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위기와 원인에 대한 과제
심 상 용 박사 서울신학대학교,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월드크리스챤 성경학 연구소 소장, 한국기독교보수교단협의회 보수원형찾기위원회 회장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학을 성경에 어떤 사람이 만들었겠거니 그리고 성경에서 나왔겠거니 하지만...
신학은 성경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성경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성경의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닙니다.
신학이라는 개념 자체를 만든 장본인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라는 철학자가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서구 기독교가 심각한 침몰 내지 죽었다는 현상은 이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실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기독교 역시 심각한 침체 현상에 빠져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교회 안 밖으로 기독교 위기에 대한 문제가 삼각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위기라는 것을 공감하고 있으며 위기에 대한 문제가 화두입니다. 세계 기독교계는 물론 한국기독교계도 이 같은 기독교 위기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지난 20여 년간 수많은 논의를 거듭해 왔습니다.
그 때마다 기독교 위기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다루고 있나 토론 현장에 참석해 보면 문제의 본질과 너무 동떨어진 주제를 가지고 위기의 문제를 다루지 않나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기독교 위기에 대한 문제는 단지 한국기독교계 만의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서구 기독교에서 지난 500년간 서구 교회의 화두였습니다.
지금 서구 기독교회가 치명적인 위기 속에 빠져 있는데 무려 천 수 백년의 그렇게 왕성했던 서구 기독교가 무너지는데 왜 이 같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아니 하였겠습니까?
한국의 기독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큰 규모와 대대적인 노력이 초교파적으로 진행되었지만 결국 이에 대한 과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이 같은 절대 위기 상황에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가 세계 기독교가 안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한 세계 기독교에 화두를 던져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한 두 개인이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교회가 안고 있는 과제이기에 한국교회에 이에 대한 과제를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설 때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위기와 신학의 문제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칠 때 불문율로 여기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신학의 전 과정을 거쳐서 꺼내지 않습니다.
신학을 가르치며 신학(Theology)과 신학체계(Theology frame) 내지 개념구조라는 Structure를 만들고 형성한 장본인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신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면서도 늘 이것이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는 일체 한마디도 없었고 누가 만들었겠거니 하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신학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니 신학을 졸업할 때까지 도대체 가장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신학이라는 것을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학을 성경에 어떤 사람이 만들었겠거니 그리고 성경에서 나왔겠거니 하지만 신학은 성경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성경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성경의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닙니다. 신학(Theology)이라는 개념 자체를 만든 장본인은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Platon)이라는 철학자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의 개념구조를 만든 장본인도 역시 플라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배우는 신학대학에서 플라톤이 만든 신학을 배우고 그 이름조차도 ‘신학대학’이라고 하니 당연히 플라톤이 성경을 말하는 신학을 만들었다고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대학에서 플라톤이 만든 신학을 만들었다고 말하는가요?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플라톤이 오늘날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신학과 신학이라는 개념 체계를 만든 장본인인데 플라톤은 일체 말하지 아니하고 그런 사실조차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까?
사실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신학의 모든 패러다임은 플라톤이 설정하고 창안한 개념체계를 받아 들여 거기에 성경에 있는 내용들로 포장시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과 그가 체계화 시킨 울피리스 방식과 사고 유형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지요. 대개 신학대학에서 기독교 신학 하면 바울이 만든 것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일컫기를 ‘바울신학’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바울이 축성했다는 바울 신학을 어거스틴이 이어받아 어거스틴이 정통신학을 세운 성자라고 온통 지칭을 합니다.
거의 모든 신학은 신구교를 막론하고 이 전제하에서 신학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바울 신학과 어거스틴 그리고 카톨릭과 개신교는 이 정통 위에 있다며 자신들의 계파적 라인을 내세워 자신들이야말로 정통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기독교가 말하는 신학 논리는 원형인 플라톤이 만들어 놓은 체계와 동일하면 이를 기독교가 주장하는 바울신학이라는 체계와 동일한 체계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말하는 논리대로라면 플라톤의 말한 신학과 신학 체계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의 신학 체계와 역시 동일합니다.
