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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의 흐름5
 
 
지난주 1) 진리개념의 다원화에 이어서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계몽주의
세 가지 혁명 즉, "철학사유, 자연과학, 역사적 사고"의 영향으로 인해 신학에
네 가지 큰 패러다임 변화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진리개념의 다원화', '판단의
기준으로서 이성
', '자연과학과 새로운 우주', '역사의식과 종말론적 신앙'
조금 길지만 따라가 보겠습니다.
 
 
2) 판단의 기준으로서 이성
 
계몽주의에 대해 평가도 다양하고 해석도 여러 가지이지만 계몽주의가
현대 서구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모두 인정합니다. 특히
이성이라는 한 단어로 말이죠.
 
[계몽주의를 성격지우는 개념으로는 자율, 자연, 진보, 조화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특징들을 포괄하면서 계몽주의를 한 단어로 규정하라면 두말없이
'이성'을 꼽을 것이다. 계몽주의는 서양 지성사에서 이성의 중요성과 강조가
전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기이다
.]
 
독일철학자 칸트가 1784년에 쓴 '계몽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계몽이란 인간의 미성숙 상태에서의 탈출이다.
미성숙은 남들의 지도 없이 이성을 사용할 결단과 용기가 결여된 것이다.
이 미성숙은 이성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그것을 사용할 결의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감히 지식을 구하라! 그대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라. 이것이 계몽주의의 모토이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같죠? 중요한 것은 어떤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계몽이라고 정의한 부분입니다.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데카르트'인데요.
 
[그의 유명한 말 "Cogito ergo Sum"을 생각해 보자.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
."는 말은 모든 것을 회의에서 시작하는 그의 사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생각마저 회의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회의는 불가지론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 이성을 통해 회의의 주체를
확인하면서 확신으로 나아간다
. 여기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는데,
모든 것은 의심스러우나 자신이 이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
 
'' 자신이 사유하는 행위 안에서 존재하는 것을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의문, 분석, 종합, 결론의 모든 부분에서 인간이 주체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 진리까지도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판단의 근거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성을 사고의
중심에 놓는 신학이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걸쳐 '이신론''자연종교'
대한 강조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저자는 진리 판단의 주체가 인간이 된다는
뜻이 신학과 연관되면 매우 복잡해지고 신학방법 자체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전통적인 신 개념은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체이며, 이 둘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 인간은 단지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 이 계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 즉 진리의 기준은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신학구조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구원론''의인론'은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계몽주의 이성에 대한 강조 이후로 이렇게 됩니다.
 
[.....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이 신을 이해하는 주체가 된다. ,
인간에게서 출발하여 신에게로 올라가는 구조이며, 여기서 절대적인
기준은 이성이다
. 이성은 판단의 기준이 되고, 이는 신과 인간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 그래서 인간의 사유로 이해되지 않을 때....역사의
부조리와 모순을 만날 때
......인간은 신에게 오히려 질문한다......성서진리는
오직 계시에 의해 인식된다는 생각은 힘을 잃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질문하고
, 그는 우리에게 변명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가 주는 신학적 과제를 네 가지로 나눠 이야기 합니다.
 
계시의 우선성 문제
원래의 신학 방법을 고집할 것인가? 그냥 이성을 기준으로 하는 신학
방법을 따를 것인가
?......이제 우리는 이 두 구조를 다 이해해야만 한다.
바른 신학이라고 반드시 이성적 작업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고, 반이성적
작업이라고 꼭 정당한 신학인 것도 아니다
. 어디까지가 '합리성'
문제인지
, 어디까지가 계시의 우선성으로 간주해야 할지 잘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속죄론 강조
계몽시대를 거치며 변화된 신학적 상황 속에서 가장 시급한 주제 중의
하나는 속죄론의 회복이다
..... 속죄의 문제가 간절하지 않으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론도 약화된다
. 구원론의 약화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싸게 만든다
..... 현대신학은 속죄론을 새롭게 재해석하고 구원의
의미를 재정립 할 과제를 안고 있다
.
 
신정론
20세기에 신정론의 문제가 신학에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게 된다......
현대의 신정론은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이 심한 지역에서 더욱 강하게
대두된다
. 합리적 사고로는 납득되지 않는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곳에서
더욱
'하나님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강하게 일어난다......20세기
중반 이후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이다
.....그러므로 왜 이런 신학이
나왔는지 그
'정신'을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되고, 그에 따른 답변이
주어질 때 해방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가 가능해 진다
.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신정론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고
, 우리 시대의 중요한 신학의
과제가 되었다
.
 
계시(말씀) 인식의 주체
이 부분을 가장 진지하고 깊이 있게 신학적으로 다룬 신학자는 칼 바르트였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식의 주체임을 주장했고, 현대신학의
형성과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바르트의 신학은 다시 한 번 계시의 성격,
인간 이성의 한계,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강조, 그리스도의 구원과 은혜를 우리
시대에 새롭게 해석했다
. 하지만 바르트로 인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 21세기에는 또 다른 모양으로 계시와 이성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조망이 필요할 것이다
.
 
