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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영성

김동현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동네의 작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장년교인 300명 정도의 규모였으니까 그리 작은 규모는 아닌 지도 모르겠군요. 아무튼 그 교회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말엽에 분쟁을 통해 2개의 교회로 갈라졌습니다. 신앙을 갖게 된지 1년 남짓 된 시점에 저는 교회가 서로 싸우고 상처 입히고 끝내 서로 등을 돌리고 헤어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땐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싸워야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었죠. 그 질문에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저는 어른이 되었고,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판사가 되었습니다. 판사가 되고 보니 교회 사람들끼리 싸움이 붙어 재판까지 오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세상엔 여러 종류의 재판이 있겠지만 가장 화해가 어려운 종류를 들라 하면 친족들 간의 분쟁과 종교가 관련된 분쟁이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개 친밀한 관계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므로 가급적 재판보다는 화해로써 분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할 텐데요, 일단 재판까지 왔다면 그건 다른 화해의 수단을 모두 다 써봤을 것이라는 의미도 되구요, 종교 관련 재판의 경우에는 저마다 자기가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서로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자기야말로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옳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명징하게 파악될 수 있는 개념일까요. 물론 때로는 한쪽의 주장이 매우 옳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교회 내부의 분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JMS 사태는 어떤가요. JMS 신도들을 빼놓고, JMS의 가르침이나 행태가 옳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제가 관여했던 재판 중에 JMS와 엑소더스(탈출자 모임) 사이의 분쟁이 있었는데요, 엑소더스 대표가 JMS의 여성교역자들을 상대로 명예훼손을 했다고 하여 해당 여성들이 그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재판에 제출된 기록들을 살펴보니 JMS의 성적 타락과 신도 착취는 사실인 걸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재판부는 엑소더스 대표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했습니다. 목적은 옳았지만 방법이 틀렸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는 매우 저열하고 비속한 언어로 상대방 여성들을 비방하고 조롱하고 난도질했습니다. 아무리 사교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짓밟혀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JMS에 반대해 투쟁하는 것은 매우 옳은 일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저는 이런 질문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엑소더스 회원들의 영혼은 건강한가요? 그들은 과연 영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런 의문은 교회의 분쟁 전체에 똑같이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다비아 회원들에게 한 번 물어볼 수도 있겠지요. 다비아도 교회의 개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의 언어들이 자주 등장하는 편이지요. 물론 옳음을 지향하는 것이 그른 것이 아닙니다. 공의를 물같이, 정의를 하수와 같이 흐르게 하여야겠지요.

  그러나 그처럼 옳음을,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나아가 옳은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 항상 우리의 영성을 담보해 줄까요. 교회의 분쟁 끝에 법정에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의 언어에는 대개 분노와 증오가 서려 있습니다. 한 번은 교회 분쟁에서 폭력을 휘둘러 구속된 사람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한 일이 있는데, 형을 선고하고 들어가는 순간 등 뒤에서 피고인이 자신을 고소한 반대파 교인들을 저주하는 말들이 들리더군요. “하나님이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은 어떤 종교적 확신이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런 종교적 확신이 우리를 영적인 삶으로 인도해 주나요?

  종교적 확신을 두고 말하자면,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이겠지요. 하지만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과연 영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들이 과연 행복할까요? 물론 그들은 행복하다고 믿고 있겠지요.

  한국적 개신교의 토양에서 자라난 저도 예외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제가 어릴 적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는 상당히 보수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설교시간은 늘 성도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곤 했습니다. 저는 늘 치열하게 죄의 문제와 올바른 인생을 고민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민들이 나를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늘 다른 사람들을 향해 있다는 게 문제였지요.

  제가 예전에 여전도사님과 교제한 적이 있었는데요, 전 그 사람이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 놀라서 좋아하는 마음이 싹 달아나 버리더라구요.

  담배 하나에 사랑이 달아나 버릴 정도로 제가 그렇게 모범생이었습니다. 모범생 콤플렉스에 시달리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런 모범생으로서의 삶이 저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했습니다. 항상 올바른 가치를 추구하고, 올바른 삶을 살려고 했는데, 정작 저의 삶은 외롭고 불행했지요.

