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27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은 욥기 35장입니다.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곧 엘리후 이야기도 끝나요. 오늘하고 다음 주 수요일까지 하면 엘리후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논쟁이 다 끝나는 거예요. 엘리후의 이야기가 끝나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고요. 그 다음 마지막 42장에서 욥이 어떻게 됐는지 간단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우리가 거의 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주제들을 다 했지만 뒷부분도 중요해요. 이 엘리후 이야기는 원래 있었던 게 아니라 나중에 들어오긴 했는데 꼭 들어올 필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겠다 싶었는데 읽다보니까 이 엘리후의 논리도 상당히 우리가 귀기울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엘리후의 네 번에 걸친 연설 중에서 세 번째예요. 35장 1절부터 16절까지 있습니다. 길지 않네요. 함께 읽겠습니다.


1. 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2.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3. 그대는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범죄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지마는

4. 내가 그대와 및 그대와 함께 있는 그대의 친구들에게 대답하리라

5.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6.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

9.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

10.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11. 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도 없구나

12. 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13.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14.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

15. 그러나 지금은 그가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악행을 끝까지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16.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기본적으로 엘리후 이야기라서 욥을 비판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멘으로 화답하기는 좀 마땅한 것은 아닌데 엘리후가 늘 잘못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욥의 세 명의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도 아주 엉뚱한 이야기는 하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읽고 아멘이라고 일단 화답을 했습니다. 욥기의 기본적인 핵심은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에요.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엘리후가 끼어들어요. 그런데 욥과 세 명의 친구들 논쟁과 이 엘리후 이야기는 좀 색다르다고 하는 건 여러분들이 아실 겁니다. 제가 몇 번 말씀을 드렸어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구조 자체가 차이가 나요. 욥의 친구들과의 논쟁에서는 욥이 꼭 반론을 폅니다. 공격을 받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엘리후에 대해서는 욥이 반론을 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엘리후의 이야기는 나중에 개입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오늘 제가 읽으면서 느낀 건데 이 엘리후의 입장은 욥과 친구들 사이를 중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기 직전에 필요한 어떤 것들을 미리 하는 것으로 이해가 돼요. 다음 주에 우리가 보겠습니다만 오늘 말씀에서도 약간 그런 흔적이 나오는데,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할 만한 이야기들, 그러니까 뒤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는 이야기들과 비슷한 말들을 제법 합니다. 5절 같은 데를 보면 이렇습니다.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구름이라는 것은 초월적인 세계잖아요. 나중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할 때도 ‘네가 악어나 암사슴이 새끼를 낳을 때를 본적이 있느냐.’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엘리후와 비슷한 논조예요.


오늘 공부 마지막 부분에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릴 거지만 그 말 자체, 엘리후의 말 자체는 옳지만 그가 어떤 태도를 했느냐에 따라서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좋은 말을 한다고 해서 다 옳은 건 아닙니다. 이게 참 이상한 거죠.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아주 아름다운 단어들을 통해서 이야기하지만 그게 상대방을 찌른다거나 나쁜 쪽으로 쓰여 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말 자체도 중요하긴 해요. 그러나 그 말을 누가 언제 어떻게 했느냐하는 이 맥락이 사실은 더 중요한 거죠. 이 엘리후가 하는 이야기들은 옳은 것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볼 거예요. 그런데 그게 잘못 사용되는 거죠.


