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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죽음에 대해서는 두렵지 않으셨겠지만 인성을 가지셨으니까
“아버지여 이 잔을 옮겨 주십시오” 하셨을 때 예수님의 고통이 어느 정도 포함 되어 있지 않았을까요?
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두려움, 인성이 있으셨기 때문에 거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작용하지 않았겠냐 하는 질문인데요? 뭐 그렇게 봐도 크게 잘 못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긴 있어요. 그것은 우리가 정확하게 모르는 거니까요. 예수님이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셨지만 그러나 그러한 십자가의 고통 때문에 이 잔을 물리쳐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그러한 기도를 절대 절명의 순간에 그런 기도를 드리는 수준은 아니라고 보는 게 옳지요.
거기에다 더 바른 진단은 대답을 안할려고 했는데, 질문하셨기 때문에 대답을 드리는 겁니다. 참, 질문 잘 하셨는데요. 그 분이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느냐 자신이 행한 공생애 동안에 모든 사건이 무의미한 것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설파 했거든요? 거기에 일체가 되서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 이 하나님의 나라만 이해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의 상당한 부분을 알 수가 있는데, 하나님의 바실레이아, 예, 신자들 여기에 관심이 없지요? 어쨋던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냥 저처럼 설교한 정도가 아니예요. 저는 그냥 주워들어서 부분적으로 알고 설교했지만 예수님은 그야말로 그 안에 들어가신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라고 하는 거 아시지요? 통치예요. 다스림 이예요.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시간적이고 운동이고 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전폭적으로 들어 가셔서 활동하셨어요. 거기에 들어 가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를 용서 선포 하실 수 있었어요. “죄 사함을 받았다” 이 얘기를 듣고 바리새인들이 팔짝 뛰었습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냐 시건방지냐 시비를 걸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일체가 되서 활동을 하고 많은 일을 하셨어요. 정말 거기에 신들림이라고 할까 좋은 뜻으로 하나가 되서 사셨는데, 결과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제자들도 평생 가르쳐 봐야 삼년동안 해 봐야 헛수고였고요. 결국 결과가 자기 십자가에 죽음이 임박했다고 하는 것을 또 알게 되었거든요? 이건 뭐냐 하나님의 나라가 실질적으로 아주 가까이 왔다 그래서 회개하고 그 쪽으로 돌아 서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확신을 가졌는데 하나님과 일체할 정도로 활동하셨는데, 결과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예, 절망이지요. 절망,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절망 예, 그런 두려움이 가장 큰 거지요. 죽음에 대한 그러한 생물학적인 죽음 하나님이 없느냐 하는 그런 생각까지 할 수 있는 거지요.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라는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정말 하나님 잘 믿으면? 예수님 입장에서 조금 근처로 와서 얘기 한다면, 내가 그러한 계시를 받았다고 할까? 그렇게 느끼고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정말 통치로서 살았는데, 아무것도 이룬 것도 없고 남긴 것도 없고, 잃게 되고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원하지도 않았던 십자가의 죽음 아주 처절한, 그러한 것이 바로 눈앞에 왔다고 할 때 어떻겠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비유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인데 최소한 남녀가, 젊은 사람이 그런데 그 사람을 배신했다 그럴 때 죽고 싶겠지요. 절망적이겠지요. 그러나 똑 같은 건 아니지만 자기 사명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 그런 것이 예수님에게 있었다고 볼 수 있지요.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실패한 자로 돌아 가셨어요. 부활은 다음에 나올 때 얘기 할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이 부활을 확신했을까요? 네, 거기까지입니다.
질문2)목사님께서 어떤 사람과 사람사이에 가까워 질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영적인 교제를 통해서 친교를 나눌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럼 예배공동체를 넘어서서 교회 공동체안에 있는 구성원들과의 진정한 친밀감의 교제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성만찬이 고대 초기기독교에서는 두 가지 종류였습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작은 떡과 포도주로 의식(sacrament)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그런 것이었고 코이노니아 애찬식이라고 하는 식사, 밥을 같이 먹는 거거든요? 전자의 것은 신앙적인 친교라 한다면 후자는 실제적인 친교라 할 수 있겠지요? 이 두 가지가 사실은 필요합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뭐, 예 치우친다기보다도 어느 한 쪽만이 무조건적이라고 보기 힘들지요.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이런게 있는 거지요. 예배 공동체 영적인 공동체라고 할 때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근본적으로 넘어 서는 것입니다. 교회론적인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론적이고 교회론적인, 마찬가지 관점에서요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렸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만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도 신경이 고백했지요? 죽은자 산자 모든 사람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거든요?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예루살렘에 마가 다락방에서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드린 그런 모임하고 통하는 겁니다. 이미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렀다고 할까요? 아니면 생명의 은폐된 세계에 들어갔다고 할까요? 그러한 성인들 하고도 우리가 지금 영적으로 친교를 누리고 있는 겁니다. 지금 그게 예배예요. 그러니까 판넨베르크 하고 제가 와인이나 맥주 한잔 하며 그리 친근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게 영적으로 굉장히 친근하게 느낍니다. 그러니까 이 공간 안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 예배드리는 대한민국 전체 기독교가 영적인 차원에서 정말 친밀하다고 하는 사실, 이게 신비로운 거지요. 이름도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친밀 하냐, 그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어야 되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친밀감이면요. 그게 원칙적인 것이고 하나의 이상적인 것이고 본질적인 것이고 그러나 구체적인 지(支)교회 안에서의 친교 이런 것은 또 하나의 과제로서 친목단체는 아니지만 정말 구체적인, 손톱이 아프면 다 아프잖아요? 예, 그런 것처럼 그런 애찬식과 같은 그런 친교의 모임이 필요한 거지요. 그런 긴장관계에 있습니다.
와~~라라님이 반짝반짝 빛을 ^ ^*
질답시간 순간에 끝나니 받아 적으려해도 속기도 안되고 좀 답답하던 차에
이거 뭐 넘 감사해서 ㅎ ㅎ ㅎ
라라님~ 복만아 받으슈~~~
2번 질문에 답해주신 목사님 말씀에 공감 합니다
한때 마틴로이드죤스와 깊게 사귀던때가 있었죠 요즈음은 소원해졌지만
헨리나우웬과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구요
정목사님과의 연으로 요즈음 새로 사귄 분들은....
바르트, 폴틸리히, 에벨링, 한스큉 판넨베르크 키에르케고르, 마이스터에크하르트 .......
그중 제일 자주 만나는분 은 판교수님 체근 만난분은 키에르케고르
이분은 사귀기가 좀 어렵네요 워낙 말을 어렵게 해서리. ㅋ ㅋ
아 라즈니쉬 이분도 자주 만납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눈만 봐도 뭘 말 하는지 알 것 같다. 이런말 하잖아요
정말 어떤 사람과 사귀고 가까와지면 말과 말사이의 말하지 않음속에서 말을 느끼듲....
정말 문장과 문장사이에서, 말 없음 속에서 말을 듣지요
라라님 수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쭉~ 부탁드려요
질문자님들~~!
질문 받아쓰기가 영 시원찮다 싶으시면, 쪽지로다 정정 해 주세요.^^
그리고 목사님!
목사님 말씀 라이브로 고대로 옮기다 보면 무진장 재미 있어요.
저 부러 교정 안 보고 올리는데요.
꼬~옥 한번 읽어 주세요.
참, 내친김에 부탁드리는데요. 시편 녹취록도 함 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