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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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님의 레이다망에 포착되어, 다비안들에게 추천된,
두 개의 소설 <혀>와 관련된 김영현의 글 “문학이여, 나라도 먼저 침을 뱉어 주마 - 이것은 '표절 시비'가 아니다” 를 저도 찾아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간격을 두고 두 개의 소감을 썼습니다.
첫 번째 것은 그 글을 읽은 첫날 저녁 반가움과 감동에 젖어 제 개인 공간에 메모해 둔 글입니다.
두 번째 것은 오늘 그의 글을 다시금 읽어보며 느낀 새로운 생각을 두서없이 늘어놓은 글입니다.
제가 읽어봐도 다분히 정신분열적이지만
그 둘 사이의 차이와 불안이 바로 제 마음의 솔직한 모습이기에
다비안들의 너그러움을 믿고 옮겨봅니다.
**************** 첫 번째 소감 (10. 14)
80년대를 돌아봅니다.
눈에 보이는 독재와 항거해 싸우며,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언어의 힘을 믿으며 문학의 제단에 자신의 영혼을 던진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또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도 그들이 쓴 문학작품들로 인해 스스로 만들어낸 거친 희망의 불빛을 품으며 세상 속으로 뛰어든 이들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요.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어쩌면 더 많은 이들이 깊은 패배감과 죄책감에 쫓겨 자신만의 은폐된 방에 숨어서 회색빛 시간을 버텨내기도 했었던 시절....
고백하자면 저는 세 번째 부류에 속했었습니다. 그랬기에 앞쪽의 두 부류의 인간들에게 부채감과 피해의식을 동시에 품곤 했었습니다.
그러한 시절의 끄트머리에서 누구보다도 찬란하게 타올랐던 불꽃이 바로 김영현이었지요. 그의 소설은 당대의 여타 민중소설들, 더욱이 설익은 선동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그 지향성만으로 씩씩하게 생산되곤 했던 일부 함량미달의 작품들과는 격이 달랐습니다.
그는 역사의 진보와 인간의 정신을 신뢰하면서도 민중운동계열이 보여준 80년대적 일방성과 경직성을 정직하게 반성하고 고민하는 글을 썼으니까요.
그러했기에 당시의 문단과 운동권 진영에 적잖은 충격과 논란을 던져줬을 뿐 아니라 (90년을 전후한 이른바 ‘김영현 논쟁’) 시대적 죄책감과 개인적 성향 사이에서 질식 직전에 있던 나와 같은 회색인들에게도 숨통을 열어준 존재였습니다.
어두운 카키색 바탕에 거친 목판화로 검은 색 산줄기를 그려넣은 그의 첫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내가 손에 든 것은 막 일병 계급장을 단 91년의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야간 불침번을 서며 희미한 비상등 불빛에 의존해 숨을 죽여가며 <멀고 먼 해후> <포도나무 집 풍경> 등 그의 빛나는 단편들을 읽던 때의 서늘한 감동이 새삼 떠오릅니다.
그러나............. 세월은 많이 흘렀고 세상은 더 많이 변했네요.
80년대의 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역사를 목도하며, 또는 80년대의 좌절과는 달리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비틀려져가는 세상과 대응하며 김영현은 80년대 민중문학판의 사랑채였던 실천문학사의 좌장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왔나봅니다. 간간이 이런 저런 소식 속에서 이름이 들려오기도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한물이 간 깃발에 더 이상 사람들은 일말의 관심도 애정도 없는 듯 했습니다. 고민하며 성찰하며 한발 한발을 내딛으려 하는 이가 감당하기에는 변화의 속도가 너무도 빨랐던게 아닐까요. 그래서일까, 가끔씩 사진으로 대하는 그의 커다란 눈과 벗겨진 머리는 갈수록 외로워보였습니다.
그런 그가 참으로 오래간만에 거친 목소리를 토했네요. 유명작가와 무명신인의 표절논란을 둘러싼 문단 안팎의 수상쩍은 움직임을 관찰하다가, 마침내는 한국 문단 전체의 곪아터진 환부를 일거에 통찰하는 속 시원한 일갈을 내 뱉은 것입니다. 글이 담고 있는 의미가 너무도 적나라하여 차라리 통쾌하다기보다는 참담하다고나 할까요.... 피고름이 흐르는 상처를 가리고 있는 오염된 거즈를 걷어내고 독하고 쓰라린 소독약을 뿌려대는 듯한 결기가 그의 목소리에 배어 있습니다.
정목사님은 김영현의 글 속에서 ‘실종된 작가정신’에 방점을 찍으셨습니다. 작가정신이 실종된 문학판이라는 자리를 상업주의가 점령한 후, 자격이 의심스러운 이들이 어느새 문단 권력이 되어 분할 주둔하고 있고, 이러한 모든 시스템이 침묵의 카르텔이라는, 있는자에게는 편리하고 없는 자에게는 굴욕적인 게임의 규칙에 의해 재생산되고 유지되는 판이 바로 오늘날의 한국문학의 풍경이구나, 새로이 알게 됩니다.
문득 김영현씨가 이 글을 취중에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비아냥이 아닙니다. 적당히 술에 취한 사람이 좌고우면 생략하고 쏟아놓는 속 시원한 일갈처럼, 이 글이 직설적이고 솔직하다는 말입니다. 단어가 꿈틀거리고 문장이 펄떡거리는 것 같습니다.