이렇게 엘리후가 나중에 끼어듭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세 가지 논점이 있는 거예요. 욥, 세 친구들, 그리고 엘리후예요. 이 세 부류, 세 가지 입장이 이 욥기 안에서 충돌하고 대립하고 어떤 때는 중복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차이가 미미해요. 그래서 구별하기 힘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쭉 읽으면서 아셨겠지만 이걸 엘리후의 말이라는 것을 빼놓고 보면 은혜로운 말씀들이 많이 있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우리가 세밀하게 구별하기가 힘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죠.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잖아요. 거기서 쓰는 용어들은 다 기독교적인 거예요. 성서 안에서 나온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옳은지 그른지가 구분이 안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바스나 빌닷, 소발, 엘리후와 같은 입장에서 설교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거예요. 이게 구분되기가 힘든 게 다 전통으로 내려왔던 거고 사용되는 용어들이 다 기독교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거죠. 이런 것을 잘 유의하면서 봐야하는데 일반 신자들이 그런 것들을 구분하기는 조금 벅찰 겁니다. 일반 신자들 중에서도 조금 관심이 있는 분들은 전문적인 주석 등을 읽는 게 좋죠. 직접 그런 걸 읽지 못한다면 교회 지도자, 목사나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잘 감안해서 가르쳐야 될 겁니다.


이 욥기의 전체적인 핵심주제는 인간이 당하는 재난의 문제예요. 그건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잖아요. 자연재해도 있고 사람에 의한 끔찍한 일들도 많습니다. 요즘은 매스컴이 발전해서 그런지 옛날보다 더 끔찍한 일들이 많이 알려지네요. 어린아이들을 부모들이 학대하는 일들도 많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지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많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람이라는 게 참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생각이나 행동들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어릴 때 학대당한 사람들은 트라우마라고 하잖아요. 상처가 있어서 원만한 대인관계를 하기가 힘들게 됩니다. 어쨌든 이런저런 재난이 많은데 그게 욥기의 핵심주제예요.


우리가 다 확인 한 거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해서 말씀드립니다. 욥의 친구들의 입장은 '재난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라고 보았고요. 그리고 엘리후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사람을 잘 교육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다. 그러니까 참고 기다려라.' 그러한 입장이고요. 욥은 그 두 가지를 다 부정합니다. 자신에게 해당되는 불행에 대한 것이 그런 거죠. '난 죄 문제로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단련시키기 위한 것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쪽이죠. 사실 욥의 뚜렷한 입장은 없다고 할 수 있어요. 단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조금 무책임할 수도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일반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면 욥의 친구들과 엘리후의 주장이 더 은혜로운 거예요. 더 신앙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해. 그리고 다시 새 출발해.' 이런 세 친구의 입장과 '이건 너를 더 크게 쓰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야. 잘 참고 기다리면 좋게 될 거야.' 이런 엘리후의 입장이 우리가 다 은혜롭게 생각하는 입장들이에요. 이것에 반해서 욥은 '난 모르겠다. 도저히 당신들의 말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볼 때 덕스럽고 바람직한 신앙의 모습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죠. 욥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해 이 욥기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고 있는 이유는 이겁니다. '인간의 심층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이 빼곡하게 있다. 그런 것들을 충분하게 이해하고 사람을 봐야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거라고 해서 그 틀 안으로 무조건 밀어 넣으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한 게 아니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엘리후의 세 번째 연설이에요. 35장입니다. 세 번째 연설에서도 엘리후의 특징이 나와요. 욥을 향해서 '더 이상 네가 옳다는 것에 매달리지 말고 하나님이 판단하는 것을 기다려라. 잘 해주실 테니까 기다려 봐라.' 그 이야기입니다. 그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엘리후가 욥을 향한 충고인데요. 14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 본문의 번역이 매끄럽지가 않아서 조금 혼동됩니다. 다른 부분도 그런 데가 있는데 14절은 더 그렇습니다. 제가 공동번역을 강의 요약문에 인용했습니다. 개역개정과 공동번역을 한 번 비교해서 보십시오. 공동번역은 이렇습니다. '당신은(욥) 하나님께서 보지 않으신다고 해서 엄청난 주장을 펴지만(엄청난 주장은 '내가 옳다.'는 이야기죠.) 이미 당신 사건은 그의 앞에 놓여 있다오. 그러니 기다리시오.'


