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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의 흐름10
 
오늘은 제2장 계시의 주체 : 바르트 / '바르트신학의 개요'에 이어서 세 번째 절
"계시의 초월성"을 연재하겠습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특정신학을 전문적으로
파헤쳐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와 응답'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춰 간략하게
현대신학의 흐름을 공부하는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어렵긴 합니다.^^
천천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3. 계시의 초월성
 
'계시의 초월성'이야말로 바르트를 자유주의 신학과 구별되게 만들었으며 바르트
신학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일명 '변증법적 시기'라고도 합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저술은 로마서 강해2판입니다. 이 당시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적 계보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바울, 루터, 칼뱅, 키에르케고르"를 거명했고,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는 "도스도예프스키, 오버벡, 불룸하르트 부자, 쿠터, 플라톤, 칸트"
언급했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네 부분으로 나눠서 '계시의 초월성'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설교와 성서
 
젊은 목사로서 바르트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 였다고 합니다.
설교자로서 당연한 고민입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바르트는 성서의 내용을 이 세상과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 고민했다. 이 세상과
성서의 세계라는 두 세계를 어떻게 설교를 통해 조화시킬 수 있는가
? ...... 이것은
젊은 바르트에게 인간의 유한함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원이 어떻게 설교를 통해
만나지는지에 대한 고심이다
.]
 
바르트의 고민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성서해석'의 고민이었습니다. 성서의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 설교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이지요. 어쩔 수 없이
이때까지의 바르트 신학의 배경은 자유주의 신학이었고, 성서해석 방법은
'성서 석의방법론'(역사비평) 이었습니다. 바르트는 이 방법에 대한 한계를 통찰하고
새로이 고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가운데 바르트는 성서에 대해 결정적인 사고의 전환을 가진다. 그는 성서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게 된다
. 그는 하나의 큰 발견을 하게 되는데,
그때까지는 성서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길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성서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기록해 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 하지만 그는 성서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견해를 담은 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 반대로 성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우리는 그저 성서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것에 위로 받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구원하시는 섭리를 발견할 수 있는
책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르트신학의 기초이자 출발이었습니다.
 
[바르트는 성서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계시이며
, 이 계시는 인간이 조절할 수 없다. 성서의 모든 사건은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한 사실을 지적한다.]
 
사고의 전환입니다. 바르트는 성서 안의 새로운 세계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우리는 성서 안에서 한 새로운 세계, 하나님,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발견한다
.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이다. 사람들의
덕이 아니라 우리를 어두움에서부터 기이한 빛 가운데로 불러내신 그 분의 덕이다
.
인간들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이다."
바르트는 성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통해 로마서 강해를 쓸 수 있었고, 나아가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게 됩니다.
 
 
2) 전적타자
 
[바르트는 성서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 말씀은 계시로서 인간의 조정을
넘어선다고 생각했다
. 그렇기에 그는 당시에 많이 사용하던 역사비평방법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 바르트가 역사비평학 자체를 거부했다기보다는, 역사비평방법이
성서에 대한 잘못된 원칙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 , 어떤 방법론을 가지고 그
방법론의 원칙에 성서의 본문을 엄격하게 적용시키면
,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이성과 판단에 맡겨지게 되는 것을 우려했다
.]
 
그렇다고 바르트가 '축자영감설'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역사비평을 기본
베이스(bass)로 하지만 그것 또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서를 해석하는 절대적인 방법론은 불가능하다는 뜻이겠죠. 바르트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유명한 명제가 있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적인 것과는 다른 어떤 존재이며, 인간과도 전혀 이질적인 어떤
존재이다
.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성서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전적 타자'(wholly other)이며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바르트는 자신의 초기 신학의 특징인 '전적타자' 개념이 케에르케고르의 시간과
영원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에 기인한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다를 뿐 아니라 이 세상과도 전혀 다른 분이다. 하나님은 현존하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자로 오고 있는 자이고 세상을 근원적으로 새롭게 하는 자이다
.
바르트가 하나님을 '오고 있는 자'로 이해한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속하는 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유일한 관계는 바로 분리의 관계이고, 질적
차이로서의 관계만 있을 뿐이다
. 인간과 신 사이에는 어떠한 직접적인 연속성도 없다.
유한이 영원을 품지 못한다.(Finitum non capax infiniti!) 따라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오직
'질적 단절'로서의 관계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신 인식은 로마서 강해에 놓인 신학적 특징입니다. 왜 바르트는
이러한 신학사유를 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당시 자유주의 신학이 신을 인간과
역사에서 찾아지는 존재로 인식한 내재주의적 신관의 문제점과 한계를 통찰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3) 위기
 
