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9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욥기 41장>

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2. 너는 밧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3. 그것이 어찌 네게 계속하여 간청하겠느냐 부드럽게 네게 말하겠느냐

4. 어찌 그것이 너와 계약을 맺고 너는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

5. 네가 어찌 그것을 새를 가지고 놀 듯 하겠으며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두겠느냐

6. 어찌 장사꾼들이 그것을 놓고 거래하겠으며 상인들이 그것을 나누어 가지겠느냐

7. 네가 능히 많은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 머리에 꽂을 수 있겠느냐

8. 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

9. 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

10.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12. 내가 그것의 지체와 그것의 큰 용맹과 늠름한 체구에 대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13. 누가 그것의 겉가죽을 벗기겠으며 그것에게 겹재갈을 물릴 수 있겠느냐

14. 누가 그것의 턱을 벌릴 수 있겠느냐 그의 둥근 이틀은 심히 두렵구나

15. 그의 즐비한 비늘은 그의 자랑이로다 튼튼하게 봉인하듯이 닫혀 있구나

16. 그것들이 서로 달라붙어 있어 바람이 그 사이로 지나가지 못하는구나

17. 서로 이어져 붙었으니 능히 나눌 수도 없구나

18.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빛을 발하고 그것의 눈은 새벽의 눈꺼풀 빛 같으며

19. 그것의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꽃이 튀어 나오며

20. 그것의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갈대를 태울 때에 솥이 끓는 것과 같구나

21. 그의 입김은 숯불을 지피며 그의 입은 불길을 뿜는구나

22. 그것의 힘은 그의 목덜미에 있으니 그 앞에서는 절망만 감돌 뿐이구나

23. 그것의 살껍질은 서로 밀착되어 탄탄하며 움직이지 않는구나

24. 그것의 가슴은 돌처럼 튼튼하며 맷돌 아래짝 같이 튼튼하구나

25. 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라도 두려워하며 달아나리라

26. 칼이 그에게 꽂혀도 소용이 없고 창이나 투창이나 화살촉도 꽂히지 못하는구나

27. 그것이 쇠를 지푸라기 같이, 놋을 썩은 나무 같이 여기니

28. 화살이라도 그것을 물리치지 못하겠고 물맷돌도 그것에게는 겨 같이 되는구나

29. 그것은 몽둥이도 지푸라기 같이 여기고 창이 날아오는 소리를 우습게 여기며

30. 그것의 아래쪽에는 날카로운 토기 조각 같은 것이 달려 있고 그것이 지나갈 때는 진흙 바닥에 도리깨로 친 자국을 남기는구나

31. 깊은 물을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를 기름병 같이 다루는도다

32. 그것의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로 만드는구나

33.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

34.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


지금 우리가 읽은 것처럼 욥기 41장은 ‘리워야단’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동물을 묘사하는 것으로 채워졌어요. 여러분 성경의 41장 1절 각주 2번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리워야단’ 각주 밑에 보면 ‘2번, 악어로 볼 수 있음’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어요. 정확하게 악어는 아닌데 악어로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이집트의 나일강가에 있었던 악어일 수 있고 유프라테스 강이나 티그리스 강의 늪에 있었던 악어일 수도 있어요. 이 리워야단이라는 동물은 다른 문서에도 나와요. 여러분 강의안에 보면 조금 어려운 단어가 나왔습니다. 우가릿문서라는 거예요.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주변에 다른 문서들이 많이 있었어요. 여러분들이 함무라비법전을 많이 들어봤을 겁니다. 또는 동양의 중국이나 인도에도 고대문헌들이 있었고, 곳곳에 고대 문명의 발생지에는 문헌들이 다 있어요. 고대 문명국가들이 문자를 사용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기록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우가릿문서라는 게 있어요. 이 문서에 가나안 지역의 여러 신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학계에서 연구가 된 이 우가릿문서를 조금 학문적으로 보면 발견된 시기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키프로스라는 섬에서 어느 농부가 밭을 갈다가 토판을 발견했어요. 흙으로 된 판에 글씨를 쓴 거예요. 기왓장 같은 거죠. 옛날에는 그런 데에도 글씨를 많이 썼으니까요. 학자들이 이걸 가져다가 연구해보니까 보통 기왓장이 아니었어요. 기원 전 15세기부터 14세기에 있었던 한 나라의 문서였던 거예요. 그걸 우가릿문서라고 합니다. 그때 그 근처에 있던 나라를 우가릿이라고 해요. 지금으로 보면 시리아입니다. 이 시리아가 옛날에는 대단했습니다. 아시리아도 그쪽인데 북이스라엘을 함락했잖아요. 거대한 제국이었거든요. 바로 그 지역입니다. 지금은 시리아가 내전이 일어나서 국민들이 흩어지고 난민이 되고 풍비박산입니다. 그러나 고대의 시리아 문명은 대단했습니다.