개역개정에서는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라고 하는 것을 보니까 욥이 기다린다는 말처럼 들려요. 그런데 제가 공동번역과 루터번역, 새번역을 확인해 봤는데 거기에는 욥이 기다린다고 되어 있지 않고 욥을 향해 기다리라고 명령하는 걸로 나와요. 그러니까 개역개정의 14절은 제가 보기에는 오역에 가깝습니다. 이런 의미가 조금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이렇게 번역을 하면 욥의 기본적인 입장과도 대립되는 거죠. '하나님이 주는 시험 기간이니까 기다려봐라.' 이게 엘리후의 입장이에요. 그래서 욥을 향해 기다리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욥은 자신이 당한 재난을 순순히 기다리는 게 아니라 거칠게 항의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볼 때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개역개정은 오역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방금 말씀드린 대로 마틴 루터번역, 공동번역, 새번역, 이런 데서도 다 엘리후가 욥을 향해서 기다리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개역개정을 잘못 이해한 건가요? 욥이 기다리는 걸로 되어 있는 거죠.


이러한 오해의 소지가 몇 구절이 더 있는데 확인해보겠습니다. 12절과 13절도 보면 공동번역은 이렇습니다. 12절, ‘악당들이 으스대는 것이 못마땅하시어 그들이 아무리 외쳐도 하나님께서는 대답도 안으시지만’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개역개정은 ‘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대답하는 자가 없다고 하는데 공동번역은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어요. 뜻이 많이 다른 거죠. 13절도 이렇습니다. 먼저 개역개정을 볼까요. 이게 무슨 뜻인지 잘 안 들어와요.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듣지 않는 것이 헛되다는 것인가요? 그런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건 아니죠. 공동번역 13절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듣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헛된 소리, 전능하신 분께서 보지 못하신다는 것은 거짓말이요.’ 이런 뜻입니다. 이게 12절부터 연결되는 문장인데요. 다시 한 번 개역개정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의미가 들어오는지 생각해보세요. ‘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문장 구조가 정확하게 구분이 안 되어 있어서 헷갈리게 되어있습니다. 문장이 정확하려면 주어, 술어, 목적어 등등의 순서가 있거든요. 그래야 머릿속에 명쾌하게 들어오는데 이거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주어인지, 술어인지 잘 나타나 있지 않네요. 그런 점에서는 공동번역이 좀 낫습니다.


이 문장 자체도 그런데다가 욥의 입장을 전제하고 보면 공동번역이 옳은 거죠.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하소연을 듣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걸 몇 번 이야기 했습니다. 욥은 사람들과 아무리 논쟁을 해봐야 답이 나오지 않으니까 하나님께 직접 판단을 받아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내용을 우리가 앞의 어딘가에서 봤습니다. 그래서 이 욥은 더 이상 하소연할 때가 없어서 이럴 바에야 차라리 스올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토로하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엘리후는 그러한 욥을 비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듣지 못한다는 건 허튼소리야. 전능자가 보지 못한다는 것은 거짓말이야. 정신 차리고 생각해봐라.’ 그런 뜻이죠. 거기까지 제가 엘리후의 세 번째 연설의 핵심 주제와 더불어서 우리말 성경이 조금 오해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이제 강의안 중간을 보십시오. ‘엘리후는 앞서 나오는 욥과 친구들의 발언을 배경으로 해서 자기 논리를 펼칠 때가 많다.’ 이 문장입니다. 엘리후가 욥과 대화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엘리후가 하는 이야기예요.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이 엘리후는 앞에서 욥이 한 이야기, 혹은 욥의 친구들이 한 비판을 인용하면서 자기 입장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7절을 보십시오. 5절은 아까 제가 읽은 부분, ‘하늘, 구름 봐라.’하는 이야기하고요. 6절에서 7절, ‘그대가 범죄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이렇게 나오는데 이건 욥도 이런 입장에서 했던 이야기예요. ‘자꾸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게 하나님에게 어떤 손해를 끼칠 거냐.(정확한 표현은 아니에요.) 얼마나 큰 상관이냐.’ 그런 뜻으로 욥이 이야기했고 그리고 욥의 친구들도 또한 그러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 중에 먼저 욥이 한 이야기를 찾아보겠습니다. 7장 20절을 보십시오.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 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되오리까.’ 친구들이 계속해서 ‘죄를 지었으니까 회개해야 돼. 그래야 어려움을 면할 거야.’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는 말입니다. 욥으로써는 아주 속이 터지는 거죠. 견딜 수 없는 마음을 갖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 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되오리까.’ 전통적인 입장에서는 조금 억지스러운 표현을 하긴 한 거예요. 그런데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친구들이 죄 때문이라는 말에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께 어떤 해가 되길래 이렇게 나를 과녁으로 삼아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건 논리적인 이야기는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도 자신이 처한 입장이 난처하니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답답한 마음이라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말한 것을 엘리후가 다시 한 번 짚는 거예요.


