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6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래간만에 저희들이 다시 욥기를 공부하게 됐습니다. 오늘은 욥기 32장과 33장이에요. 우리가 공부를 할 때 몇 가지 생각해야 될 것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전체를 염두 해두고 부분을 봐야하는 점이에요. 그래서 32장과 33장을 따로 떼지 말고 봐야합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니라 복음서와 서신, 더 나가서 성경 전체를 바탕에 두고 부분을 따라가야 방향을 잃지 않게 돼요. 욥기가 전체 42장까지예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습니다. 적당하게 42장까지 있어요. 여기에 가장 핵심적인 것이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이에요. 여러분들이 욥기하면 ‘욥이 사탄의 시험받아서 쫄딱 망했다가 믿음을 잘 지켜서 다시 몇 배로 축복받았다.’ 이런 걸로만 생각하는데, 사실 그거는 욥기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서사,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욥기서는 단순히 서사에서 말하는 욥의 운명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욥의 서사, 줄거리, 스토리를 바탕에 놓고 신학적인 논쟁을 하는 것이 핵심이에요. 그래서 욥과 세 명의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진 신학적인 논쟁이 가장 길어요. 그게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 앞부분에 설명한대로 4장부터 31장까지예요. 전체 42장 가운데서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 스물여덟장이 됩니다. 3분의 2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상당히 길어요. 그 부분이 중심이지요. 그리고 욥에게 벌어진 불행한 사건들, 자식과 재산이 하루아침에 몽땅 다 없어지는 재앙은 1장과 2장이에요. 축복 이야기는 마지막 결론인 42장에 살짝 나오고요. 그리고 3장에서 욥이 자신의 운명을 탄식합니다. ‘이럴 바에는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하는 탄식이 3장에 나오고 4장부터 욥의 친구들이 나와서 31장까지 논쟁을 계속합니다. 지난번 공부 때 31장에서 욥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말했습니다.


여기 욥의 친구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시나요?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 세 친구들과 논쟁이 벌어지고 이제 욥이 31장에서 일단락 했어요. 논쟁이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엘리후라는 젊은 친구가 나와서 좌충우돌로 공격을 합니다. 욥도 비판하고 욥의 세 친구들도 비판합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전체 욥의 이야기에서 조금 이질적인 요소예요. 전체 흐름에서 볼 때 이 엘리후 이야기는 어색한 부분입니다. 몇 가지 점에서 그러한데요. 보통 욥의 친구들이 비판하면 욥이 반론을 폅니다. 늘 그랬죠. 그런데 엘리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욥이 반론을 펴지 않습니다. 엘리후 혼자서 말하고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욥의 긴 이야기 중에서 이 엘리후 이야기는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나옵니다. 그것이 일리가 있는 거예요. 혹시 여러분들이 이런 것으로 성경을 오해하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완벽한 거지 나중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라고 의아하게 생각하실 텐데, 이건 성서학자들이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이기 때문에 맞는 이야기고요. 그리고 이 엘리후 이야기가 나중에 쓸데없이 첨가된 것이 아니에요. 이 엘리후 이야기는 비교적 길어요. 32장에서 37장까지니까 여섯 장이나 됩니다. 거의 엘리후 혼자서 여섯 장에 걸쳐서 주로 욥을 비판하는데 친구들도 마음에 들지 않다는 뉘앙스로 쭉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엘리후 이야기는 쓸데없이 들어온 게 아니라 욥과 세 명의 친구들 사이에서 중재해 보려는 노력들이 들어있어요. 그게 무엇인지 우리가 조금씩 따라가 보겠습니다. 일단 전체 구조가 다시 한 번 정리가 됐죠. 전체 42장에서 가운데 토막인 핵심적인 이야기가 친구들과의 논쟁이었고 이어서 엘리후 이야기가 여섯 장에 걸쳐서 들어오게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욥에게 이르는 이야기가 38장에서 41장까지 있어요.