기원전 15세기에서 14세기, 그걸 성서시대와 연관시키면 대충 어느 쯤 일까요. 출애굽시대 정도 됩니다. 여러분들이 기본적으로 아는 구약시대 역사인데 잠깐 말씀드리면, 출애굽 한 다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사사시대가 시작되죠. 그렇게 몇 백 년이 지나가고 사울왕이 나오고 다윗, 솔로몬에게 내려가요. 솔로몬까지는 통일왕국이었고 아들 대에서 르호보암, 여로보암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르호보암은 솔로몬의 아들로써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독재 비슷하게 나가서 여로보암이라는 장군이 반역을 일으켜서 북이스라엘을 설립하잖아요. 그래서 남북이 분리됩니다. 어쨌든 기원 전 15세기, 14세기는 출애굽이라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하나의 민족으로서 그 정체성을 시작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정확하게 언제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은데 아주 큰 틀에서 보면 그러한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원전 15세기에서 14세기하면 굉장히 까마득한 옛날이죠. 우리가 느끼기에 500년 전만 하더라도 굉장히 옛날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이니까 정말 먼 이야기입니다. 그 때 우가릿이라는 나라가 있었어요. 수도를 우가릿으로 하는 나라에서 만든 토판이 1920년대에 발굴되기 시작해서 많이 나왔어요. 그 전에는 우리 인류가 우가릿문자를 몰랐거든요. 그런데 그 토판이 나오면서 학자들이 연구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 걸 보면 참 신기합니다. 전혀 몰랐던 문자들, 바벨론문자나 잉카문명에 있었던 고대 언어들도 그렇고, 처음 봤을 때는 그림처럼 보였겠죠. 그러나 고대언어학자들이 그거를 연구해서 해석해냅니다. 거기서 알파벳을 찾아내요. 모음, 자음을 조합해서 글자를 찾아내는 거죠. 아주 대단한 연구죠. 우리는 지금 이미 아는 문자, 독일어나 불어, 스페인어 같이 학습할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 문자들도 익히기 힘들어 하는데, 전혀 새로운 문자를 학자들이 연구를 해서 그 문장들을 해석합니다. 학자들이 이 우가릿 토판을 해석해보니까 그 안에 성경에 있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 거예요. 바알, 아세라와 같은 신들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와요. 가나안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을 멋지게 표현하는 거죠. 바람과 비를 지배하고 계절을 다스리고 풍요를 주는 바알과 아세라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학자들이 우가릿 토판에서 찾아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리워야단이라는 동물도 거기에 나옵니다. 오늘 여기 욥기 41장이 리워야단을 묘사하는 핵심은 리워야단이 우리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다는 거예요. 초월적인 존재라는 거죠. 초월적인 존재인 리워야단을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하려는 거죠.


참고적으로 욥기 41장 1절~8절은 히브리성경에서는 욥기 40장에 포함돼요. 그리고 9절부터 41장 1절로 시작합니다. 이런 것들을 조금 더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41장 9절을 41장 1절로 보면서 히브리성경하고 연관시키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히브리성경에서 번역한 게 아니라 칠십인역에서 번역을 했을 거예요. 칠십인역은 헬라어로 기록한 거예요. 이런 작은 차이가 있는데 여러분들이 깊이 모르셔도 되고 참고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욥기는 전체적으로 고난에 대한 문제예요. 고난, 재앙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에 대한 것을 전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후반부에 저는 고난과 재앙을 당한 사람들의 문제를 세 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을 했어요. 무죄한 자의 재앙, 이건 지금도 많잖아요. 우리가 그런 것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딱하죠. 못사는 나라만 힘든 게 아니라 잘사는 나라에서도 이런 어려운 일이 계속 일어나요. 어쨌든 그런 고난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를 지난주 공부 마무리에서 세 가지로 설명했는데 오늘은 하나 더 보태서 네 가지로 간단하게 그 윤곽을 잡아볼까 합니다.