한 구절 더 보실까요. 9장 22절입니다. 원래는 맥락을 좀 봐야하는데 한 구절만 봅니다.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킨다 하나니’ 그러니까 ‘악한 자나 온전한 자나 큰 차이 없이 전부 멸망시킨다.’라고 말하는 건데 이것도 논리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처한 어려운 입장을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세상을 표면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악한 자라고 해서 늘 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늘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동양에서도 그런 말이 있어요. ‘천지불인(天地不仁), 하늘과 땅은 인자하지 않다.’ 벼락이 칠 때 착한 사람을 피해서 벼락이 치진 않아요. 그런 자연재해는 두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 교통사고와 같은 재해도 많이 있는데 그것도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가려서 나지 않습니다. 교회 갔다 오면서도 사고가 나는 경우가 많죠. 하여튼 이 세상을 표면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겁니다.


이번에는 친구들 중에 엘리바스가 똑같은 논리를 펴면서 욥의 의를 깎아내리는 것을 보겠습니다. 22장 2절과 3절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라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지금 엘리바스와 욥이 같은 생각을 밑바탕에 놓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와 선한 자를 분명하게 구분해서 처리하지 않으신다는 입장을 똑같이 바탕에 놓고 욥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반면에 엘리바스는 욥을 비판하는 거예요. ‘네가 의롭다고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 봤자 얼마나 의롭겠냐.’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똑같이 받아들이면서도 그걸 어떻게 이해하냐에 따라서 정반대의 입장이 나오네요. 욥은 자신이 이런 엄청난 재앙을 받을만한 죄를 지은 게 아니라는 것으로 표현하는 반면에 엘리바스는 욥이 자기 의를 의지하는 것을 비판하는 쪽으로 갑니다.