전체적인 윤곽이 다시 한 번 정리 됐고 이제 신학적인 핵심의 윤곽이 뭔지를 잡아보겠습니다. 세 명의 친구들의 주장, 욥의 반론, 그리고 엘리후의 주장의 특징들이 뭘까요? 각각 자기들이 주장하는 논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뭘까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이 욥기의 전체 주제는 고난의 문제예요. 무죄한 자의 고난과 재앙,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큰 불행을 만난 이유가 뭐냐에 대한 논쟁입니다. 각각의 주장하는 근거들이 차이가 있어요. 욥의 세 명의 친구들의 주장하는 핵심은 ‘너는 죄인이다. 잘못한 게 있으니까 회개해라. 하나님은 잘못한 사람을 징벌하시고 잘하면 복 주신다.’라는 논리입니다. 이 관점에서 봤을 때 완전히 밑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이 욥은 분명히 죄인인거죠.


여기에 대해서 욥이 어떤 반론을 펼까요? 욥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아요. 이 친구들의 신학은 유대인의 지혜 전통이에요. 지혜에 따르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복을 주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거예요. 욥도 그런 전통에서 살았기 때문에 친구들의 말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되 용납할 수는 없는 거고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은 죄가 없다는 것을 아주 처절할 정도로 붙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완전히 따돌림 당해서 코너로 몰리고 ‘이럴 바에야 차라리 스올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 죽은 자들의 음부의 세계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이런 상태라면 친구들의 권면대로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이렇게 했으면 간단했을 텐데요. 그럼 누구나 ‘저 사람 회개했구나. 하나님이 다시 복을 주실 거야.’라고 인정했을 텐데 욥은 그렇게 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 당시의 사람들이 보기에 욥은 뻔뻔스러운 거예요. 그래도 욥은 자신의 의를 끝까지 붙들고 있으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하나님에게 심판받고 싶다. 하나님에 의해서만 내가 판단된다.’ 여기까지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일반적인 생각은 불의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 건데 욥은 의롭지만 고난을 받았다는, 그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용납하기 힘든 신앙적인 딜레마, 모순을 이 욥이 붙들고 있습니다.


그 다음, 엘리후의 특징은 뭘까요? 지금 욥의 친구들과 욥의 입장을 이야기했어요. 엘리후의 입장은 ‘인간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신앙을 더 높은 차원으로 보내기 위한 교육적인 목표다.’는 입장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공부할 때 23장 10절 말씀 때문에 조금 논란이 있었는데 한 번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이러한 입장은 욥이 아니라 엘리후의 입장인거예요. 그런데 이게 욥의 대답으로 되어 있으니까 조금 이상한 거예요. 이 구절의 뜻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설명을 했으니까 다시 하지는 않겠습니다. 한마디만 하고 지나가면 ‘하나님께 내가 아무리 시험 받더라도 나는 순금같이 의롭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번역에 조금 문제가 있다고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몇 주 동안 엘리후의 이야기를 공부하겠습니다. 엘리후가 전체로 보면 여섯 장에 해당하는데 이 내용이 네 단락으로 나눠져요. 32장부터 37장까지인데 제가 강의안에 네 단락이 어떤 건지를 설명했습니다. 1)고난은 하나님의 교육적인 조치다.(32장, 33장) 2)고난은 교육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계속되는 하나님의 시험이다.(34장) 3)그 교육 목적은 하나님에게 속하기 때문에 사람은 참고 기다려야 된다.(35장) 4)하나님에게 우리가 승복하여, 혹은 굴복하여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36장, 37장) 이렇게 네 단락으로 나뉩니다. 어떻습니까. 이 네 단락의 제목만 봐도 굉장히 은혜롭고 신앙적이라고 표현이 되죠? 우리가 늘 이런 식으로 설교를 들었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늘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이 주신 시험이야. 잘 참고 인내하면 이길 수 있으니까 기다리면서 오히려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게 엘리후의 논리인거예요. 이건 결코 나쁜 게 아니에요. 옳은 가르침이긴 한데 이걸로 인간의 문제와 욥이 당한 고난, 재앙이 다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욥기가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말을 들으면 참 갈피를 잡기가 힘들어요. 당연히 옳은 말이 이 욥이 당한 재앙 속에서 이 엘리후의 말로 다 통용이 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 쉽게 답을 내리기가 어렵죠. 이렇게만 정리하고 넘어갑시다. 성경을 통해서 정답을 얻으려고 하지마세요. 성경은 정답에 가까이 가려고 했었던 신앙인들의 신앙고백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정확하게 알아가지만 그 신앙고백이 하나님 자체는 아닌 거예요. 정답 자체는 아닌 거예요. 정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거예요. 이런 말들이 정확하게 여러분들에게 전달되기가 힘들기는 한데 이런 정도만 생각하고 본문을 더 들어 가봅시다. 자꾸 이런 말씀들을 정확하게 공부하게 되면 하나님 경험, 하나님에게 가까이 간다는 것이 뭔지,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느끼게 될 겁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거기에 있는 거죠.


