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싸우는 진리 1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일컬어지는 이스라엘이 오늘날의 교회 곧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을 상징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고자 한, 그들 행보의 궁극적 목표가 되는 가나안 땅이 천국에 대한 상징이라는 것도 익히 일반화된 이야기들입니다. 가나안을 향한 이스라엘의 신앙 여정이 저 멀리 믿음의 조상이라 불려지는 아브람으로부터 시작된 후 마침내 여호수아에 의해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소망이 이 세상에서부터 이루어지기를 열망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 일이 전연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만일 우리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구하도록 가르치시는 주님의 주기도문을 기억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어찌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애굽 탈출 후 광야 생활이 거의 지나갈 무렵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세움을 받게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용감히 쳐들어가 그곳에 거하는 거민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각 지파별로 분할 받게 한 주인공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이스라엘을 이끌던 어느 지도자보다도 그의 이름이 유독 우리의 애착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향하던 중 그는 무척이나 중대한 시기에 그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었고 또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위대한 여호수아의 활약상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신앙 원리> 하나를 깨달을 수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때까지 그가 줄곧 <싸우는 진리>로써 그들을 인도해가고 있었다는 점에서 발견되어 집니다. 믿음을 잃고 광야에서 불순종의 삶을 살다가 급기야 겁을 냄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던 저 불순종의 세대와 달리 여호수아가 이끄는 젊은이들은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자기 앞에 온갖 거치는 것들을 차례로 싸워 이기는 등 그는 시종일관 주님의 전투적인 용사로써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저 유명한 지도자 모세를 통해서도 불가능했던 가나안 땅 정복이 여호수아 오직 그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를 깨우치는 여호수아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는 바 만일 그가 지금 우리의 마음 속에 <싸우는 진리> 라는 닉네임을 가진 인도자로 살아 있어 거기 수많은 생각과 애정들로부터 높임을 받고 있다면 과거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 주시고자한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효력을 발휘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의 활약상을 통해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신앙 원리 하나는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어둠의 세력과 싸우고 또 싸우기를 독려하는 강인한 진리>의 인도를 따르는 길만이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신앙 생활이 아직 광야 속에서 허우적거린다고 생각하는 자 누구든지 그곳을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지극히 사랑함에서 오는 악들과 싸워 그들을 물리치는 수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를 인정한다면 성경을 대할 때도 이러저러한 원리들을 깨우쳐주는 여느 진리들보다 오직 강한 믿음으로 싸움을 독려하는 진리들을 더 반가워하는 시각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싸우는 진리>로 상징된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는 것이야말로 성경 말씀에서 우리가 취하는 수많은 신앙 원리들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까닭에 그러합니다. 그토록 막중한 여호수아의 역할에 걸맞게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 그로 하여금 <두려움 없는 강인한 믿음으로 어둠의 세력과 싸우고 또 싸우는 강한 진리의 모습>을 상징하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과 사물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사건들, 이 모두가 사실은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설명은 다른 글들에서 수차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 모세에 이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지는 성경의 역사적 이야기 속에 담긴 의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 1:1-5)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의 겉 사람을 지배해온 고질적인 악들이 잠복해 있습니다. 그들과 맞서 싸울 강인한 힘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적과의 대대적인 싸움을 독려하며 신앙 생활을 꾸려갈 지도자격의 진리가 절실히 필요한데 이 역할을 감당키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어진 자가 바로 ‘싸우는 진리’라는 닉네임을 지닌 여호수아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젊은이들 역시 그 안에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바 그것은 아직 성숙치는 못하지만 하나님을 따르고자 함에 겁을 내지 않고 ‘싸우는 진리’의 인도를 따르려는 우리 마음 속의 여러 생각과 애정들을 뜻합니다.

