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16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 욥기 공부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난주에 42장까지 다 했지만 오늘 이 시간에 전체적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나오신 분들은 욥기를 한꺼번에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욥기 본문은 지금까지 검토했기 때문에 오늘은 보지 않고, 42장까지에 이르는 전체를 놓고 볼 때 우리가 어떤 부분을 생각해야 하는지 몇 가지 관점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이 욥기는 구약에서 좀 특별해요. 구약은 전체 구도로 보면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모세오경, 예언서, 성문서(거룩한 문서)예요. 이 중에 모세오경이 제일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본적으로 아시겠습니다만 구약성경이 처음부터 39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신약도 마찬가지고요. 어떤 문서가 시작할 때 처음부터 체계 있게 결정된 게 아니에요. 옛날에는 특별히 더 그렇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에게 종교 문헌들이 많이 나왔어요. 역사 안에서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들이 여러 군데로 흩어지기도 하고 학자들이 연구하기도 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학파들이 있잖아요. 캠브리지학파, 옥스퍼드학파 등등에서 일반 철학이나 인문학, 물리학에서 학파가 있는 것처럼 고대 유대인들에게도 학파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이름도 똑같지 않았어요. 하나님에게 일단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건데 이런저런 형편상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고 근동에 있었던 다른 신들의 이름을 빌려 오기도 하는 등의 여러 파가 있었습니다. 이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어느 한 사람이 독점해서 이야기할 수 없는 거죠. 여러 생각들이 시작해서 얽히고 섥혀면서 내려왔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부르거나 ‘야훼’로 부르거나 또는 ‘아도나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었고요. 그리고 제사장 그룹이 있어서 어떤 전통을 이루는 그러한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고대 유대인들에게 여러 문서들이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어떤 것은 중요하게 다루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게 대했어요. 이건 자연스러운 거죠.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디서나 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고 어떤 문서는 그런 것이 조금 약해 보이는 것이 있으면 조금 덜 인정하고요. 그렇게 고대 유대 역사에서 여러 종교 문헌들이 이런저런 평가를 받으면서 내려왔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두가 인정한 성경이 뭐겠어요? 모세오경이에요. 이 모세라는 이름이 들어간 걸 봐도 벌써 권위가 있는 걸로 알 수 있죠. 그래서 모세오경은 유대인들에게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을 받은 거예요. 캐논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단계가 예언서예요. 세 번째 단계는 바벨론 포로 이후까지 성경으로 할지 말지가 논란이 많았던 성문서예요. 문학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있는 성경입니다. 거기에 이 욥기가 들어가게 되는 거죠. 물론 그렇게 지나오면서 39권이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요. 여러 가지 형편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성경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칠십인역이라고 해서 유대 디아스포라 사람들을 위해서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 등이 있었습니다. 제 말이 옆으로 나갔는데 이 욥기서는 성문서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경전으로써의 권위는 조금 낮아요. 이게 처음부터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겁니다. 나중에 인정받게 되는 거죠. 그러나 경전으로써의 권위는 약하지만 신학적인 의미에서는 굉장히 깊습니다. 시편은 어디에 속할까요? 당연히 성문서죠. 이 시편도 얼마나 신학적 의미가 깊습니까. 이러한 시편이나 욥기 등등은 초기 기독교 안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다뤄지고 읽던 성경이었습니다.


우리가 1년 가까이 욥기를 공부했는데 제가 중요한 포인트를 몇 가지 잡아야겠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준비를 하면서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에 있는 대로 몇 가지 단락을 잡았습니다. 전체로 네 가지죠. 첫 번째 소제목은 세상과 재앙, 두 번째 소제목은 하나님과 재앙, 세 번째는 자연신학의 가능성, 네 번째는 기독론적 토대로 잡았습니다. 이 네 가지를 지금 이 시간에 차례차례 설명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이 욥기서는 재앙문제가 핵심 주제로 다뤄지고 있죠. 인간에게 임하는 재앙입니다. 재앙이 왜 일어나는지 참 안타깝죠. 이유도 각양각색입니다. 사람들의 잘못으로 일어나는 일도 많이 있어요. 며칠 전에 벨기에의 브뤼셀에 테러가 있었는데 사상자가 많이 생겼다고 하네요. 거기 있었던 사람들은 날벼락을 맞은 거죠. 그리고 전쟁도 분명히 사람으로 인한 재앙입니다. 또한 자연 재해로 인한 재앙도 있죠. 가뭄이라든지, 홍수라든지, 아주 크게 보면 빙하기가 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재앙입니다. 가뭄이나 홍수도 막기 힘들고요. 옛날에는 메뚜기가 와서 농산물을 다 갉아먹었다는 일도 있는데 그런 것도 재해고요. 하여튼 이 지구 안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자연재해를 맞고 삽니다. 이 빙하기가 큰 빙하기가 있고 작은 빙하기가 있거든요. 앞으로 지구에 빙하기가 오는 것은 분명합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피할 수 없는 지구의 생태적 사실입니다. 만약 큰 빙하기가 오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있을 거예요. 지구 전체가 다 얼음으로 뒤덮입니다. 그리고 적도 부근만 반지처럼 녹아있는 상태, 아니면 더 심하게는 거기까지 다 얼음으로 덮일 수 있겠죠. 그게 어느 정도 강한지는 우리가 어떻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구에 그런 일들이 몇 번 있었어요. 앞으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될 텐데, 이러한 빙하기 같은 재앙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거라고 할 수 있죠. 또는 개인적인 선천성 불치병도 있습니다. 이것도 큰 재앙인데요. 이게 일어나는 이유는 너무 깊어서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유전이라고도 하는데 그게 어떤 방식으로 어떤 사람에게 일어날지는 참 까마득합니다. 어떤 병들은 신생아 중에 만분의 일의 확률로 병에 걸리기도 하는 여러 가지 선천성 희귀병이 있어요. 그런 게 인간에게 없을 수가 없는 거예요. 확률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데 끔찍한 재앙이죠. 그리고 이거는 수준이 낮은 나라에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잘 사는 나라에도 계속 그러한 일들이 있었어요.


