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17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 우리 함께 공부할 욥기는 진행이 많이 돼서 38장이 되겠습니다. 거의 끝나가는 장면이에요. 욥과 욥의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논쟁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게 지나갔고 그 다음에 엘리후라는 젊은 친구가 나서서 자기주장을 펼치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욥의 반론이 없는 것으로 지나가 버렸어요. 이제 거의 막바지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38장부터 41장까지예요. 42장에도 조금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거는 이러한 논쟁, 신학적인 시시비비가 아니라 정리되는 부분이라서 조금 구분해서 보시면 됩니다. 실질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38장부터 41장까지입니다. 전체적으로 네 장입니다. 별로 길진 않아요. 여기는 거의 비슷한 내용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집에서 읽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익숙한 내용들이에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통독해서 읽어보겠습니다.


<욥기 38장>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8.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9.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10.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11.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12.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13.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

14. 땅이 변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 되었고 그들은 옷 같이 나타나되

15. 악인에게는 그 빛이 차단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16.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17.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18.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19. 어느 것이 광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어느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20. 너는 그의 지경으로 그를 데려갈 수 있느냐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21. 네가 아마도 알리라 네가 그 때에 태어났으리니 너의 햇수가 많음이니라

22.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23. 내가 환난 때와 교전과 전쟁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남겨 두었노라

24. 광명이 어느 길로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땅에 흩어지느냐

25. 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으며 우레와 번개 길을 내어 주었느냐

26.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27.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28. 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29. 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30. 물은 돌 같이 굳어지고 깊은 바다의 수면은 얼어붙느니라

31.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

32. 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33.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34. 네가 목소리를 구름에까지 높여 넘치는 물이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35.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번개가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36.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

37. 누가 지혜로 구름의 수를 세겠느냐 누가 하늘의 물주머니를 기울이겠느냐

38.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

39. 네가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욕을 채우겠느냐

40.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숲에 앉아 숨어 기다리느니라

41.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38장이 좀 길긴 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준 말씀이에요. 이게 39장까지 이어져요. 40장은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죠. 38장을 같이 봤는데 여기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전체 윤곽을 잡으면 그 특징이 다음과 같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칭호가 여호와로 여기서 처음 나와요. 우리는 하나님, 여호와 익숙하게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을 호칭할 때 서로 차이가 있어요. 욥기의 앞부분에서는 여호와로 안 나와요. 앞에서는 하나님을 두 가지로 호칭합니다. 하나는 엘이에요. 이거는 보통 하나님으로 번역이 됩니다. 또 창세기나 다른데 보면 엘로힘이라는 명칭으로 나와요. 하나님에 대한 호칭들이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아도나이라는 표현도 나오고요. 욥기는 앞부분에서 다 엘, 혹은 엘샷다이라고 나오다가 여기 38장 1절에서 처음으로 여호와라고 나와요. 그리고 40장 1절, ‘여호와께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라고 나오는데 앞에서는 이렇게 나오지 않아요. 40장 3절에도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대답하는 것이 나오고요. 40장 6절, 42장 1절, 이렇게 여호와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욥기를 기록한 그 당시의 고대 저술가가 하나님을 아주 특징적으로 이 부분에서 표현하는 거예요.


방금 말씀드린 대로 욥기의 앞부분에서 봤을 때는 엘, 엘샷다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 부분이 많은데 제가 한 군데씩만 강의 요약문에 인용했습니다. 35장 2절 보세요. 엘리후가 말하는 거예요.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여기서 하나님 할 때는 히브리어로 엘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런 게 앞에도 많아요. 제가 하나만 인용을 했습니다. 또 하나는 엘샷다이예요. 34장 17절 보십시오. 이것도 엘리후 이야기죠. ‘정의를 미워하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그대가 정죄하겠느냐’ 그러니까 우리말 번역으로는 엘샷다이를 전능자, 혹은 전능하신 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34장 12절도 보세요.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여기에 하나님은 엘이고요.) 전능자는 공의를 굽지 아니하시느니라.(여기 전능자는 엘샷다이예요.)’ 그런데 여기 38장부터는 하나님을 엘, 엘샷다이가 아니라(그런 부분도 나오지만) 특징적으로 여호와, 야훼, 이러한 호칭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어요. 이 여호와라는 호칭은 막연한 전능자,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인도해 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자기를 드러내시고 나타내시고, 그리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리라는 약속을 주시는 분, 특별하고 긴밀한 관계를 나타낼 때에 쓰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여호와예요. 그러한 특징이 하나 있어요. 앞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았던 칭호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우리가 방금 읽어서 느꼈겠지만 질문 형식의 문장이 반복됩니다. 이 38장 3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시작하죠.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 할지니라’ 묻는 것을 대답하라고 하면서 계속 물어요. 40장 2절에서도 다시 한 번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욥은 자신이 당한 재앙, 재난, 큰 불행 앞에서 친구들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해요. 친구들 충고의 핵심은 ‘너의 죄 때문이다.’라는 거잖아요. 본인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그리고 더 이상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입장을 인정받지 못해요. 이건 당연한 겁니다. 그렇다면 욥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부정하든지 하나님을 떠나든지 해야 하잖아요. 여태까지 내려온 전통에 따르면 분명히 욥에게 어딘가 잘못이 있는 거예요. 이건 이스라엘의 오래된 지혜 전통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혼자만 '나에게 닥친 재앙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옳다.’고 주장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어려운 거예요.


