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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면류관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1-8)
바울은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고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의 순간은 옵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육체가 땅에 묻혀서 썩거나 불에 태워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아무 흔적도 없게 됩니다. 인류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바울과 디모데도 이름을 남겼습니다. 후손들이 이름과 활동을 기억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이 그대로 남은 건 아닙니다.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 뒤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태평스럽게, 또는 지나친 열정으로 지금 세상을 삽니다. 마치 마지막 순간이 오지 않을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표현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릴 겁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는데 어떻게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표현을 문자적으로 믿습니다.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을 한 사람이 머리에 월계수 관을 쓰듯이, 옛날 임금들이 머리에 보석으로 치장된 관을 쓰듯이 말입니다. 의의 면류관은 우리가 의(義)의 세계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의는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아무리 완벽한 복지가 실현된 나라에도 여전히 불의가 남아 있습니다. 의는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한 세계입니다.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흙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의로운 세계가 아닐까요?
주님, 우리에게 다가오는 마지막 순간을 망각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 순간은 우리의 탐욕이 끝장나고 하나님의 의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임을 기억하게 해주십시오. 그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십시오. 아멘.
공교롭게도..
목사님 해설하신 귀절이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귀절이라서 그런지..
자꾸 이 방에 쥐방울 드나들듯 하네요.
그랬더니 반가운 분들도 뵙게 되고요..
"전제와 같이 내가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왔도다."딤후 4:6
저는 사도바울이 죽음에 임박해서 어떤 비장한 각오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전제와 같이 부어지고" 라고 하셨네요. 제사로 드려진다는 말씀이지요?
나의 죽음이 태워져서 주님께 드려진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얼마나 제게 절절히 다가 오던지요.
우리는 죽으면 천당에 간다는 생각으로만 꽉 차 있는데,
(이제 생각하니 이것도 '불신지옥 예수천당'의 연장선상이 아닐까 싶은데요.)
사도바울의 하직인사는 참으로 비장하네요. 그래서 저는 참 이 구절이 좋았어요.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왔다."
저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그리고 가장 진실된 순간이 바로 이때가 아닐까 늘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그래서 할 수 만 있으면 맨 정신으로 (준비없이 획 가버리지 않게) 이 순간을 느끼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주님께 늘 기도드려요.
그 시간이 아마 몇 년이 될 수 도 있고, 몇 달 혹은 몇 일이 될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시간, 그 귀한 시간을 깊게 음미해 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저는 사도바울의 저 비장한 말씀들이 참 좋아요.
그리고 우리앞에 조금 먼저 떠나시는 분들을 배웅해드리는 자리가 너무나 숭고해 보여서요..
참 "아름다운 자리"라는 생각이 늘 들거든요.
왜냐면 "찰라"에서 영원"으로 가는 문턱에서 여이땅 하고 있는 거잖아요.^^
아, 주의 말씀의 기묘함이여!!
사실,목사님께 뭘 질문한다는게 좀 어려워요
이미 다비아의 곳곳에서 밝혀 놓으신건데 저 혼자 엉뚱한 소리 하고 있는건 아닌가하는 염려 때문에.
그런데 라라님의 댓글은 평신도의 고민을 공감 하는듯 하여 덜 긴장하게 해주니 고마워요.
정목사님 덕분에 성경을 '시'로 읽는다는 놀라운 시각을 배웠고
그래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혼자서 음미하며
볼수있었고 많은걸 느낄수 있었습니다.
예전의 나라면 간과했을 법한 장면들,대사들,몸짓들...
다비아의 인문학적 성서읽기를 통한 열매라고 할까요 ㅋ
내용중에 다비아에서 듣던 말도 제법 나오던데요
김용택시인이 시강좌 할때 특히.
제가 제법 떠들고 있네요 ^^
어색하지 않게 인사해준 라라님 덕분에.
목사님 답변에 감사하다고 따로 댓글 달지 않을테니 제 인사도 전해주세요~
(말걸기 어려워서 그러는건데 인사성이 없다고 하실까봐 ㅋㅋ)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도 매일성경으로 QT를 하고 있어서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될것 같아요
다비아는 이래저래 제 신앙생활에 큰 자리를 잡아가는데
어려움도 함께 줍니다 (공동체안에서의 격리되는 느낌..)
그건 제가 풀어 가야할 과제이고 하여튼 감사의 말씀 드리며..
오늘 본문에서 '의의 면류관'은 보통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약속 된 것입니까?
바울처럼, 디모데처럼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만 기대할수 있는 것이라
오늘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 잘못된 믿음으로 살지 말라는 교훈으로 읽어야 하는지요?
앞선 본문의 맥으로 말한다면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라는..
바울서신서들을 대할 때 그의 삶을 본 받아야 한다는 강요(?)를 하도 받아와서
자동으로 그렇게 읽히는데
목사님의 글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에 초점이 있는 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