그러면 32장과 33장에 엘리후의 발언 첫 번째 단락을 보겠습니다. 먼저 32장 1절부터 22절까지 읽겠습니다.


<욥기 32장>

1.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2.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3.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4.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6.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7.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8.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9.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

11. 보라 나는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노라 당신들의 슬기와 당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

12. 내가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13. 당신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진상을 파악했으나 그를 추궁할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14. 그가 내게 자기 이론을 제기하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이론으로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15.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었더라

16. 당신들이 말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하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17. 나는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18.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19. 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구나

20. 내가 말을 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21.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이가 속히 나를 데려가시리로다


엘리후의 말이지만 전체적으로 깊이가 있는 이야기들이에요. 마지막 절 보면 이 사람이 자신의 말에 얼마나 확신이 있었는지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내가 만약에 사람의 얼굴을 향해 아첨하고 체면치레했다면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는 게 낫다.’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엘리후는 특별한 영적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고 영적인 진정성을 확보한 사람이 틀림없어요. 앞에서도 계속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 배가 터질 지경이다.’ 이런 정도로 표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세 명의 친구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에요. 그에 비해 엘리후는 젊은 사람으로 등장하는데도 훨씬 더 세계를 보는 눈, 하나님과의 관계, 영성, 이런데서 특출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일단 이 엘리후라는 이름을 보면 구약의 어떤 사람이 떠오르죠? 엘리야와 비슷합니다. ‘엘’이 들어가면 하나님을 뜻합니다. ‘엘’이라는 근동지방의 단어가 그 뜻이에요. 그래서 성서만이 아니라 다른 메소포타미아라든지 고대 근동지방에 ‘엘’이라는 단어로 신명(神名)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엘리후라는 이름은 '그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엘리야는 '여호와는 하나님'이라는 뜻이에요. 뜻이 비슷해요. 이 엘리후가 앞서 말한 대로 욥도 비판하고 세 친구들도 비판합니다. 비판하는 핵심은 이거예요. 일단 엘리후는 욥을 무조건 배관시하는 것은 아니에요. 욥이 괜찮다는 것도 알아요. 그런데 엘리후가 보기에 욥이 진도를 너무 나간 거예요. 그러니까 욥의 말을 들어보면 욥은 옳고 하나님은 잘못된 것처럼 느끼게 되는 거예요. ‘왜 억울한 일을 행하셨냐.’ 따지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렇게 욥이 토로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 삼자가 볼 때 이 욥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의롭게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걸 이제 비판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세 친구들도 비판하는데 비판을 하는 이유는 이 세 친구들이 욥이 잘못된 것을 알고도 그걸 설득시키지 못하는 무책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 엘리후는 굉장히 옳은 이야기를 많이 해요.