쉽게 말하자면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같이하다가 완전히 한 사람이 왕따 당한다고 할까요? 그리고 자기를 어떻게 변명하기 힘들어 졌을 때나 신앙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교회를 나가든지 신을 부정하든지 해야 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잖아요. 사실은 욥도 그러한 상황인데 거기서 떠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고 끝까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나님과 대결해서 대답을 듣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곳곳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앞에서는 그러한 부분들이 여러 번 나왔는데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이제 다 지나간 다음에 바로 여기서 하나님이 나타나서 질문을 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말씀이 욥이 원했던 대답을 직접적으로 주는 건 아닌 거예요. ‘나는 이러한 재앙과 재난을 받을 만한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정확하게 이야기해 달라.’ 이러한 요청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간접적으로 질문만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38장을 읽으면서 느끼셨죠? 욥이 잘했다, 못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고 ‘네가 뭘 봤냐. 이걸 이해를 했느냐.’하면서 하나님께서 간접적으로 대답을 주시는 거죠. 대답을 안 주는 게 아니라 간접적으로 주는 거예요.


우리가 여기서 교훈을 받는다면 신앙생활하면서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해서 응답받는다는 생각을 하잖아요. 당연히 응답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하고 살아가는 건 좋은 거예요. 그러나 늘 그러한 방식으로 딱딱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답하시는 거죠. 그걸 우리가 잘 붙들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를 응답될 때까지 부르짖으라고 말하는 것은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옳은 것은 아니죠. 기도해서 응답받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응답받지 않은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신 거예요. 그런데 그거를 미처 깨닫지 못해서 혼자서 가슴앓이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욥의 그 안타까운 요청과 질문에 대해서 직접 대답하지 않으세요. ‘이건 죄 때문이야.' 아니면 '그것과 상관없이 된 거야.’ 이런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연관된 것을 직접 말하지 않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건 조금 있다가 본문을 좀 보겠습니다. ‘동풍이 어떻게 됐는지 아느냐.’ 이런 식으로 욥이 원하는 그 문제와 다르게 엉뚱한 것들을 하나님이 욥에게 질문을 하고 그렇게 간접적으로 욥을 깨닫게 하세요. 그래서 42장에 가면 욥이 결국은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회개를 하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딱 부러지게 확신을 얻을만한 구절은 없어요. 딱 끊어서 ‘너 죄지은 게 아니야. 걱정하지마라. 뜻이 있어.’ 이런 식으로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계속해서 리워야단, 악어와 같은 것, 자연의 어떤 놀라운 것들을 이야기 하면서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절대성을 깨닫게 하는 거죠. 그렇게 문제가 해결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늘 살아가는 이 수준에서 눈높이가 맞춰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람으로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긴 합니다. 자녀들 결혼, 취업 등등부터 시작해서 가족관계, 친지관계, 크고 작은 온갖 일상들에 파묻혀서 살잖아요. 그걸 우리가 한 순간에 초월해서 완전히 도사처럼 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계속해서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거죠. 전혀 다른 영적인 눈높이를 확보하는 게 핵심입니다. 그러면 이해되지 않았던 것, 안타까웠던 것, 마음을 요동치게 했던 것들이 해결 되는 거죠. 욥은 그런 방식으로 해결을 받는 거예요. ‘이게 죄냐, 아니냐. 단련이냐, 아니냐.’ 그렇게 욥과 친구들이 논쟁한 차원이 아니라 더 근원적으로 이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을 향해서 닫혔던 눈이 확 뜨여지는 거죠. 일단 그렇게 보이면 다른 우리의 인생에서 벌어졌던 것들도 그게 아픈 것들이었든지 즐거웠던 거였든지 다 소화해내는 거죠. 욥이 그런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받습니다. 아주 근원적인 것에 대한 해결인 거예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일치라고 한다면 사실은 다른 문제들은 다 해결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질문 방식으로 욥에게 대답을 주시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신앙의 근원적인 차원, 그 깊이로 들어가는 거죠. 질문하고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고 답변을 얻고, 그러면서 자신의 영적인 내공이 아주 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죠. 그게 두 번째입니다. 질문의 형식으로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직접적인 대답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욥에게 주는 대답이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세 번째 특징은(우리가 앞으로 41장까지 가면서 보겠습니다만) 이 부분에서는 하나님이 역사의 문제는 많이 말씀 안하시고 자연을 많이 말씀해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뜻을 자연에서 찾는 거죠. 구약성경에서는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겁니다. 하나는 역사, 다른 하나는 자연이에요. 혹시 지난주에 설교한 내용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라는 제목이었어요.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려면 열광주의에 빠지는 게 아니라, (모세의 입을 통해서)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신명기의 말씀을 중심으로 설명을 드렸는데 머릿속으로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십시오. 자신들의 생존과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죠. 그렇잖아요. 우리의 운명, 생존의 주인이 누구라는 걸 알면 당연히 경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라 마라의 문제는 차치하고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우리의 생존과 미래를 책임진다고 무의식적으로 교육을 받아요. 아주 어린 유치원 때부터요. 그러한 시스템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아주 익숙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엄정한 사실을 이해하기도 힘들고 이해해도 그 안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죠.