전적 타자인 하나님은 인간에게는 이질적인 자가 됩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의
범주로 인지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할 때 우리에게 오고,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적당한 도움과 위로를 주는 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 요즘은 그런 하나님이 대세이니
이 말이 소 귀에 경 읽기처럼 들리겠지만.....) 질적으로 다른 그 분이 인간세계를 요동하면서
드러날 때 인간에게는 '위기'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죄 된 인간에게는 심판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면 인간이
기쁨과 위로가 아니라
, 먼저 노출되는 것은 인간의 죄성이다.....하나님의 말씀이
오면 감추어진 인간의 본질이 계시의 빛 아래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 인간은
심판 아래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 이것은 바로 전 실존의 '위기'로 이어진다.]
 
여기에 예화가 있네요. 인간은 햇빛에 대해 뭔가 말해 보지만, 정작 태양을 직시할 때
인간의 눈이 감기고 넘어지듯, 신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의 죄성이 노출되며 잘못된
자신의 실존이 감히 신을 바라보지도 못하며 쓰러지는 '위기'에 처한다.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말도 했네요. "직접적으로 인지되는 신은 우상이다. 인간의 지, , 의에
바탕을 둔 어떠한 직접적인 신 인식도 모두 우상이다." 배워야 합니다. ㅎㅎ
 
[바르트는 로마서 7:7 이하를 "종교의 의미""종교의 실체"라는 제목으로 해석하면서
.....바르트는 무엇보다 먼저 계시와 종교를 구별하고 인간의 종교적 체험을 계시로
착각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 바르트에게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의 체험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것을 말한다
.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과 인간의 엄청난 간격을
무시하고 영원하고 낯선 하나님에게 손을 뻗어 하나님을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
 
바르트에 의하면 종교는 인간의 착각이며, 교만의 '발로'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종교성에 매달리는 것은 계시와 종교를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일 뿐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려는 착각과 교만으로 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종교는
계시의 빛 아래에서 폭로되는 인간의 죄성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위기일 뿐이라는 것이죠.
 
저자는 여기서 한 마디 더 보탭니다. 인간이 종교성에 묻혀 자기만족적 상태가 되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르트는 인간의 죄성의 깊이를 잘
모르고 시도하는 종교적 체험을 "낭만적인 열정"이라고 표현했네요.
 
[믿음은 인간의 의가 아니다. 믿음은 인간적 태도나 신념과 무관한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고 인간의 존재와 소유 모든 것에 활동하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 이 하나님의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자유 가운데 일어나는 힘 있고 실재적인
행위이며
, 인간에게 믿음은 단지 기적일 뿐이다......경건과 종교는 인간의 행위이고
믿음은 하나님의 행위이다
. 종교적 체험과 은혜로 오는 믿음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이는 당시 대세였던 자유주의 신학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들입니다. 어떤가요?
우리 한국교회 신앙(?)과도 배치되지 않나요? 앞서 지적했듯이 형태만 다를 뿐
자유주의와 신비주의(경건주의)는 인간에서부터 신에게로 향하는 동일한 도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바르트는 인간의 종교와 숭고한 감정, 자신을 위한
종교성은 궁극적으로 "우상숭배'로 못 박습니다.
 