첫 번째는 고난과 재앙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에게 묻는 거예요. 사라마구라는 포르투갈 소설가가 쓴 ‘카인’이 바로 그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사람은 많이 있어요. 철학이나 예술에서도 그렇습니다. 신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죠. 현대에 많은 무신론적인 실존주의자들은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평생 동안 사는 것 등을 보고 '신이 있다면 도저히 이럴 수는 없다.’는 식으로 신을 부정하는 입장이 있어요. 가장 적극적으로 신을 부정하는 입장입니다.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이 세상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두 번째는 욥의 친구들의 입장이에요. 이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여러 번 이야기 했듯이 재난의 이유가 죄 때문이라는 거예요. 성경에도 그러한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대표적인 거예요. 이들이 교회 전통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친구들과 논쟁을 하고 있는 욥의 입장입니다. 세 친구들과 논쟁하고 있는 욥은 친구들이 주장하는 죄 때문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거죠. 그런데 이 세 번째 욥의 입장과 첫 번째 입장은 서로 다른 겁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이러한 재앙과 재난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무신론에 빠진 입장이고요. 반면에 욥의 입장은 무신론에 빠져서 하나님을 부정하지는 않되 지혜 전통에 대해 저항하는 거예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있냐. 당신의 판단을 더 받고 싶다.’ 이러한 입장입니다. 조금 생각이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런 고민을 하면서 살 거예요.


네 번째는 하나님을 경험한 욥의 입장이죠. 친구들과 논쟁을 벌이는 욥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경험한 욥의 입장이에요. 세상에 부조리와 모순이 여전히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차원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이 욥기가 우리들에게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려는 거죠. 욥기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저술 목적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무죄한 자의 고난을 무조건 죄의 탓이라고 하는 지혜 전통에 대한 도전입니다. 친구들의 주장은 전통적으로 내려왔던 거예요. ‘네가 잘못해서 그래. 회개해.’ 이런 주장에 대한 도전이고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두 번째로 그 모순, 딜레마들을 극복하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 들어가는 신앙을 말하려는 거죠. 제가 보기에는 이 두 가지 목표를 욥기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따라가야 되는 거죠.


우리가 쉽게 죄 때문이라는 시각은 많이 극복을 했어요. 앞에서부터 많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않고 이 모순이 많은 세상, 실질적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고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 들어가는 신앙의 비약, 이러한 경험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까지 완전하게 살펴보지는 않았습니다. 결론 부분에 그런 것들이 더 정리돼야겠습니다. 다음 주에 주로 그 이야기를 하게 되겠는데요. 다음 주가 42장 끝마치잖아요. 그리고 거기 42장 5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을 여태까지 귀로 들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보는 거와 같다.’라고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경험인거예요. 하나님 경험을 들은 풍문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경험한 욥의 신앙적인 경험이 42장에 나오니까 다음 주에 그 부분을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 제목은 ‘하나님 경험’이에요.


이 하나님 경험에 이르는 전 단계가 38장~41장까지 나오는 이 세계의 신비와 하나님의 통치 능력의 초월성인 거예요. 그래서 계속 욥을 향해서 ‘네가 아느냐. 보았느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1장에서는 악어를 예로 들면서 ‘네가 근처도 못 간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어요. 다음 주에 우리가 하나님 경험이라는 것을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38장에서 41장에 이르는 자연에 대한 욥기의 설명을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오늘은 다시 전체적으로 정리하는 겁니다.