이들에 의해 저 고질적인 악들이 쫓겨날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는 천국이 임하게 된다는 것이 여호수아와 젊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각 지파별로 분할 받는 모습입니다. 천국이 이 세상 삶에서부터 우리 마음 속에 자리할 수 있는 방법은 이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던 이기적 마음에서 물러나 이제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돌아오는 영혼의 실제적 변화를 경험하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길고 긴 세월 동안 우리 마음을 지배해오던 악과 거짓들이 하나, 둘 극복되고 그 대신 그들이 물러난 바로 그 자리에 주님으로부터 유입된 사랑과 진리들이 채워져 마침내 온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상태, 이것을 상징하는 그림이 바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람으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신앙 여정이 이삭, 야곱, 요셉으로 대를 이으면서 그 자손들의 번창을 맛보고 그 후 우리의 인도자 모세에 의한 애굽 탈출을 거쳐 여호수아 때에 가나안으로 진군하여 거기 살던 민족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기업으로 분할 받는 이야기의 순서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밑그림이 우리 마음 속에서 지금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을 나타내주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거기 존재하던 인물들이나 사물들 역시 우리 마음 속에서 선과 악 또는 진리와 거짓 사이의 어떤 영적인 원리나 요소들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성경을 읽기 전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거기 내재하는 진리를 좀더 순수한 빛 속에서 보기를 원한다면 먼저 시공간으로 이루어진 자연적인 관념을 벗고 그 대신 어렵지만 사물의 상태 변화를 이해하는 영적인 관념을 입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겉으로는 시공간 안의 자연적인 빛 속에서 쓰여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은 하나님 나라와 영적 세계를 담고 있어 그 본질에 있어서는 전혀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성경을 읽을 때는 누구나 자연적 빛 속에서 읽을 수밖에 없으나 이제 우리가 광야 생활을 벗어나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땅 더 깊은 지점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성경을 영적인 빛 속에서 읽을 수 있는 힘을 길러 이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지리부도 상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그 시대, 그 공간에 위치하던 가나안 땅은 오늘 지금이라는 이 시점에 우리 마음 속 사랑과 지혜의 아름다운 빛 속에 건설되는 하나님 나라로 받아들여지기가 더욱 쉬울 것입니다. 이렇게 그 신비하고 이상한 빛 속에서 성경을 들여다보면 가나안 땅은 물론 그 땅의 경계가 되는 요르단 강과 그 이전의 광야, 또 그 이전의 홍해와 이집트, 그리고 그보다 더 멀리 이스라엘의 조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처음 갈대아 우르에서 시작된 아브람의 행보 역시 그동안 우리 마음 속에서 벌어진 참으로 길고 험난했던 신앙 여정의 첫걸음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어린 시절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던 순진 무구의 마음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깨어나면서부터 길고 긴 우리의 신앙 여정은 시작이 되는데 이것이 어느 날 문득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그로 하여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자신이 지시하는 땅으로 향하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뒤 커가면서 점차 세상 지식과 영적 지식들을 배우고 이에 따라 선한 애정도 키워가다가 우리의 신앙심이 본격적으로 도약의 시기를 맞게 되는 시기는 내면에 벌어지는 여러 시험들을 맞이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시기를 인도자 모세와 그를 따르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광야 생활이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 시기, 그 시험들을 어떻게 극복해내느냐에 따라 우리 영혼의 명암이 극명하게 갈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혹 싸움에 져 그만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할 처지에 놓일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시험들을 잘 극복하여 강인한 힘을 키운 결과 마음 속 깊숙이 숨겨져 있던 자신의 유전 악들을 몰아내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내용을 신비하게도 이 땅위에 펼쳐진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에 담아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성경을 이와 같이 대한다면 먼 옛날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나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그들 주변에 살던 이방 민족들까지도 오늘날 우리 마음 속에서 나름대로의 생명을 받아 다시 살아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른 바 그들 모두는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마음 속의 무수한 생각과 애정들을 상징하며 지금도 우리 영혼에 생생히 살아 움직이고 있어요. 그들 가운데 선민으로 불려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의 차이점은 이스라엘이 우리 마음 속에서 특별히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입은 영적인 생각과 애정들을 뜻하는 것에 반해 그들 주변의 이방인들은 아직 그 빛을 받지 못한 인간의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삶에 관계하는 생각과 애정들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그 당시 이스라엘의 행적을 보면 우리 내면에 하나님과 교회의 영적인 것들을 섬기도록 특별한 선택을 입은 생각과 애정들로 상징된 이스라엘이 그만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데 골몰한 나머지 하나님을 배반하고 못내 광야에서 슬픈 운명을 맞게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고 겁을 냄으로 그분의 계명에 불순종한 결과 그들 속에 스며있던 하나님의 생명이 모두 소멸해버린 것이지요. 