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13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 욥기 공부 34장입니다. 우리가 지금 엘리후의 이야기를 지난주부터 공부하고 있어요. 이 엘리후 이야기의 전체 주제는 하나인데 그걸 분류하면 네 가지 소주제로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소주제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전체 욥기의 흐름을 알고 계실 거예요. 지난주에도 다시 확인해 드렸듯이 늘 그것을 염두 해두고 부분을 따라가야 됩니다.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이 앞에서 상당히 긴 분량으로 나오고 이제 엘리후라는 젊은 친구가 불쑥하고 튀어나와요. 여기에 대해선 아무도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욥이 대답도 안 하고요. 그러니까 신학적으로 연구해 보면 엘리후의 이야기가 나중에 보충된 거라는 답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후가 하는 이야기가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충됐지만 우리가 넘어가지 않고 잘 따라가면 욥기 전체 공부에서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두 번째 연설이지요. 34장입니다. 우리 한 번 본문을 읽겠습니다. 이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고 기도이며 신앙고백입니다. 아주 먼 고대, 2500년 전 유대인들에게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이고 그것이 어느 시기에 구약성경 안에 들어온 말씀이에요. 기도와 찬송을 부른다는 생각으로 이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욥기34장>

1. 엘리후가 말하여 이르되

2.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3.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4.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5.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6.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 하니

7. 어떤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비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8.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9.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10.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11.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12.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13.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상을 그에게 맡겼느냐

14.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15.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16. 만일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17. 정의를 미워하시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그대가 정죄하겠느냐

18. 그는 왕에게라도 무용지물이라 하시며 지도자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19.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의 낯을 세워주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라

20. 그들은 한밤중에 순식간에 죽나니 백성은 떨며 사라지고 세력 있는 자도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제거함을 당하느니라

21.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22.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

23.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24.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하게 하시느니라

25.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 사이에 뒤집어엎어 흩으시는도다

26.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사람의 눈 앞에서 치심은

27. 그들이 그를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깨달아 알지 못함이라

28. 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하게 하며 빈궁한 사람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리게 하느니라

29.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

30. 이는 경건하지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 백성을 옭아매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31. 그대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2.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는가

33. 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그대의 뜻대로 속전을 치르시겠느냐 그러면 그대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그대는 아는 대로 말하라

34. 슬기로운 자와 내 말을 듣는 지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내게 말하기를

35.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도다 하리라

36.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37. 그가 그의 죄에 반역을 더하며 우리와 어울려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 눈으로만 읽는 것도 좋고 소리 내서 읽는 것도 좋습니다. 원래 모든 글은 소리로부터 시작된 거예요. 말이 문자가 돼서 글이 됐는데 핵심은 소리입니다. 우리가 함께 통독해서 읽는 것도 참 좋은 거고요. 그리고 우리 대구샘터교회는 예배 때 성경을 세 군데, 시편까지 네 군데를 읽잖아요. 시편을 꼭 읽죠. 이렇게 네 번을 읽는 것이 교회 전통이에요. 옛날에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내려온 겁니다. 그걸 성서일과라고 하는 건데 성서를 읽는 거예요. 이 성서일과의 전통은 유대교에서 온 거예요. 기독교가 처음 시작할 때 모든 걸 새롭게 한 것이 아니라 유대전통을 바탕에 두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주로 어디를 갈까요? 원래는 안식일을 지키려면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하는데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으니까 가지 못하고 곳곳에 있는 회당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성경을 읽는 거죠.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성경이 흔하지 않아서 회당에 가면 성경을 두루마리 형식의 양피지에 적어 놓은 곳이 있어요. 그 한 권, 한 권이 굉장히 두꺼워요. 양피지를 돌돌 말아 놓으니까요. 이사야 같이 긴 문서는 한 권으로는 안 되고 여러 권으로 만들어 놨을 겁니다. 그 중에 하나를 갖다가 회당장이 읽거나 혹은 유랑하는 랍비들이 와서 읽고 설교도 합니다. 그러한 전통이 기독교 안에 들어왔습니다.