이는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바울 이후의 어떤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 논리대로 말한다면 당연히 바울이 가지고 있는 바울신학 체계는 플라톤이 말한 플라톤이 만든 신학과 신학 체계를 그대로 원용하여 사용한 것이므로 신학에서는 반드시 플라톤과 바울, 바울과 어거스틴, 그리고 플라톤과 카톨릭, 플라톤과 루터 그리고 칼빈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모두 플라톤이 만든 신학과 신학체계를 그대로 수용하여 신학과 신학체계를 사용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서는 플라톤이 신학을 만들었다는 것도, 그리고 플라톤(Platon)이 만든 것을 바울 신학이 형성되었다는 것도, 그것을 어거스틴이 만들었다는 계승시켰다는 것도 일체 말하지 않습니다.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신학과 신학체계 자체를 만든 장본인을 일체 말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이용한 사람들 다시 말해 바울이나 어거스틴을 기독교 신학과 신학체계를 만든 원조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소위 신학과 신학체계를 만들었다면 세계관 및 신앙관 신학관 교리관의 뼈대의 근간을 모두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논리에 의하면 바울이나 어거스틴이 그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체계 뼈대위에 성경을 포장해서 기독교 신학을 완성시켰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신학과 신학체계를 말하려면 당연히 그 신학과 신학체계를 만들고 그 구성의 근간을 마련한 장본인인 플라톤을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기독교는 왜 신학과 신학구조를 만든 플라톤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가요? 그렇다면 플라톤(Platon)이 성경을 위하여 이 같은 신학과 신학체계를 만들었는가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단연코 플라톤은 성경을 위하여 신학(Theology)과 신학체계(Theology frame)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의 민족 종교인 오르피우스 종교와 그들의 선조들이 전승해준 종교를 집대성하기 위하여 그들의 신과 종교 체계를 만들기 위하여 신학과 신학체계를 마련한 것입니다. 플라톤 사상은 철학사상으로 포장되어 그리스 로마 사상에 크게 영향력을 제공하게 됩니다.
저명한 철학자 버트란트 럿셀(Bertrant Russell)에 의하면 플라톤이야말로 고대 중세 현대를 거치면서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인물이 플라톤이라고 소개합니다. 플라톤이 이렇게 고대 중세 현대에 이르며 큰 영향력을 주었다는 이면에서 그가 만든 신학과 신학체계가 카톨릭만이 아니라 개신교 그리고 이슬람까지 그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미치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반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플라톤(Platon)이 만든 신학과 신학체계는 자체부터가 성경을 위하여 만든 것도 아니고 성경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는 성경에 대하여 알았거나 접했다는 어떤 증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가 이 신학과 신학체계를 만들고자 한 의도는 유일하며 명백합니다. 자신의 역사와 종교를 말하는 고대 그리스 종교와 철학사상체를 집대성하기 위하여 만든 신학이며 신학체계입니다. 대개 역사적으로 플라톤 하면 플라톤 철학사상으로 대변합니다. 그러나 플라톤 철학사상은 철저히 종교사상을 포함하여 말합니다. 당시에는 종교와 철학을 구분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입장에서 본다면, 신학과 신학개념체계들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이교도들의 산물입니다.
성경을 위하여 사용할 수도 없고 사용해서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방식에 의해 소개되거나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플라톤이 만들어 놓은 신학과 신학체계에 그대로 원용해서 성경을 덧입혀 놓고 그것을 성경을 위한 학문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현주소입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중세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합니다. 기독교 신학의 큰 문제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방법론에 성경을 덮어 놓고 그것이 성경을 위한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엄격히 말해 플라톤 사상을 이해하고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지 성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방법론이 아닙니다.
가령 부산을 가기 위한 도로를 만들기 위하여 아르콘을 준비했는데 그것을 인천 가는 길에 깔았다고 합시다. 그 아르콘이 깔려져 있는 것을 보고 그 길을 가는 것을 곧 부산가는 길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아무리 아르콘을 깔아 놓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가는 길은 어디까지나 인천이지 부산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원리도 같은 원리입니다. 지금 기독교가 신학과 신학체계 위에 성경을 깔아 놓고 그것이 성경이라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플라톤이 만들어 놓은 것 신학과 신학체계 위에 성경에 있는 내용들을 포장해 놓고 그것이 성경을 위한 것이라고 그것이 성경이라고 이해하라는 것은 플라톤을 이해하는 것이지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현재의 기독교는 플라톤의 사상적 체계와 플라톤의 길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지 성경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신학 안에서는 수많은 모순과 허구체계와 반성경적 체계와 주장들이 난무하지만 기독교는 이를 은폐시켜 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짓밟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성경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Platon)이 자신의 신과 신학체계를 만들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수단들에게 성경을 덧입혀 그것을 성경이라고 하는 것에는 명백하고도 분명한 모순이 존재합니다.
