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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의 흐름24
 
오랜만에 연재를 합니다. 나름 여름방학이라 생각하고 좀 쉬었습니다.^^ 불트만 연재를
끝내고 방학을 했어야 했는데, 게으름이 천근만근이었네요. 오늘은 불트만 '5. 역사와 신앙'
연재하겠습니다.
 
 
5. 역사와 신앙
 
[역사와 신앙은 20세기 신학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주제이다. 중세 이후 근대까지 기독교에서
해결해야 할 우선적 주제는 이성과 신앙의 문제였다
. 이 주제는 오랫동안 기독교 전승에서
다양한 형태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 물론 이성과 신앙은 지금도 여전히 신학의 주요한
관심을 끌고 있다
. 하지만 계몽주의 이후 역사학의 발전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역사학은 다양한 역사에 대한 관점을 제공함으로 역사관이라는 사고의 틀을 제공했다.]
 
과거의 사람들이 공간적 사고를 하는데 반해, 현대인들은 시간적 사고를 합니다. 그래서
역사의 모든 사건을 시간 안에서 해석하기 때문에 초월적 요소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계시의 초월적 성격과 심각한 대립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계시는 계시로서의 그 타당성을 역사 내적인 어떠한 것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냥 계시 스스로가 진리인 것이죠.
 
[이렇게 됨으로 현대로 오면서 역사와 계시, 혹은 역사와 신앙의 문제는 신학에서 해결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된 것이다
.]
 
역사와 신앙의 문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아직도 완벽히 해결 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그 근저에 역사와 신앙이라는
근본적인 대립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부 자르듯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역사적 예수 추구 = 역사비평학을 통한 진리추구.
신앙의 그리스도 추구= 계시는 인간의 영역을 초월하며 인간은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와 조우.
 
역사적 예수를 추구하는 노선과 신앙의 그리스도를 주장하는 노선은 늘 평행선을 달렸고
도저히 접촉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불트만을 통해 역사와
신앙의 만남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습니다.
 
[역사와 신앙의 만남을 시도한 신학자는 종종 있다. 하지만 불트만처럼 실제로 역사비평학을
적용하면서 이렇게 진지하게 신앙과 대화를 한 신학자는 없다
. 불트만은 역사비평학을 가장
엄격하게 사용하는 역사가로서 역사적 예수를 추구했다
. 동시에 그는 루터의 '오직 믿음'
전승에 충실하게 서 있는 전형적인 개신교 신학자이다
.]
 
주제가 주제인 만큼 세부적으로 다룰 수는 없고 전체적인 흐름과 방향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불트만 신학에서 역사비평학을 통해 역사적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앞서 공부했던 부분을 참고하세요.^^ 더 나아가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를 통해 구원도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한때 결단했고 예수를 '쫓음'으로 예수의 오심을 받아들였던 그 결단을
예수의 십자가에 직면해서 새롭고 근본적으로 했어야 했다
. 말하자면 십자가는 결단의
문제를
다시 한 번일으켰던 것이다."
 
[불트만에게서는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이나 케리그마가 선포될 때 인간에게 결단이 요청된다.
그러므로 위 인용에서 예수의 삶이 결단을 요청했고, 십자가에서 다시 한 번 결단의 문제가
생긴 것은 역사적 예수를 통해 구원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 불트만은 역사비평방법으로
예수의 말씀
, 비유, 행위에 대해 많은 것을 밝혔다. 하지만 그는 직접적으로 역사적 예수가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표현에는 신중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예수가 구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불트만의 입장이다
.]
 
불트만의 저서(공관복음 전승사』 『예수』 『예수와 바울)를 통해 그의 입장이 일관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자신을 보냈다는 의식 속에 있었다. 이것은 자신의 선포에
의해 사람들에게 요청한 것이 결정적 결단이었음을 의미한다
. 그가 지금 사람들을 회개토록
선포하는 것은 정확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최종적인 증거이다
; 그의 오심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은혜이다
;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는 이제 값없이 하나님의 구원이 주어진다.
참으로 예수는 자신의 사역에 근거해 결단을 요청했다."
 