 
3) 자연과학과 새로운 우주
 
계몽주의가 이성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과학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자연과학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빠른 발전을 보이는데요.
이 과학 발전이 어떻게 신학의 틀을 바꾸게 되는지 이 부분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약 400년 전 '천동설' '지동설' 논쟁일 것인데요.
이것을 단순히 신학과 과학의 싸움에서 과학이 승리했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갈릴레오 자신도 이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성서의 진리를 부인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인간이해를 위해 은유와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고, 과학적 진리를
다르게 해석될 수 없는 직접적 표현을 쓴다
. 전자는 해석이 필요하고,
후자는 관찰과 분석에 따른 객관적 논증이 필요하다. 따라서 둘은 서로
다른 영역을 점유하며
, 과학이 진리를 위한 제2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어려운 과학 법칙들과 용어들은 생략하고 계몽주의에서 촉발된 과학의
발전이 신학 패러다임 변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현대에
어떤 과제를 가지는지가 중요하겠죠. 몇 가지로 나눠서 보겠습니다.
 
세계관의 갈등
[천동설과 지동설은 두 학설의 대립이 아니었다. 당시까지 교회가 믿어
왔던
'세계'와 과학의 이름으로 발견한 새로운 '세계'의 충돌이었던 것이다.....
두 세계의 충돌이라는 계몽시대에 야기된 문제는 지금도 신학적으로
답변이 요구되고 있다
.....계몽주의에서 시작된 과학의 세계는 현대에
와서 더욱 그 영역을 넓혀간다
. 이제 과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뿐
아니라
, 새로운 우주를 보여주고 있다. 현대신학은 과학과의 대화를
피할 수 없고
, 과학의 세계가 던진 도전을 해결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세계의 근거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하나님을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1원인)로서
생각했다
. 이 세상의 만물과 사건들(2원인)은 모두 창조주로 말미암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 진리에 대한 다른 근거가 있다는 확신
속에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은 이 세상을
'자연적 방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즉 제2원인들을 직접적인 신의 개입이 아니라, 정확한 증거에 의해 원인을
찾고 그 자체에서 이유를 찾았다
......이제 신은 이 역사와 구체적인 나의
삶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자로 다가온다
. 이것이 현대세계에서 신에 대한
논의가 그렇게 공허해진 이유이다
.]
 
합리주의적 경향의 신학
[계몽주의 시대인 18~19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은 이미 언급한 합리주의적
경향의 신학이다
. 이것은 개신교 내에서 소위 자유주의 신학인데, 이 신학의
구조는 위에서 살펴본 전형적인
'이성-우선적' 형태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반발한 조류가 '경건주의' 인데요. 특징은 신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시도한 것입니다. 차가운 이성적인(신학적인?) 신 대신,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신을 강조한 것이죠. 그런데 문제가 좀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개인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 경향을 띄게 되면 상당히
심각해진다
. 개인화된 경건주의는 역사와 피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지에 대해 어떤 것도 제시하지 못했다
. 오히려 하나님을
역사와 세상과 상관없이 개인의 체험의 영역 속으로 끌로 들어온다
.
이는 인간에서 출발해서 신을 향해 수직으로 올라가는 전형적인 '공간적 체험'
구조가 된다
. 여기에서는 역사적 지평은 사라지고 역사의 목적도 사라진다.]
 
정용섭 목사님께서 여러 저서에서 누누이 언급한 부분입니다. 신을 인간의
역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죠. 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하나 기억해야 한다. 경건주의는 합리주의에 반발해서
나왔지만
, 실상은 둘 다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일반적으로
합리주의는 이성을 강조해서 자유주의 신학으로 발전했고
, 경건주의는
체험과 감성을 강조하면서 신비주의적 경향을 가진다
. 하지만 근본 구조는
흡사하다
. 이 두 신학은 모두 인간에서 출발해서 위로 올라가는 같은
구조를 가진다
. 전자가 이성을 강조하고 후자가 경험을 강조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 인간이 주체가 되어 신을 향하는 동일한 구조의 신학이다.
따라서 경건주의적 시도는 합리주의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 부분이 길어지네요. 저자는 기도와 같은 개인 경건을 무시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개인적 경건이 차지할 위치를 정확히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죠. '공간적-체험의 형태' 즉 구체적 역사와 삶속이 아닌
개인의 특정 체험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구조를 그대로 두고 경건에
몰입하는 것이 문제를 더 꼬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나 경건
보다 바른 신학의 정립이 더 우선 되어야 한다는 말 아닐까요?^^
 
[현대신학에 와서 이 문제는 해결 되었는가? 이 세상과 역사 속에서 신을
구체적으로 논하고 체험할 수 있는 신학적 대안이 제시되었는가
?......
주제는 현대에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났다
. 하나는, 보수적인 신학에서
나타났는데
, 신과의 만남을 개인적인 영역에서라도 확보하려는 시도이다......
다른 하나는 진보적인 신학에서 나타나는데,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 대한 강조로 나타났다.]
 
