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 변화에 대한 물음
-은명교회 이민재 목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은명교회 이민재 목사님(이하 ‘이 목사’)에 대한 필자의 기억은 지금부터 13년 전인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에 이 목사는 레이몬드 B. 블레크니가 엮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4년에 걸친 번역 작업 끝에 세상에 내놓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에크하르트의 글을 직접 읽은 필자는 신비주의 영성에 성큼 다가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두 권으로 묶인 이 책은 지금도 팔만 뻗으면 손에 넣을 정도로 내 서재의 중요한 자리에 놓여 있으니, 이 책에 대한 필자의 관심이 어떠한지는 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무려 35쪽에 이르는 역자후기는 이 목사의 신앙과 영성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이 책을 번역하기로 마음먹을 당시에 그는 군목을 막 제대하고 유학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삼십대 초반의 이 목사는 “하늘을 보아도 눈물이 났고, 꽃을 보아도 눈물이 났다.”고 한다. 책을 보면서도 울었고, 걸으면서도 울었다. 일할 때도 울었고, 혼자 있을 때도 울었다. 그는 그 사건을 “아하, 감수성의 회복이었다!”(에크하르트 2권, 306쪽)고 회고한다. 자신이 쫓아다니던 모든 것들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그는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비늘이 떨어지자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껍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에게 유학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박사도 목사도 중요하지 않았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에 부딪친 것이다.” 흡사 사도 바울이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경험한 전적 깨우침인 돈오(頓悟)와 비슷한 경험 앞에서 이 목사의 영혼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나는 너무 많은 세월을 허송했다는 생각이 무겁게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 겨울도 지나가면 내 나이 서른 셋, 예수의 나이가 되는데, 아아,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그가, 허구가 잉태한 세계의 고통과 모순을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그가 온 몸으로 시를 쓰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했는가?(307쪽)

그는 온몸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갈고 닦는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실존적 지평이다. 그 뒤로 그는 사회혁명이 아니라 “꽃과 별의 혁명”이라는 사회적 지평에서 “나의 나됨”의 의미를 찾으며, 한국교회의 왜곡된 영성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한 성숙한 인간”이라는 종교적 지평에서 참된 신앙의 길을 발견했다. 실존적, 사회적, 종교적 지평이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이 목사의 신앙과 삶에서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곧 존재론적 변화를 가리킨다.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내면의 자기 자신이 새로워져야 하며, 사회구조의 혁명 이전에 자기라는 존재로부터 혁명이 일어나야 하고, 종교적 업적을 강화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존재론적 일치를 통한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는 삶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이 목사는 이 세 지평의 영성을 에크하르트의 글에 기대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영혼 속에서 아들의 탄생을 통한 인간의 신으로서의 복귀! 인간의 신성에의 참여! 신과 인간의 합일! 가장 래디칼한 혁명의 완성! 그리고 에크하르트의 지향과 나의 지향의 융합!(324쪽)

삼십대 후반에 쓴 이 목사의 역사후기에 담긴 영적 깨우침은 지금 오십대 중반인 필자가 읽어도 놀라우리만치 치열하고 심오하다. 그러니 이재민이라는 이름이 내 기억에서 잊힐 리가 있겠는가.

밀알의 영성
필자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읽은 지 1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뒤로 다시 한 번 더 이 목사를 글로 만날 수 있었다. <기독교사상> 2003년 6월호 특집 <영성이 뭐꼬?>에 이 목사는 “내 영성 여정의 비방록-한국교회의 영성 정립을 위한 몇 가지 제언-”을 게재했다. 이 특집에는 필자도 “설교자로서 기독교 영성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글로 참여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이렇게 같은 지면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건 삶과 역사의 신비 아닌가. 나로 하여금 신비주의 영성의 진수를 맛보게 했던 이 목사가 1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자못 궁금했다. 오래전 짝사랑하던 사람을 지면에서 만난 것 같은 기분으로 그의 글을 단숨에 읽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이 목사는 소위 386과 민중신학이 사회구원에 매진하고 있던 1980년대에 뜬금없어 보이는 영성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의식에 대한 존재의 우선성, 또는 머리에 대한 인격의 우선성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다. 그의 역사경험에 따르면 의식화에 함몰된 채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역사 진보와 공동체 발전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교회 공동체에서는 그런 경향이 훨씬 분명했다. 의식화로 달성될 수 없는 인격의 성숙이 곧 그가 말하는 영성의 핵심이다. 따라서 영성은 결코 공부가 아니며, 임의적으로 조작된 어떤 조직적 운동이 아니다. 왜 그런가?

