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레위
-따름과 버림-
본문5:27-32,참조마9:9-13,막2:14-17

동양 사상에서는 스승이나 제자가 각자 나름대로 자신의 고유한 정신(진리) 세계를 추구할 따름이지만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진리와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를 구체적으로 따라 나서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한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멀찍이서 예수를 관망하는 게 아니라 직접 예수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예수의 12제자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은 이런 제자직에서만 그 정체성이 유지된다.  

1. 세관에 앉은 레위(마태)
신약성서 시대의 세무는 그 일을 맡은 이들이 아주 고약하게 처신할 수 밖에 없는 그 바탕을 마련해주고 있다. 식민지 상황에서 상당한 부분이 인정과세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세리는 얼마든지 착복할 수 있었다. 양심적으로 그 일을 처리한 세리들이 없지 않았겠지만 사람은 근본적으로 상황에 거의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기 때문에 대다수의 세리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개인적 욕망 해결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를 강도와 마찬가지로 죄인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오늘 성서 본문에 등장하는 세리 레위는 두 세계 사이에 놓인 사람이었다. 하나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가능성이며, 다른 하나는 부도덕하다는 비난 앞에서 겪게되는 양심의 가책이다. 본문에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않지만 물질의 풍요와 정신적 빈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 두 세계가 더불어서 풍요롭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물질은 늘 한정적이기 때문에 서로 경쟁을 통해서 확보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일에 힘을 쏟다보면 정신세계가 빈곤해질 수 밖에 없다. 반면에 정신세계는 무한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경쟁없이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은 정신적 풍요없이는 결코 평안,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존재인데도 오늘의 세계는 거의 일방적으로 물질의 풍요만이 절대적인 가치가 되어 있다. 물질과 정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도 찾을 수 없다. 아마 갈등을 느끼지 못한다기 보다는 그것을 일부러 회피하고 있는 상태이다. 물질문명이 과대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세계에 눈을 돌릴 수 없다는 말이다.

2. 예수의 부르심
우리는 무슨 이유에서 예수가 세리 레위를 향해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속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초면에 다짜고자로 나를 좇으라고 했다면 아마 “맛이 간”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미 예수와 레위 사이에는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만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레위는 평소에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었고, 가끔 그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또는 직접 찾아가서 이런저런 어려움에 대해서 자문을 구했을 것이다. 예수의 입장에서도 레위가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로 인해서 고민하고 나름대로 길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헤아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제 예수가 그를 불렀다. “나를 좇으라.”
예수의 이 부름은 예수가 곧 길(道)이라는 의미다. 그게 곧 인생의 답이다. 길인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곧 구원의 길이며, 참 생명의 길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곧 기독교인들이다.
그런데 아무나 이런 부름을 들을 수는 없다. 진리는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만 열려진다. 물론 이미 예수가 문을 두드리고 있긴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들을 귀가 있어야 듣고, 눈이 있어야 볼 수 있다.”
“나를 좇으라”는 말은 모든 것을 때려 치우고 무조건 예수를 졸졸 따라다닌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직을 자기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는 곧 하나님이 자기 삶의 토대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어렴풋한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가 우리의 삶에 토대라는 사실을 실감있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물론 입으로는 늘 “주님의 뜻” 운운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 욕망은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을 때가 많다. 가정, 교육, 종교 현장에서 교묘한 방식으로, 때로는 거룩한 방식으로 자신을 확장시켜나간다. 그래서 예수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고 경고하셨다. 모든 것을 버려두어야만, 가족까지 포기해야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만큼 제자직은 철저한 삶의 자세를 가리킨다.

3. 버림
누가복음은 이 장면에서 이렇게 간략하게 진술하고 있다.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28절). 우선 이런 설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레위가 무작정하고 당장에 모든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라나섰다고 보면 곤란하다. 아마 예수의 부름이 있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있었을 것이며, 그 부름을 듣고도 막상 하던 세리 일을 걷어치우고 완전히 예수와 더불어서 방랑 공동체를 꾸리게 될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레위가 자기 인생에서 버려야할 것과 따라야 할 것을 분간하고 그것을 결행했다는 사실이다.
레위는 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을까? 반 드시 그래야만 하는가? 사람은 오직 한 가지만의 절대적인 세계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지 양다리 걸침은 불가능하다. 물론 대개의 사람들은 절대적인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또한 별로 원하지 않기 때문에 버릴 것도 없다. 그러나 절대적인 것을 알면 알수록 상대적인 것에서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예컨대 여러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던 난봉군이라고 하더라도 자기에게 절대적인 여성을 만나게 되면 다른 여자들에게서 눈을 돌리는 것과 같다. 예수도 사람들에게 인간이 돈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했다. 돈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돈을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4. 따름의 전제 조건
오늘 레위가 다른 일을 접어두고 예수를 따른 것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일순간에 뜨거워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 앞서서 어떤 사유의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것은 곧 자기의 일이 하찮은 것이라는 자각이다. 그동안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세리 직업이 별로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그는 결코 예수를 따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혁명적 전환이 바로 회개다.
29절 이하에 보면 레위가 예수를 집으로 초청한다. 그곳에 따라 들어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불평했다. 이때 예수의 답변은 이렇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1,32). 이 비유의 말씀은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한 바리새인은 아무리 말해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반면에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한 세리들은 자기의 가치관을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이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거나 또는 이들이 그렇게 타고 났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이 받아온 전문적인 경건훈련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 이유이다. 경건훈련은 아무리 세련되게, 또는 자학적으로 수행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행하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지 하나님 자체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리할 여분이 없게 된다. 자신이 쌓아놓은 종교적 업적이 하나님에 이르는 길을 막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일이 2천년 전에도 일어났고, 지금도 역시 그렇다.
이런 문제는 종교에서만이 아니라 지성의 세계에서도 비슷하게 작용한다. 지성훈련을 많이 받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자기 세계 안에 빠져서 다른 것을 바라보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묶여 있다는 말이다.

5. 따름과 버림의 변증법
레위가 예수의 부르심을 듣고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묶어놓았던, 혹은 자기의 성취수단이었던 것들을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며, 역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예수에게서 절대적인 세계를 발견하고 따라나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계기에서 선후 문제를 엄밀하게 따지기는 쉽지 않다. 우선 이 세상의 일들이 하찮다는 사실을 뻐저리게 느껴야 더 절대적인 세계를 추구하게 되지만, 역으로 절대적인 세계를 경험할 때만 이 세상의 일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마 이 두 경험은 상호적으로 영향을 준다고 보아야 한다. 버림과 따름이 변증법적으로 우리의 삶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한편으로 버림을, 다른 한편으로 따름을 조화롭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6. 묵상주제
진리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가장 큰 기쁨이며 행복이다. 길(道)을 발견한 사람의 심정을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길을 떠난다. 다른 것은 버려두고 참된 세계를 향해서 떠난다. 이게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무슨 의미일까?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