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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지식과 구원 – 지식에만 머물러 있는 신앙의 위험성


내가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이 벌써 반백 년이 넘었다. 내가 처음 교회를 다닐 때 그때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참 많이 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많은 책이 나와 있지도 않았고 공부를 많이 한 그리스도인들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당시 대학 진학률이 20%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어르신들은 초등학교도 겨우 나오신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말씀보다는 기도가 우선이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이 새벽이면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던 DNA를 물려받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 당시 장로나 권사는 새벽 기도에 열심이고 저녁이면 교회에 나와 홀로 기도하시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영적인 능력이 뛰어난 분들이 많았다.

그러다 110만 명이 참석했던 빌리 그래함 1973 여의도 광장집회와 이듬해인 1974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32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렸던 ‘엑스플로 ’74’와 같은 한국교회 최대 집회 이후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발전하여 많은 지식인들이 교회로 들어왔다. 그 이후 80년 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책들이 번역되어 나오고 대학 진학률도 높아지면서 교회는 이제 지식인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 공부가 유행하게 되면서 성경 지식의 추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도보다는 성경 지식 추구가 오늘날의 대세이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 믿음과 행함, 앎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이어서 성경 지식에만 치우쳐서는 안 된다(딤전 4:5). 성경 지식만 추구하는 그것은 어쩌면 사도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성경의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쓰여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적 앎과 히브리적 앎은 차이가 있다. 헬라어로 말하면 기노스코(ginosko)와 오이다(oida)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기노스코(ginosko)는 외적이며 객관적인 지식을 가리키고 오이다(oida)는 내적이며 주관적인 의식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외적이며 객관적인 지식으로도 알지 못했지만 자신은 아버지를 내적이며 주관적인 의식으로 알고 있다고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다(요 7:55).

인간의 이성은 자율적, 자충족적이고 본질적으로 선하며 그 이성을 통하여 지식과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것은 그리스적 앎이다(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반면에 참된 지식이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또는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믿는 것은 히브리적 앎(성경적 앎)이다(잠 1:7, 9:10).

이것은 ‘안다’라는 의미의 차이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리스적 지식관에서는 지식이란 차가운 이성적 추론의 결과 얻어진 관조적인 것이나 명상적인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히브리적 지식에서는 행함과 유리된 관념적이고 사변적 지식은 아직 아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지식의 결과로 행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식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앎과 더불어 실제적인 행함이라는 불가분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안다’라는 히브리어 ‘야다(yada)’는 인식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뿐 아니라 대상에 대한 책임이나 대상과의 관계성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보여주는 지식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행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헬라 철학은 이원론적이나 성경적 세계관인 히브리적 성경관은 일원론적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이원론적 관념이 팽배하다. 이원론은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가 서로 독립된 실체라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몸은 물리적 세계에 속하지만 정신은 그와 다른 독립적 실체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이원론자 데카르트는 정신(영혼)과 물질(육체)을 별개의 실체로 간주했다. 이런 이원론이 기독교계에도 영향을 미쳐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거나 이 세상은 악하고 저 세상인 천국은 선하니 구원받아 천국으로 가야 한다는 것 등이다.

기독교계의 이런 이원론적 사고의 문제점은 1) 신앙의 개인주의화 2) 교회 중심의 종교 생활에만 열심을 내는 신앙의 형식화를 조장 3)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신앙의 형식화(구원의 확신 공식을 강조) 등이다. 기독교계의 이원론적 사고의 문제점은 바울과 야고보의 사상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의 사상이 실제로 믿음만을 강조하는 이원론적이지 않는데도 많은 신학자들이 그렇게 몰고 갔다.

종교 개혁가 루터는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행함을 강조하는 가톨릭교회에 맞서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행위를 경시했다. 그런가 하면 야고보서의 기록자는 믿음을 강조한 나머지 행위를 외면하는 개신교인들에게 믿음뿐 아니라 행위도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은혜와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행위를 외면하다가 지금 한국교회는 부패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심지어 사회인들조차 한국교회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개독교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예수의 율법’, 즉 ‘사랑’의 행위를 믿음보다 더 강조하기도 했는데, 지금 교회에서 사랑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런 때 한국교회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약 2:26)이라고 말하거나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약 4:17)라고 언급하면서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진지하게 묵상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루터가 야고보서에 찍어놓은 낙인을 지워야 한다. 야고보는 낙타 무릎이라고 할 정도로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믿음과 행함으로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이었다.

바울 서신은 유대교와의 싸움이었다.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이삼서, 유다서 등의 공동서신은 로마라는 거대하고 적대적인 세상을 상대해야 했던 교회가 남긴 성경이다. 공동서신은 세상 속의 교회라는 거대한 주제 아래 하나의 일관된 신학으로 모아질 수 있다. 세상의 유혹과 위협 앞에 서 있는 교회에게 요구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스스로의 힘이나 어떤 이념이나 원리로 이 세상을 변혁시키고 뒤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공동서신이 세상 속에 있는 교회, 세상을 맞닥뜨린 교회에게 요청하는 것은 결국 진리와 사랑의 문제에서 승리하라는 요구라고 할 수도 있다. 야고보서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사랑하여 시험에 들지 말라는 것이다. 베드로전서식으로 말하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나라를 받은 거듭난 심령의 교회는 오직 그 많으신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의 사랑 안에서, 이 세상을 십자가의 길 곧 선한 양심의 길로 가시며 불의한 자들을 하나님 앞에서 인도하신 그리스도를 좇아 제사장의 임무를 다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베드로후서식으로 말하면, 결국 사랑에서 그 정점에 이르는 하나님의 본성으로만이 이룰 수 있는 사명이다.

공동서신 중에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람은 바울의 가르침을 극단적으로 몰고 간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바른 신앙의 길로 이끌려고 이 글을 썼다. 그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으니까 행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주장했다. 일종의 도덕(율법) 폐기론자들이다. 이들이 요한계시록에는 니골라당(계 2:6, 15)으로 나온다.

우리는 야고보서를 읽으면서 믿음과 행함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새에게 두 날개가 필요하듯이 믿음과 행함은 그리스도인의 두 날개이다. 믿음과 행함, 즉 지행(知行)은 호진(互進)해야 한다. 믿음과 행함, 즉 앎과 행함은 두 다리와 두 팔과 같이 하나가 나아가면 또 하나가 따라오는 것과 같이 앎이 나아가면 행함이 뒤따르고 행하고 나면 앎이 뒤따라야 한다. 한 번 믿고 한 번 행하고 한 번 행하고 한 번 믿고 이것이 반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믿음과 행함은 그리스도와 존재론적으로 일치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진리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지식도 실천과 연결되지 못하고 이론적인 지식으로 남게 된다면 의미가 없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단순히 세계를 보는 정적인 입장으로만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생동감 있게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날 때 바른 지식, 살아 있는 지식이 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이 지식적인 것으로만 남게 되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은 공의와 인자와 겸손에 관해서 아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미 6:8).

이 시대는 도덕적 시궁창에 빠져 있다. 그 속에서 성도들 역시 신앙적 가치관을 바로 세우지 못한 채 길을 잃고 함께 헤매고 있다. 성경적 지식은 많아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처럼 삶이 따르지 못하는 성경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앎이란 입으로 말하기보다 몸으로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스스로 돌아보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시대적 책임이 무엇인지 알고 실천해 나가야 한다. 기독교인으로 올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세울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해 나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그 지식이 거짓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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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25.04.18 20:39:31
*.45.99.73

정성스럽게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복사 넣기 착오로 중복되는 대목이 있으니까 정리하셔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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