영성은 체험이요, 맛봄이요,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과에 대한 공부와 그로 얻은 지식은 사과에 대한 진정한 앎이 아니다. 사과의 본질은 그냥 한번 베물어 먹는 것으로 즉시 알 수 있다.(기상 2003년 6월, 35쪽)

이 목사는 199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한국 교회의 왜곡된 영성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기적을 추구하는 신앙’으로 발전하는 영성이며, 다른 하나는 ‘나’의 일상에서 ‘나’의 감수성으로 느낄 수 있는 내면적 영성이다. 이 목사는 전자를 ‘천둥번개의 영성’으로, 후자를 ‘햇살의 영성’으로 명명했다. 이 목사가 몰입하려고 애쓴 햇살의 영성에서도 그는 만족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햇살의 영성은 자칫 영적 엘리트주의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런 영성은 ‘나’가 중심이 됨으로써 그리스도 없는 영성으로 흘러갈 개연성이 높았다.
이 목사는 이제 ‘밀알의 영성’을 제시한다. 거기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밀알의 영성은 ‘나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이럴 때만 신비경험은 훼손되지 않고 본래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할 수 있으며, 일상에서의 은총과 깨달음이 신앙인들로 하여금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타자를 위해 종이 되도록 견인한다는 것이다. 둘째, 밀알의 영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영성이다. 옛 ‘나’가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니라 숨어 있던 참 ‘나’가 살아나는 것이다. 참 ‘나’를 살리는 궁극적인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예수 영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존재의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극은 은폐되어 있던 나의 그리스도적 본성을 일깨우다.”(42쪽) 그의 마지막 진술은 다음과 같다.

밀알의 영성은 은둔적 여성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악취 나는 시장으로, 시끄러운 거리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는 영성이다. 결국 밀알의 영성은 고고한 구도자의 영성이 아니라 평범하고 소박한 생활인의 영성이며, 일상의 번잡하고 번거롭고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과 씨름하면서 마침내 은은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악취 나는 주변 세계에 뿜어내는 영성이다.(43쪽)

이 목사가 걸어온 영적 여정의 끝자락이기도 하며, 동시에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밀알의 영성은 곧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이다.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정직하게 대면하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은총의 기회로 받아들이는 영성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곧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존재론적 변화이며(고후 5:17), 죽음에 대한 일상적 경험(고전 15:31)이기도 하다. 초자연적 능력에 의존하거나 내면의 평화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삶의 영성이며, 다른 사람과 삶의 환경을 바꾸는 데 몰두하거나, 또는 세상과 단절한 채 자신의 내면 안에 자폐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더불어 살아나는 신앙의 과정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영성이다.
이 목사는 기독교 영성의 중심에 바로 서서 한국교회의 비틀린 영성을 시정하려고 지난 20년 동안 애를 썼으며, 지금도 그런 길을 가고 있다. 영성에 관한 신학적 바탕이나 실천이 미흡한 필자는 이 목사의 영성에 대해서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이미 1994년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통해서 영적인 충격을 받았으며, 2003년의 글에서도 적지 않은 공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바둑으로 치자면 몇 수 아래의 영성을 겨우 맛보고 있는 필자가 언어를 통한 영성의 열매라 할 그의 설교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 모르지만 그의 깊은 영성이 한국교회에 자리매김 되는 일을 돕는다는 차원에서라도 필자는 오늘 무언가를 말해야겠다. 힘에 겨운 숙제를 앞에 둔 학생 같은 심정으로 말이다.
필자는 이 목사가 2006년 1월부터 2007년 7월까지 은명교회에서 행한 주일공동예배의 설교 텍스트를 교회 홈페이지에서 읽었다. 안타깝게도 설교 음성이나 동영상은 접할 수 없었지만, 설교 텍스트가 거의 축자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덕분에 그의 설교를 따라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존재론적 변화에 대해서”라는 제목을 잡은 이유는 기독교의 영성은 이 목사가 말하고 있듯이 행위가 아니라 존재에 천착하는 신앙적 태도이기도 하고, 이번 기회에 이에 관한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혼란을 조금 바로 잡았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다. 즉 기독교인의 존재론적 변화가 도대체 무엇인지 속 시원하게 말해보자는 게 제목에 담긴 필자의 속내이다. 의욕은 있지만 실제로 그게 가능한지는 자신이 없다. 일단 길을 떠나보자.  