한 시절 오래도록 그의 독자이기를 다짐했었던, 그러나 너무도 오래 그 이름마저 잊고 지냈던 이들에게, 김영현의 펄떡이는 글은 오래전 애인에게서 날아온 편지인양 반갑고도 당혹스러울 듯 합니다. 저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대중들이 시류의 복잡다단함을 핑계로 그저 가끔씩 세태에 어울리는 풍선껌 같은 소설이나 골라잡으면서도 시니컬하게 ‘요즘 소설은 도무지 읽을 게 없어...’ 하면서 젠체하는 동안 한국문학은 이렇게 망가져가고 있었고, 그나마 ‘작가정신’ 을 붙들려고 고민하던 작가들이 저토록 처참히 절망하고 있었구나,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신문의 신간 섹션을 넘치도록 장식하고 있는 저 화려한 언사들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지.... 머릿속이 어지러웠습니다. 익숙한 것들이 총체적으로 낯설어지는 기묘한 충격이 김영현이 오래간만에 내민 선물이었습니다.
**************** 두 번째 소감 (10. 17)
김영현의 글을 다시 읽어보니 처음엔 눈에 띄지 않았던 몇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예전에도 늘 반복되었던 불편함이기에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는 문제겠지만, 회색인의 전형적인 피해의식과 까칠함이 내 안에 아직도 여전하구나, 새삼 확인하게 되네요.
우선, 그는 자신의 글 속에서 ‘문학의 신’ 이라는 명칭을 반복해서 거론합니다.
문학의 신이라니? 도대체 이게 뭘 말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같은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사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신의 그림을 품고 있는 경우를 늘 봅니다. 순복음교회 장로님의 하나님과, 민중교회 청년 전도사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당연하지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학에 따라, 또한 각자가 처한 경험의 차이에 따라 각자 신을 이해하는 자신만의 그릇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문학의 길을 가는 어떤 이가 ‘문학의 신’을 말한다면, 이 역시 그가 흉중에 품고 있는 문예미학과 개인적 경험에 근거를 둔 신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영현이 말하는 문학의 신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은 그의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자면, 주이란이 품고 있는 순수한 작가정신, 김곰치가 보여준 진정성있는 문제의식, 그리고 그러한 가치들이 존중받는 문단의 모습 등이 문학의 신을 지켜내는 요소들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래에 발췌한 문장들은 조금은 생뚱맞습니다. 자신의 사상적 포지션에 경도된 감정의 오버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 슬픔과 그리움과 분노를 먹고 살았던 신.... 독재의 푸른 발톱 하에서도 살아 펄펄거리던 문학의 신.... 자신의 정신적 노고를 보답 받지 못한 채 쫓겨난 문학의 사제들.... 고난의 시대, 자신의 운명을 걸고 싸웠던, 그리하여 거리에서 감옥으로 헤매던 작가들.... 승리는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임승차 한 채 숨을 죽이고 있던 자들에게.... 반동적인, 너무나 반동적인....”
물론 의도적으로 격한 감정을 정제하지 않고 쏟아낸 사정이리라 여겨지지만, 어쨌든 위의 문장들만을 따로 떼어놓고 읽자면 결국 김영현이 말하는 문학의 신이란, 여전히 한때 민족문학작가회의와 실천문학사로 대변되는 그룹들이 꿈꾸었던 사회 변혁의 이상, 그리고 그 도구로서의 문학이라는 테두리 안에 놓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합니다. 전반적으로는 분명 다른 이야기를 해 놓고 말입니다. 경직의 시대에 반성을 보여주었던 이가, 역으로 중심이 해체된 시대를 견디지 못해 경직의 시대를 일정부분 그리워하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한국 문단을 향한 김영현의 적나라하고도 진정성 있는 지적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하더라도, 그 외침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려는 애매한 지향점에 대해서마저 동의할 것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개개인의 선택의 영역으로 남습니다.
이것은 마치 한국 교단의 개혁을 외치는, 성실하고도 건전한 진보 기독교 진영의 목소리를 접할 때 느끼는 미묘함과도 비슷합니다. 많은 단체들이 작금의 개신교가 보수적 교리와 역사의 왜곡으로 점철되었다고 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하지만 그들이 꿈꾸는 새로운 기독교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 물어보면, 결국은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에 철저히 제한되는 또하나의 근본주의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하더군요.
누군가의 행동이 진실하고, 구체적 사안에 대한 주장이 옳다 하더라도, 궁극적인 방향에 있어서는 각자의 더 많은 책임있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한편, 김영현의 분노는 어쩌면 그가 글에서 거론한 구체적인 문단 관련자들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과 같은 계열의 작가와 작품들에게 설 자리를 더 이상 제공해 주지 않는 독자들을 향한 울분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80년대 진보 계열의 작가들에게 빛나는 꽃다발을 걸어주었던 그 많던 독자들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다는 말인가? 왜 그토록 허망하게 상업주의 출판사와 작가와 작품들을 향해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렸단 말인가? 하는 외침이 행간에 배어있다고나 할까요.
그렇다면 또 한가지가 궁금합니다.
“문학의 신을 유폐시키고 마침내 죽여 버린 우리 시대의 문학 교수, 평론가, 작가, 출판사 기획자, 사장, 신문 기자들, 너와 나를 향해서도 마음껏 침을 뱉어주마!”
라고 외치면서도, 김영현은 왜 정작 독자 제위에게는 침을 뱉지 않는걸까요? 민중의 가치를 중심에 두어 온 그의 지향으로 볼 때 문학판의 민중인 독자를 향해서 침을 뱉는 행위는 차마 신성모독적으로 느껴져서일까요?