저자는 두 방향의 시도 모든 '역사성 상실'이라는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현대신학은 신을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논하기
위한 신의 '역사성 회복'이라는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과학맹신주의
[계몽주의 이후 과학 혁명의 시대를 거치면서 '과학적', '객관적', '과학적 진리'
혹은 '객관적 사실'이라는 말은 하나의 마술적 단어가 되었다.....그래서
비과학적이라면 이는 객관적이지 못하고
, 객관적이지 못하면 비현실적이거나
비진리적인 느낌을 준다
.]
 
자연과학에서 사용된 이러한 연구 방법론이 거의 모든 학문에 영향을
끼쳤는데요. 이에 대한 문제점들도 같이 야기됐습니다. 특히 역사학,
사회과학 분야에서 자연과학과 같은 '과학적', '객관적'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일어난 것이죠. 이런 방법이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능력을 발휘하지만, 인간과 인간, 혹은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는 적절치 않은 방법입니다.
 
[이런 자연과학적 관계는 '나와 그것'(I and It)의 관계일 뿐이다. 이는 나와
'사물'과의 관계이며, '나와 당신'(I and Thou)의 인격적 관계가 아니다.....
이런 방법론이 인문과학과 역사학에 영향을 끼치고, 대중적 사고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도 인식하는
주체와 알려지는 객체라는 주
- 객 이원화에 빠진다......인간과 신과의 만남은
이런 이원론적 도식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
 
성서의 언어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이원화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허구'
라는 두 범주 외에 제3의 범주가 없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당연히
과학적 발견이 더 많은 사실을 발견하면 할수록, 기독교의 진리는 허구처럼
보이겠죠. 그런데 이게 또 다른 문제를 야기 시킵니다.
 
['사실 - 중심적' 사고는 성서도 문자적으로 보는 경향을 만들었다. 사실 - 중심적
사고로 성서를 읽고 취급하는 것이 문제인 이유는 성서의 정신을 문자에 갇히게
만들기 때문이다
.]
 
현대신학이 과학주의의 이런 위기에 대해 어떤 대응을 했는지가 중요합니다.
대표적으로 잘못된 대응은 '창조과학회'류의 대응입니다.
 
[이는 주로 기독교인 과학자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들은 성서의 진술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 이들은 성서의 잘못된
문자주의를 과학주의적 사고와 연관시킨다
.]
 
이러한 시도는 최소한 두 가지 문제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성서언어문제
[성서의 정신과 언어가 가지는 성격을 알아야 한다......성서의 언어는
사실적 표현
, 시적 표현, 신화적 표현, 풍부한 수사학, 종교적 고백 등
영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의 모든 기능이 다 포함된 진술의 형태를
가진다
......이제 우리는 문자를 뚫고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고, 성서의
세계에서 성서의 정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 즉 과학적 언어,
과학적 진술 방법으로는 성서의 뜻에 도달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성서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문자에 가둘 가능성이 높다
.]
 
진리판단의 주체문제
[성서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성서 진리'를 과학에 의해 판단되게
하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 성서의 진리와 신앙은 인간의 과학적 증명 여부에
그 진실이 좌우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시도가 과학이 아직 밝히지 못한
작은 것에 논리적 근거를 두다가
, 그 토대가 무너짐으로 오히려 심각한
타격을 입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신이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은 점차 작아진다.]
 
여기까지만 해야겠습니다. 다음은 이절 마지막 '역사의식과 종말론적 신앙'
대해서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profile

비가오는날

March 28, 2013

불가지론: 초경험적인 것의 존재나 본질은 인식불가는하다는 철학상의 입장

profile

天命

March 29, 2013

요새 저는 집수리 하는 중이라 바빠서,
오늘 새벽이 되어서야 이 공부를 했습니다.
역시 읽으면 읽을수록 참 재미 있고 생각해야 할 것도 많이 나옵니다.
마치 주렁주렁 이어져 나오는 고구마 뿌리 같습니다.
 
오늘 새벽 5시에도 어김없이 내 창문을 환하게 비추기 위해  
우리 앞집 '영동교회' 의 새벽기도를 알리는 불이 켜질 것이고 
찬송소리도 들려 올 것입니다만,

아무리 년수가 더해 가도 항상 똑같은 차원에서 低徊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실상을
더욱 생각하게 되는 새벽입니다.  감사합니다. ^^^
 

"그러니까 기도나 경건 보다 바른 신학의 정립이 더 우선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요?^^"

말이 나와서 그런데, 소위 '바른 신학'이라는 말도
쓰는 사람과 교회에 따라 참 종류도 다양할 수밖에 없네요.
그걸 늘 구호처럼 앞세우는 교단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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