32장은 본격적인 비판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자신이 왜 나설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서론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32장 8절과 9절에 나이를 거론하면서 ‘내가 지금까지는 참았다. 어디서든지 나이든 연로한 분들이 지혜가 많아서 그 분들이 먼저 말씀을 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내가 물러서서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로운 말을 하고 지혜를 생각할 수 있도록 영을 부어 주셨기 때문에 비록 내가 당신들보다는 나이가 적지만(아주 젊은이는 아닐 거고요. 어쨌든 욥과 세 친구들보다는 나이가 적어요.) 이제 분명하게 나의 할 말을 하겠다.’는 거죠. 8절 보시면 재밌는 표현이 나와요. 앞에서 나이와 지혜가 많고 적고를 이야기하다가 나이 많은 것이 장땡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여기 영이라는 단어와 숨결이라는 단어가 똑같은 거예요. 구약에서 ‘루아흐’라고 하는 이것은 지혜, 영, 바람, 숨, 그리고 어떤 능력, 전쟁에서 이길 때에 어떤 힘, 이런 것들을 전부 ‘루아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걸 주었다.’라고 표현을 하네요.


그렇게 쭉 이 32장에서는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는 배경을 설명합니다. 18절 보십시오.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굉장히 영적으로 절박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어요. 이건 우리에게 참 필요한 자세이기도 합니다. 특히 목사에게는 이런 것이 좀 필요하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거룩한 압박감, 이런 것들이 설교자,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영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엘리후가 바로 그런 사람이네요. 비록 욥을 비판하는 사람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이 말씀은 굉장히 좋은 표현이네요. 32장 18절, 저도 이 구절을 늘 외우고 있어야겠습니다. 저에게 꼭 필요한 말씀처럼 들리네요.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이러한 태도가 엘리후에게 기본적으로 있었습니다. 그 다음, 21절과 22절, ‘내가 앞으로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겠다. 만약에 내가 사람 눈치를 보는 일이 있다면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도 좋다.’ 이러한 결기, 각오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32장은 이걸로 됐습니다. 그 다음에 33장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엘리후가 욥을 비판하는 첫 대목이 나옵니다.


<욥기 33장>

1.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2.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말하는구나

3. 내 마음의 정직함이 곧 내 말이며 내 입술이 아는 바가 진실을 말하느니라

4.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5. 그대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6.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7.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8. 그대는 실로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 나는 그대의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9.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10.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11.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12.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13.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14.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15.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16.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17.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18.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

19. 혹은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20. 그의 생명은 음식을 싫어하고 그의 마음은 별미를 싫어하며

21.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22. 그의 마음은 구덩이에, 그의 생명은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

23.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 그의 정당함을 보일진대

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25. 그런즉 그의 살이 청년보다 부드러워지며 젊음을 회복하리라

26.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말미암아 기뻐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공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27.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범죄하여 옳은 것을 그르쳤으나 내게 무익하였구나

28.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29. 실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30.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려 하심이니라

31. 욥이여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32.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기쁜 마음으로 그대를 의롭다 하리니 그대는 말하라