성경을 보통 네 군데를 읽어요. 제 1독서는 구약, 제 2독서는 서신, 제 3독서는 복음서를 읽고 시편을 읽습니다. 우리 대구샘터교회는 성경 봉독하는 분을 따로 세워서 해요. 그 성경 봉독은 설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설교의 비중을 갖고 있는 거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설교를 엉뚱하게 할 바에야 하지 말고 성경만 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설교를 하지 않더라도 성경만 잘 읽으면 거기에 힘이 있어요. 그래서 어떤 경우에 성경의 언어가 그 사람의 영혼을 가득 채워서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합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죠? 성경을 읽을 때 어느 때는 그 말씀이 살아있다는 느낌으로 들어올 때가 있을 겁니다. 그 당시는 성경이 없어서 소리 내서 귀로 들었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우리도 성경 봉독할 때 성경을 펴서 그 구절을 눈으로 따라서 읽어도 되고 아니면 안 봐도 됩니다. 듣는 것만 해도 성경 읽기와 듣기의 좋은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함께 읽었어요. 이렇게 읽는 것이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읽는다고 하는 것이 대단히 엄청난 사건이에요. 그것을 두 가지로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같이 읽음으로써 수천 년 동안 이 성서의 세계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일치 되는 거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서를 읽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수십억의 사람들이 지구에 살았으니까(옛날에는 유럽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있었습니다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읽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들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엄청난 사건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거룩한 경험인거예요. 나는 혼자지만 성경이나 예배를 통해서, 아니면 기도나 특별히 더 중요한 성만찬을 통해서 역사를 초월한 기독교 전체 영성에 내가 참여한다는 사실을 아주 리얼하게, 정말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그게 거룩한 경험인거예요. 그런 것이 점점 우리의 영혼에 축척되고 영적인 발효가 되면서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숙해가는 거죠.


제가 지금 이야기하면서 굉장히 좋은 단어를 이야기했는데요. ‘영적인 발효’라는 단어를 생각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튀어나오네요. 제가 조금씩 그런 쪽으로 깨달아 가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말들이 쉽게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상당히 소화가 된 어떤 세계를 알고 있다 보면 창조적으로 말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따로 적어놔야겠어요. 발효라는 것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거 아니겠어요. 김치부터 시작해서 술이라든지 모든 것이 박테리아의 작용인데, 누룩도 그렇고요. 조그만 것이 들어와서 그게 발효가 되면 가득 차듯이 많은 기독교 영성가들이 그런 것을 경험했어요.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고 영적인 발효가 돼서 우리 안에 자루가 가득 찰 정도로 부풀어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이런 성경읽기라는 작은 행위를 통해서 참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꾸준하게 일상적으로 말씀을 대하고, 수요일 모임에 우리 교인들이 많이 참석하지 않지만 사소해 보이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런 것과 만나는 계기가 되는 거죠. 안 보이지만 쌓이는 겁니다. 엉뚱하게 말씀을 공부하면 오히려 우리 영혼이 손상을 당하지만 바르게 읽고 바르게 이해하기만 하면 그게 잘 쌓여서 아주 폭발적으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에너지가 가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하듯이 공부를 할 필요가 있죠.


34장, 엘리후의 두 번째 연설입니다. 이 욥기의 전체 주제를 신학적인 용어로 하자면 신정론(神正論)이에요. 강의 요약문에 한자로 적어놨습니다. 신(神), 바를 정(正), 논할 논(論)이에요.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변증하는 신학 논의'를 가리켜서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theodecy’, 독일어로는 ‘theodizee’라고 합니다. 이 신정론(神正論)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두 단어에서 온 거예요. 하나는 ‘테오스(θεός)’,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디케(Δίκη)’, 이것은 정의, 영어로 ‘justice’라고 하고 조금 더 정확하게 하면 'divine justice', 신적인 정의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옳음에 대한 논증을 가리켜서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데, 하나님이 세계를 통치하시는데 이 세계에 악과 재앙, 불의가 있어요. 이게 모순되는 거죠. ‘하나님은 선하시고 능력 있으신데 왜 이 세상에 불행들이 일어나는가.’하는 거죠. 서로 모순되는 거 맞죠? 예를 들자면, 하나님께서 정말 사람들을 사랑하고 능력이 있다면 지진이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도 있고 강도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줄 수도 있겠죠. 정말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렇게 해야 되는데 이 세계를 보면 악도 많고 재앙도 일어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하는 반론이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변증을 하는 작업을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답을 얻기가 쉽지 않아요.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왜 인간이 불행을 겪고 죽기도 하는 일이 일어나나.’하는 것에 대해서 그 책임을 하나님에게 두지 않고 인간의 죄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모든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창세기부터 기본적으로 구약에 깔려 있는 바탕입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욥기도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예요. 제가 욥의 친구들이 지혜의 전통에 있다고 했잖아요. 유대인의 지혜의 전통이에요. 죄를 지은 사람은 징벌을 받고 선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욥의 세 명의 친구들이 그런 논리를 계속 폈지만 이 욥은 자신을 그러한 구도 속에 몰아넣고 자책하지 않고 친구들을 설득할 수 없어도 자신의 옳음을(그 당시에는 인정받기가 힘들었는데) 계속 밀고 나갔습니다. 재판장에서 자신의 옳음을 말할 때 맹세를 함으로써 인정받듯이 이 욥은 계속 혼자서 외롭게 밀고 나갔어요.