물론 마지막 문장의 ‘너와 나’ 의 ‘너’ 가 모든 독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좀 더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에라, 이 대가리에 *만 든 독자넘들아!” 라고 소리치며,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독자들에게도 힘껏 침을 뱉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태도야말로 그가 말하는 문학의 신을 향한, 그리고 독자들을 향한 그만의 일관성있는 예의일 것입니다.
그의 글을 읽은 다비안들께서 김영현이 뱉은 가래침이 썩어빠진 일부 문단 패권주의자들만을 향하고 있다고 맘편히 생각하고 옳소, 하고 박수를 치셨다면 글쎄요, 너무 안이한 태도인 듯 합니다.
김영현의 주장대로 소수의 패권주의자들이 문학판을 찜쪄먹고 있다면, 그것을 방치하고 동조한 책임이 바로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과도한 해석 아니냐구요? 문단의 부패는 단지 문단의 문제 아니냐구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신학도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기반하는 토대의 수준이 딱 그 수준이더라는 말입니다. 한국 교단의 수준이 곧 한국 성도들의 수준이고, 한국 문단의 현주소가 한국 독자들의 현주소라는 말이지요.
김영현이 조롱하고 있는 (그러나 실은 피맺힌 심정으로 질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신경숙, 은희경, 조경란 류의 소설을 베스트셀러로 선택한 이들이 바로 우리들이며, 너저분한(김영현의 표현) 김화영을 비롯하여 몇몇 문단 권력들과 조중동과 문지, 문학동네 패거리들에게 이 땅의 문학의 모든 지분을 도매급으로 떼어 넘긴 장본이이 바로 우리들이라는 말입니다. 몰랐다거나 상관없다는 말을 하면 무슨 말이 돌아올지는 알고 계시죠? 방현석처럼 빌라도 되는 겁니다.
자, 이제 어쩌시렵니까?
저는 일방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반성하고자 하시는 이들은 김영현이 내뱉은 가래침이 바로 평범한 소시민인 당신을 향한 것임을 알았으니 오늘부터라도 뼛속 깊이 반성하시면서 김영현이 말하는 문학의 신을 되살리는 일에 작은 정성이나마 보태시면 되겠습니다.
아니라면, 이거 가만히 생각하니 기분 나쁘네? 명색이 출판사 대표라는 자가 시대의 흐름도 제대로 파악 못해놓고, 독자들의 입맛 하나 맞추지 못해놓고 이제와서 어디다 대고 성질을 부려? 맨날 박제처럼 굳어버린 과거의 이상이나 붙들고 찌질한 소설따위나 출간하다가 짜그러진 주제에.... 하며 개무시하시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구요.
이도 저도 아니라면, 저처럼 회색인의 대책 없고 답 없는 고민에 동참하시던지.....
나도 모르게 좀 되바라진 말투로 글이 흘렀네요. 죄송합니다.
대충 수습하자면
김영현의 문단 상업주의와 패권주의에 대한 지적은 옳다,
그러나 그가 쓴 글의 행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마음 불편한 점이 있다,
그러므로 철저히 반성하고 함께 돌을 던질 이들도 나와야 하지만,
반대로 김영현의 오버를 지적하며 결국은 우리들이 선택한 판에 대해 책임있게 고민하는 이도 있어야 한다,
뭐 이쯤으로 해두면 모양새가 좀 되는건지.....
두 개의 소설 <혀>와 관련된 김영현의 글 “문학이여, 나라도 먼저 침을 뱉어 주마 - 이것은 '표절 시비'가 아니다” 를 저도 찾아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간격을 두고 두 개의 소감을 썼습니다.
첫 번째 것은 그 글을 읽은 첫날 저녁 반가움과 감동에 젖어 제 개인 공간에 메모해 둔 글입니다.
두 번째 것은 오늘 그의 글을 다시금 읽어보며 느낀 새로운 생각을 두서없이 늘어놓은 글입니다.
제가 읽어봐도 다분히 정신분열적이지만
그 둘 사이의 차이와 불안이 바로 제 마음의 솔직한 모습이기에
다비안들의 너그러움을 믿고 옮겨봅니다.
**************** 첫 번째 소감 (10. 14)
80년대를 돌아봅니다.
눈에 보이는 독재와 항거해 싸우며,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언어의 힘을 믿으며 문학의 제단에 자신의 영혼을 던진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또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도 그들이 쓴 문학작품들로 인해 스스로 만들어낸 거친 희망의 불빛을 품으며 세상 속으로 뛰어든 이들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요.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어쩌면 더 많은 이들이 깊은 패배감과 죄책감에 쫓겨 자신만의 은폐된 방에 숨어서 회색빛 시간을 버텨내기도 했었던 시절....
고백하자면 저는 세 번째 부류에 속했었습니다. 그랬기에 앞쪽의 두 부류의 인간들에게 부채감과 피해의식을 동시에 품곤 했었습니다.
그러한 시절의 끄트머리에서 누구보다도 찬란하게 타올랐던 불꽃이 바로 김영현이었지요. 그의 소설은 당대의 여타 민중소설들, 더욱이 설익은 선동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그 지향성만으로 씩씩하게 생산되곤 했던 일부 함량미달의 작품들과는 격이 달랐습니다.
그는 역사의 진보와 인간의 정신을 신뢰하면서도 민중운동계열이 보여준 80년대적 일방성과 경직성을 정직하게 반성하고 고민하는 글을 썼으니까요.