33. 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그대를 가르치리라


참고적으로 1절을 보십시오. 33장 1절, ‘그런즉 욥이여’ 이렇게 부르죠. 앞에서 욥의 친구들은 욥을 비판할 때 이름을 못 불렀어요. 안 불렀는지 못 불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반적인 것처럼 이야기를 했는데 이 엘리후는 이름을 부르면서 ‘욥, 당신 들어라.’라고 아주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욥 앞에서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자신의 열정이 어떤지를 4절에서 이렇게 표현하네요.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이게 앞에서 말한 32장 8절에 나온 영, 기운과 같은 단어들이에요. ‘루아흐’입니다. 구약성서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힘을 가리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엘리후가 그러한 하나님의 영, 전능자의 기운을 갖고 말한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욥을 비판하고 충고하는 엘리후의 이야기를 네 가지로 정리를 했어요. 첫 번째는 8절에서 12절, 두 번째는 13절에서 22절, 세 번째는 23절에서 28절, 네 번째는 29절에서 33절입니다. 먼저 8절에서 12절을 보면, 일단 이 엘리후의 연설에는 특징이 있어요. 방금 말한 대로 욥의 이름을 직접 호명하고요. 그리고 여러 군데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자주 인용해요. 그러니까 욥이 앞에서 한 말을 다시 거론하면서 그 말이 무엇이 문제인가를 확인하는 거죠. 이 엘리후는 굉장히 논리적이에요. 앞의 세 사람보다 훨씬 더 언어, 글쓰기, 논리학, 이런 점에서 뛰어난 사람처럼 보여요. 그래서 무작정 충고하듯이 ‘네가 잘못했으니까 회개해.’, ‘너를 앞으로 더 큰사람 만들기 위해 시험하는 거야.’ 그렇게 하지 않고 욥이 한 말을 인용하면서 ‘당신이 말한 이 부분은 이런 것이 문제야.’라고 확실하게 짚어가면서 비판하는 거죠.


8절에서 12절 사이도 보면 욥의 말을 인용합니다. 8절 보세요. ‘그대는 실로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 나는 그대의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하고서 그 다음 구절부터 욥의 이야기예요. ‘(9절)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10절)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11절)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이 구절들은 욥이 앞에서 했던 이야기이고 앞에 몇 군데에 흩어져있어요. 제가 그 자리가 어디인지 강의안에 적지는 않았습니다. 욥이 앞에서 친구들 세 명과 논쟁할 때 했었던 몇 구절을 여기저기서 끌어와서 엘리후가 다시 한 번 ‘당신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확인하는 거죠.


이렇게 불평했던 욥을 향해서 12절에 보면, (이건 엘리후의 말이죠.)‘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라고 합니다. 왜 의롭지 못하다고 공격할까요?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다는 사실을 놓쳤다는 것을 지적하는 거죠. ‘네가 이해 못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못 됐다고 하면 되냐.’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크다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이에요.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불평하면 되냐. 그런 부분들이 욥, 너의 잘못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엘리후의 말이 맞지 않습니까?


그리고 뒤에 엘리후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38장부터 41장까지 하나님이 욥에게 하는 이야기가 나오죠? 그것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하나님이 아주 신비한 이야기들, 우레 소리 등등 많은 것들을 열거하면서 ‘네가 이런 것들을 다 알아낼 자신이 있느냐.’라고 욥을 다독거리기도 하고 충고하기도 하면서 ‘네가 말이 너무 많다.’ 이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까. 이 말이 엘리후의 이야기와 굉장히 비슷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엘리후는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에요. 저도 미리 공부하면서 엘리후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봤어요. 다른 때도 읽었지만 공부 준비를 하기 위해서 더 또박또박 읽어봤는데 이 엘리후가 아주 정확하게 어떤 사태를 짚고 있습니다.


8절부터 12절까지 첫 번째 항목이었습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지 못해서, 자신이 의로웠음에도 불구하고 받은 재앙과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실제로 원망하는 건 아닌데 엘리후에게 그렇게 비치는 거죠.) 것들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후의 이야기가 다 맞는 것도 아닙니다. 욥이 자신의 재앙을 받아들이지 못한 건 아니고 힘들지만 자기 운명을 감수 하려고 했겠지요. 이게 이런 거예요. 욥의 친구들이 자꾸 당신은 죄인이고 회개하라고 하니까, 그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아마 욥은 더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욥은 자신이 재앙을 받을 정도의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붙들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한다면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이 되어 있는 거예요. 비록 자신의 운명이 너무 처절한 곳에 떨어져서 이럴 바에야 어머니 태에서 죽었으면 나았을 거라는 망발에 가까운 말을 했지만, 하나님이 올바르게 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이 와서 회개하라고 하니까 거기서 다른 말들이 많이 나오게 된 겁니다.