지금 엘리후는 이러한 논쟁을 바탕에 두고 그걸 다시 한 번 인용하면서 욥을 비판합니다. 8절 보면 이렇습니다. 그에 앞서 엘리후는 7절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라고 이야기한 다음에 8절에서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렇게 비판을 합니다. 욥의 악을 강조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죄가 아니면 욥의 재난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너 같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악이 있는 거다.’라고 이야기하고 이어서 '욥의 공의는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있는 거다.'라고 비판합니다. ‘의로운 자의 재난은 하나님의 본질과 상충되기 때문에 욥이 가지고 있는 의라는 것은 별개 아니다. 일반 사람들도 있을 만한 거니까 자랑하지 마라.’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좀 까다롭죠? 이게 욥의 입장인지, 엘리바스의 입장인지, 엘리후의 입장인지, 약간씩 미묘하게 차이가 나면서 서로 중복이 되고 있어요. 그래서 이 욥기를 읽기가 참 까다롭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 놓은 것이 강의안에 밑에서 두 번째 패러그래프에 나와요. 복잡한 것은 다 잊어버려도 됩니다. 핵심적인 것만 여러분들이 알고 있으면 돼요. 엘리후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비판하는 핵심은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건 앞에서 친구들도 똑같이 문제를 삼은 거예요. 35장 2절을 보십시오. 결국 문제는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걸 말 하려고 다른 여러 가지 장황한 이야기를 끌어들이고 있는 겁니다. 2절,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이 엘리후가 볼 때, 욥이 자기 의를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마저 인정을 받은 거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욥이 자기의 의가 하나님과 버금갈 정도라고 말한 적이 있나요? 그건 아니거든요. 자신이 젊어서 알지 못하고 지은 죄를 알고 있죠. 그리고 그 이후에라도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만한 의가 있겠습니까. 욥이 말하려는 핵심은 지금 자신이 받은 재앙과 재난의 이유를 죄라고 비판하는 그걸 용납 못하는 거죠. 그거 말고 자신이 받아야 될 재난이라고 한다면 받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죄 때문이라는 그 논리를 욥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 2절을 여러분들이 머릿속에 넣어두십시오. 엘리후가 하는 이야기예요. ‘네가 정말 의롭냐? 네가 하나님만큼 의롭냐?’ 지금도 사람들이 툭하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똑같이 이야기 안 해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지. 그러니까 누가 옳고 그르고 말할 것도 없어.’ 그리고 교회 안에서 바른말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 다 거기서 거긴데 왜 그래.’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회 정의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 아니냐. 다른 이야기는 하지 마라.’ 이런 식으로 하면 그게 틀린 말은 아니더라도 그것은 결과적으로 잘못되는 거죠. 이건 엘리후가 하는 말과 똑같은 논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욥과 같이 처절한 재난과 불행을 당한 사람을 향해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통으로 죄 문제를 주장하는 것처럼 실제적으로 육체가 힘들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사람을 향해서 ‘네가 그렇게 옳다는 말이냐. 하나님 앞에서 네가 의를 붙들 수 있겠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저주에 가까운 거죠.


35장의 전체 주제는 욥이 당한 재앙이 하나님이 주는 시험이기 때문에 기다려야 된다는 엘리후의 주장입니다. 굉장히 은혜롭죠? 이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는 거예요. 지금도 우리는 툭하면 '그래,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지.'라고 하는데 이건 틀린 게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살기도 해야 됩니다. 그러나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욥과 같은 처지에 떨어진 사람을 향해서 비판한다거나 충고한다거나 신앙적으로 계몽하려는 쪽으로 가게 되면 잘못되는 거죠.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 자체로는 옳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다리라는 엘리후의 말은 분명 옳지만 아주 처참한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향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잘못된 거죠. 그냥 욥 스스로 '그래, 내가 기다려야겠다. 하나님의 뜻이 어딘가에 있겠지.'라고 생각했다면 이건 신앙적으로 옳은 거예요.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은 마땅하되 옆에 있는 타인이 '기다려야 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종교적인 계몽으로 떨어져서 신앙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기독교인들에게 좀 많아요. 특별히 목사들에게 더 많습니다. 신자들이 이런저런 어려움을 만났을 때 늘 이런 투로 이야기하거든요. 그리고 신앙이 있는 신자들이 조금 부족한 사람들에게 신앙적으로 가르치려고 많이 합니다. 때에 따라서 가르칠 필요가 있긴 하겠습니다만 조심스러워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실은 우리는 아는 게 별로 없고요. 결과적으로 어떤 것이 그 사람에게 좋은지 잘 모르기 때문에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절제해야 하는 겁니다. 기다리라는 가르침은 참 좋은 것이지만 그게 엘리후가 욥을 계몽하고 가르치려고 썼기 때문에 바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욥기를 공부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35장을 우리가 읽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또 앞으로도 읽게 될 이 욥기, 우리도 그러한 기독교 전통 안에 들어있습니다. 오늘 저희들 엘리후가 욥을 향한 세 번째 충고를 읽으면서 아름다운 말, 신앙적인 말이라고 해서 다 옳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우리의 분별력이 충분하지 않으니 항상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성령께 온전히 의지하는 자들 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이렇게 한 주일의 중간, 수요일 저녁에 함께 모여 말씀을 읽고 신앙적인 친교를 나누는 우리 작은 이 모임에 하나님의 큰 은혜가 늘 넘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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