그러했기에 당시의 문단과 운동권 진영에 적잖은 충격과 논란을 던져줬을 뿐 아니라 (90년을 전후한 이른바 ‘김영현 논쟁’) 시대적 죄책감과 개인적 성향 사이에서 질식 직전에 있던 나와 같은 회색인들에게도 숨통을 열어준 존재였습니다.
어두운 카키색 바탕에 거친 목판화로 검은 색 산줄기를 그려넣은 그의 첫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내가 손에 든 것은 막 일병 계급장을 단 91년의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야간 불침번을 서며 희미한 비상등 불빛에 의존해 숨을 죽여가며 <멀고 먼 해후> <포도나무 집 풍경> 등 그의 빛나는 단편들을 읽던 때의 서늘한 감동이 새삼 떠오릅니다.
그러나............. 세월은 많이 흘렀고 세상은 더 많이 변했네요.
80년대의 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역사를 목도하며, 또는 80년대의 좌절과는 달리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비틀려져가는 세상과 대응하며 김영현은 80년대 민중문학판의 사랑채였던 실천문학사의 좌장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왔나봅니다. 간간이 이런 저런 소식 속에서 이름이 들려오기도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한물이 간 깃발에 더 이상 사람들은 일말의 관심도 애정도 없는 듯 했습니다. 고민하며 성찰하며 한발 한발을 내딛으려 하는 이가 감당하기에는 변화의 속도가 너무도 빨랐던게 아닐까요. 그래서일까, 가끔씩 사진으로 대하는 그의 커다란 눈과 벗겨진 머리는 갈수록 외로워보였습니다.
그런 그가 참으로 오래간만에 거친 목소리를 토했네요. 유명작가와 무명신인의 표절논란을 둘러싼 문단 안팎의 수상쩍은 움직임을 관찰하다가, 마침내는 한국 문단 전체의 곪아터진 환부를 일거에 통찰하는 속 시원한 일갈을 내 뱉은 것입니다. 글이 담고 있는 의미가 너무도 적나라하여 차라리 통쾌하다기보다는 참담하다고나 할까요.... 피고름이 흐르는 상처를 가리고 있는 오염된 거즈를 걷어내고 독하고 쓰라린 소독약을 뿌려대는 듯한 결기가 그의 목소리에 배어 있습니다.
정목사님은 김영현의 글 속에서 ‘실종된 작가정신’에 방점을 찍으셨습니다. 작가정신이 실종된 문학판이라는 자리를 상업주의가 점령한 후, 자격이 의심스러운 이들이 어느새 문단 권력이 되어 분할 주둔하고 있고, 이러한 모든 시스템이 침묵의 카르텔이라는, 있는자에게는 편리하고 없는 자에게는 굴욕적인 게임의 규칙에 의해 재생산되고 유지되는 판이 바로 오늘날의 한국문학의 풍경이구나, 새로이 알게 됩니다.
문득 김영현씨가 이 글을 취중에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비아냥이 아닙니다. 적당히 술에 취한 사람이 좌고우면 생략하고 쏟아놓는 속 시원한 일갈처럼, 이 글이 직설적이고 솔직하다는 말입니다. 단어가 꿈틀거리고 문장이 펄떡거리는 것 같습니다.
한 시절 오래도록 그의 독자이기를 다짐했었던, 그러나 너무도 오래 그 이름마저 잊고 지냈던 이들에게, 김영현의 펄떡이는 글은 오래전 애인에게서 날아온 편지인양 반갑고도 당혹스러울 듯 합니다. 저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대중들이 시류의 복잡다단함을 핑계로 그저 가끔씩 세태에 어울리는 풍선껌 같은 소설이나 골라잡으면서도 시니컬하게 ‘요즘 소설은 도무지 읽을 게 없어...’ 하면서 젠체하는 동안 한국문학은 이렇게 망가져가고 있었고, 그나마 ‘작가정신’ 을 붙들려고 고민하던 작가들이 저토록 처참히 절망하고 있었구나,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신문의 신간 섹션을 넘치도록 장식하고 있는 저 화려한 언사들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지.... 머릿속이 어지러웠습니다. 익숙한 것들이 총체적으로 낯설어지는 기묘한 충격이 김영현이 오래간만에 내민 선물이었습니다.
**************** 두 번째 소감 (10. 17)
김영현의 글을 다시 읽어보니 처음엔 눈에 띄지 않았던 몇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예전에도 늘 반복되었던 불편함이기에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는 문제겠지만, 회색인의 전형적인 피해의식과 까칠함이 내 안에 아직도 여전하구나, 새삼 확인하게 되네요.
우선, 그는 자신의 글 속에서 ‘문학의 신’ 이라는 명칭을 반복해서 거론합니다.
