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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대표적 사상입니다.
못하는 현실을 고민하였다. 그는 비신화화라는 계시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으로 현대정신의
문제점을 극복하려 시도했다.]
해석학이 없이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합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보겠습니다.
즉 하늘, 땅, 지옥이라는 삼층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신화론적 세계관입니다. 이게 신약성서만의
특별한 사고는 아닙니다. 그리스 시대의 모든 종교들이 공유한 세계관입니다. 보통 별 숭배,
신비 종교, 영지주의, 유대 묵시적 신화 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불트만이
'신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하고 있는가가 중요하겠죠.
보느냐에 따라 비신화화의 타당성이 주어지기 때문이다.......불트만이 신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신화는 비세상적인 사물을
세상적인 것으로 만든다......둘째, 신화는 인간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대한
표현이다.......셋째, 신화의 목적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자신에 대한 자기-인식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신화는 우주론적으로 해석해서 안 되고 인간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신화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접근은 실존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신화론적 세계관이 과학에 의해 사고가 형성된 현대인에게는 수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뿐 아니라, 우리는 실제로도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그 나름의 자연적인 원인과 결과를
가진다는 가정 위에서 행동한다."
것은 무리죠. 한국교회는 예외(?)입니다만,
신화론의 충돌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익히 들었던 것처럼
불트만의 비신화화가 성서의 신화론적인 세계관을 과학적 세계관으로 바꾸거나, 현대인에게
맞게 합리적 진술로 고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손질하여 종교를 현대인에게 보다 잘 수용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기-변명을 못하게 하려 한다.......불트만은 현대인은 두 가지 점에서 위험에 처해 있다고 본다.
하나는, 현대인은 과학적 지식에 의해 이 세상과 자신의 삶을 통제하려 한다.......다른 하나는,
현대인은 진정한 안정은 인간의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을 조정함으로써 얻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비신화화의 목적은 신약의 세계관이라는 잘못된 걸림돌(stumbling-block)을 제거하고,
참된 걸림돌을 드러나게 하여 현대인에게 분명히 마주치게 하는 것이다.]
신화들을 비신화화 함으로 그 밑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노출시키려는 것이죠.
여기까지는 비신화화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이 정당한 것일까요?
요한에게서는 근본적으로 이미 신약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비록 여전히 우주적
드라마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실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를 기대했었지만, 결정적인 사건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바울은 묵시론적인 세계관에 따라
복음의 핵심을 해석하지 않았다. 예수의 말씀, 선포, 복음과 율법, 심판과 종말 등의 개념에
대해 이미 실존적인 해석을 하였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믿었다. 즉 요한도 묵시문학적인 세계관이나 구조로
복음을 이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트만은 이렇게 주장한다. "비신화화는 신약성서 자체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오늘 날 우리의 비신화화 과제는 정당하다."]
경향이 있었다. 초기에는 단순한 문법이나 문헌의 해독이 일차적인 목적이었다. 점차
해석학은 기록된 문서의 형식, 개념에 대한 이해, 문법적 특징 등의 법칙들과 연관해서
사용되었다. 해석학은 18세기가 되면서 그 뜻이 훨씬 확장되어 지금의 해석학이라는
용어로 쓰인다.]
중요한 분야로 자리합니다. 기독교 세계에서 해석학에 대해 중요한 위치를 가진 사람은
슐라이허마허이며 그 후 19세기 딜타이에 의해서 해석학은 더욱 발전됩니다.
바른 해석의 문제가 등장한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성서 텍스트가 가지는 중요성만큼
해석학의 중요성도 비례한다.]
행했다.......비신화화는 신약의 신화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다.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신약의 신화론적 요소들을 잘 알았다. 그들은 신약의 신화를
안전하게 제거하고 단지 그 핵심만을 간직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신화뿐 아니라
케리그마 자체도 없애버리거나, 혹은 케리그마를 얼마의 종교적인 원칙이나 윤리적 원칙으로
환원시켜버렸다.]
우리의 과제는 성서비평학을 신화론으르 해석하기 위해 사용한다."
'전이해'(pre-understanding)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연관'(life-relationship)이다.]
주어진 본문에 어떤 질문을 던지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것은 해석자가 직접이든 간접이든 텍스트에 표현된 주제와 삶의 연관을
가질 때 어떤 이해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삶의 연관이 없다면 텍스트는 침묵한다.
객관성과 해석에서의 객관성이 가능한지를 질문함으로써 객관적 지식과 역사의 객관성을
다룬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객관성을 자연과학에서 사용하는 객관성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불트만에 따르면, 역사적 자료의 해석에는 크게 두 가지 접근이 가능하다. 첫째, 단순히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둘째는, 역사적 자료로부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뭔가를 배우는
것이다. 즉, 역사적 자료가 우리의 자기-이해를 위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
두 가지 중 첫 번째 방법을 반대한다.]