생명의 충일
이 목사가 영성 여정의 비망록에서 밝힌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은 그의 설교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위치가 어디인가?” 하고 묻는다.(2006년 7월9일) 그는 과녁에 집중하는 궁사처럼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영적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리스도 중심은 거의 모든 설교자들의 설교에서 발견될 수 있는 메시지이긴 하지만, 그것을 말하는 설교자의 영적 경지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말이 될 수 있다. 이 목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은 이미 고정된 어떤 신앙체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해야한다. 마음과 영을 분명하게 구분하는데서 그리스도 중심을 말하는 그의 영성이 얼마나 치밀한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목사에 따르면 마음의 본성은 넷이다. 첫째, 마음은 삶의 경험이나 인간의 성장과정과 함께 자란다. 둘째, 마음의 성격은 부정적이다. 셋째, 마음은 전염성이 강하다. 넷째, 마음은 한 개인이 다스릴 수 없다. 이 목사가 이렇게 마음의 정의를 내리는 이유는 마음을 다스려서 무언가 영적인 가치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공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데에 있다.  “마음을 믿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마음을 믿고 마음을 따르는 삶은 불행의 지름길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떼어낼 수 없는 우리는 무엇을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마음속에서 마음과 씨름하지 말고, 마음을 통째로 버리면 됩니다.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놓아야 합니다. 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과는 다른 것을 잡으면 됩니다. 다른 것을 잡아야만 놓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잡아야 할까요?(2006년 8월6일)

그 다른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것 없이 자기 자신의 마음을 훈련하는 것만으로는 절망만 더 깊어질 뿐이다. 그 설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실 분입니다. 여러분! 미련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물거품처럼, 안개처럼 사라지고 투명해지고, 맑아지고, 깨끗해진 사람! 결국 예수님 꼭 붙들고 날마다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자신의 어둠을 이겨나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린 아이처럼 천국을 살아갑니다.

독자들은 마음을 믿는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의 차이를 눈치 채셨는지. 그것은 심리학과 신학의 차이를 가리킨다. 마음은 말 그대로 심리학에 속하며, 영은 신학에 속한다. 기독교 신앙은 마음이 아니라 영의 영역에 속한다. 많은 이들이 흔한 말로 믿음의 확신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심리학의 영역이다. 이런 확신은 인간학적 훈련으로 얼마든지 도달 가능한 심리적 상태이다. 예컨대 피라미드 판매회사가 조직원들에게 “나는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게 하는 수많은 방법론들이 바로 그런 심리학적 훈련이다. 사이비 이단 교주들의 가르침을 맹신하는 이들의 심리상태도 이와 비슷하다. 그들은 늪에 빠지듯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심리에 의존해서 교주의 가르침을 확신할 뿐이다. 정통교회도 역시 이런 심리학에 의존하는 행태를 보일 때가 적지 않다. 여기서는 그것에 관해서 자세하게 언급할 여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이 목사의 진술에 기대서 한마디만 한다면 마음을 다스리는 방식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게 없다는 사실을 오늘 교회 지도자들이 기억해야 한다. 일시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해서 얻은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 결국 기독교 영성은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에 철저하게 의존하는데서만 가능한 삶의 태도이다. 여기서만 생명의 충일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님과 접속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자신을 다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된 사람,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은 이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지는 경험을 합니다. 신적 생명으로 충일해지는 경험을 합니다. 부활생명의 대 해일에 휘감기는 경험을 합니다. 그것이 거듭나는 체험입니다. 이런 체험을 한 사람은 영생과 부활을 상징이나 관념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믿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누리기 시작했으며, 육신의 옷을 벗을 때 완전하게 구현할 새로운 삶의 거부할 수 없는 리얼리티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2006년 11월26일, 약간 고쳐 적었음, 필자 주)