그 결과 이스라엘의 장성한 자들은 광야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그곳에서 쓸쓸히 인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장면의 전반적 의미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 천국이 임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할 생각과 애정들이 스스로 불순종을 택한 끝에 거룩한 땅으로의 행군을 마감하고 급기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런 상태의 생각과 애정들로서는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신 거룩한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겉으로 볼 때는 그 내용이 무척 두렵고 슬픈 내용으로 비쳐집니다. 그러나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신비롭고 무한한 말씀임을 감안한다면 그것이 때로 겉모양과 달리 더 깊은 의미로는 정반대의 상황을 그릴 수 있다는 것도 전연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리를 살피는데 이러한 자세야말로 우리 이성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의 신성이 담긴 말씀 앞에 유한하기만 한 자신을 소경으로 낮추는 겸손한 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건대 저 내용은 그리 비관적인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의 속뜻으로 볼 때 저 이야기는 우리가 광야 시험을 통과하는 가운데 불순종을 유도하던 세력들이 쇠퇴하고 그 대신 강하고 순종적인 새로운 군사들이 힘을 얻어 가는 상황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이스라엘이 모세에 이끌려 이집트라는 세상적 삶을 빠져 나온 후 곧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겠다는 첫 결심으로 홍해를 건넜지만 이어지는 광야 생활에서 많은 영적 시험들을 만나게 되고 거기서 오랜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외적으로나마 자신의 생활을 바로잡아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 반항하던 생각과 애정들이 떨어져 나가게 되는데 이것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장년층의 죽음으로 상징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이제 더 강한 믿음의 군사로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할 요르단 강을 법궤를 앞세워 건넌 후 본격적으로 내면 깊숙이 잠복해 있는 악의 세력들을 정복함으로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소망과 용기에 찬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내용은 성경을 글자 그대로의 의미만으로 대할 때는 그 빛이 많은 의혹들로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오랜 시간 광야 시험을 통하여 저 불신앙의 상태가 거두어지고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새로운 생각과 애정들이 마음 속에서 저들의 뒤를 이어 그 터를 확장해갈 때 비로소 우리는 가나안 땅을 밟기 위해 먼저 요르단 강을 건널 준비가 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여호수아와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의 용기 있고 담대한 모습입니다. 그들이 우리 마음 속에 살아있는 한 우리는 이제 웬만한 어려움이 닥쳐도 이전처럼 겁을 내어 쉽사리 불순종하는 그런 식의 신앙 생활을 허락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 속은 이미 광야의 시험을 극복하여 새로운 힘을 얻은 생각과 애정들로 물갈이가 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쟁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악과 싸우고 또 싸워야 한다는 진리를 그들의 인도자로 삼고 그 아래 강력한 전투 진영을 짜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순종한 장년들과 그들의 인도자 모세까지 모두 광야 생활에서 죽은 후 오직 여호수아와 그를 따르는 새로 태어난 젊은이들만이 살아남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르단 강 앞에 집결해 있는 장면입니다.

끝으로 첨부하고 싶은 말은 성경에서 이런 정도의 빛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경은 언제나 문자 그대로의 의미만을 그곳에 담고 있는 평범한 책이 아니라는 인식을 누구라도 가질 수밖에 없겠기에 그러합니다. 성경 속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 불려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글자가 겉으로는 이 세상에 보여지고 만져지는 시공간적인 것들을 표현하고 있을지라도 그 속뜻으로는 하나님 나라 곧 교회와, 그리고 신비롭게도 인간의 내면에서 선악간에 벌어지는 영적인 일들을 구체적으로 또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데 익숙하게 되면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 예를 들어 오늘 주제와 연관되어 언급되는 모세와 여호수아, 라합,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러 이방 민족들은 물론 그들 주변에 언급되는 이집트, 광야, 요르단강, 여리고 성, 아이 성, 가나안 땅 등의 지명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물들이 사실은 이미 흘러간 과거 속의 존재들이 아니라 현재 우리 마음 속에 거하며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써의 진리가, 비록 겉으로는 시공간 안에 갇힌 채 저와 같이 인간적이며 자연적인 것들로 제약을 받고 있지만 그 속을 영의 눈으로 들여다본다면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영적 세계, 그 생명의 세계 안에서 악과 거짓으로부터 우리 영혼을 구원해 내고 있는 진리의 힘찬 모습들을 뚜렷이 보게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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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우는 진리 2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할 때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자연적으로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혹 삶 주변에 어느 조그마한 어려움이 닥치면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급히 그 상황을 회피하려고만 드는 등 우리는 매사에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각자의 삶 주변에 일어나는 잡다한 위험들에 직면하여 거기 대항할 힘을 기르지 못한 채 줄곧 그들의 지배를 허용해온 결과입니다.