시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을 단순히 조합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는군요.
역사의 상황을 재구성하는 것에 대한 관심에 의해, 심리적 관심에 의해, 혹은 심미적 관심에
의해 공급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해석의 목적은 인간 실존이 살아 움직이는 삶의 영역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관심에 의해 수립된다.]
'성서도 하나의 역사적 자료'라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을 찾는 가운데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의 삶은
신을 향한 추구에 의해 움직여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항상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
자신의 실존에 대한 질문에 의해 움직여지기 때문이다."]
질문을 적절히 던지는 방법은 '인간의 실존이 성서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이다.
불트만은 성서에 대한 바른 질문은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불트만은 실존철학의 인간이해와 신약의 인간 실존의 이해가 거의 동일하다고 인정합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인간의 '타락'에 대한 관점입니다. 총체적이냐, 부분적이냐, 하는 차이입니다.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불트만의 실존신학과 실존철학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실제적인 가능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덜 타락한 것처럼 말하고, 실존철학자들과 논쟁할 때는 정통주의 입장의 상당히 신화론적인
포즈를 취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핵심은 '인간의 타락'에 대한 이해입니다.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실제적인 능력은 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불트만과
실존철학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고, 이 부분이 둘 사이의 경계를 가르는 차이의
핵심이 될 것이다. 즉, 불트만은 그의 케리그마의 해석을 실존철학과 구별하는 시도를 할 때,
타락을 주어진 조건으로 간주함으로써 자연인이 타락에서 자신의 진정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한다. 불트만은 그 이유를 단순하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표현으로 본다........불트만은 죄를 이렇게 정의한다. "눈에 보이는 안정을 추구하고, 손에
잡히는 실체를 추구하며, 일시적인 것들에 매달리는 것이 죄이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실체를 닫아버리고 우리에게 선물로 오는
하나님의 미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한편, 신앙은 죄-아닌 상태를 의미한다. 성서는 생명이
항상 선물임을 말한다. 실존의 진정성(authenticity)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인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가능하다. 불트만에게 신앙은 자신에게서 떠나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의 자기 안정을 포기하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안정을 찾는 것이다."]
죄를 존재론적으로가 아니라 실존적으로 이해한다는 말은
죄가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행위를 통해서 죄가 된다는 뜻입니다.
불트만에게는 객관적인 역사는 중요하지 않고
인간이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경험하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지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도 역시
그걸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하느냐에 초점을 두는 겁니다.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하구요.
한국교회 신자들은 성서문자주의를 따르면서도
신앙적으로는 실존적인 경향을 보입니다.
모순이지요.
불트만을 거부하면서
실제로는 불트만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거지요. ㅎㅎ
비신화화라는 단어보다는
탈신화화가 독일어 <Entmythologisierung>에 더 적합합니다.
힘들어도 열공하세요.
그게 남는 장삽니다. ㅎㅎ
존재론적, 실존적을 해명키 위해
일주일 내내 하이데거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목사님께서 진짜, 선수를 치셨습니다.
사실 저는 어제 TV를 보다가 이 문제를 생각케 하는 걸 하나 목격했습니다.
어제 ebs의 인문학교실에서 였습니다.
르네상스 초기의 그림 중에 베드로가 세례를 주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스승 정도는 된다는 화가의 그림입니다. 화가 이름은 기억을 못합니다.
세례를 받고 있는 장면인데,
세례를 받고 있는 건장한 남자의 모습이 조금 이상하게 보입니다.
자못 거룩하고 엄숙한 이 장면에 어울리게
그 남자 모습도 그러해야 하거늘
이 남자, 잔뜩 웅크리고 떨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왜 그럴까?
세례를 받고 있는 자신이 황공해서 그러한 것인가?
그러나 그 모습에 대한 설명은 달랐습니다.
지금 그림 속에 나오고 있는 다른 사람들, 모두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필시 추운 겨울에 이 세례가 시행되고 있는 광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례 받고 있는 장정이 아무리 건장해도 추운 건 당연지사!
그래서 추워서 잔뜩 웅크리고 있다는 겁니다.
중세의 기독교의 그림,
더구나 세례 장면이라면 근엄과 엄숙과 거룩을 상상하겠지만
르네상스의 사조가 시작되면서,
이렇게 회화 속에서도 인간의 실제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존재론적으로는 거룩하고 엄숙한 세례 장면이
실존적으로는, 추위에는 떨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
- 이게 제대로 설명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
목사님 설명하신 것은 그걸 가지고 또 읽고 또 읽으면서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불트만은 죄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실존적으로 이해했다." 는
아직도 규명 중에 있습니다. 너무 읽어야 할 거리가 많아서...
공부할 건 매주 쌓이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