이 허구와 모순이 일반인들은 알 수 없지만 기독교에 대하여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서구의 천재적인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비록 전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여지를 간파하고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서구 기독교의 죽음을 초래케 한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구조 위에 성경을 덧 입혀 놓고 그것이 성경이라고 하는 기독교를 은폐시켜 놓고 있는 이 같은 모순의 구조들과 그 산물이 기독교를 죽음의 여지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기독교를 치명적인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심각한 요인은 없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기독교는 이를 알리도 없고 그것만이 성경이라고 믿고 있는 기독교는 속수무책으로 위기에 노출되어 있지만 기독교는 여전히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논리위에 세워 놓은 것만이 성경을 이해하는 정통논리라고 굳게 믿고 확신하고 있기에 기독교는 이 사실을 의심하거나 여기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것이 아니면 기독교와 성경을 지켜내지 못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여기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소위 정통신학이니 전통신학이니 하는 말들은 하나같이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체계 논리위에 성경을 덧입혀 놓고 그것이 성경이라고 외치고 있기에 언제나 공격당할 여지에 노출되어져 있습니다.
플라톤의 신학과 신앙 논리에 기독교가 말려 들어가 있으면서도 그것만이 기독교의 전부라고 맹신하고 있는 까닭에 기독교는 치명적인 함정에 빠져들어가면서도 자신들은 성경으로 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과 신학체계를 소개하는 신학대학에서 대개 자신들이 배우는 신학과 신학체계가 바울신학이라고 그리고 이것을 어거스틴이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은 바울의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라는 인물과 사상 앞에 ‘신학’이라는 말을 붙여 놓고 바로 바울 신학이라고 했으면 바울이 이 신학을 만들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사실을 전혀 해명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바울이 신학이라는 것을 만들었다는 증거가 어디에 나옵니까? 그리고 바울은 신학을 한 적이 없으며 바울 서신 자체에 나타난 그의 주장들은 신학대학에서 주장하는 사상적 맥락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뿐입니다. 바울은 신학이나 신학체계를 말한 적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바울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요? 이것은 명백한 바울에 대한 기만입니다.
바울은 신학을 한 적이 없었고 신학을 만든 장본인도 아닙니다. 오늘날까지 신학대학이나 신학교에서 바울 신학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울이 만든 것도 체계화 한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바울이 신학을 만들고 바울이 신학체계를 형성한 것처럼 포장하고 조작해서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모두 근거가 없는 조작된 사실을 가지고 바울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후에 플라톤 신학과 신학체계를 도입해서 기독교 신학과 한 교부나 학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들의 조작물들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바울의 이름을 가져다 붙여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결코 바울은 오늘날 신학을 창안한 사람도 아니고 신학체계를 형성하거나 구성한 인물도 결코 아니며 바울은 현재의 신학과 아무 상관도 관련도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바울의 사상과 궁극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말하는 신학 역시 성경과 관련이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신학체계를 분석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허구체계인가를 알 수 있는데 이는 플라톤의 울피리스 종교 방식에 성경을 덧입혀 놓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오늘날 사상계에서는 바울에 대하여 바울이 신학을 잘못 만들어 놓았다고 종종 비난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만약 현재의 기독교 신학을 바울이 만들었거나 조성하였다면 이 비난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으나 바울은 현재의 기독교 신학이나 교리신학을 조성한 바가 전혀 없습니다.
현재의 기독교 신학을 바울이 만든 적도 없고 이것을 조성한 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 대한 이같은 비난은 당장 중단되어야 하며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신학이나 교리가 바울신학이라는 가르침이나 주장은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바울 신학을 계승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근거없는 허위 사실입니다. 결코 어거스틴은 바울 신학을 계승하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은 바울사상을 계승한 계승자도 아니고 어거스틴의 사상은 바울 사상과도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구교나 개신교나 어거스틴이 바울의 사상을 계승하였다고 가르치고 있으나 이것은 엄청난 조작을 전제로 하는 주장입니다.