비록 마음으로는 자신이 처한 어려움이나 약함, 두려움들과 적극적으로 싸워 극복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생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된지 오래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잃어진 상태에서의 마음은 이미 자신에게 닥치는 현실적인 위험들로부터 잔뜩 겁을 집어먹은 탓에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온갖 움직임들로 분주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한껏 위축되어 있는 마음을 진정시키기에는 솔직히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힘이 없다는 것을 경험상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이 나약한 우리의 영적 상태는 과거 모세의 인도 하에 가나안 땅으로 향하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방황하면서 행하였던 불순종과 반항의 흔적들을 판에 박은 듯 그대로 재현하여 보여줍니다. 그 당시 마음 내키지 않는 억지 순종과 툭하면 불순종으로 일관하는 이스라엘! 그런 그들을 힘겹게 이끌어 가던 모세와 모세의 그와 같은 처지를 고스란히 반영해주는 하나님의 율법, 그리고 그 율법과 이스라엘 백성들간 지속되는 줄다리기!

이와 같이 허약한 그들의 믿음 상태로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약속하신 안식의 땅을 밟을 수 없는데 성경은 이를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이스라엘 장년층이 모두 광야에서 쓸쓸히 죽어간 것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또 그런 영적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역시 그들 마음 속에서 더 이상 존귀를 받지 못하고 무시되어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갈 능력을 상실해 버리는데 성경은 이를 거룩한 땅 정복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그들의 대표요 인도자인 모세가 더 이상 그들을 이끌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그만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 모세에 의해 인도되던 이스라엘처럼 아직 영적으로 성숙치 못한 처지에 있을 때는 믿음이 없어 많은 것에 겁을 내며 불순종하거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꺼운 순종을 주님께 드리지 못합니다. 또 그때는 성경 말씀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진리들만을 가려서 읽거나 자기 식으로 합리화하여 읽으며 이로써 위로를 삼기에 급급한 형태의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예로는 어렵고 힘든 세상사에 모든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주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은혜를 표현하는 말씀들은 무척이나 감미롭게 읽혀지는 반면 힘써 자신의 악과 싸우고 계명에 순종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등의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말씀들을 읽을 때면 마음은 그다지 즐거워지지 않고 무거움을 느낍니다.

모세는 그와 같이 우리가 영적으로 여린 상태에 있을 때 쉽게 눈에 들어와 우리를 이끌어 가는 진리들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서 오는 내면의 영적 즐거움보다는 단지 외향적 삶의 개선에서 취하는 기쁨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인도 받기를 원하는, 그런 시절의 우리를 이끌어가던 진리의 말씀으로써의 주님을 모세는 상징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진리의 가르침에 버거움을 느낀 나머지 툭하면 거기 반항하며 불순종하기 마련이고 이로 인해 진리 역시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딪쳐 우리를 결코 가나안 땅으로까지는 인도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인도자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정작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허락되지 않았던 것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모세는 그렇게 죽고 우리는 여호수아가 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인도해 가는 것을 봅니다. 지휘권이 교체된 것이지요. 여기 모세에게서 여호수아로 이어지는 지휘권의 교체에는 우리가 무심히 스쳐 지날 수 없는 영혼의 크나큰 변화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불순종의 대명사 이스라엘과 그런 그들의 불신앙적 상태를 이끌어 간신히 가나안 땅 눈앞까지 인도해온 참 성전의 그림자격인 율법, 그리고 그 율법을 상징하던 그들의 인도자 모세! 모세의 죽음과 함께 여호수아가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하는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 1:1-5)

