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lassic Style
- Zine Style
- Gallery Style
- Studio Style
- Blog Style
기독교를 말한다.(기독교의 윤리적 지평)
성서는 기독교 윤리의 전범인가?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자들은 성서가 기독교 윤리의 전범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윤리가
규범적 경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는 이유도 이런 전이해 때문이다. 실제로 구약성서의 율법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규범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십계명이 그것이다.
규범적 성격이 강한 성서의 지침들은 오랜 세월을 통해 갈고 닦여진 최소한의 규정이라는
점에서 매우 높은 가치를 갖는다. 이는 유대인의 삶의 농축된 지혜이며 질서다. 그들은 이런
지침대로 살아가기만 한다면 건강한 사회를 넉넉히 유지해나갈 수 있다고 경험적으로 확신했다.
따라서 성서를 기독교인의 윤리적 전범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유대인과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고유한 정신유산을 물려받는다는 점에서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하겠다.
그런데 이런 규범적 규정들은 일반적으로 그 시대의 특별한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석학적 과정 없이 현대인들에게 무조건적인 것으로 적용시키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구약 레위기, 출애굽기에 나오는 규범들은 그 당시의 세계관에 의한 것들이다. 물론 오늘의
시대정신이 따라잡을 수 없는 고귀한 윤리적 가치들도 넘쳐난다. 예를 들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책을 언급하는 출애굽기 22장 같은 경우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눈에 호불호간의
이러한 율법들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지 초역사적으로, 초문화적으로 모든 인간 행위를 규정하는 전범이라고
할 수 없다.
구약성서는 그렇다 치고 신약성서는 좀 다르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근본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할,
그렇지 않으면 신자가 될 수 없는 절대 규범으로 생각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별로 없다. 이 말씀은
그것이 아무리 선하고 귀해도,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이들이 취해야 할 윤리적, 신앙적 삶의
방향을 말하는 것이지, 행동지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가 우리 기독교 신자들의 윤리를 규정하는 유일한 전범이 아니라면 어디서 윤리적 근거를
찾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제기된다. 현재 처해 있는 정황에 대한 해석이 그에 대한
답변이다. 물론 그렇다고 기독교 윤리가 단순히 상황론에 빠져들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상황에서 스스로 책임적으로 판단하고 결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라. 실제로 뺨을 얻어맞는다면 다른 편의 뺨은 고사하고 맞받아 싸우는 게 통상적이다.
왼 뺨까지 돌려대야만 윤리적인 행동이고 그런 폭력을 제압하는 건 비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성서는 윤리 교과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이들이 새겨야 할 삶의 방향성이라 말 수 있다.
그 어떤 고전적인 진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이 시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된다. 성서윤리도 마찬가지다. 여호와의 증인이 수혈을 거부하는 것이 또
하나의 신앙이고 삶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설득력을 획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기독교 윤리는 인문학의 세례를, 아니면 최소한 인문학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절박한
시점에 와 있다. 그렇지 않고 성서를 절대규범이라고 고집한다면 그것을 실행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점점 더 고민과 번민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는 성서 말씀을 문자적으로 실천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렇게
살 수도 없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매 순간마다 실존적으로 판단하고 결단하는
과정을 통해서 실현된다.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는 자로서 매 사건에 직면하여 책임적인 자세를
견지해야만 한다. 이런 면에서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한 말씀은 기독교 윤리의
이러한 과정적 성격을 적절하게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