어느 것 하나 바울과 아무 상관없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개념 체계를 끌어다가 거기에 성경을 덧입혀 놓고 그것을 바울신학이라고 외치는 것은 성경에 대한 기만이며 역사에 대한 조작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 방식에 의해서 소개되거나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기독교는 소위 정통교리 전통신학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바울신학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모두가 근거 없는 허구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플라톤의 신학과 신학 방식에 의거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현재의 기독교 신학과 신학 체계는 그 역사적 전모나 조작의 전모가 어디에 있는지 규명되어야 하며 바로 잡아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이제 플라톤이 이교도들의 신 즉 고대 그리스의 이교도들의 오르피우스 종교를 체계화시키기 위하여 만든 방식으로 구성된 신학(Theology)이나 신학구조(Theology frame)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에 의해서 성경을 이해하는 새로운 개념체계를 연구해 내거나 이끌어 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독교와 교회는 이를 위해 모든 총력을 기울여야 하며 수많은 위기극복의 과제 가운데 이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당면한 위기극복의 최대의 과제이며 숙제인 것입니다. 2010-05-12 복음신문 |
무엇이 문제라는 겁니까? 신학 자체가 문제 라는 겁니까?
아니면 신학을 말하는 사람이 문제라는 겁니까?
아니면 기독교 전체가 문제라는 겁니까?
그리고 님의 결론은 성경을 문제 그대로 믿는 것은 괜찮구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알수가 없네요...
이단이 맞다는 것을 님이 말하는 것입니다. 잘보세요..
영남신대 김동건 교수님의 논문중 발췌된 겁니다 읽어보세요....
먼저 ‘신학’이라는 용어의 정의와 이 용어의 역사를 간략히 보자. 신학이라는 말이 성서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신학(theology)은 신(theos)과 말(logos)이라는 두 헬라어의 결합이다. 즉 신을 논리적이고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뜻한다. 판넨베르크는 신학을 신에 대한 “인간의 인식론적 노력”이라 정의했다. 이 말은 신학이 단지 종교적 선험성에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학이라는 용어는 초기 교부시대에서부터 사용되었다. 2세기 후반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기독교 신학(theologia)을 당시 이교도의 신화(mythologia)와 대조시킴으로서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이론’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가 정착하던 그리스-로마 문화권은 종교적으로 다신교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은 주변의 문화-종교적 상황 속에서 변증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이 당시는 넓은 의미에서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설명, 그의 구원사역과 섭리를 보여주고, 그에 대한 신앙적인 요청을 수행하는 작업을 의미했다. 따라서 신학은 당시 기독교인들의 삶과 연결되었고 기독교 공동체와 보다 밀접한 연관이 있는 용어였다. 기독교가 공인 받는 첫 4세기까지 신학작업은 후대에 비해 비교적 덜 체계적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박해와 교부의 시대였으며, 긴 기독교 역사에 결정적인 신학적 토대가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그 후 중세를 거치면서 신학은 주제별로 체계화가 이루어진다. 기독교가 공인 되면서 신학은 공개적인 논의의 자리로 나올 수 있었다. 니케아(325), 콘스탄티노플(381), 칼케돈(451) 같은 신학의 방향을 결정짓는 회의가 열렸고 중요한 교리가 제정되었다. 이 시기에는 신학이 이론적으로 정립되고 학문적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신학의 주요 주제들이 확립되어 기독론, 삼위일체론, 교회론, 성령론, 구원론, 종말론과 같은 교의(dogma)가 체계화 되었다. 거의 12세기까지 신학은 큰 어려움 없이 교회와 학문의 영역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해나갔다.
12세기 이후 유럽에서 대학들이 생겨나면서 신학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옥스퍼드, 파리, 볼로냐 같은 유럽의 오래된 대학들은 대체로 네 분야를 가지고 있었다. 교양, 의학, 법학, 신학이다. 교양은 대체로 입문과정이었고, 입문을 거치면 상위 과정인 나머지 3개의 영역에서 공부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시기에 신학은 학문적인 체계성을 가지고 연구하는 ‘학문의 분야’가 되었다. 신학을 지칭하는 ‘theologia’는 초기에 하나님에 대한 이론에서 기독교 전체 교리를 의미하는 포괄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이 13세기에 나타난 것도 이 시대의 흐름과 유관한 것이다. 이 시기에 신학은 학문적 토대를 인정받았지만 신앙공동체와 직결된 실천적 성격이라기보다는 이론적 특징이 더 두드러졌다. 이런 경향은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1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종교개혁가들은 신학을 단순히 학문적으로만 여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삶과 유리된 중세의 교회와 신학을 비판했고 하나님을 살아있는 방법으로 그 시대 속에서 매개하려고 시도했다. 성서에 대한 강조로 성서해석이 활기를 띄었고 신학을 학문의 한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고 실천의 영역, 삶의 영역, 역사의 영역에서 다루려는 실천지향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즉, 16세기 종교개혁에서 18세기 계몽주의까지는 중세의 대학의 한 학문적 분과에서 다루어지던 성격과 개혁가들의 신학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함께 공존했다.