다음 두 번째, 13절에서 22절입니다. 강의안을 보십시오. 13절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 욥이 불평해요. 그러니까 욥이 ‘하나님, 당신께서 옳은지 그른지를 분명하게 대답해 달라.’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것을 욥이 불평하는 것에 대해 엘리후의 설명은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줬다. 그러나 인간이 마음이 없어서 듣지 못하는 거다.’라고 이야기해요. 엘리후가 그럴듯하게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두 가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는 꿈과 환상입니다. 15절 보세요.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질병입니다. 아픈 것, 재앙, 이런 거예요. 19절 이하에 쭉 나와 있는 내용들입니다. 욥이 바로 이러한 처지에 떨어진 거죠. 엘리후의 주장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말씀해 주셨고 꿈이나 환상, 질병, 이런 것들을 통해 (16절에 나와 있는 대로)하나님이 경고하신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을 네가 깨닫지 못할 뿐이지 이미 하나님은 다 말씀하셨고 침묵하지 않으신다.’ 이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23절에서 28절이에요. 여기서는 하나님의 경고를 잘 받아들인 사람의 삶은 다시 회복된다는 겁니다. 이 부분이 바로 엘리후의 주장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재앙과 고난, 불행은 교육적인 의미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말에 욥이 동의할까요? 여기에 동의할 수는 없어요. 이 말이 틀린 건 아니되 동의할 수는 없는 거예요. 이렇듯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심층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의 잣대로(아무리 그것이 옳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정죄, 재단,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우리는 같은 교회 안에서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가 봐요.’라는 식으로 쉽게 이야기하잖아요. 어려운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은 옳지만 무엇 때문에 그렇다는 입장은 그 자체가 옳더라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엘리후가 그러한 입장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29절에서 33절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고난을 교육적으로 잘 통과한 사람에게는 좋은 결과가 있고 빛을 내려주신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30절 보세요.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려 하심이니라’ 이 말 자체만 보면 은혜로운 거죠. 그러나 욥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에요.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봤습니다. 엘리후의 연설 첫 번째 단락을 본 겁니다. 엘리후의 연설은 앞으로 세 번 더 진행이 돼서 전체적으로 네 번, 네 가지 주제로 공부하겠습니다. 오늘 첫 번째를 한 거예요. 여러분들에게 전달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보다는 훨씬 더 일리가 있게 말한다고 볼 수 있어요. 더 합리적이기도 하고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나중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는 것을 미리 말할 정도로 이 엘리후는 영적인 통찰력이 뛰어났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후와 세 친구의 차이를 한 마디로 한다면 세 친구는 보상의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선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는 보상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엘리후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겁니다. 우리를 가르치는, 신앙적으로 교육하시는 하나님인거죠. 그런 점에서 엘리후는 앞의 세 친구들보다는 뛰어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정답은 아닌 거예요. 정답이 뭘까요? 나중에 욥기가 다 끝나면 우리가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2016년 첫 번 수요공부 시간이었습니다. 2015년이 쏜살같이 지나가더니 2016년이 득달같이 당도했습니다. 이러한 시간의 막강한 속도 속에서 우리의 인생이 혹시라도 길을 잃을지 모르니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말씀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이제 오늘부터 1년 동안 수요공부 모임이 계속됩니다. 오늘 우리가 같이 찬송을 불렀듯이 날마다, 날마다 주를 찬송한다는 태도로 이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잘 새기며 말씀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저희들 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금년 한 해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닥칠지 다는 모릅니다. 좋은 일, 어려운 일, 희로애락 가운데 저희들이 살 텐데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그런 일들로 인해서 너무 낙심하거나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자세로 매 순간, 매 순간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인도 해주십시오. 우리 금년 한 해 모든 수요성경공부 모임을 하나님께 의탁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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