 
4) 주체이신 하나님
 
'유비'(analogy)라는 단어를 아실 겁니다. 어떤 새로운 사물이나 객체를 인식할 때
쓰이는 방법론을 뜻합니다. 철학과 신학에서 자주 사용되었는데, 철학에서는
플라톤 이후, 신학에서는 아퀴나스 이후 즐겨 사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없다고 단호히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바르트가 단호하게 존재의 유비를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존재의 유비는 방법론적으로 인간이 중심이 된다
. 이 방법에 의한 신 인식은
인간의 자기 속성에 의한 투사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 둘째, 존재의 유비가
인식론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가 단지
'' 적인 차이만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주의할 점은 존재의 유비가 반드시 '이성'만을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니라
, 인간의 종교적-신비적 체험도 인식의 매개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자연신학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
 
바르트는 존재의 유비를 '적그리스도의 고안'이라고까지 했네요.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어떠한 만남, 관계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인가?"
당연히 아니겠죠. 다만 존재 유비를 거부한 것이고, 또 신과 인간의 만남, 신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이 주체가 되는 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르트는 인간 쪽에서 출발해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유비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는 오직 하나님 쪽에서 계시로서 허락하는 유비(analogia revelatonis)는 가능하다고
보았다
. 혹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연결이 존재하며, 이 연결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며 소통의 고리라는 뜻으로 관계의 유비
(analogia relationis)라고도 한다.
하나님이 허락한 이 관계의 유비는 인간 쪽에서는 오직 신앙으로만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신앙의 유비
(analogia fidei)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고, 인간은 신앙 속에서 말씀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르트 주장의 요지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혹은 유비는 반드시
하나님 우선성(initiative)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주관되고 하나님에 의해 허락된 이 연결은 바르트가 그렇게 강조하는
'은혜'를 의미한다. , 바르트는 하나님과 자연인 사이의 유비는 거부했지만,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님의 자발성에 의해 은혜의 관계를 가지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
 
하나님의 주권의 강조입니다. 모든 것이 그 분의 결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 분은 인간에게 탐구, 경험, 설명, 서술 될 수 있는 객체가 아니라 '주체'라는 겁니다.
그 분은 스스로 자신을 알리는 분이며 자신을 계시할 때 인간은 저항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역사를 뚫고 들어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말씀이 주체로서 인간에게 말씀하고, 이 말씀이 인간에게 위기와
물음을 던진다.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에게 '부정'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부정 뒤에서는 훨씬 더 큰 하나님의 '긍정'이 온다. 인간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타락과 불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무한한 긍정으로 다가온다. 하나님의
부정은 결국 하나님의 긍정으로 가기 위한 첫 단계이다. 이것이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의 특징인데 공부가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음은 네 번째 절 '자연신학 논쟁과 은혜의 우선성'을 연재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profile

天命

April 24, 2013

부정과 긍정을 반복하는 바르트의 신학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따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진즉이, 바르트 신학의 문제점을 파헤쳐 본다는 의도라도 가지고
이를 연구하고자 했다면 한국교회가 지금과 같은 저회적인 상태에서  
좀더 일찍 벗어날 수 있었으련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읽다가 아직은 감이 잘 안잡히는 데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의할 점은 존재의 유비가 반드시 '이성'만을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신비적 체험도 인식의 매개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자연신학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로부터의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신학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한 것인가요?

또,
계시로서 허락하는 유비(analogia revelatonis)와 관계의 유비(analogia revelatonis)에서
왜 둘의 라틴어가 동일하지요?
profile

小木

April 24, 2013

일단 오타를 수정합니다.^^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 입니다.^^ 그리고 질문하신 내용은 이렇습니다. 바르트가 존재의 유비를 반대하는 이유 두 번째인데요. 일단 집사님 지적이 옳습니다. 존재의 유비라는 방법론 자체가 일반 학문에는 유용해도 신인식에는 적절치 못하다는 겁니다. 신과 인간의 차이가 양이나 형태의 차이가 아니라 질적 차이가 전제 되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래서 만약 존재의 유비가 가능하다면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처럼 이성적 방법을 통해 신을 인식하려는 시도만이 아니라, 종교적 감수성이나 신비적 체험도 얼마든지 신인식의 도구가 될 수 있어서 자연신학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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