여기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끌어내어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의 경계인 요르단 강 앞까지만 인도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그의 한계였던 반면 여호수아는 모든 어둠의 세력과 싸우고 또 싸우려는 강한 믿음으로 모세의 한계를 뛰어 넘고 그들을 이끌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으며 마침내 그곳을 그들의 기업으로 분할 받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가 모세에 의해 인도되는가 아니면 그 시기를 지나 여호수아에 의해 인도되는가 사이에는 이와 같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약하여 겁을 냄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더 이상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생각과 애정들이 이미 우리 마음에 우글거리고 있는 상태에서는 지도자 모세로 하여금 그들을 인도하여 요단강을 건너라는 말씀을 하나님은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겁을 내지 않고 모든 어둠의 세력과 과감히 맞서 싸우고자 하는 여호수아에게나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생활에서 거룩한 땅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모세에게 말씀하실 수는 없고 반드시 <싸우는 진리>라는 닉네임에 걸 맞는 여호수아에게 내리신 것입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 속에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어둠과 싸우고 또 싸워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 평범하면서도 특별난 진리의 위대함! 이런 힘있는 진리야말로 광야에서 방황하던 무리들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인 장본인이었으니 그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하겠는지요? 자기 악과 적극적인 싸움을 통해 그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 없이는 결단코 거룩한 땅에 들어갈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둠의 세력과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자 하는 노력 없는 교회 생활도 모두 허망한 산을 쌓는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영적 싸움이 치열하게 우리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우리가 선 곳이 광야인가 아니면 거룩한 땅인가의 차이를 낼 것입니다. 설마 우리는 격렬한 싸움 없이도 손쉽게 구원에 들 수 있다는 거짓 교리에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있지는 않겠지요?

우리가 광야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우리 신앙이 오늘처럼 형편없게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악과 싸우려 들지 않는 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임할 수 없다는 것! 평범한 깨달음이지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던지 우리는 자나깨나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미간에 표로, 손목에 기호로 새겨 놓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실제 생활에서 현실적 문제들과 부딪히면 우리는 두려움과 이기심으로 자신의 어둠과 싸우고자 하는 마음을 자꾸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싸움을 인도하는 여호수아야말로 순간순간 우리 마음 속에서 얼마나 귀중한 존재로 우러름을 받아야 할까요?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향하는 길을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면(수 3:4) 지금 서있는 곳은 저 거룩한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성경에서 여호수아와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어떤 식으로 그 길을 밟아갔는지를 보며 한치도 틀림없이 그 길 그대로를 따라가는 훈련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가르쳐주시는 그 교과서적인 가르침을 버리고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오랜 세월을 자기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해왔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그 하나 하나의 방법을 세밀히 가르쳐주며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있는데 우리는 정말 그 가르침대로 따라가려는 시도를 해본 적이 몇 번이나 될까요? 여호수아 1-3장의 기록을 보면 거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에게 명하신 많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천천히 묵상해본다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직접 가르쳐주시는 길을 무시한 채 자신의 총명을 의지하며 자기 식대로의 신앙 생활을 하는데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는지가 극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거기 가르쳐지는 내용 모두는 사실 역사 속 과거 그 상황에 처해있던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말씀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 모두에게 명하신 말씀으로 읽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그 말씀 한 구절 한 구절들을 정확히 따라가며 신앙 생활을 하려는 시도는 거의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원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제가 지적하고 싶은 이유 하나를 든다면 그것은 오늘날 그 내용이 지금 우리 마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나아가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빛의 조명을 받지 못한 탓으로 여겨집니다.

