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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이어서 오늘은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한다.
우리가 보통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성령체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기적’ 등이 경험이다.
이러한 것을 ‘종교적 경험’이라 하는데, 이게 진짜 가능한가? 하는 질문에 신학자들의 대답은 단연코
‘그렇다!’라고 한다. 이치적으로 봐도 종교적 경험이 없다면 종교란 아예 시작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의 현존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갖는다는 것은 앞서 다뤘듯이 개념적이고 사변적 논증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신의 현존에 대한 지식은 이론을 통해 아는 게 아니라 신의 행위를 경험하는 것을
통해 얻는 것이고, 그것과 관계를 맺는 다는 것이다. 옳다고 본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의
하나님 경험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사실 우리가 종교를 갖는 이유는 종교적 경험을 갖기 위해서지
종교적 이론을 알기 위해서는 아니지 않는가? 물론 이론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바르트의 말대로
‘교회를 위한 신학’이란 말이다.
종교적 경험에 대해 종교인들이 모두 선망하고 바라고 하느냐 또 그건 아니다. 그런 경험을 하나의
심리적 환상으로 보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그런 경험이 실재한다 하더라도 종교생활 즉
교회생활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에서 특정한 사람이 ‘본다’ ‘들린다’
이러고 다니면 공동체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교권을 가진 자 입장에서는 좋게만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신학자들은 신존재를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고 하니 한번
들어봐야겠다.
내가 읽었던 책의 저자는 종교적 경험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눴다.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 와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 이 두 가지로 말이다. 어려울 것 없다. 말 그대로다. 신비적 경험이라는
것은 어떤 종교적 대상이나 내용이 물질적 세상을 잠시 잊게 하는 경험이다. 개인적으로 환상, 음성,
특별한 감정, 황홀경 등을 통해 초월적 대상과의 조우를 하는 것이다. 독일 현대 신학자 루돌프 오토는
“누미노제(Numinose)”라고 표현했고, 유명한 일화 중에 하나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야기도 여기에
속한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을 쓰고 있는 기간에 미사를 집전하는 중, 그러니까 정확한 날짜까지
전해진다. 1273년 12월 6일 수요일 성 니콜라스 축제일 아침이다. 본인만 알 수 있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그때까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신학대전의 집필을 멈추게 된다. 의아해 하는
지인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본 것과 내게 계시되는 것에 비교해 볼 때 내가 쓴 모든 것은
지푸라기처럼 여겨지네.” 인간의 판단 기준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경험이다. 이것이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라고 한다.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는 신비적인 체험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예배, 기도를 포함한
일상적인 종교행위들을 말한다.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의 삶의 모두 것을 하나님과 연관해서 살펴보고,
의미를 찾고 그러한 태도, 패러다임으로 사는 것을 뜻한다. 보통 기독교인들이 모든 것을 “주님, 주님”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기독인들은 그런 패러다임으로 살기 때문에 모든 삶의 원인과 과정
결과를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이다. 시쳇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보이니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정리를 해야겠다. 도대체 ‘경험을 통해 신을 알 수 있다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는 것이냐’ 명제가 좀
흐려졌다. 나도 뭔가 확실한 대답을 듣기를 바라고 책을 읽었지만 대답은 약간 엉뚱한 곳에서 나온다.
역시나 학자들은 잘도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저자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려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에게 신의 존재는 이미 ‘증명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보았다. 들었다. 경험했다.’ 라고 하면 그냥 그런 것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단순한 심리적 현상인지 알 길은 없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안전장치를 조건으로 걸어둔다.
종교적 신비경험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종교적 일상적 경험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 경험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앞에 언급했던 아퀴나스나 사도바울처럼 말이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의 경험이 그의 일상까지도 완전히 뒤 바꿔놓았다. 그것이 진정한 ‘메타노이아’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런 조건을 달아 놓으니 많이 걸러지긴 할 것 같다.
결론은 신의 존재는 경험적으로 증명해 낼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뭔가 약간은 찜찜한 느낌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부활하신 예수가 로마황실에 간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있는 다락방으로 갔으니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