설교에서 그 부분을 이야기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 생존과 운명의 토대다. 그 분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안다고 그랬죠? 설교 때 제가 논리적으로 설명해갔습니다. 우리가 그런 걸 알아야 전체 성경 안에 나온 문장들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거거든요. 예배에 오니까 기분이 좋고 마음에 평화가 온다는 것도 중요한 거예요. 그러나 거기에 머물면 곤란하고 성경이 그러한 요청을 할 때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따라가는 게 신앙이 깊어지는 중요한 공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손에 우리의 생존과 미래가 달려있다는 사실이 신앙의 핵심이잖아요. 어디서 알 수 있을까요? 구약성경은 그것을 역사를 통해 안다고 생각했어요. 출애굽, 광야 40년, 가나안땅 정복, 이걸 구약성경은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한마디만 붙이면 역사라는 게 역사학자가 설명하듯이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식의 연대기적인 역사, 예를 들면 세종대왕이 언제 무엇을 했다는 차원, 이런 것이 아니라 (그걸 바탕에 두되)그 역사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행위라는 것을 보는 거죠. 그게 중요한 겁니다. 우리 개인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어렸을 때부터 살아온 과정이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인생을 글로 쓸 수도 있고 이렇게 저렇게 말할 수 있는데 신앙인들은 ‘아, 여기에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섭리하셨다.’는 사실을 뚫어봐야 하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 경배는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설교 때는 역사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역사에 하나님이 신비한 방식으로 개입하시는 그 차원을 뚫어 보는 것을 이야기했어요.


좀 더 설명하면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할 때 ‘역사를 봐라.’고 하면서 출애굽과 광야와 만나와 메추라기, 요단강 갈라지고 건너서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일 등을 계속 이야기하잖아요.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이 여호수아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한 신앙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거예요. 그러면 세계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다시,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정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 확신한다면 다른 염려 같은 것을 하겠어요? 이 부분은 자기 합리화나 종교적인 자기만족이 아니라 이 세계의 역사, 생명을 뚫어보는 영적인 안목입니다. 그게 성서에 계속해서 나오고 있어요. 성서를 읽는 것은 그런 것을 배움으로써 성서기자와 같은 차원의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하는 거죠. 그러한 역사가 하나고 자연이 또 있어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완성하신다는 것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중요한 것을 이야기했어요. 두 가지를 꼭 기억해 두세요. 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이 두 가지 단어, 역사와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고 증언하는 게 구약성경입니다.