다시 말해 거기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들 각각의 이름과 지명,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주변의 일들과 여러 움직임들이 지금 우리 마음 속의 여러 영적 원리들과 요소들을 제각각 표현해주는 아주 구체적인 그림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두리 뭉실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고 그만큼 우리는 희미한 빛 속에서 신앙 생활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어쨋거나 우리 마음에 저 여호수아의 생명이 살아 있는가 하는 점이 신앙의 관건이라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우리 내면에 살아 있어 그 아래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 수만 있다면 일상의 삶에 어렵고 힘든 일들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과거와 같이 쉽사리 그들에게 마음 문을 열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에 대한 굳은 신뢰감으로 자신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적들과 싸워 반드시 이겨내리라는 강한 의지와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없이는 결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도우실 터이니 반드시 그 싸움에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적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그들의 인도자 모세가 광야에서 어떤 세월을 보냈으며 또 어찌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기서 죽게 되었는지 성경 말씀을 통해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거기까지 인도하던 말씀이 어떻게 그 빛을 잃게 되어졌는지 그 슬프고 무서운 결과를 생생히 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그의 백성들이 겪은 비참을 확연히 보고 알게된 지금 우리는 이제 모세 때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벗어나 그 모든 어려움들과 싸울 수 있는 강한 믿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그동안 오늘과 같은 상황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여호수아를 보존하여 주셨습니다. 만일 그로 하여금 우리의 생각과 애정을 통솔하도록 한다면 다시는 겁을 내지 않고 모든 약함과 두려움에 맞서 싸울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자신과 세상 사랑에 길들여진 백성들을 통솔하여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쪽으로 이끄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성경에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여호수아를 필두로 마음을 강하게 한다면 우리는 능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어느새 광야 생활을 청산하고 거룩한 땅에 들어가 그곳의 삶을 누릴 것입니다.

이제 종합해 보겠습니다. 오늘날까지 우리의 신앙을 이끌어가던 많은 진리의 가르침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값지고 보배로운 것을 꼽는다면 이는 단연 <싸우는 진리>로 이름을 떨치는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는 일이라 서슴없이 주장하고 싶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와 같은 백성들을 한 마음으로 이끌어 가나안 땅의 평화와 안식을 얻게 하는 이 엄청난 과업을 이루어줄 수 있는 자로 이제 여호수아를 발견케 되었으니 그의 이름이 얼마나 위대해 보이는지요! 지긋지긋한 광야 생활과 거룩한 평화의 땅 사이를 가로지른 요단 강을 건널 수 있는 자 오직 여호수아뿐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여호수아가 우리 마음 속에 살아있는 것이 느껴집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의 인도 하에 우리의 생각과 애정들을 한데 모아 요단강을 건너는 일에 온 주의를 집중시켜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큰 소리로 마음에 외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단강이야말로 광야와 가나안을 구분 짓는 경계라는 점에서 우리의 신앙 여정에 아주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광야에 머물러 있는 우리로서는 눈앞에 요단강을 건너는 일 외에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즐겁고 기쁜 일, 슬픈 일, 걱정스러운 일, 마음 상하는 일 등 크고 작은 일들에 집중되어 있던 우리의 생각과 애정들을 한데 모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일에 전력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머물러 있는 그곳이 저 유명한 광야가 아니던가요? 너무 오래 그곳에 체류하고 있지는 않았던가요? 이제는 그곳을 빠져 나와야 할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광야는 대개 기쁨과 평화는 없이 싫고 지루하고 고되고 힘겨운 삶의 연속이며 때로 신기루를 발견하고 그 기쁨에 젖어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만 감미롭고 달콤할 뿐 본질이 드러나면 그 속은 전연 그렇지 않은 헛된 망상이 존재하는 곳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취하던 기쁨과 그 환상에 끌려가지 말고 하루 빨리 거기서 빠져 나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나안 땅의 진정한 기쁨과 평강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요단 강 건너는 일이 그리 중대한 사안으로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우리의 존귀한 여호수아가 내 속에 죽어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 우리의 시급한 일은 먼저 여호수아를 살려내는 일입니다. 그가 살아나야 비로소 거기 요단 강도 눈앞에 어른거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각기 다른 데로 튀기 바쁜 생각과 애정들을 한데 모아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훈련을 하는 것과 동시에 여호수아의 생명을 주님께 간절히 구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히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광야 생활이 점점 깊어지는 이때 우리는 지금 서있는 곳을 서둘러 떠나야 합니다. 신앙의 위기 의식을 느끼며 철저히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할 때입니다. 만일 거기서 조금 더 지체하다가는 과거 역사 속 이스라엘이 당한 것처럼 큰 불행이 닥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광야 생활이 깊어지면 질수록 우리의 성정은 점점 굳어지기 쉬운 법! 석회석처럼 굳어지면 돌이키기가 더욱 힘들어 지겠지요. 그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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