이 목사의 설교는 바로 이 하나의 사실, 즉 생명의 충일에 집중하고 있다. 생명의 충일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다. 그것을 단지 교리가 아니라 현실로 체험하는 것이 곧 영성이기도 하다. 이 목사는 그것을 신자들에게 설교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비유와 은유를 사용한다. 생명은 곧 ‘영적인 빛’이다. 그것은 초월적 빛이요, 신적인 빛이며, 신적 광명이다. 이 빛만이 우리의 내면에 켜켜이 쌓인 어둠과 병든 영혼의 어둠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다.(2007년 4월22일) 그것은 곧 하나님 체험이다. 그래서 이 목사에게 하나님 체험은 “삶에 대한 근원적 느낌”, 또는 “삶에 대한 직관적 느낌과 관계된 어떤 것”이다.(2007년 7월1일)
위의 표현들이 너무 관념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생명의 충일, 영적인 빛, 삶의 근원적 느낌은 시적(詩的)인 감수성에 속할 뿐이지 신앙의 구체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진수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 신앙이 관념적이라는 오해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과를 실제로 먹어보기 전에는 아무리 자세한 설명을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는 것처럼 생명의 충일도 역시 그런 영적 경험이 없이는 접근할 수 없다. 이런 대목이 쉴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 감정’, 또는 루돌프 오토의 ‘누미노제’ 경험이다. 이를 신학 개념으로 바꿔 말한다면 하나님의 계시 경험, 또는 예언자들의 신탁(神託)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험과 인식이 없는 설교자는 대중을 다룰 줄 아는 기술에 아무리 능하다 하더라도 기독교 영성가의 길과는 거리가 먼, 단순히 연설 기술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건 하나님의 계시 차원에서 살아가야 할 설교자에게 비극이 아닌가.
생명의 충일이라는 하나님 경험은 설교자에게 그 이외에 더 이상 중요한 게 없을 정도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성서도 모두 이런 하나님 경험에 관한 진술들 아닌가. 다른 예를 들어 보충적으로 설명해야겠다. 여기 어떤 음악가가 있다고 하자. 아니 음악가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 여기 두 눈 부릅뜨고 이 세상을 직면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어느 날 그는 ‘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경험했다. 그는 그때부터 이 세상을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 경험은 그에게 경천동지의 사건이었다. 그는 이제 소리를 듣는 것만이 아니라 보기도 했으며 느끼기도 했다. 소리가 그의 전체 실존을 사로잡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숨소리, 장마철 한밤중에 들리는 개구리 소리, 천둥소리, 욕설을 내뱉으며 싸우는 소리, 교회 종소리 등등, 많은 소리를 듣고 살았다. 지금도 우리가 하루 종일 소리에 파묻혀서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 어느 날 그 소리를 단순히 소리로 들은 게 아니라 ‘존재’로 들은 것이다. 소리가 ‘있다’니! 왜 소리는 없지 않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 없음과 있음의 막다른 경계까지 다가가는 것은 인간 인식의 백척간두(百尺竿頭)와 같지만 거기서 진일보(進一步)하지 않으면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단지 일상에 널려있던 소리가 이제 그에게 절대적인 존재 ‘사건’이 된 것이다. 그 소리는 생명이 되었으며, 그의 내면을 가득 채웠다. 이런 소리의 연금술사들이 바로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윤이상, 정명훈 같은 이들이 아니겠는가.
이 목사가 말하려는 생명의 충일 경험은 위에서 말한 소리의 존재론적 깊이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것이 어떤 사람들에게 두려움이기도 하다. 어린아이들이 어른의 세계에 눈을 뜨면서 얼마나 큰 충격에 휩싸이는지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대개의 아이들은 고통스런 사춘기를 지나면서 자신들이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어른이 되지만, 어떤 아이들은 어른이 되기를 포기한다. 그들은 어른의 세계를 마주할 자신감을 얻지 못한다. 어쩌면 한국교회는 마마보이나 나르시시스트처럼 영적으로 어린아이로 머물기를 원하고 있는 것 같다. 단지 교회성장과 교리적 자기 확신에 안주함으로써 어떤 종교적 안정감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충일을 얻을 수 없다. 생명의 충일이 없는 교회는 생명의 심층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단지 외피를 씌우는 일에 모든 신앙적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말 것이다.