이 두 가지인데 욥기에서는 역사는 빠져요. 그리고 자연이 주로 나옵니다. 이 자연은 지혜 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 바람, 별, 물, 여러 동물들, 이런 것들을 보는 거니까 다 지혜의 전통이 아니겠습니까. 전도서, 시편 등등에도 많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거네요. 앞부분에서는 욥기가 지혜의 전통을 좀 부정하죠. 지혜 전통에 의한 인간에게 임하는 모든 재앙과 불행은 죄의 결과라는 것을 부정해요. 그러나 이 대목에서는(38장에서 41장까지) 그 지혜 전통을 다시 붙들고 있습니다. 자연의 현상을 지혜롭게 보고 정말 참된 지혜가 뭔가를 알라는 뜻으로 나온 거죠. 지금은 21세기예요. 시간이 참 빨리 가네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하고 ‘2000년이 되면 우리가 몇 살이냐.’ 그런 대화를 한 기억이 나네요. 그 때는 까마득한 미래로 생각이 됐어요. 그런데 벌써 2016년, 세월이 많이 갔네요. 10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는 것 같습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16년이 지났습니다. 21세기 신학에서 자연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요. 지금 자연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잖아요. 과학이라는 것은 가속도가 붙는 것 같아요. 중세기까지는 별로 많은 발전을 안했어요. 점진적으로 천천히 갔어요. 산업혁명이(2, 300년 전인가요?) 일어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구식이죠. 그러데 지금은 걷잡을 수 없이 속도가 나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이 자연을 다 설명할 수 있을 듯한 자세로 오고 있어요.