  10대에서 20대에 이르기까지 저는 늘 고독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고독하다고 느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저를 피하고 좀 싫어했던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기 직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교회의 후배 여학생에게 편지를 받은 적이 있지요.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싫어한다는 그런 내용이더군요. 그 편지를 한밤중에 받았는데요, 집에 돌아가는 길에 편지를 펴서 읽어보다가 다리가 풀려서 휘청 넘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좀 외곬이고 이상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제 나이 스물일곱 살 때, 그때가 사법연수원 2년차였는데요, 연수원에서 만난 신우회 선배가 책을 한 권 권해주었습니다. 헨리 나웬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사람의 책이었습니다. 책을 펼쳐 읽어보니 어려운 단어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책에 담긴 영적 깊이는 단어의 무게를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책을 이해하기 위해 언제나 3번 이상을 읽어야 했습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때 그 시절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헨리 나우엔이 고독하고 상처 입은 스물일곱 살의 청년에게 던져준 감동은 매우 크고 깊었습니다.

그가 이야기한 연약함의 영성은 늘 완벽을 추구하고 이 세상에 대한 개혁의 열망으로 가득한 젊은이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헨리 나웬은 권력 중에 가장 나쁜 것이 바로 종교적 권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권력 있는 사람은 두려움의 대상이지, 친밀함의 대상은 아니지요. 그는 세상의 약자들이 위로를 찾아 교회에 왔다가 자신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려는 목회자와 신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상처를 입고 떠나간다고 말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이 세상에 가장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던 하나님을 상기하며, 연약함의 영성을 제안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연약함의 모습을 입고, 더 가까이, 더 친밀하게 다가오기를 원하신다고 합니다. 그런 친밀함의 모습으로 세상의 약자들에게 위로를 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어떤 이를 바꾸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기보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웬은 지금 우리가 서로를 바꾸고자 섣불리 다가가는 것은, 우리 마음에 십자군을 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요. 대한성공회 차기 서울교구장 당선자 김근상 신부님은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 “성공회 특성 중 하나는 '~를 해야만 한다', '~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쓰지 않는 점이다. 사람은 모든 일을 할 가능성이 있다. 교회는 '이러면 안 돼'보다 '관용'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헨리 나웬의 연약함이란 사역자가 인간실존의 바탕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질서를 규정하고 만들어가기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실존적 현실을 깊이 이해하고, 그 바탕 위에서 영적인 근원으로 다가가는 방법을 모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연약해 지는 것은, 그저 나약해 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를 비움으로써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을 초대할 수 있다고 그는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연약해 질 때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요. 이게 단순한 종교적 수사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요? 그런 분이 계시다면, 헨리 나웬이 품은 영적 깊이를 제 언어가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결과이겠지요. 물론 짧은 시간에 그의 영성을 충분히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생각은 여러 주제를 가지고 천착해 들어가지만, 그 모든 생각은 다 한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헨리 나웬이 ‘연약함’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질서에 무관심하고 스스로 제안하는 질서를 강요하는 데에서 영적인 불균형이 발생한다는 생각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저작 <춤추시는 하나님>이나 <모든 것을 새롭게>는 하나님의 질서를 발견하고 그 질서에 순응할 것을 권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늘 하나님의 음악이 흐르고 있지요. 그 음악은 때로 슬프게도, 또 때로 즐겁게도 흘러갈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음악에 맞추어 스텝을 밟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의 슬픔은 변하여 춤이 될 것이라고 그는 얘기합니다.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는 당신은 행복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그 슬픔의 자리로 나아가, 그 사람이 슬픔의 기억에 직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사역자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슬픔의 자리에서 억지로 끌어내는 것이 함께 슬퍼하는 것보다 편리하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진정으로 영적인 삶을 보장해 줄까요.