문학의 신이라니? 도대체 이게 뭘 말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같은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사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신의 그림을 품고 있는 경우를 늘 봅니다. 순복음교회 장로님의 하나님과, 민중교회 청년 전도사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당연하지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학에 따라, 또한 각자가 처한 경험의 차이에 따라 각자 신을 이해하는 자신만의 그릇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문학의 길을 가는 어떤 이가 ‘문학의 신’을 말한다면, 이 역시 그가 흉중에 품고 있는 문예미학과 개인적 경험에 근거를 둔 신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영현이 말하는 문학의 신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은 그의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자면, 주이란이 품고 있는 순수한 작가정신, 김곰치가 보여준 진정성있는 문제의식, 그리고 그러한 가치들이 존중받는 문단의 모습 등이 문학의 신을 지켜내는 요소들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래에 발췌한 문장들은 조금은 생뚱맞습니다. 자신의 사상적 포지션에 경도된 감정의 오버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 슬픔과 그리움과 분노를 먹고 살았던 신.... 독재의 푸른 발톱 하에서도 살아 펄펄거리던 문학의 신.... 자신의 정신적 노고를 보답 받지 못한 채 쫓겨난 문학의 사제들.... 고난의 시대, 자신의 운명을 걸고 싸웠던, 그리하여 거리에서 감옥으로 헤매던 작가들.... 승리는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임승차 한 채 숨을 죽이고 있던 자들에게.... 반동적인, 너무나 반동적인....”
물론 의도적으로 격한 감정을 정제하지 않고 쏟아낸 사정이리라 여겨지지만, 어쨌든 위의 문장들만을 따로 떼어놓고 읽자면 결국 김영현이 말하는 문학의 신이란, 여전히 한때 민족문학작가회의와 실천문학사로 대변되는 그룹들이 꿈꾸었던 사회 변혁의 이상, 그리고 그 도구로서의 문학이라는 테두리 안에 놓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합니다. 전반적으로는 분명 다른 이야기를 해 놓고 말입니다. 경직의 시대에 반성을 보여주었던 이가, 역으로 중심이 해체된 시대를 견디지 못해 경직의 시대를 일정부분 그리워하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한국 문단을 향한 김영현의 적나라하고도 진정성 있는 지적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하더라도, 그 외침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려는 애매한 지향점에 대해서마저 동의할 것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개개인의 선택의 영역으로 남습니다.
이것은 마치 한국 교단의 개혁을 외치는, 성실하고도 건전한 진보 기독교 진영의 목소리를 접할 때 느끼는 미묘함과도 비슷합니다. 많은 단체들이 작금의 개신교가 보수적 교리와 역사의 왜곡으로 점철되었다고 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하지만 그들이 꿈꾸는 새로운 기독교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 물어보면, 결국은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에 철저히 제한되는 또하나의 근본주의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하더군요.
누군가의 행동이 진실하고, 구체적 사안에 대한 주장이 옳다 하더라도, 궁극적인 방향에 있어서는 각자의 더 많은 책임있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한편, 김영현의 분노는 어쩌면 그가 글에서 거론한 구체적인 문단 관련자들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과 같은 계열의 작가와 작품들에게 설 자리를 더 이상 제공해 주지 않는 독자들을 향한 울분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80년대 진보 계열의 작가들에게 빛나는 꽃다발을 걸어주었던 그 많던 독자들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다는 말인가? 왜 그토록 허망하게 상업주의 출판사와 작가와 작품들을 향해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렸단 말인가? 하는 외침이 행간에 배어있다고나 할까요.
그렇다면 또 한가지가 궁금합니다.
“문학의 신을 유폐시키고 마침내 죽여 버린 우리 시대의 문학 교수, 평론가, 작가, 출판사 기획자, 사장, 신문 기자들, 너와 나를 향해서도 마음껏 침을 뱉어주마!”
라고 외치면서도, 김영현은 왜 정작 독자 제위에게는 침을 뱉지 않는걸까요? 민중의 가치를 중심에 두어 온 그의 지향으로 볼 때 문학판의 민중인 독자를 향해서 침을 뱉는 행위는 차마 신성모독적으로 느껴져서일까요?
물론 마지막 문장의 ‘너와 나’ 의 ‘너’ 가 모든 독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좀 더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에라, 이 대가리에 *만 든 독자넘들아!” 라고 소리치며,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독자들에게도 힘껏 침을 뱉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태도야말로 그가 말하는 문학의 신을 향한, 그리고 독자들을 향한 그만의 일관성있는 예의일 것입니다.
그의 글을 읽은 다비안들께서 김영현이 뱉은 가래침이 썩어빠진 일부 문단 패권주의자들만을 향하고 있다고 맘편히 생각하고 옳소, 하고 박수를 치셨다면 글쎄요, 너무 안이한 태도인 듯 합니다.
김영현의 주장대로 소수의 패권주의자들이 문학판을 찜쪄먹고 있다면, 그것을 방치하고 동조한 책임이 바로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과도한 해석 아니냐구요? 문단의 부패는 단지 문단의 문제 아니냐구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신학도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기반하는 토대의 수준이 딱 그 수준이더라는 말입니다. 한국 교단의 수준이 곧 한국 성도들의 수준이고, 한국 문단의 현주소가 한국 독자들의 현주소라는 말이지요.
김영현이 조롱하고 있는 (그러나 실은 피맺힌 심정으로 질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신경숙, 은희경, 조경란 류의 소설을 베스트셀러로 선택한 이들이 바로 우리들이며, 너저분한(김영현의 표현) 김화영을 비롯하여 몇몇 문단 권력들과 조중동과 문지, 문학동네 패거리들에게 이 땅의 문학의 모든 지분을 도매급으로 떼어 넘긴 장본이이 바로 우리들이라는 말입니다. 몰랐다거나 상관없다는 말을 하면 무슨 말이 돌아올지는 알고 계시죠? 방현석처럼 빌라도 되는 겁니다.
자, 이제 어쩌시렵니까?