그리고 엘리후가 등장한 이유는 앞에서 본대로 욥이 잘못됐다는 것을 자신이 증명해야 하고요. 그리고 욥의 친구들이 나이는 들었지만 이 사람들이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요. 욥을 굴복시키지 못하니까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결심하고 엘리후 자신의 논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엘리후의 주장의 핵심을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욥의 친구들은 욥의 재난과 재앙이 욥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고, 엘리후가 볼 때는 이 재앙이 하나님의 시험이에요. 그래서 그런 시련을 통해 좀 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한다는 논리입니다. 사실은 이 두 가지가 많이들 하는 이야기잖아요. 지혜의 전통인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갑자기 나쁜 일이 벌어지면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신앙생활 잘못했나.’ 그런 쪽으로 생각하거나 ‘하나님이 나를 시험해서 더 좋은 신앙인이 되게 하는 거야.’ 이 두 가지 논리가 지금도 많이 있잖아요. 그게 지금 욥기에서 계속 주장되는 겁니다. 죄의 문제는 욥의 세 친구들,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엘리후의 주장이죠.


36절 한 번 보십시오.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딱 짚어서 이야기하죠?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그러니까 이 엘리후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재앙이 다 하나님의 시험으로 본 거예요. 그러니까 ‘욥이 아직까지 정신 못 차렸어. 그러니까 그 시험을 더 받아야 돼. 재난은 더 있어야 돼.’ 이런 쪽으로 엘리후가 말하고 있어요. 이것에 대해서 욥이 동의했을까요? 당연히 동의하지 않죠. 그러나 동의하지 않는다는 내용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엘리후의 이야기는 따로 독립된 주장이기 때문에 욥과 논쟁을 벌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42장에 가면 하나님께서 등장해서 정리를 합니다. 조금 있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갈 텐데, 제가 아직까지 계속해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욥기의 결론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하는 거요. 제가 두 가지를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38장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서도 뚜렷하게 ‘네가 재난 받은 이유는 이것 때문이야.’라는 정확한 말씀이 없어요. ‘왜 정확한 대답을 안 하셨을까?’ 이걸 제가 좀 더 생각을 깊이 해야 하고요. 또 하나는(이게 더 중요한 문제인 것 같은데요.) 욥이 ‘하나님을 여태까지는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본 것처럼 확실하다.’ 그렇게 대답을 하잖아요. 42장 5절에 그렇게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고난 받은 이유는 이거야.’라고 말하지 않고 ‘리워야단을 봐라.’, ‘산양이 새끼를 낳는 장면을 봤냐.’ 등등으로 신비로운 자연현상, 초인간적인 위력, 자연의 신비로움, 그런 것들로만 말씀하셨는데 욥이 ‘여태까지는 말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본다.’라고 대답했어요. 그리고 그 때서야 회개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너 회개해.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거야.’라고 많이 말을 했을 때도 전혀 듣지 않던 이 욥이 그 때서야 회개를 해요. 이 부분에서 ‘욥이 어떤 경험을 했을까?’하는 거죠. 아직까지 제가 정확하게 정리는 못했습니다. 조금 시일이 남았기 때문에 앞으로 그것을 염두 해두고 이 두 가지 문제를 여러분들에게 풀어서 설명을 해야겠어요. 하나는 왜 하나님이 ‘재난이 이것 때문이다.’라고 직접 대답하지 않고 ‘이걸 네가 보았느냐.’ 이렇게 간접적으로 말씀하셨을까하는 것과 욥이 거기서 어떤 깨달음이 있었기에 그 때서야 회개를 했을까, 그리고 그게 어떻게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을까 하는 겁니다. 하여튼 지금 우리는 거기까지 가기 위해 과정을 거치고 있는 거예요. 그 중간에 엘리후가 등장했기에 우리가 지금 보고 있습니다.