영성의 현실
생명의 충일이 옳다 하더라도 그런 영적 경지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느냐, 그건 또 하나의 영적 엘리트주의를 생산해내는 것 아니냐, 하고 질문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음악가나 위대한 시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개는 이 세상을 평범하게 살아간다. 기독교 신앙이 필부로 사는 사람에게 가능한 세계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종교적 사치에 불과할지 모른다. 이게 바로 필자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신앙적 딜레마이기도 하다. 이렇게 질문하겠다. 성서와 계시, 무로부터의 창조, 종말, 칭의와 성화, 교회력과 성례전, ‘이미’와 ‘아직 아님’의 변증법적 긴장 관계로 만나는 하나님 나라, 삼위일체 등등,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와 그것의 체계적 해명인 신학의 세계를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 거기에 관심도 없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오직 순종하는 자세로 평생을 살아오신 분들의 영혼에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충일이 가능할까? 이런 문제는 아무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원리적으로만 본다면 그런 이들은 흡사 명작 소설과 시는 모른 채 단지 초등학교 국어책만 달달 외우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것으로 국문학 공부를 마친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가능한대로 평신도들에게도 신학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이 위대한 명작을 읽고 고전 음악의 세계를 섭렵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기독교 영성의 깊이로 들어가기 위해서 전문적인 신학공부를 할 수는 없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고도의 신학적 인식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 전문가가 되어야만 기독교 영성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빛이 우리를 뒤덮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것이 계시인데, 기독교 영성은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계시와 은총의 빛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신학적 사유가 필요하다는 것도 역시 분명하다. 이게 앞서 필자가 말한 신앙적 딜레마이다. 일반 신자들은 신학적 사유가 불가능한 현실에서 살고 있으며, 또한 영성의 깊이가 확보되기 위해서는 신학적 사유가 필요하다는 두 명제의 충돌 말이다.  
이 딜레마를 돌파할 수 있는 대안은 교회 지도자들인 목사의 역할로 돌아간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전문가들이어야 한다. 그들의 영성이 건강하면 역시 교회 공동체도 건강할 수 있으며, 그들의 영성이 미숙하면 교회도 역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좋은 뜻으로 영적인 엘리트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언어로 전승된 성서를 해석함으로써 언어의 구원 사건적인 지평을 확보할 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창조가 어떻게 종말론적 완성과 연결되는지 그 신학적 맥락을 따라갈 줄 알아야 한다. 교회성장만능주의에 바벨론 포로가 된 목회 현장에서 이런 신학적 영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한 목표를 향해서 달음질해야 할 목사로 살아가겠다고 나선 마당이니 억지로라도 자신을 쳐서(고전 9:27) 그런 영적인 구도자의 길을 가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
글이 옆으로 흘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충일을 외치는 이 목사의 메시지가 필자의 입장에서도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요소로 보여 잠시 한눈을 팔았다. 다시 중심 줄기로 돌아와서, 이 목사가 강조하는 생명의 충일은 일상을 초월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일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영성은 일상을 벗어나면서 동시에 일상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이다. 전자는 초월이며, 후자는 내재이다. 전자는 자유이며, 후자는 구속(拘束)이다. 기독교인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부활의 삶을 희망하면서 동시에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한다. 그래서 영성의 초월적 성격을 강조하는 이 목사는 일상 안으로 들어가는 구속의 영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곧 영성이 몸을 입는 사건(incarnation)이며, 영성이 삶에서 현실(reality)이 되는 사건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결코 관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이야’ 하고 막연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가 되어야 하고,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사과의 맛을 생각하는 것과 직접 맛보는 것, 수영에 대해 이론으로 아는 것과 물속에서 직접 헤엄치는 것, 배고플 때 그림의 떡을 보는 것과 음식을 직접 먹는 것이 하늘과 땅 차이인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2006년 6월18일)