저는 일방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반성하고자 하시는 이들은 김영현이 내뱉은 가래침이 바로 평범한 소시민인 당신을 향한 것임을 알았으니 오늘부터라도 뼛속 깊이 반성하시면서 김영현이 말하는 문학의 신을 되살리는 일에 작은 정성이나마 보태시면 되겠습니다.
아니라면, 이거 가만히 생각하니 기분 나쁘네? 명색이 출판사 대표라는 자가 시대의 흐름도 제대로 파악 못해놓고, 독자들의 입맛 하나 맞추지 못해놓고 이제와서 어디다 대고 성질을 부려? 맨날 박제처럼 굳어버린 과거의 이상이나 붙들고 찌질한 소설따위나 출간하다가 짜그러진 주제에.... 하며 개무시하시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구요.
이도 저도 아니라면, 저처럼 회색인의 대책 없고 답 없는 고민에 동참하시던지.....
나도 모르게 좀 되바라진 말투로 글이 흘렀네요. 죄송합니다.
대충 수습하자면
김영현의 문단 상업주의와 패권주의에 대한 지적은 옳다,
그러나 그가 쓴 글의 행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마음 불편한 점이 있다,
그러므로 철저히 반성하고 함께 돌을 던질 이들도 나와야 하지만,
반대로 김영현의 오버를 지적하며 결국은 우리들이 선택한 판에 대해 책임있게 고민하는 이도 있어야 한다,
뭐 이쯤으로 해두면 모양새가 좀 되는건지.....
소풍님의 글은 항상 감동이 깊었고
그래서 이번에도 주저없이 긴 글에도 불구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잘 내려갔습니다. 전반부는...
(한겨레칼럼에서 홍세화선생님의 글을 통해 이 사건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저께 정 용섭 목사님의 글을 통해 프레시안에서 김 영현의 글을 읽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저의 의문을 한번 피력해보겠습니다.
소풍님께서 김영현을
"경직의 시대에 반성을 보여주었던 이가, 역으로 중심이 해체된 시대를 견디지 못해 경직의 시대를 일정부분 그리워하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 라고 했습니다.
김영현은
오늘날을 80년대의 연속선상에서 보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즉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된 과정이란 점에서 말이죠.
해체된 듯한 많은 시도들과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중심은 어느때보다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죠.
해체되었다고 하는 그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어느부분에 가장 큰 강타를 먹이는지 한 번 살펴봐보세요.
물론 소풍님께서 독자로서의 나의 위치를 반성해보자는 점을 상기시킨다는 점을
각자가 뼈 아프게 반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기독교내부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서도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않는 어떤 지점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길래
흥미를 가지고 지켜봐봤죠.
초신자이지만
기독교 내부인으로써 제가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면
체제, 계급의식, 주체 등등의 개념에 대해 갖는 기독교인들의 근본적인 반감입니다.
물론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죠.
그러나 암묵적으로 그어지는 어떤 비판의 선들을 그어보았더니,
이것을 넘지않는 다는 것이죠.
이를테면,
소풍님의 지금까지의 글을 고려해볼 때,(즐겨 읽긴 했으나 모두 읽었는지에 대해선 확신이 없습니다.)
율법주의자는 절대 될 수 없는 감수성의 소유자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많은 고민 후에 현재의 미션을 감당해가는 그런 분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김영현의 비판 지점, 딱 거기까지만 허용되는 어떤 선...
어떤 의미에서 이 질문은 소풍님에게 던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저도 크리스쳔 내부인으로서 해결해나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소 난삽한 글이 된 듯 합니다. 머리 아프지않기를...
그래서 이번에도 주저없이 긴 글에도 불구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잘 내려갔습니다. 전반부는...
(한겨레칼럼에서 홍세화선생님의 글을 통해 이 사건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저께 정 용섭 목사님의 글을 통해 프레시안에서 김 영현의 글을 읽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저의 의문을 한번 피력해보겠습니다.
소풍님께서 김영현을
"경직의 시대에 반성을 보여주었던 이가, 역으로 중심이 해체된 시대를 견디지 못해 경직의 시대를 일정부분 그리워하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 라고 했습니다.
김영현은
오늘날을 80년대의 연속선상에서 보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즉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된 과정이란 점에서 말이죠.
해체된 듯한 많은 시도들과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중심은 어느때보다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죠.
해체되었다고 하는 그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어느부분에 가장 큰 강타를 먹이는지 한 번 살펴봐보세요.
물론 소풍님께서 독자로서의 나의 위치를 반성해보자는 점을 상기시킨다는 점을
각자가 뼈 아프게 반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기독교내부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서도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않는 어떤 지점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길래
흥미를 가지고 지켜봐봤죠.
초신자이지만
기독교 내부인으로써 제가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면
체제, 계급의식, 주체 등등의 개념에 대해 갖는 기독교인들의 근본적인 반감입니다.
물론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죠.
그러나 암묵적으로 그어지는 어떤 비판의 선들을 그어보았더니,
이것을 넘지않는 다는 것이죠.
이를테면,
소풍님의 지금까지의 글을 고려해볼 때,(즐겨 읽긴 했으나 모두 읽었는지에 대해선 확신이 없습니다.)
율법주의자는 절대 될 수 없는 감수성의 소유자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많은 고민 후에 현재의 미션을 감당해가는 그런 분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김영현의 비판 지점, 딱 거기까지만 허용되는 어떤 선...
어떤 의미에서 이 질문은 소풍님에게 던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저도 크리스쳔 내부인으로서 해결해나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소 난삽한 글이 된 듯 합니다. 머리 아프지않기를...