위의 내용정도는 알고 비판하세요....
아니, 종교의 옷을 입은 플라토니즘이라고까지
비판당할정도로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건
많이들 알고 있지 않나요?
그뿐 아니라 서구사상자체가 플라톤의 주석이라고 말할정도인데
서구에서 나고자란 기독교가 플라톤 영향을 안받으면 더 웃기잖아요. ㅋㅋㅋㅋ 안그래요?
그런데 분명한 차이점은 있다고 하는데 제가 그걸 쓸수준은 안되고,
따로 정목사님에게 여쭤보세요.
그런데, 궁금한게 비유와 상징으로 풍부한 성경텍스트를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제대로 해석하는 걸까요?
혹시 답을 알고 계신가요?
전 기본적으로 성경은 열린텍스트라고 생각해서,
결론이 없다고 보거든요.

이건 토론이 아니고 시비입니다.
그걸 구분 못하시나요?
이곳은 님의 멍석이 아닙니다. 남의 멍석에서 님의 주장을 펴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님께서 님의 주장을 하시고 싶다면 님의 멍석에서 하시고, 님이 직접 추수하셔서 하세요.
이건 예의가 아닙니다. 차라리 증산도나 대순진리회사람들처럼 길거리에서 하시던지요.
예의와 토론을 구분 못하시는분은 아니실듯 하니 자진해서 삭제하시고 나가주시기를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님이 올린 자료에도 나오지요?
○ 먼저 ‘신학’이라는 용어의 정의와 이 용어의 역사를 간략히 보자. 신학이라는 말이 성서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신학(theology)은 신(theos)과 말(logos)이라는 두 헬라어의 결합이다. 즉 신을 논리적이고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뜻한다. ○
판넨베르크는 신학을 신에 대한 “인간의 인식론적 노력”이라 정의했다.
이 말은 신학이 단지 종교적 선험성에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학이라는 용어는 초기 교부시대에서부터 사용●되었다.
창조주를 논리적으로 학문적으로 연구?
이게 가능한가요?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 초월자를 연구 분석? 한다고요?
얼마나 오만하고 건방진 태도입니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죠?
자식된 도리로서 아버지를 논리와 학문적으로 연구한다고요?
이게 말인가요 막걸린가요^^
그래서 제가 기독교의 신학자들 교부들이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질타한겁니다.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학문적으로 연구한다는 신학적 발상이 과연 성경과 관계가 있을수가 있나요?
그리고 신학이란용어가 초기 교부시대부터라고 님이 인용한 논문자료에 기록된것처럼 초기 사도님들과 함께했던 공동체완 전혀 상관 없다는 겁니다. 그당시 믿는 무리들, 기독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초대교회 당시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용어가 신학이란것입니다.
내 아버지를 말하면서 논문이나 학문적으로 교리적으로 누군가에게 전한다는게 자식된 도리로서 합당한가요?
결국 기독교는 스스로 자식인것처럼 주장만하지 아버지에대한 자세나 태도로만 보면 이건머...전혀 아니자나요...
제가 주장하는게 시비거는것처럼 보인다해도.. 진실을 알려고 노력하는게 합당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차라리 무수한 신학적논문이나 교리나 이론보다는 아버지께 감사의 편지를 올리는건 어떨까요^^
자신의 성경해석을 내놓으려는 건 아니시죠?
개인적으로 이댓글까지는 충분히 가질 수 있는
타당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일부분 동의하고요.
그런데 아후에 혹시 새로운 성경해석을 내놓으며
서프라이즈하게 만드실 계획이면 날도 더운데 화낼겁니닼ㅋㅋ
미리 말씀드리면 님이 해석을 하는 순간
님은 이 댓글과 바로 모순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인간은 해석하는 동물입니다.