이 목사에 따르면 하나님 경외는 경건의 훈련을 요구한다. 예컨대 구약의 나실인처럼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역시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고 풀어내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의 일상은 “욕망 대신 의미를, 육체적 쾌락 대신에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으로 바꿔야 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용어를 빌려 이 목사는 이것이 곧 “미학적 삶을 윤리적 삶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때 우리의 의식은 고양되고 우리의 영적 에너지 수준이 높아진다고 한다.(2006년 3월19일)
이 경건의 훈련은 생활의 순교를 목표로 한다. 이를 가리켜 이 목사는 “적극적인 수동성의 신비”라고 표현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방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순교의 차원에서 무화하면 그 현실이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저주스럽던 현실이 갑자기 은총과 축복의 통로로 변할 것입니다.”(2006년 8월13일) 이런 순교의 영성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의 극치이다. “처절하도록 치열한 무조건적인 사랑”(2006년 8월20일)이야말로 생명의 충일을 경험한 기독교인들이 일상에서 구체화해야 할 삶의 태도이다.
이 목사는 이런 방식으로 영성의 현실들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구체화하기 위해서 매진하고 있었다. 이는 흡사 국가 대표급 수영선수가 초보자들을 물 안으로 친절하게 안내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설교행위를 통해서 존재론적 변화의 영적 차원들을 흡사 어미닭이 병아리들에게 먹이 있는 곳과 먹는 방법을 알려주듯이 신자들에게 선포하고 있었다. 그의 설교를 접하는 다른 이들도 아마 그의 설교에 기독교 영성의 보화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해석학의 문제
그런데 아쉽게도 일 년 반치의 설교를 모두 접한 뒤에 필자는 그의 설교에서 무언가 허전하고 불편한 구석이 있다는 게 솔직한 느낌이다. 이건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라 영성에 관한 관점의 차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또는 이 목사의 영적 깊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필자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었든지 필자는 필자의 눈에 들어온 그런 불편했던 문제들을 밝힐 생각이다. 훗날 이 목사의 해명을 듣고 내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성서해석이다. 우선 이 목사의 설교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예를 들겠다. 2007년 4월9일 종려주일에 이 목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당시에 타신 나귀를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상징” 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그 사건은 예수님이 원초적 욕망의 종이 되지 않고 다스렸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나귀는 말처럼 승리가 아니라 겸손과 순종을 의미한다는 해석은 자주 들었지만 욕망 운운하는 해석은 처음 듣는다. 2007년 4월22일의 설교 “영적 탐색”(막 8:22-26)에서 이 목사는 맹인이 치유 받는 과정을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첫 번째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맹인의 단계이며, 두 번째는 사람이 나무로 보이는 단계이고, 세 번째는 모든 것을 밝히 아는 단계이다. 이런 해석을 이해 못할 것은 없다. 그는 신자들이 영적으로 높은 단계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아 성(性)에 관한 보도인 맹인 치유 사건을 굳이 영적인 단계에 관한 텍스트로 삼을 필요가 있는지 필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2007년 7월8일의 설교에서 이 목사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는 장면을 본문으로 선택했다. 모세가 지팡이를 던지자 뱀으로 변했다. 야훼 하나님은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했다. 그러자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이 목사는 이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현실적인 삶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필자에게는 그의 이런 해석이 뜬금없어 보였다. 강물이 피로 변한다는 것도 질적으로 새로운 삶, 생명으로 가득한 삶, 진정한 자유인의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알레고리 해석이다.
필자는 이 목사가 왜 성서 텍스트를 알레고리 방식으로 접근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성서에도 알레고리가 등장하고, 지난 2천년 성서해석의 역사에서 알레고리가 중요한 방식으로 다루어진 적도 있었다. 그런 방식의 해석이 어떤 경우에는 청중들의 영혼에 공명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알레고리 해석이 일반화하면 성서해석의 안전인수, 견강부회, 침소봉대를 피할 수 없다.
2006년 5월7일의 설교 “혼이 돌아오게 하소서.”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사건을(왕상 17:17-24) 본문으로 한다. 이 날은 어린이 주일이었다. 이 목사는 죽은 아들에게서 오늘 어린이들이 처한 영적인 상황을 읽을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죽은 아들의 영혼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 길은 세 가지이다. 첫째, 부모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에게 한 말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시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왕상 17:18) 둘째, 선지자에게 아이를 맡겨야 한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어머니에게서 건네받아 다락으로 올라간 장면을 가리킨다. 이에 근거해서 이 목사는 우리의 자녀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겨야 한다고 설교했다. 셋째, 아이의 전체 존재를 껴안아야 한다. 엘리야가 아이의 몸에 세 번이나 자신의 몸을 맞춘 행위를 가리킨다.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내용은 옳다. 그러나 설교는 기독교 신앙 ‘일반’을 전하는 게 아니라 성서텍스트의 고유한 맥락에서 발생한 어떤 영적인 사건을 오늘의 언어로 전하는 것이다. 이 목사의 설교에서 발견되는 알레고리 방식의 접근은 성서텍스트의 역사적 깊이를 간과하고 그것을 읽는 독자들의 현재적이고 실존적인 영성만 크게 부각시킨다. 결국 이 목사의 설교에서는 성서텍스트 자체보다는 설교자의 영성이 우위를 차지하는 셈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목사의 성서해석이 알레고리에 빠지는 이유는 그의 영성 이해가 주관적이라는 데에 있다. 물론 이 주관성은 무조건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그에게 궁극적인 삶으로부터 오는 느낌이 중요하다는 점은 앞에서 필자가 지적했다. 개인적인 영성의 차원에서 그런 경험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공적인 설교의 자리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객관적인 말씀을 해석해야 할 설교자에게는 별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설교에 관한 그의 입장을 들어보면 이런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러분! 제가 설교를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주석 책을 보면서? 신학교과서를 보면서? 설교집을 보면서? 유명한 목사님들 설교를 벤치마킹하면서? 아녜요! 저는 하나님이 제 입에 넣어두신 말씀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말만 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 제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삶에 대한 근원적인 느낌으로 다가오시는 깊이의 하나님이 전해주시는 말씀만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 준비하는 것이 아주 쉽기도 하고 아주 어렵기도 합니다. 그 깊은 느낌에 충실하면 그냥 그것이 이끄는 대로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2007년 7월15일)