다시 한번 고백하지만 김영현의 글을 읽고 누구보다도 가슴이 뛴 사람 중 한명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흥미로운 이슈가 다비안들 사이에서 조금은 일방적인 결론으로 갈무리된 채 (문학판도 역시 썩었군, 정도로...) 사그라드는 듯하여
다시금 토론의 장으로 끌어들여보고픈 마음에서 내가 먼저 다시 말을 꺼내봐야겠는 생각에서 올린 글이었습니다.
김영현의 말대로 이것은 단순한 표절시비가 아니므로.....
일부러 손 가는 대로 죽죽 쓰고는 거의 다듬거나 줄이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단견과 혼돈이 알몸으로 드러나는 글을 써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른 분들이 적극적인 비판과 지적을 통해 논의 속으로 참여해 주시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글을 쓰다보니 너무 주관적이고 장황하고 난삽하게 되어서
다른 분들의 진지한 참여를 유도할 만한 수준의 글이 되지 못한 듯 합니다.
정치적 담론의 글쓰기에 미숙한 저 자신의 한계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신자의 특권님께서 꼼꼼히 읽어주시고 진지하게 댓글을 달아 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날카롭게 지적해 주신 부분이야말로 늘 제가, 또는 저와 같은, 소위 인식의 토대가 나이브한 감상에 붙들려있는 사람들이 항상 씨름해야 하는 과제라 여겨집니다.
구체적으로 기독교라고 하는 믿음의 체계가 그러한 성향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검토해야 한다는 과제도 던져 주셨네요.
꼭지글을 올린 날 밤에 두명의 비기독교인 친구(인간의 종교성에 대한 관심은 많으나 한국에서의 현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비판의식이 너무 강하여 전도가 영 쉽지 않은 인간들이죠~^^) 와 밤 늦게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혀’ 표절 논란과 김영현의 이야기도 나왔는데, 말 그대로 밤새 디지게 욕 먹었습니다 ㅠ.ㅠ...
초신자의 특권님의 말씀과 유사한 지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뭐, 제가 또 일방적으로 혼나고만 있었겠습니까, 나름대로 제 생각을 펼치기도 하며, 일정 부분 수용도 하고, 반성도 하며....
당연히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참 유익한 밤이었습니다.
혹 기회가 되신다면, 님께서 말씀하신
“오늘날을 80년대의 연속선상에서 보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해체되었다고 하는 그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어느부분에 가장 큰 강타를 먹이는지 한 번 살펴봐보세요.”
부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의견을 간략하게나마 덧붙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억지로 부탁드리는건 아닙니다 ^^*
평안한 주일 보내세요 ~
그런데 이 흥미로운 이슈가 다비안들 사이에서 조금은 일방적인 결론으로 갈무리된 채 (문학판도 역시 썩었군, 정도로...) 사그라드는 듯하여
다시금 토론의 장으로 끌어들여보고픈 마음에서 내가 먼저 다시 말을 꺼내봐야겠는 생각에서 올린 글이었습니다.
김영현의 말대로 이것은 단순한 표절시비가 아니므로.....
일부러 손 가는 대로 죽죽 쓰고는 거의 다듬거나 줄이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단견과 혼돈이 알몸으로 드러나는 글을 써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른 분들이 적극적인 비판과 지적을 통해 논의 속으로 참여해 주시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글을 쓰다보니 너무 주관적이고 장황하고 난삽하게 되어서
다른 분들의 진지한 참여를 유도할 만한 수준의 글이 되지 못한 듯 합니다.
정치적 담론의 글쓰기에 미숙한 저 자신의 한계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신자의 특권님께서 꼼꼼히 읽어주시고 진지하게 댓글을 달아 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날카롭게 지적해 주신 부분이야말로 늘 제가, 또는 저와 같은, 소위 인식의 토대가 나이브한 감상에 붙들려있는 사람들이 항상 씨름해야 하는 과제라 여겨집니다.
구체적으로 기독교라고 하는 믿음의 체계가 그러한 성향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검토해야 한다는 과제도 던져 주셨네요.
꼭지글을 올린 날 밤에 두명의 비기독교인 친구(인간의 종교성에 대한 관심은 많으나 한국에서의 현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비판의식이 너무 강하여 전도가 영 쉽지 않은 인간들이죠~^^) 와 밤 늦게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혀’ 표절 논란과 김영현의 이야기도 나왔는데, 말 그대로 밤새 디지게 욕 먹었습니다 ㅠ.ㅠ...
초신자의 특권님의 말씀과 유사한 지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뭐, 제가 또 일방적으로 혼나고만 있었겠습니까, 나름대로 제 생각을 펼치기도 하며, 일정 부분 수용도 하고, 반성도 하며....
당연히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참 유익한 밤이었습니다.
혹 기회가 되신다면, 님께서 말씀하신
“오늘날을 80년대의 연속선상에서 보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해체되었다고 하는 그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어느부분에 가장 큰 강타를 먹이는지 한 번 살펴봐보세요.”
부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의견을 간략하게나마 덧붙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억지로 부탁드리는건 아닙니다 ^^*
평안한 주일 보내세요 ~
빠르고 부드러운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현재의 혼돈의 원인을 어떻게 진단하느냐에 따라 관점이 다를 듯 한데요.
시장전체주의로 현재를 진단하는 사람에게는
해체의 현란함이
자본이라는 중심을 더욱 공고하게하려는 뛰어난 전략으로 보일 것입니다.
