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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말한다.(하나님에 대한 물음)
실체론적 하나님 이해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이 우주공간 어디엔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공간적인 개념으로 구성된
현실 삶의 조건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당연히 그렇게 존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서에,
하나님이 하늘에 있다는 표현은 고대인들의 우주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뿐이지 공간적인 의미에서
하늘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어떤 사물처럼 어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분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공간적이고 실체론적 하나님 표상이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플라톤은 이 세상의 실재를 가능하게 하는 보편이 있다고 보고
그것이 곧 이데아의 세계라 했는데, 기독교는 이런 이데아를 하나님으로 해석하고 “하나님은 존재한다”고
했다. 곧 ‘실체론적 형이상학’의 출발인 셈이다.
그러나 이제 현대물리학과 철학은 실체론적 형이상학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과정철학의
“리얼리티는 과정이다”라는 경구가 있다. 리얼리티(reality)는 어떤 실체(substans)가 아니라
과정(process)이며 운동이고 변화라는 말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물(H2O)은 주변의 상황에 따라서
고체, 액체, 기체가 된다. 이런 과정에서 리얼리티는 어떤 액체, 고체, 기체라는 실체가 아니라 그
사이에서 변화되는 과정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이 지구 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인간까지 포함해서,
소립자가 여러 형태로 바뀌어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생물체이든, 무생물체이든 물체적 성질을 갖고
있다면 만물은 서로 간 상통된다. 인간 몸 안에 있던 칼슘이 원숭이나 밤나무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 반대도 역시 가능하다. 어떤 고정되어 있는 불변의 실체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리얼리티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을 어떤 존재자로서 설명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만약 동화책의 ‘있음’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차원에서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적 인식론
결국 하나님에 관한 문제는 존재지평이 아니라 인식지평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세계 내(內)
존재로서 세계, 역사, 현실성의 한계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세계는 곧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하는 길이다. 이런 방식 말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도달하겠는가?
진리에 도달해보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사실 이런 인식론적 근거에서 이루어진다. 기독교 신앙도
그러한 관점에서 그들과 경쟁관계에 놓여있다.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의 원리로 세상을 설명하며,
생물학자는 생물학적 원리로, 정치가는 정치논리로, 경제학자는 경제논리로 세상을 보듯이 우리 기독교
신앙은 신앙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며 그러한 인식으로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문제는 인식 체계가 다르다고 해서 하나의 것이 다른 하나의 것을 적대시하거나
어느 하나만이 우월한 것은 아니다. 각자의 인식 체계가 진리론적 바탕에서 나름대로의 합리적 설명을
제시할 수만 있으면 충분하다. 기독교의 신앙이 자신의 독특한 인식 방법론을 보편적 지평에서 전개할
수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구약성서를 통해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인식해온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지구상의 수많은 민족들
중 왜 그들에게만 하나님이 알려졌을까? 유대인들이 특별히 윤리적으로나 지성적으로 탁월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만을 편애해서도 아니다.(물론 그들은 그렇다고 주장하지만) 다만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비슷한 역사 현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활동을 읽어낼 수 있는 힘을 가졌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성서기자들과 예언자 전통이 쌓이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층을 두텁게 해 나간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을 좀 더 정확하게 인식해 나가는 그 과정에서 살아간다. 고정불변한 하나님
상(像)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유대인들의 전승을 이어받아 오늘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새롭게
하나님을 인식해 나가고 있다. 아직은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종말에 가서야 자신을
완전히 드러낼 것이다.
참고)
구약성서에 드러난 유대인의 역사가 다른 민족의 역사 일반과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하나님, 모세를 시켜 유대민족을 해방시킨 하나님, 가나안 부족들이나 주변의
제국들과의 전쟁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앞서 구, 신약을 공부하면서 성서가
객관적 역사를 사실적으로 진술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 해석을 시도한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그렇게 인식했다는 말이며,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으로
보냈다는 말은 모세가 그런 사명을 깨닫고 인식했다는 말과 같다. 일제치하에서 우리의 많은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해방과 독립을 위해 투쟁한 것과 비슷하다. 우리 선조들은 그것을 애국심으로 생각했지만
모세를 조상으로 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약성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인식해온 과정이다. 이 중에는 옳은 인식도 있고 잘못된 인식도 있으며 역사 전승을 통해서
진리가 드러나듯이 올바른 인식이 중심을 이루게 되어 히브리즘이 형성되었다. 급기야 유대의 민족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예수에 의해 보편주의적 방향으로 변화되어 기독교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