보통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계를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죄 용서받아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살아있을 때 복 받아서 지상 천국도 누리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어서 천당 간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틀린 거 아니에요. 옳은 거예요. 기본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게 허공에 떠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실질적인 이야기가 되려면 이 세계를 알아야 돼요. 왜 그러냐면 우리는 세계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계하고 상관없는 하나님 경험, 구원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세계를 별로 잘 생각을 안 하는데 그 이유는 뭘까요. 이 세계, 역사, 자연, 우주를 잘 생각하지 않잖아요. 단순히 자연 경관을 보면서 ‘참 아름다워라. 하나님 지은 세계.’ 이 정도로만 세계를 보지 아주 실질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특히 한국교회가 왜 그러냐면, 기독교 신앙에도 흐름이 있거든요. 신앙의 메인 스트림, 중심 줄기가 있고 곁가지가 있어요. 이 곁가지가 틀린 건 아닌데 중심은 아닌 거예요. 주류가 아닌 비주류는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을 놓치는 거죠. 우리 한국교회 신앙이 비주류에 많이 속해있어요. 여러분들이 동의하지 않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급성장 했고 미국교회와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중심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어떤 흐름이냐면 청교도주의예요. 영국과 유럽 본토에 있었던 부흥운동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게 주류는 아닌 거예요. 개인의 회심, 도덕적인 변화를 신앙의 핵심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태도예요. 이게 미국으로 건너가서 에드워드라는 사람의 부흥운동, 무디와 같은 사람들의 선교 부흥운동, 그리고 20세기 중, 후반부터는 빌리 그레엄식의 신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겁니다. 이건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예요. 틀린 건 아니에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전체, 예수 그리스도 사건, 하나님 창조, 종말, 성례전 등등, 기독교 신앙의 원뿌리가 있는데 여기에 탄탄하게 토대를 두고 있는 흐름은 못 되는 거죠. 그래서 만날 눈물 흘리면서 돌아오고 예수 영접하고 믿음이 좀 떨어진 것 같으면 첫사랑을 회복하는 식이에요. 계속해서 예수와의 실존적인 관계에만 떨어지는 거예요. 자기의 어떤 종교 감정에만 떨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블랙홀이나 빅뱅이 어떤지, 물리학, 생물학, 역사 해석 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이건 몰라도 된다고 생각해요. 한 쪽으로만 치우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독교 신앙이 센티멘탈리즘에 떨어지게 되는 거예요. 감수성에 떨어져버려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러나 중심은 아닌 거예요. 그래서 만날 흔들리죠. 감정의 기복이 심한 거예요.


이 세계를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이고, 또 하는 역사예요. 자연과 역사, 사실은 이 주제만 하더라도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주제는 학문적으로도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헤겔 같은 사람이 역사철학에 대해서 많은 글을 썼잖아요. 제가 거기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건 아니고 책을 조금 봐서 어떠한 방향만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할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대충 흐름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도 이 역사와 자연을 붙들고 있을까요? 당연히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게 종교적인 언어로 설명이 되어 있어서 물리학이 이야기하는 자연, 생물학이 말하는 자연, 우주 과학이 말하는 것들, 그리고 역사철학이 말하는 것들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정확하게 못 찾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핵심으로는 성경이 그것들을 붙들고 있습니다.


큰 틀로 이야기해서 구약성경은 세 가지잖아요. 모세오경과 선지서, 성문서예요. 이 모세오경과 선지서는 주로 역사를 다루고 있어요. 출애굽, 광야 40년, 가나안 정복, 그 안에서 사사들의 활동과 그들이 정착하는 문제, 그리고 왕조로 넘어가면서 통일왕국와 분열왕국, 거기서 선지자들의 활동들을 이야기하는데, 이건 역사에 대한 이야기예요. 출애굽만 하더라도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에 의하면 불가능한 사건인거예요. 그러나 그런 것을 이룬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출애굽기나 신명기 등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관점은 이 역사가 사람들의 뜻에 따라서 그냥 흘러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거라고 봤어요. 이게 좀 딱딱한 이야기인데 여러분 개인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도 역사잖아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게 기계적으로 진행된 게 아니라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의 운명이 진행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두 가지 중에 역사를 짚었고요.