지식과 노동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봉사하고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어렵지않을 것입니다. 해체주의를 떠드는 지식인들은
노동운동도 달라져야 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본에 굴복하는 모습입니다.
노동법과 서민들의 삶의 질이 어떤 연관관계를 갖는지는 지금의 사회상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체제에 대한 의문을 봉쇄하는 어떤 혐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진단을 자신이 선 위치에서 구체적이고도 적확하게 해 나가야 합니다.
자신이 선 자리 라는 것은 여러 의미의 층위를 가질 수 있지만,
계급의식 만큼 뚜렷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알수 있게 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주체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기초와 방향을 내가 결정한다는 의식, 상대방도 하나님의 선물을 동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믿음,
하나님의 손을 잡고 내가 나의 삶을 결정해나가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즉 해체의 현란한 수사들이 역사, 주체, 체제 등의 시대진단 핵심개념들을 무장해제하는
지적 공헌을 이루었다는 뜻이었습니다.
현재를
모더니즘이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발전했다고 여기는 분은 이런 관점을 시대착오적으로 볼 수 있겠죠.
그러나 이런 가운데 혼란은 가중되고 이 혼란을 해결할 전의조차 상실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는 것입니다. 해결책이 안 보이는 아득한 혼돈...해체주의의 완벽한 승리...
key word 를 폐기하게 하면서 가장 득이 되는 집단이 누구냐 하는 것이죠.
이것은 자칫 소풍님의
"이것은 마치 한국 교단의 개혁을 외치는, 성실하고도 건전한 진보 기독교 진영의 목소리를 접할 때 느끼는 미묘함과도 비슷합니다." 처럼 저도 이런 느낌을 갖게 되는 데,
개인이 자리잡고 있는 지점에 따라 이런 느낌을 가질 듯 합니다.
현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개념과
선물을 잘 가꾸고 평등하게 누려야한다는 하나님의 교리중에
모순을 일으킬 때,
첫번째 교리가 항상 승리하는 것은 무슨 논리냐 하는 것이죠.
기독교인들이 위의 핵심개념들에 대해 갖는 거리감이 있는 듯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본주의 병폐의 어떤 부분에는 날카롭게 비판을 하면서도,
그것이 어설픈 지점에서 행복하게 머물고마는 원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하고있습니다.
물론 더 지켜 볼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대 성자의 모습과 가장 가까운 모습은 농부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보곤 합니다.
이런 토론을 통해 저의 사고도 유연해 질 수있기를 바래봅니다.
좋은 가을 밤입니다. 잘 누리시길...
현재의 혼돈의 원인을 어떻게 진단하느냐에 따라 관점이 다를 듯 한데요.
시장전체주의로 현재를 진단하는 사람에게는
해체의 현란함이
자본이라는 중심을 더욱 공고하게하려는 뛰어난 전략으로 보일 것입니다.
지식과 노동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봉사하고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어렵지않을 것입니다. 해체주의를 떠드는 지식인들은
노동운동도 달라져야 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본에 굴복하는 모습입니다.
노동법과 서민들의 삶의 질이 어떤 연관관계를 갖는지는 지금의 사회상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체제에 대한 의문을 봉쇄하는 어떤 혐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진단을 자신이 선 위치에서 구체적이고도 적확하게 해 나가야 합니다.
자신이 선 자리 라는 것은 여러 의미의 층위를 가질 수 있지만,
계급의식 만큼 뚜렷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알수 있게 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주체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기초와 방향을 내가 결정한다는 의식, 상대방도 하나님의 선물을 동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믿음,
하나님의 손을 잡고 내가 나의 삶을 결정해나가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즉 해체의 현란한 수사들이 역사, 주체, 체제 등의 시대진단 핵심개념들을 무장해제하는
지적 공헌을 이루었다는 뜻이었습니다.
현재를
모더니즘이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발전했다고 여기는 분은 이런 관점을 시대착오적으로 볼 수 있겠죠.
그러나 이런 가운데 혼란은 가중되고 이 혼란을 해결할 전의조차 상실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는 것입니다. 해결책이 안 보이는 아득한 혼돈...해체주의의 완벽한 승리...
key word 를 폐기하게 하면서 가장 득이 되는 집단이 누구냐 하는 것이죠.
이것은 자칫 소풍님의
"이것은 마치 한국 교단의 개혁을 외치는, 성실하고도 건전한 진보 기독교 진영의 목소리를 접할 때 느끼는 미묘함과도 비슷합니다." 처럼 저도 이런 느낌을 갖게 되는 데,
개인이 자리잡고 있는 지점에 따라 이런 느낌을 가질 듯 합니다.
현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개념과
선물을 잘 가꾸고 평등하게 누려야한다는 하나님의 교리중에
모순을 일으킬 때,
첫번째 교리가 항상 승리하는 것은 무슨 논리냐 하는 것이죠.
기독교인들이 위의 핵심개념들에 대해 갖는 거리감이 있는 듯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본주의 병폐의 어떤 부분에는 날카롭게 비판을 하면서도,
그것이 어설픈 지점에서 행복하게 머물고마는 원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하고있습니다.
물론 더 지켜 볼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대 성자의 모습과 가장 가까운 모습은 농부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보곤 합니다.
이런 토론을 통해 저의 사고도 유연해 질 수있기를 바래봅니다.
좋은 가을 밤입니다. 잘 누리시길...
회색 지대로 향하여
오늘, 소풍님 던지는
선홍빛 물감 주머니가 폭턴처럼 터져
그 선명함을 가릴 수 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