지난 주 설교 때도 중력파를 발견했다는 물리학계의 이슈를 말씀드렸는데요. 그러니까 13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지금 여기 지구에서 포착해서 연구할 정도니까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러한 자연과학의 발전 앞에서, 결국 자연 문제인데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의 창조가 자연이라고 하잖아요. 자연은 우리가 세계에 들어가서 살고 있는 건데 자연과학 쪽에 있는 사람들의 접근방식이 있고 기독교의 성서에 근거해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접근방식이 있는데 이게 준비를 하지 않으면 자칫하면 충돌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이 익히 잘 아시는 대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종교재판 열어서 완전히 부정하는 일들이 교회에 있지 않습니까. 준비를 안 해서 그렇게 된 거고 다윈이 이야기하는 진화론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과학적으로 드러난 사실은 인정을 해야 됩니다. 만약에 먼 미래(언제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세계 전체, 우주물리까지 다 포함해서 자연과학이 완벽하게 해명할 때가 온다면 우리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될 거예요. 하나님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다르게 하든지 해야 될 겁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자연과학을 배척할 필요는 없지만, 끊임없이 그러한 시각을 통해서 이 세계와 자연을 잘 학습하되 신학적인 대안들, 어떤 대답들을 찾아나가야 하는 거죠. 그 작업을 신학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거를 과학신학, 혹은 자연신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전공한 판넨베르크의 말을 빌리면(그 분은 그런 쪽에 대표적인 신학자세요. 2, 3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요.) 그 분이 어떤 이야기를 하시냐면 자연과학이 많은 것들을 밝혀내는데 그걸 부정할 필요는 없고요. 핵심적으로 말씀드리면 우연성이라는 것으로 신학적인 대답을 합니다. 그러니까 진화론 같은 것에서 어떤 법칙이 있잖아요. 늘 거기에는 돌연변이가 들어오게 됩니다. 우연한 것들이에요. 그리고 우주의 메커니즘도 굉장히 정확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거기에 우연한 어떤 것들이 계속 개입해서 변화돼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우연성,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계에 개입하는 하나님의 고유한 방식이라고 설명을 해요. 우리의 신앙과는 거리가 먼 학자들의 표현이기는 한데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 21세기에는 자연과학의 큰 도전 앞에서 기독교가 준비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한편으론 무식하게 생각이 돼서 따돌림 당한다거나 아니면 우리 스스로 하나님 신앙의 토대를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 가지를 말씀드렸어요. 이게 우리가 41장까지 읽게 될 말씀의 특징들입니다. 오늘은 38장을 같이 읽었죠. 여기서 눈여겨 볼만한 몇 가지를 간단하게 추렸습니다. 내용은 비슷한 것들이 앞으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게 참 재밌어요. 이 표현이 좀 그렇긴 한데 정말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천천히 읽어보세요. 그거를 뻔한 것으로 보지 마시고 이 욥기를 기록한 사람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잘 읽어보세요. 어떤 것이 전달될 겁니다. 여러분 강의안을 보면 몇 가지 구절을 표시했죠. 비슷한 내용들이 많아서 다 확인하지 않아도 됩니다. 8절 봅시다.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문학적인 표현이에요. 바다가 어디서 터져 나오는 물로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이 바다가 어디에 갇혀 있잖아요. 이걸 과연 누가 했느냐는 표현이 나오네요. 16절을 보세요.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두 개가 다 바다예요. 4절은 땅에 대한 문제고요. 8절과 16절은 바다, 12절은 하루의 날, 고대인들에게는 태양이 뜬다는 것이 엄청나게 새로운 사건이었어요. 사실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영적인 안목이 필요합니다. 매일 하루가 시작되고 저물어 간다는 것을 감격스럽게 느낄 수 있다면 영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이 되는 거예요. 24절에서는 장마와 동풍이 거론되죠. 저는 시골에 살기 때문에 바람을 좀 더 느껴요. 대나무가 많아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흔들려서 저 바람이 참 대단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계곡을 타고 내려와서 바람의 흐름들이 여러 군데로 흩으러 지는데요. 우리가 그것을 놓쳐서 그렇지 만약에 바람에 색깔이 있다면, 그리고 바람의 세기에 따라서 색깔이 달라진다면, 정말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그 세계가 보이겠죠. 안 그렇습니까. 그 바람의 세기도 각양각색이고 나무 밑으로 들어갔다가 바위를 타고 넘어가는 것들을 색깔로 느낄 수 있다면 이 세계는 완전히 요술과 마술처럼 정말 대단한 것으로 경험이 될 거예요. 그러한 눈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고백하는 사람들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그런 것들이 쭉 열거되어 있어요. 집에 가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성경 본문의 의도가 뭔지를 제가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거기 8절과 16절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항목을 보십시오. 하나는 이 세계를 살아있는 것으로 여기는 거예요. "바다를 가둬서 지키는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 '젊은 사자가 먹이를 먹는데 그걸 네가 다 준비할 수 있느냐.' 등등하면서 바람, 물, 땅, 하늘, 별, 온갖 것들의 이 세계 현상들을 하나의 죽어있는 정태적,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동태적, 역동적인 걸로 볼 수 있는 거죠. 그런 안목이 있으면 정말 우리 일상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공연한 것에 우리의 마음을 다 소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살아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게 하나고요. 두 번째는 살아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모든 것들의 유기적인 관계를 뚫어보는 시각이에요. 이런 것들을 아까 제가 하나의 그림처럼 묘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람의 강도와 방향을 색깔로 표시할 수 있고 볼 수 있으면 얼마나 멋지겠나.' 그러한 이야기를 했죠. 제가 말을 해놓고도 기특한 것 같아요. 생생하게 들어오죠? 그게 볼 수 있는 눈만 가지면 되는데요. 이 두 가지에 같이 해당하는 거죠. 세계를 살아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거고 돌과 흙, 바람 모든 걸 살아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고 그것이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운행되고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하신 이는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차이가 있어요. 자연주의자는 자연을 절대화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서기자들은 학문적인 걸로 하면 탈자연주의예요. 이 자연을 귀한 것으로 여기되 결국 이것도 하나님의 창조, 더 절대적인 하나님에게 영적인 포커스를 맞춘 사람들, 그들이 바로 구약을 기록한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2016년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하고도 반 이상이 지났습니다. 지금 우리가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이 모든 것들이 때에 따라서는 현실인지 아닌지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 빠른 차를 타고 가면 눈앞에 있는 것이 보이지 않고 현기증이 나는 것처럼 그러한 삶을 저희들이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창조하시고 완성하신 그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적인 촉수를 온전히 예민하게 작동시키고 살아가도록,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의 허무, 또는 어려움과 시련들을 신앙적으로 극복되도록 인도 해주십시오. 오늘 이렇게 저희들 욥기, 아주 오래전 유대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시간을 껑충 뛰어넘어 2500년, 3000년 시간을 넘어서 이렇게 보고 읽고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니 이것보다 더 행복한 일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씀에 저희들이 더 집중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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