[위의 인용은 역사적 예수가 구원의 주체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가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비판은 참으로 근거 없다는 것을 확연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따라서
불트만은 역사비평학으로 역사적 예수를 찾을 수 있고
, 나아가 이 역사적 예수를 통해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이것은 지금까지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 비해 매우 긍정적인 기여이며
높게 평가할 만하다
. 불트만의 기여가 긍정적인 이유는, 불트만은 누구보다 엄격한 양식 비평을
사용해서 역사적 예수의 추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나아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어느 정도 그려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 그의 말씀과 인격을 통해 구원이 선포된다는 것도 밝혔다.]
 
이 주제를 "역사와 신앙"이라는 차원에서 보겠습니다. 불트만의 주장에 따르면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역사적 예수의 구원과 신앙의 그리스도의
구원이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와 신앙의 접촉점도 가능해 진다는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불트만은 1962"초기 기독교 케리그마와 역사적 예수"에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한다.
"무엇보다도 이제 예수의 선포가 '케리그마적 성격'을 가진 것은 분명하다." 불트만은 자신의
제자들과의 토론에서도 같은 입장을 유지한다
. 케리그마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메시지도 과거의
에온과 단절을 요구하며
, 이미 새롭게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를 향하도록 한다.]
 
전문적인 용어로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에는 '연속성'(continuity)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구체적으로 역사적 예수의 선포와 신앙의 그리스도는 세 가지 점에서 같은 성격을 가집니다.
 
첫째, 양자 모두는 최종적인 목표가 인간의 구원, 혹은 인간의 새로운 자기-이해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의 선포와 마주하든, 신앙의 그리스도를 만나든 인간은 다 같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둘째, 양자 모두 '지금 여기'에서의 결정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역사적 예수의 선포나 신앙의
그리스도는 단지 추상적인 지식이나 개념이 아니다. 양자는 그 선포를 통해 인간에게 실존적
결단을 요청한다. 이 결단은 반드시 지금 그리고 여기(here and now)에서의 결단이다. 이 결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현재화된다.
 
셋째, 결단에 의해 인간은 죄, 혹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스스로 만든 안정성이라는 참답지
못한(inauthentic) 삶에서 자유로워진다. 여기서 결단을 인간의 내재적 능력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앞서 논의했지만 인간의 결단의 다른 측면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불트만에게서
결단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제한 인간의 능력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저자의 글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불트만이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을 확립한 것은 중요하다. 이를 통해
그는 역사와 신앙이 접촉점이 있으며 만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역사적 연구와 신앙의 선포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역사와 신앙이 서로 배타적인 두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 이것은 역사와 신앙 사이에는 서로 접촉 가능한 부분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점이 계몽주의 이후에 시작된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 기여한 불트만의 진정한 공헌이다.
불트만은 역사-비평적 연구가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역사와 신앙은 배타적이기만 했다
. 이제 역사와 신앙은 한 점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
 
 
다음에는 불트만 신학의 최종 평가를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평안 하십시오.

profile

天命

September 06, 2013

현대신학의 흐름 24, 벌써 20 분이나 조회를 했네요.

저는 지금 (현대신학의 흐름 8)의 초두에 나오는,  저자 김동건 교수께서
현대신학의 흐름을  '계시와 응답'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여 글을 쓴다는 뜻이
무슨 뜻인가에 걸려 넘어져서, 일어나려고 기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24번이 올라와 있는 것도 이제서야 발견했습니다.

그래도 그러던 중 이신건 교수의 글을 발견해서 이를 우선 올렸습니다.

대강, 그 뜻이 " 현대신학자 각자의 계시에 대한 이해가 어떤가에 따라,
그의 신학의 전개가 어떻게 되고 있는가?"의 관점에서 분석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profile

小木

September 06, 2013

그런 것 같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인간의 반응, 이런 관점에 따라 각 신학자들의 신학을
훑어 가는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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