이상한 일이다. 필자는 이 목사처럼 남의 설교집에는 관심이 없지만, 이 목사와 달리 주석과 신학 책에는 관심이 많다. 교회력에 따라서 주어진 성서 텍스트를 충분히 읽고 묵상한 다음에 역사비평에 충실한 주석서를 정독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설교의 주제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몇몇 종류의 조직신학 책을 펼쳐든다. 한국신학연구소가 펴낸 국제성서주석 시리즈와 하인리히 오트의 <신학해제>가 필자의 애독서이다. 주석과 신학 책을 참고하지 않는다는 이 목사의 진술이 사실을 말하는지 아니면 영적 경험의 직접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한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그가 평소에 성서 텍스트의 역사비평을 소홀하게 다룬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아마 전자에 가까운 것 같다. 서로 성격이 다르지만 일반적인 대중설교자들에게도 이런 현상이 그대로 나타난다. 그들에게 성서텍스트는 설교의 중심이 아니라 사족에 불과하다. 필자로 하여금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영성에 눈을 뜨게 하고 20년 동안 영성이라는 한 우물만 판 이 목사에게서 부분적이지만 대중설교자들과 비슷한 태도를 발견한다는 것은 당혹스런 일이다. 설교 한편을 구체적으로 거론해야겠다.
2006년 8월20일에 이 목사는 “사랑 없이는 여행하지 마!”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성서본문은 그 유명한 고전 13:13절이다. 이렇게 한 절만 뚝 떼어서 설교 본문으로 삼는다는 건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다. 어쨌든지 이 목사는 한 여름철 바쁜 가운데서도 깊은 묵상을 통해서 거룩한 삶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말로 설교의 문을 열었다. 곧 이어서 그는 감동받은 책을 소개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가 함께 쓴 <인생수업>이 그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했다. “삶이라는 이 여행을 사랑 없이는 하지 마.” 이 문장은 이 목사로 하여금 삶의 모습을 새롭게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기도에 힘쓰고, 거룩한 삶에 투신하는 경건의 노력들이 사랑과 관련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그는 사랑이 없으면 모든 은사가 무의미하다는 바울의 고백(고전 13:1-3)을 한번 인용한 다음에 계속해서 <인생수업> 이야기를 끌고 나갔다. 그 책에서 그는 ‘그냥 사랑’, 또는 ‘무조건 사랑’을 배웠다고 한다. 이런 사랑을 경험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천진한 어린이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베푸는 사랑이다. 우리가 매일 어린아이처럼 낮아져야 하고, 매일 죽어야 한다. 물론 이 대목에서 이 목사는 그리스도론적인 중심을 잃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적절하게 지적했다. 그리스도 없이 인간의 경험과 의지로만 사랑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또 하나의 다른 사랑의 속성을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것을 이 목사는 <인생수업>의 공저자 데이비드 케슬러의 경험을 전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이렇게 설교의 결론을 내렸다.

곁에 있어주는 사랑, 이것은 쉬운 것 같지만, 사실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기주의적인 풍토에 너무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교육에 너무 길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탄식하신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세대를 슬퍼하신 것입니다. 이 공감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이 공감의 능력을 회복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찔림을 보면서 우리는 잠든 감각을 일깨워야 합니다.  

