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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저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갈 3:10-18)
바울은 율법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율법의 저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있는 율법을 저렇게 표현한다는 것은 보통의 결기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가 아무런 근거 없이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율법은 완벽한 실천을 요구합니다. 완벽하게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저주 아래 놓입니다. 여기서 저주라는 말은 문학적 수사이겠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율법의 본질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다음과 같은 논리입니다. 율법은 완벽한 실천을 요구하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피아노 연주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연주하라는 주문과 같습니다. 율법의 요구 앞에서 인간은 저주 아래 놓이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가 바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났다면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활의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거기서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이후로 율법은 더 이상 칭의와 구원의 효능이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율법의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우리는 율법의 의무,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받았으니 어찌 감사와 찬양을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 기뻐 찬양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