해석없이 세상을 인식할 수 없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쨌거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면 이미 하나님에대한 해석과 인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님의 말처럼 이성으로 알수 없다면
'도가도 비상도' 같은 경우고
님이 말하는게 이런 수준이라면
저나 다비안 모두 수긍할 수 있을겁니다.
그런데 님이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 순간
님은 플라톤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상과 함께 내놓아야 할거에요.
예를들어,
하이데거나 들뢰즈 화이트헤드 같은
사상가들과 어깨를 겨룰만한 해석의 틀을 제공하셔야 합니다.
위의 심박사님은 신학이론의 동기 중 하나가
변증에 있다는 걸 간과하신 듯 합니다.
복음이 소아시아, 유럽으로 건너가면서
하나님,예수,성령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인간의 머리로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구실로
강건너 불구경하듯 팔짱만 끼고 앉아 있다면
그건 겸손한 게 아니라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을 거치면서 생성된
다양한 기독교 신학이론들은 어떤 이슈에 대한
절대적 선언으로서 법칙이 아닙니다.
최선일 뿐이랍니다.
이론과 법칙을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요?
법칙은 바뀔 수 없는 것이라면
이론은 언제나 열려있는 거지요.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교체될 수 있답니다.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 사람들이 많은것 같아요. 철학을 하면 하나님을 철학이란 안경을 쓰고 보고 신학을 하면 신학이란 안경을 쓰고 보고 인문학을 하면 인문학 안경을 쓰고 보고 장사를 하면 장사를 하는 안경을 쓰고 보고.. 자기가 보는 대로 생각을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말이며, 그런 방법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극히 일부를 볼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볼수는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없으면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보게해 주지 않으시면 결국 하나님 근처에도 가지 못합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중의 한명인 니고데모도 거듭남이 무엇인지 이해를 못하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철학을 하시던 신학을 하시던 그것만으로 하나님을 알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거듭나셔야 철학도 신학도 그 무엇도 하나님을 아는데 도움이 될수 있는 것입니다. 까만 안경을 쓰고 하늘을 보면 하늘이 검게 보입니다. 하지만 하늘은 검지 않습니다. 플라톤을 공부하시면 플라톤의 시각으로 성경이 보일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성경의 전부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먼저 거듭니지 않으면 믿음이 없으시면 다른 것들은 다 쓰레기입니다.
그러나 수박인 줄 알고 사온 것이 호박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호박을 수박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맞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 못 된 것을 찾은 것입니다.
기독교는 성경과 무관한 종교입니다.
나귀가 금덩어리를 등에 지고 갑니다.
밥이 생깁니다.
이 나귀에게 금의 가치는 밥입니다.
기독교는 성경을 등에 지고 갑니다.
돈이 생깁니다.
이 기독교에게 성경의 가치는 돈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교리에서 벗어나 성경에 집중하시면...
이러한 복음전파의 원리와 그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의 생각이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인간의 생각과 같겠습니까?
어떤 인간들은 평생 성경도 한 번 제대로 안 읽고
혼자서 잔 머리를 굴리다가 어느날 문득 떠오른 어리석은 생각에
스스로 뻑가서 혼자만 특별히 깨달은 진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자칭 대단한 도사라 생각하며 성경을 자기 생각에 뜯어 맞추며
여기저기 가르치러 다니기에 인생이 바쁩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어느날 구원 받았다는 허황된 기쁨에
눈물 콧물짜며 울었다는 간증이 필수입니다.
천국과 지옥에 가봤다고 특별한 기적체험을 간증하는 자들과
그 근본과 가증스러운 목적이 같은 것입니다.
사도들께서도 끝까지 달음질하시는 경주를
이런 자들은 보리수나무 아래서 갑자기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때로는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이 만든 설화다, 구전이다." 주장하니
당연히 그자들이 "나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세상 어디에서도 근거 조차 찾을 수 없는 미친 소리가 분명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믿는 척 하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미친 인간인지를 조금도 느끼지를 못합니다.
불교나 천주교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자들은 운이 좋아서 기독교인이지, 기회만 있었다면 풍수지리나 떠들며
돋자리깔고 사람들 눈치를 살피며 점이나 보는 처지였을 것입니다.
독사들을 빼고는
짐승도 그런 행동은 절대 안합니다.
* 오해방지 *
예수님을 알게 된 기쁨으로 감격하셨던 분들의 감동에 대하여 부정 하는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