욥기는 주로 자연을 이야기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은 역사예요. 초월적으로 하나님이 개입해서 역사가 간다고 본 거고요. 이 욥기는 자연을 이야기합니다. 좀 전에 역사와 자연, 두 가지가 세상이라고 했어요. 38장~41장은 인간의 인식을 뛰어넘는 자연의 현상을 집중적으로 가리키고 있어요. 우리가 몇 주간에 걸쳐서 봤습니다. 오늘 41장의 리워야단, 악어에 대한 묘사도 핵심은 이거예요. 아주 이상한 모습으로 큰 능력을 행하고 있는 악어를 말하고 있는데 구절 하나하나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묘사 하나하나를 다 볼 거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21절, ‘그의 입김은 숯불을 지피며 그의 입은 불길을 뿜는구나.’, 13절에 보면 ‘누가 그것의 겉가죽을 벗기겠으며 그것에 겹재갈을 물릴 수 있겠느냐.’ 이런 구절들 하나하나를 다 몰라도 돼요. 그러나 이게 말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능력과 인식을 뛰어넘는 이 자연을 보는 거죠. 그것은 곧 초월적인 것을 말하는 거예요. 자연의 초월성, 세상의 초월성이에요. 이 초월이라는 단어가 딱딱해서 안 들어올 수도 있는데 이게 뭔지는 이해하실 거예요. 우리가 그것을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 있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존재론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대로 도구처럼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라 훨씬 더 근원적으로 뛰어넘는 힘이 거기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초월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연에 대해서 가장 반기독교적인 입장이라는 주장이 보통 진화론이잖아요. 진화론에 의하면 이 세계의 생명, 자연이 기계적으로 진화의 법칙에 따라서 진행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진화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두 가지 점에서 진화가 기계적으로 움직인다는 말은 아닙니다. 기계적이라고 하면 초월적이지 않다는 거거든요. 그대로 기계적으로 나타나니까요. 그런데 진화론을 이야기할 때 그게 아닌 이유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근거입니다. 하나는 진화과정에서 늘 특이점이 발생한다는 거예요. 다 똑같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아요. 보통 돌연변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런 것들이 늘 개입되어 있어요. 둘째는 짧은 시간으로 보면 진화가 되는 것 같지만, 그러니까 얼룩덜룩한 고양이가 새끼를 낳으면 비슷한 새끼를 낳는 것처럼 짧게 보면 기계적으로 진행이 돼요. 그러나 긴 시간으로 보면 이 생명의 변화라는 것은 진화의 법칙을 초월합니다. 전달이 됐겠죠? 짧은 시간에는 진화가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것 같은데 그러나 길게 보면 그거를 넘어서있다고 하는 겁니다. 앤드류 놀이라는 학자가 쓴 ‘생명, 최초의 30억년’에 보면 캄브리아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게 지금부터 5억 년 전이에요. 그 때에 생명이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해요. 이 앤드류 놀의 연구에 따르면(물론 다른 학자가 연구해 놓은 것을 더불어서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 캄브리아기 이전과 이후는 도저히 연결해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생명 현상이 급속도로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것들도 다 자연의 초월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자연을 이야기할 때에 우리가 또 한 가지를 짚어야 할 것은 자연과학과의 관계예요. 이게 충돌하는 거죠. 진화론도 비슷한 거예요. 학자들이 자연을 연구해서 그것의 비밀을 다 밝힐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제가 하이데거라는 사람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이데거가 자연과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인데요. 그 사람의 설명에 따르면(저도 동의하는 바지만) 옛날 헬라 철학자들과(그 당시는 철학자가 곧 과학자였어요.) 현대의 첨단 과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문적인 활동은 실제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아는 게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이게 표현이 좀 이상하죠. 그 당시에 비해서 우리가 아는 게 얼마나 많아요. 훨씬 많은 것 같은데, 그러나 본질적으로 보면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예요. 어떤 과학자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은 그 때까지 있었던 과학 원칙에 근거해서 앞길을 조금 여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작업이 제한적인 거죠. 그러니까 2000년 전에 있었던 피타고라스 같은 사람이 한 작업이나 지금 첨단의 노벨 물리학상을 탄 과학자들이 한 일이나 사실은 역할이 똑같다는 거예요. 하이데거가 말하려는 것은 결국 과학이라는 것은 계량화 작업이라고 합니다. 숫자로 표시하고 측정하는 거지 이런 방식으로 모든 사물과 세계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지금 진화론과 하이데거의 말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말씀드렸어요.


