
교회탐방을 하면서 가장 많이 느끼고 배울 수 있었던 교회라고 자체평가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
제게는 이재철목사님의 설교보다 박종화목사님의 설교가 생각할 거리를 더 많이 던져주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제 곧 교육전도사 사역을 시작해야 하는 저로서는 이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되어 버렸네요..
교회탐방을 하는 동안 저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교회였기에
탐방이 끝난 이후에도 주일예배에 자주 참석했던 교회가 경동교회였습니다.
Show가 아닌 예배. 그리고 설교자의 실존과 고민이 느껴지는 설교에 큰 감명을 받았었지요.
교회탐방을 하면서 가장 많이 느끼고 배울 수 있었던 교회라고 자체평가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
제게는 이재철목사님의 설교보다 박종화목사님의 설교가 생각할 거리를 더 많이 던져주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제 곧 교육전도사 사역을 시작해야 하는 저로서는 이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되어 버렸네요..
2006.07.05 00:28:57
서 군,
한 학기 동안 교회 탐방을 열심해 했나 보군.
잘 했네.
방학 잘 보내고,
신학생 때는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한 학기 동안 교회 탐방을 열심해 했나 보군.
잘 했네.
방학 잘 보내고,
신학생 때는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2007.01.02 11:37:56
목사님의 글을 차근차근 읽고 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는것 같습니다.
목사님, 그러나 글을 읽다가 목사님의 비평기준이 되어온 성서텍스트의 해석과 교회력이라고 하는것에 대하여 의문이 있어 잠시 주제 넘지만 문제를 제기할까 합니다. ^^
먼저 성서 텍스트 해석에 관한 것.
절대적 텍스트인 성서의 해석에 있어 고정된 '플롯'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혹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정목사님께서 공부하신 좁은(?) 스펙트럼 안에서
판단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텍스트로 부터 해석된 것은 교회 구성원에게 일단 던져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자의 의도로서 만들어지고 던져 졌다고 해서 대중에게 1%의 오차한계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의
절대적인 것인가요 ?
전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목사님께서 혹시 화자와 독자와의 상호관계를 간과하고 계신건 아니지 염려됩니다.
역동적인 목회현장을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땅과 열방의 수많은 목회자와 선교사들은
그들의 독특한 사역 환경에서 텍스트를 해석해 던져 내고 있고 더불어 그들과 호흡하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하늘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말하는 화자의 의도가 어떠하든지 주님께서 역사하시면 독자의 상황을 고려하여 어루만진신다는
말이겠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너무나 다양한 필요에 의해 수만가지의 방법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목사님께서 인지 하셨으면 합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인간의 좁은 인식의 틀에서 재단되어질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던져내고 현장의 역동성 속에서 살아있는 성경읽기가 실현될때 비로소 설교는 완성되어지는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떠신지... ^^
그리고 교회력에 관하여.
목사님 역사는 완성된 것입니까, 아니면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까 ?
교회력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어진 과제가 아닌지요
지금의 교회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고 더불어 새로운 교회력을 써내려가고 있는건 아닌지요
고정된 틀에서 형식이 되어버린 가톨릭의 그것이 생명력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꿈틀대는 것은 생명력이 있지요.
그것이 혹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지나고 나면 그것은 역사입니다.
주님께서 그것들을 통해 일하신다면.
무례하게 글을 드린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
어린 후배의 철없는 걱정일테지만, 목사님 하늘소망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
목사님, 그러나 글을 읽다가 목사님의 비평기준이 되어온 성서텍스트의 해석과 교회력이라고 하는것에 대하여 의문이 있어 잠시 주제 넘지만 문제를 제기할까 합니다. ^^
먼저 성서 텍스트 해석에 관한 것.
절대적 텍스트인 성서의 해석에 있어 고정된 '플롯'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혹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정목사님께서 공부하신 좁은(?) 스펙트럼 안에서
판단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텍스트로 부터 해석된 것은 교회 구성원에게 일단 던져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자의 의도로서 만들어지고 던져 졌다고 해서 대중에게 1%의 오차한계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의
절대적인 것인가요 ?
전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목사님께서 혹시 화자와 독자와의 상호관계를 간과하고 계신건 아니지 염려됩니다.
역동적인 목회현장을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땅과 열방의 수많은 목회자와 선교사들은
그들의 독특한 사역 환경에서 텍스트를 해석해 던져 내고 있고 더불어 그들과 호흡하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하늘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말하는 화자의 의도가 어떠하든지 주님께서 역사하시면 독자의 상황을 고려하여 어루만진신다는
말이겠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너무나 다양한 필요에 의해 수만가지의 방법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목사님께서 인지 하셨으면 합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인간의 좁은 인식의 틀에서 재단되어질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던져내고 현장의 역동성 속에서 살아있는 성경읽기가 실현될때 비로소 설교는 완성되어지는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떠신지... ^^
그리고 교회력에 관하여.
목사님 역사는 완성된 것입니까, 아니면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까 ?
교회력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어진 과제가 아닌지요
지금의 교회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고 더불어 새로운 교회력을 써내려가고 있는건 아닌지요
고정된 틀에서 형식이 되어버린 가톨릭의 그것이 생명력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꿈틀대는 것은 생명력이 있지요.
그것이 혹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지나고 나면 그것은 역사입니다.
주님께서 그것들을 통해 일하신다면.
무례하게 글을 드린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
어린 후배의 철없는 걱정일테지만, 목사님 하늘소망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
이제야 정교수님의 '말씀신학과 역사신학'을 읽기 시작했는데,
제게 있어서는 기존 목사님들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라는 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역사를 통해 드러날 수 있는가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될 듯 합니다.
평소 교수님의 혹독한(^^;)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저도 교수님과 감정이입이 되는지 타 설교자만을 객관화시키곤 했는데,
이번 박종화 목사님에 대한 교수님의 애정어린 설교비평은
제 시선을 타설교자로부터 내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는군요.
너무 좋습니다....
좋지 않은 설교에 대한 좋은 비평보다
좋은 설교에 대한 좋은 비평이 저희 같은 신학생들에게는 훨씬 유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참, 그리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국내에서 신학에 관련한 해석학 분야에 뛰어난 교수님이나 서적을 좀 소개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