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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선풍기에서 에어컨으로 옮겨 가야 할 것 같네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 '그리스도의 형성'이 있을 뿐이고, 이것이
유일한 현실이다. 하지만, 이 유일한 현실은 현재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현실은 완전히 현재화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에게 이
세상은 어떤 의미이며,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매우 중요하고도 진지한 질문이
가능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답을 본회퍼에게 들어 보도록 하죠.
이라고 했다. 아직 의인화되지 못한 상태, 그리스도의 현실로 들어오지 못한 이 세상의
상태를 '궁극이전의 것'(the penultimate)이라고 말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궁극이전의
것은 "궁극적인 것 이전에 생기는 모든 것이고 궁극적인 것이 발견됨으로써 궁극이전의
것으로 인정되는 모든 것이다."]
이것이 밝혀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혼란스럽겠죠.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할
지 말입니다. 기독교 윤리는 이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고 하네요. 궁극적인 것과 궁극이전의 것의
관계 설정에는 두 가지 극단적인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급진적인 길이고 다른 하나는 타협적인 길입니다.
궁극이전의 것은 죄이고, 그리스도에 대립되는 것이며, 궁극이전의 것은 거부며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이 때 궁극적인 것은 궁극이전의 것에 대한 파괴자로 다가온다.]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망해야하는 현실이니까요. 십자가는 믿는 자에게는 은혜지만 세상에는
가혹한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유지되고 있다. 궁극이전의 것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궁극이전의 세계는
자체적으로 존재의 가치를 가진다. 궁극이전의 것은 궁극적인 것으로부터 위협받지 않는다.]
두 가지 길 모두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둘 다 똑같이 극단적이고 오류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타협주의는 결단을 미워한다. 극단주의는 현명한 것을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단순성을 미워한다.
극단주의는 중용을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미워한다. 극단주의는 현실을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말씀을 미워한다."
보존의 하나님을 생각한다. 전자는 종말을 절대적인 것으로, 후자는 이미 존재한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파괴되고, 타협주의에서는 궁극이전의 것이 궁극적인 것의 지배를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현실에
참여하려는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이 두 가지 길에서 어려움을 겪는 게 사실입니다. 본회퍼는
어떤 길을 제시할까요?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극단주의도 타협주의도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의 현실과 인간의 현실이 존재한다. 라고 합니다.
현실은 세상의 현실과 만난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 참된 만남에 참여케 한다. 그것은 모두
극단주의와 타협을 넘어서는 만남이다. 기독교인의 삶은 그리스도와 세상의 만남에 있다."
궁극적인 것과 궁극이전의 것의 관계를 예수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에서 찾았습니다.
궁극이전은 부활의 힘이 드러나고, 새 창조의 힘이 자라나는, 즉 궁극적인 것이 확장되어야 할
공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궁극이전의 세계는 하나님이 유지하고 보존하는 세계이고 인간이
아름답게 살아야 할 세계이다.]
궁극이전의 것은 궁극적인 세계가 확장될 곳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결국 궁극이전의 것이
궁극적인 것이 되는 것인데,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 는 질문이 생깁니다. 본회퍼는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그리스도만이 궁극적인 것을 향해 "길 예비"를 한다는 논리입니다.
믿음의 고백입니다. 본회퍼가 살았던 당시의 세상을 아시죠? 히틀러 정권의 어둠 속에서 이런
믿음의 고백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스도의 도래와 그의 길 예비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도움이나 방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것 앞에서 인간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본회퍼는 뭐라 답 할까요?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한한 책임을 부과한다. 굶주린 자는 빵을, 집 없는 자는 거처를 필요로
한다. 무규율한 자는 질서를, 노예는 자유를 필요로 한다. 굶주린 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모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가는 길은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것인 동시에 굶주린 자의 것인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그와 빵을
나누어 먹고 거처를 같이 한다. 만일 굶주린 자가 신앙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 죄는 그와 빵을
나누기를 거절한 자 위에 떨어진다.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는 것은 은총의 도래를 위한 길 예비이다."
또 저항하는 존재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인 것과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궁극이전의
것을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궁극적인 것과 분리된 단순한 사회적 프로그램이나 사회 개혁은
궁극적인 것으로서의 길 예비와는 다르다고 본회퍼는 이야기 합니다.
것이 궁극적인 것과 관계되어 있다."
한다고 강조합니다. 본회퍼는 구체적으로 네 가지 위임(four Mandates)을 제시합니다.
위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위임은 역사적 산물이거나 인간이 만든 가치가 아니라 위로부터
온 것으로 봅니다. 물론 절대적이라는 게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책임적 존재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항목이라는군요. 우리 시대에는 우리에게 위탁된 위임을 찾는 것에 과제일 것입니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는 이 때
열공에 수고가 많습니다. ㅎㅎ
위에서 인용된 '그리스도의 형성'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들어오지 않아서
나도 김동건 박사님의 책을 직접 펼쳐보았어요.
뭔가 오자가 아닌가 하구요.
거기에도 그대로 '형성'이라고 되어 있네요. 음,
형성이라는 단어로 번역된 영어는 두 가지네요.
formation, form
근데 form은 모습, 또는 형성 등등으로 번역되어 있군요.
그게 본회퍼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무언지 확인할 수 없어요.
그게 필요한 데...ㅠㅠ
김동건 박사님은 영역본으로 책을 보신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형성'이라는 단어는
개념적으로 정확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내가 추정하기에 본회퍼가 그 단어를 사용할 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質料와 形相' 개념을 전제한 겁니다.
질료는 matter이고, 형상은 form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form은 에이도스와 비슷한 말로서
플라톤의 이데아에 가깝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있지요?
그때의 形像은 'image'입니다. (한자가 맞는지 모르겠는데...)
개념적으로 볼 때는 질료와 형상의 그 형상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의 그 형상이 비슷합니다.
김동건 박사님이 형성이라고 표현한 그 단어는
'형상'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고 봐야 합니다.
그책 336쪽 둘째 줄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오직 하나 '그리스도의 형성'(Christ's form)이 있을 뿐이고...>
'그리스도의 형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이겠지요.
형성이라는 단어로 번역한다고 해서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ㅎㅎ
왜냐하면 결국 형상이 어떤 것을 가능하게 하는(즉 형성하게 하는)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전체 철학과 인문학의 흐름에서 볼 때
형성보다는 형상이라고 해야 옳은 거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현실성'이라는 말은 판넨베르크의 말이 아니라
그냥 신학에서 통용되는 말이에요.
철학에서도 통용되구요. ㅎㅎ
세상 현실성이라고 하면
겉으로 보이는 그런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전체로,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을 가리키는 거지요.
수고 많았습니다.
인간은 길 예비에 참여하는 책임적 존재 또 저항하는 존재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본회퍼, 우리 책임을 또 지적하고 있군요.
‘그리스도의 형성’이란 말이 대강 뜻은 들어오는 것 같지만 좀 익숙하지 않은 표현이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