그는 피리 운운하는 본문을 잘못 짚었다. 그 이야기는 무감각한 시대를 향한 예수님의 탄식이 아니라 거꾸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자신들의 요구대로 따라주지 않는다는 바리새인들의 투정이다.(마 11:16-19) 어쨌든지 이 목사는 본문으로 선택한 고전 13:13절을 설교 전체에서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지나가면서 고전 13:1-3절을 한번 인용했을 뿐이다. 대신 <인생수업>이 전체 설교 판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다음 주일에도 그는 이 책을 중심으로 설교했다. 설교 내용은 분명히 신자들의 영혼에 공명을 일으킬 만하지만, 주일공동예배의 설교 시간에 <인생수업>이 텍스트로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슨 말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고전 13:13절을 성서본문으로 선택한 설교자라고 한다면 바울이 왜 믿음, 희망, 사랑 가운데 사랑이 가장 우선적이라고 말하는지에 대해서 충분하게 설명해야 한다. 고전 13장은 소위 사랑예찬이 아니라 그리스도론이다. 그리스도만이 사랑의 원천이다. 그만이 사랑의 능력이다. 믿음과 희망은 우리의 일이지만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일, 즉 그리스도의 일이다. 사랑은 하나님 자체이다. 사랑은 곧 하나님의 존재론인 셈이다. 설교자는 온갖 미사여구와 휴먼 스토리를 근거로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를 강요하지 말고 사랑의 존재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 목사는 이런 성서텍스트의 깊이로 들어갈 생각은 없이 <인생수업>에 나오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전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했다.

칭의가 답이다.
필자가 이 목사의 설교 중에서 한두 편을 골라내서 비판하는 게 아닌가 하고 염려할 분들이 있겠지만, 그런 염려는 놓으시기 바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성서텍스트에 관심이 한참 떨어지는 현상은 그의 모든 설교에 적용된다. 노파심으로, 설교 내용이 여전히 영성의 깊이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지금 필자는 내용이 아무리 건전하고 심오하다고 하더라도 성서텍스트에 의존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중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이 목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필자가 그동안 보아온 많은 설교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소위 강해설교자들이 비교적 성서텍스트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도 역시 성서텍스트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필수적인 역사비평과 조직신학을 등한히 한다는 점에서 오십보백보이다. 이를 통틀어 말한다면, 한국교회 강단의 위기는 ‘해석학’의 부재이며, 왜곡이다.
설교행위에서 해석학이 무슨 필요가 있나, 청중들이 은혜만 받으면 되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많을 것이다. 바로 그 은혜 만능주의야말로 오늘 우리의 강단을 오염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까지도 역시 은혜를 닦달하는 도구로 떨어지고 있는 마당이니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으랴. 설교행위에서 은혜 만능주의를 용납하고 싶은 사람은 사이비 이단들의 설교행태에 대해서도 아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도 나름으로 은혜 경험이 작동되기 때문이다. 은혜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은혜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절대가치로 삼는 신앙행태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은혜는 신학적 주제인 반면에, 경험은 인간학적 주제라는 사실이 이런 문제제기에 대한 신학적 대답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론 안에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인간론을 말씀의 진리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설교자에게는 역사비평과 조직신학에 근거한 해석학이 필수이다.
이제 글쓰기를 마쳐야 할 때가 되었는데 이 글의 제목 “존재론적 변화에 대한 물음”이 별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 같다.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지향한다는 이 목사의 영성신학에 관해서 필자는 이미 동의한다고 말했다. 이제 이 목사에게 이렇게 물어야겠다. 이 목사의 영성이 말하려는 존재론적 변화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는 그리스도 중심의 밀알영성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필자는 그 밀알영성이 주관주의적 실존 차원에 머물러 버린 게 아닐까 염려스럽다. 그의 설교에서 성서텍스트의 고유한 역사적 지평이 실종되며, 단지 개인의 실존적 영성만 강조되었기에 하는 말이다. 필자의 생각에 성서와 신학이 말하는 기독교인의 존재론적 변화는 칭의론에 집중된다. 실제로는 의롭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의롭다고 인정받을 뿐이다. 여기서 예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그 사건이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우주론적 구원 행위이다. 우리는 그것을 신뢰할 뿐이다. 그 신뢰가 바로 우리의 존재론적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 변화는 우리에게서 발현 개발되는 영성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주어지는 배타적 능력이며 사건이다. 바꿔 말해, 존재론적 변화는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할 수 있다.” (기독교사상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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