그러면 성서는 이 세상을 뭐라고 하는지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하면 오늘 우리가 공부할 것들은 다 끝날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왜 세상 이야기를 자꾸 하는지를 아시겠죠? 욥기 41장에서 말하는 것이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는 그 고백에 이르는 과정이에요. 거기에 리워야단이라는 우가릿문서에 나오는 한 동물을 잘 표현하면서 이 하나님의 창조물인 이 세계가 얼마나 엄청난지, 우리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세상을 다시 한 번 그런 시각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역사 문제는 접어두고 자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죠. 보통 피조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몇 가지 의미가 있어요. 제가 강의안에 다섯 가지로 설명해놨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대전제가 말하려는 것이 뭔지에 대한 설명이에요.


첫째, 자연 자체는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피조물인 거예요. ‘creatio ex nihilo’, 무로부터의 창조, 이게 대원칙이거든요. 무로부터 나왔지 그 자체가 있었던 건 아닌 거예요. 원래 있었던 것을 변화시킨 게 아니라 아예 무로부터 창조된 거라서 자연 자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닐 겁니다. 두 번째, 자연과 세상은 창조자에 의존해 있다는 겁니다. 성경은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받아서 살아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세상은 언젠가 끝나고 새롭게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것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하고 있어요. 네 번째 세상은 종말에 가서야 그 실체를 다 드러낸다는 겁니다. 네 번째 말한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자연,(역사까지 다 포함해야겠네요.) 이것들은 종말에 가야 그 실체를 드러내요. 그 말은 지금은 아직 우리가 다 모른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물리학과 생물학, 우주과학이 굉장히 발달했기 때문에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너무 미미한 거예요. 앞에서 하이데거가 이야기한 2000년 전의 헬라과학자들이 아는 거나 지금 우리가 아는 거나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말도 여기에 해당되는 겁니다. 수학에 이런 말이 있어요. 무한 앞에서는 유한은 아무리 커도 제로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계는 하나님과의 창조와의 관계 속에서 거의 무한이잖아요. 그런 데에서 안다고 해봐야 옛날이나 지금이나(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절대적인 세계 앞에서는 똑같은 거죠. 종말에 가서야 실체를 드러냅니다. 강의안에 ‘소피의 세계’라는 책 제목을 적었습니다. 재밌는 이야기인데 오늘 시간이 없어서 말씀드리기가 힘들고 다음 주에 잊어버리지 않으면 이 책에 나오는 세균 한 마리 이야기를 다시 하겠습니다. 다섯 번째, 세상은 신적 속성을 지닙니다.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한계가 있지만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신적 속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적 속성이 뭐냐에 대해서는 우리가 몇 가지 단어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고요. ‘하나님이 여기에 통치하시고 개입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이 세계를 다스리신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신학자 융엘이라는 사람이 ‘세계 비밀로써의 하나님’이라는 책을 썼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세계의 비밀이다. 세계는 여전히 감춰져있다. 종말에 가서 다 드러난다. 그러나 그 비밀이 곧 하나님이다.’라는 책의 제목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계는 신적 속성이 있는 거죠.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말한 몇 가지 이야기한 것을 다 통틀어서 제가 말씀드리는 핵심은 이 세상은 초월적입니다. 우리가 과학적인 지식으로 재단하고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있어서 우리의 생각과 운명과 모든 것을 뛰어 넘는 그러한 대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강의 요약문 마지막 문장이 이렇습니다. 초월적이라는 말을 다른 것으로 바꾸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세상을 다 알아버리면 얼마나 우습겠어요. 정말 초월적이라는 것은 다행한 일이고 더 나아가서 그렇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에 맡긴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잘 먹고 잘 살고 복지가 잘 된 그런 나라만 생각할 텐데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와 자유에 내 죽음 이후의 운명까지 다 맡길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바로 성서가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는 하나님과의 일치, 그리고 구원이 있는 거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욥기서 마지막 장의 바로 앞부분, 41장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정말 오래전 기록된 말씀인데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살아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아는 것 같으나 그게 아니라 점점 더 하나님의 비밀이 숨겨있는 것으로써 우리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깊은 뜻을 순종하며 따라가는 자들 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현대 문명 가운데서 사람들이 너무 교만하여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모든 것을 분석할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저희들 오늘 욥기서 41장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초월성이 이 세계에 깊이 들어있음을 알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저희들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수요일 저녁 함께 말씀을 나눈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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