엘리후의 주장, 시험을 받아서 더 신앙적인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 바로 재난이라는 주장과 자신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욥의 입장에서 누가 더 옳을까요?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건데, 일반적인 걸로만 이야기하면 엘리후의 이야기가 맞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당했어도 그걸 극복하면 신앙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쪽으로 구약에서 많이 이야기했고 신약도 그러한 입장은 많이 있습니다. 목회서신이나 디모데 전, 후서 등에 많이 나와요. 그 자체가 틀린 건 아니죠. 문제는 모든 문제를 그러한 구도에서 재단에 버리는 자세가 잘못된 겁니다. 예를 들어서, 파키스탄이나 인도에 지진이 나거나 테러가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하나님의 시련이야.'라고 한다면 언어도단이죠.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이 개인적이고 실존적으로 당한 고난을 하나님의 시험으로 생각해서 지혜롭게 극복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신앙이 성숙해 진다면 그건 옳은 거예요. 그러나 그 경험을 가지고 모든 다른 사람을 향해서 단죄하거나 그 안에 가둬두고 '하나님의 시험이니까 다른 생각하지 마라.' 이러한 태도는 잘못된 거죠.


본문을 좀 더 보겠습니다. 강의 요약문을 보시면 제가 몇 단락으로 나눴어요. 1절에서 9절, 10절에서 20절, 21절에서 27절, 28절에서 33절, 34절에서 37절, 이렇게 다섯 단락으로 나눴습니다. 이걸 일일이 다 보기는 힘들고 간단하게 보겠습니다. 1절에서 9절, 엘리후가 욥을 책망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책망하는 겁니다. 사실 욥이 직접 하나님을 모독한 건 아니에요. 그렇죠? 아닌 거지만 엘리후가 볼 때, 이건 누가 보더라도 욥이 의롭지 못한 게 분명한데 끝까지 욥이 자신의 의를 고집하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라는 이야기죠. 엘리후가 지금 욥을 그렇게 비난하는 겁니다. 욥이 직접 하나님을 모독한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의 말대로 죄 때문이니까 회개하라는 요청을 거절하는 태도, 이게 바로 자기 의를 내세운 거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부정한 거라는 논리로 욥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두 가지예요. 재판을 두 군데서 받으셨어요. 하나는 산헤드린, 또 하나는 로마 총독 관저예요. 종교법과 로마법이에요. 그 당시 가장 권위가 있었던 종교법인 산헤드린, 율법이고요. 또 그 당시 정치적으로 가장 권위가 있었던 로마법, 이건 굉장히 대단한 힘이 있는 겁니다. 이 로마법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쳐요. 그러니까 법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인간의 지혜가 축척되어서 내려온 겁니다. 종교적인 것도 그렇고요. 예수님은 이 두 가지 법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어요. 산헤드린에 의해 재판 받았고 또 하나는 로마법입니다. 이 두 가지 죄명이 무엇인지 아시겠죠. 산헤드린에서 받은 죄명은 신성모독이에요. 그리고 로마 총독에게서 받은 죄명은 사회 소요죄예요. 이게 양쪽에 가장 아킬레스건이죠. 로마는 자기 체제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최고였습니다. '팍스 로마나'라는 이데올로기예요. 그러니까 나라가 작으면 통치하기가 어렵지 않은데 제국은 여러 민족들을 식민지로 거느려야 하기 때문에 한 쪽에서 약간의 균열이 일어나면 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제국의 질서가 떨어져서요. 로마는 식민지의 종교, 문화를 다 용납했지만 한 가지만은 초전박살로 응징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로마체제에 대한 반역이에요. 소요, 사회가 시끄러워 지는 겁니다. 그거 하나와 신성모독, 이것은 종교법으로써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직접 모독한 것은 아닌데 산헤드린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봤습니다. 마가복음 14장 64절에 정확한 이야기가 나와요. 나중에 집에 가서 한 번 보십시오.


다음 10절에서 20절, 여기서는 굉장히 멋진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논리가 좋아요. 정말 옳은 이야기를 많이 하네요. 그러니까 엘리후가 욥을 무너뜨리기 위한 논리는 '네가 의로운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의로운 거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야.'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10절에서 20절까지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우신 분인가를 멋지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0절, 이렇게 되어있어요.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라고도 부르고 전능자라고도 불러요. 전능자는 히브리어로 '삿다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고 하나님은(제가 히브리어 성경을 확인하지 못했는데) '엘로힘'이라고 되어 있을 거예요. 하나님과 전능자, 이 두 가지 표현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강의 요약문을 보시면 되겠어요. 우리가 다른 데서도 흔하게 들었던 내용입니다.