‘연약함’이라는 생각은 그의 ‘영적 발돋움’이라는 주제에도 닿아 있지요. 그는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로,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동료 인간들에게로, 그리고 하나님 그분에게로 우리가 영적으로 발돋움해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숙명 같은 고독을 안고 살아왔던 제가 가장 기쁘게 받아들였던 것은, 동료인간들에게로 발돋움하는 방법, 바로 환대(hospitality)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늘 서로에게 느끼고 있는 적개심을 환대로 바꾸는 것이 영적인 발돋움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세 명의 낯선 사람을 맞아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을 때, 사렙다 과부가 엘리야에게 먹을 것과 잘 곳을 마련해 주었을 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길에서 만나 같이 가던 낯선 이에게 하룻밤 같이 묵자고 청했을 때, 그들이 만난 이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알려 주는 손님으로 드러납니다. 적개심이 환대로 바뀌면 무섭게만 느껴지던 낯선 사람은 갖고 온 약속을 주인에게 알려 주는 손님으로 바뀔 수 있다고 헨리 나웬은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환대할 수 있을까요. 나우엔은 자기의 모국어인 네덜란드어 하스토레이하이트(gastorijheit)에서 그 의미를 찾습니다. 그 말은 손님에게 자유를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변화시키고자,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손님을 꽁꽁 묶어놓는다면 그것은 환대가 아닙니다. 그것은 때로 좋은 책이나 이야기나 일로 교양 있게 협박하는 형태로 전개되기도 합니다. 나우엔은 진정한 환대는 손님으로 하여금 무서움에 질린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어서 그로 하여금 뿌리 있는 말, 풍성한 열매가 맺히는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려운 얘기를 했지만 결국 쉬운 말로 하면 따뜻한 배려를 얘기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손님을 포박하고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계획에 손님들을 가두어 놓고, 그 부속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손님을 환대하고, 그에게 자유를 줄 수 있을까요. 따뜻한 배려라는 것은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 걸까요. 나우엔은 생각의 가난과 마음의 가난을 이야기합니다. 생각의 가난이란, 인생과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 없음을 점점 인정해 가는 자세라고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또한 확실한 무지(docta ignorantia)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어떤 이가 경험한 특별한 종류의 종교적 체험만이 아니고, 하나님을 어떤 개념이나 견해, 신념 속에 잡아 두거나 그 속에 담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마음의 가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음을 고백할 때, 진리에 대한 겸허한 자세를 보여줄 때, 우리에게 찾아온 손님은 비로소 두려움을 거두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비하신 풍성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를 통제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철저히 무력함 속에 자기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친밀한 교제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어쩌면 이런 얘기들은 세상에 나와 있는 처세론 책들에도 널리 나오는 내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우엔의 글에는, 그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상처받았던 경험을 이야기하고, 스스로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런 상처와 고통이 또 다른 어떤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치유의 재료로 사용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의 글을 읽어가면서 그의 사랑의 언어들로 인해 깊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제가 생각의 가난을 배워가기 시작하면서, 저는 점점 사람들의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 여러분은 제게, 그렇다면 네가 얘기하는 영적인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이냐?라고 물어보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떤 대답을 드릴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무책임한 말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진정한 영적 가치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점에 존재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가도 비상도의 원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고, 그 궁극의 지점을 확고하게 잡아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끊임없이 그 지점을 모색해 나갈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정치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옳은 방향성을 견지하고 있다고 하여 확보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헨리 나웬의 언어들이 그처럼 강한 호소력과 능력을 갖는 것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에 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쩌면 바울이 고전 13장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이란 영적인 가치 중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 사랑의 본질에 관해 우리가 구체적인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사랑이 우리의 삶을 영적이게 한다는 말은 할 수 있겠군요.

판넨베르크의 설교를 보니, 사랑의 능력에 관해 감동적인 서술이 나옵니다. 헨리 나웬의 ‘생각의 가난’과도 닿아 있는 얘기인 것 같아서 한 번 읽어드리는 것으로 오늘 제 얘기를 마칠까 합니다.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부여된 은사들은 우리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과제로서 우리 손에 넘겨졌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 우리의 은사는 우리가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를 통해서 생명을 얻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창조한 사랑은 우리와 우리의 모든 은사를 철저하게 영적으로 만들며, 우리를 살아있게 만듭니다. 사랑만이 완전하며 영원합니다. ....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의 자기집착을 극복해 주시는 그 길에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이 자기집착에 사로잡히지 않은 곳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 군데 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사람만이, 지난 삶을 벗어버리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가슴에 충만하게 공급하시는 성령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랑이 구체적인 모습을 획득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사람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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