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들어 어떤 일련의 사건들을 겪어가며 느끼게 되는 것은, 부부 사이에 한 사람만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행복해지지 못한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슬픈 얘기지만, 다른 진실은 없다.
그런 감수성, 그런 동일화라는 것은 속한 그룹이 커져갈수록 옅어진다. 가족들의 아픔보다 직장동료의 아픔이 덜 아프게 느껴지고, 같은 도시의 사람들, 같은 나라의 사람들로 넘어가면 벌써 남과 같이 되기 마련이다. 지구 한쪽에서 단 1달러가 없어서 굶어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지구의 다른 한쪽에 사는 같은 '세계인'들은 그 아픔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배부르지 않은 한끼 식사에 수백달러를 쓰기도 한다. 사실 그처럼 타인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나쁘고 나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타고난 감수성이 그정도이니 어쩌겠는가, 라고 항변하고 싶은 사람도 있지 않을까.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것, 그것은 보다 많은 짐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다 더 예민하게 자신의 것처럼 느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감소시키고자 하는 노력에 보다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나서게 된다. 그것은 세상죄를 지고 가는 구세주를 떠올리게도 하는, 어쩌면 인간에게만 주어진 어떤 필연적인 대속적 부담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인도적 헌신이 가능해지는 원인은 어떤 철학적, 논리적 논거보다도, 감수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직관적인 동력이며, 어떤 윤리적 논거에 의한 등떠밈보다도 강력한 동력이다. 이미 자기의 것이 되어버린 아픔을 감쇄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도적 헌신이 갖는 본질이 아닌가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인도적 헌신을 단순한 이기적인 발로일 뿐이라고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나는 그것의 중요성을 안다. 또한 나는 세상에 산재한 고통을 아프게 받아들인다. 너희는 나아가 그 고통을 구제하라고 하나님은 명령한다. 그러나 그 명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감수성 있는 양심은 또 얼마나 드물게 존재하는지.
성경은 예수의 마음을 이렇게 기록한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이 마음, 이 감수성야말로 바로, 예수를 구세주 되게 한 동력이었을 것이다. 도탄에 빠져 있는 나를 구원할 위로라는 것도, 기실은 바로 그 마음에서 발원하고 있지 않을는지. 그러므로 예수의 뒤를 따라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바로 이 마음을 권하고 계신 것이 아닐는지.

목사님께서 염려하시는 바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감수성이란, 아마도 '객관'에 대치되는 '주관'을 의미하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각자의 '주관'이 강조될 때 생기는 독단은 우리를 무질서와 혼란으로 이끌어갑니다. 헤겔이 칸트의 도덕철학이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내용이 없음을 지적하며 비판한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이성의 중요함을 생각하되, 감수성이 결여된 지식이란 생동감을 잃을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구원이란 것도, 결국은 세상에 산재한 아픔을 예수님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그 감수성에서 촉발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오늘은 뵐 수 있을까 했는데, 오후 일정이 너무 딜레이되는 바람에 참석을 못했네요. 다음주에는 꼭 뵙도록 하겠습니다.















이방인



김동현 님,
감수성이라는 단어가 위 글에서는
새로운 차원으로 돋보이는구료.
나는 원래 그 단어를 객관성을 상실한 채
개인의 주관적 감정에 횝싸이는 상태로 생각했었소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인간 구원의 단초로 해석되다니
좋은 통찰인 것 같소이다.
약간 다른 관점으로 한 마디 한다면
그 감수성으로 인해서
우리가 부질없고 소모적인 논란으로 빠져들 때도 많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 하오.
사진이 아주 핸섬하구요.
비오는 주말, 좋은 주일을 맞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