한 가지만 좀 더 확인하면 15절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의 뜻을 행하시는데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그러니까 한 사람만 죽는 게 아니라 다 죽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정의로운 거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만 오래 살게 하거나 죽지 않게 하는 게 아니라 다 죽고 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 걸 두 가지로 말할 수 있겠네요. 하나님은 전능자라는 사실과 정의롭다는 사실입니다. 불공평하게 죽음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같이 가게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내용도 그런 쪽으로 보시면 돼요. 굉장히 표현들이 세련됐습니다. 19절 보시면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를 높이거나 하지 않는다.' 그리고 후반절 보시면,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심 바가 됨이라.' 그러니까 고관이나 부자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피조물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피조물이기 때문에 20절에, '한밤중에 순식간에 죽을 수도 있고 백성들도 사라지고 세력 있는 자들도 결국은 재가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이 어떤가를 지금 여기서 엘리후가 피력했어요.


그 다음 21절에서 27절에서는 하나님의 판단이 아주 빠르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것을 엘리후가 비판하기 위해서 ‘네가 의로운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의로운 거야.’라고 말하잖아요. 하나님의 판단은 정말 빠르고 정확하다고 23절과 24절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다 무너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 옳은 주장이죠. 그러나 옳은 주장이라도 그 논리로 욥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 거죠.


그 다음 28절에서 33절은 성서학자에 따르면 난해구절이에요. 28절에서 33절은 칠십인역에는 빠져있어요. 칠십인역이라는 것을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구약성경이 원래 히브리어로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이 히브리어를 잘 모르는 유대인들이 있었어요. 당연히 그 사람들은 이집트나 시리아, 로마 지역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였어요. 그들은 헬라어를 썼습니다. 그래서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북아프리카에 있는 알렉산드리아라는 곳에서 70여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어요. 그것을 칠십인역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한 성경번역이라고 할 수 있어요. 거기에는 이 구절이 빠졌습니다. 여러분들이 왜 어떤 번역에는 들어가고 어떤 번역에는 빠져있는지 좀 이상하게 생각되십니까? 그 당시에는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성경처럼 딱 결정되지 않았었어요. 그래서 약간씩 차이가 나기도 하고 번역을 하면서 전체적으로 맞지 않으면 빠지기도 하는 작업들이 있었습니다. 그 부분은 그 정도로 넘어가겠습니다.


마지막 34절에서 37절입니다. 결론 부분이에요. 자신의 주장이 대다수의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지지받는다고 엘리후는 말하고 있어요.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 거죠. ‘내가 이정도 말했으니 욥이 무식하다는 사실, 그리고 지혜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 아니냐.’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욥이 아직 변하지 않아요. 그래서 36절에서 ‘아직 때가 안 된 것 같다. 그러니 욥에게 시련, 시험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욥이 악하다는 사실을 37절에서 이렇게 표현하네요. 이 부분이 우리말 번역으로 조금 오해가 있어서 설명하겠습니다. ‘그가(그는 욥이죠.) 그의 죄에 반역을 더하며 우리와 어울려 손뼉을 치면서’ 우리가 어울려 손뼉을 친다면 서로 의견이 맞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여기는 그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울려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이렇게 되면 우리도 역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처럼 표현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욥이 혼자 이렇게 하고 있는 거죠. 우리가 같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있는데 욥이 혼자 박수를 치면서 떠들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연설할 때는 좀 더 강조하기 위해서 손뼉도 치고 모션을 취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동조하지 않는데 욥 혼자서 우리 앞에서 손뼉을 쳐가면서 하나님을 거역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중요한 것을 많이 배웠네요. 저도 오늘 집에 돌아가서 다시 한 번 읽고 내용을 잘 정리해봐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이렇게 2500년 전부터 내려오던 욥기의 일부, 34장을 함께 읽고 공부했습니다. 이 공간 안에서 함께 성경을 읽는다는 사실, 소리를 같이 내고, 그 소리를 같이 듣는다는 사실, 그리고 생각을 같이 나누며 서로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그 말씀에 우리가 영적으로 동참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지, 또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래서 우리가 순전히 은총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지, 진심으로 감사하고 기쁨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이 귀한 시간 주신 것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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