이렇게 욥기는 이런 인간에게 임하는 재앙 문제를 아주 진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서 늘 잘 먹고 잘 사는 생각만 하면 위험한 것이, 성서는 이 고난 문제, 재앙 문제를 아주 진지한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이러한 고난과 재앙을 다 피하고 싶죠. 말도 꺼내기 불편하고요. 이 짧은 인생에 재밌는 이야기만 하고 복 받는 이야기하고 오순도순 재밌게 살고 자식들 속 안 썩이고 성공하고 부부 사이도 늘 좋고 늙어서 노후가 아주 편안한 그러한 이야기만 하고 그러한 기도만 하는 것도 시간이 짧은데 무슨 재앙, 불행을 생각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그러나 성서는 인간이 본인의 잘못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천재지변일 수도 있는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임하는 재난, 고난, 불행의 문제를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이건 우리가 기독교 신앙 안에서 꼭 붙들어야할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욥기를 통해서 우리는 조금 더 정확하게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 재앙이라는 소제목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재앙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목사 가정에서도 장애인이 태어날 수도 있고, 교회 나왔다가 돌아가면서 자동차 사고를 당할 수도 있듯이 알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앞에 산적 해있는데, 도대체 하나님의 창조가 선하다고 한다면 왜 이러한 재앙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재앙과 하나님의 관계인거예요. 성서가 말하는 대답은 죄입니다. 이 고난과 재앙은 총체적인 인간 삶을 파괴하는 사건들인데 그것에 대한 근원적인 대답은 죄입니다. 우리가 여태까지 욥기를 통해서 보았듯이 욥의 친구들도 욥이 당한 재앙의 책임, 이유를 죄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우리는 그걸 틀렸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또 죄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좀 복잡해서 정리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성서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고통의 원인이 죄라고 하는 답과 욥의 친구들이 욥을 비판할 때 말하는 죄라는 것은 범주가 다른 거예요. 성경이 인간이 감당해야 될 여러 가지 고난의 이유와 근거를 죄라고 하는 걸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겠죠. 그건 선악과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뿌리 깊은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선악과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나고 사람이 노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고 여자들은 산고를 겪어야 되는, 그러한 인간의 이 땅 위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실존적인 고난의 이유를 성서는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욥의 친구들도 욥을 비판할 때 죄를 이야기합니다. 이건 방금 제가 말씀드린 대로 비슷한 말을 하고 있지만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이 두 입장을 구분해서 봐야한다는 그 말씀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죄는 이런 뜻이에요. ‘네가 잘못했으니까 죄를 진거야.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라는 뜻이라기보다,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잘못한 걸 뻔뻔스럽게 잘못 없다고 해도 된다는 게 아니라 지금 성서가 죄 문제를 어떤 범주에서 말하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런 설명들이 쉽지가 않습니다. 이게 많은 것들과 연관된 문제라서 한, 두 마디로 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거거든요. 하여튼 그런 것을 감수하고 조금 더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서가 죄를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벌어지는 불행, 악한 행위들, 살인 등등을 포함한 그 모든 것들은 죄의 결과고 그런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 바로 죄라고 이야기하는데요. 그것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아주 존재론적인 힘이라는 겁니다. 이 악과 죄라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잘 해서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더 초월하는 아주 존재론적인, 아주 근원적인, 그 누구도 그것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이 욥을 향해서 하는 말은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너에게 떨어진 재앙은 네 책임이야. 네가 잘못했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범주가 다른 거죠. 성서가 말하는 죄는 존재론적인 범주라고 한다면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했던 비판은 하나의 윤리적인 범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서의 존재론적인 범주, 이것은 아주 근원적인 힘이 여기 작동한다는 사실과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임한 재앙을 그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 이 두가지는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구분해서 봐야합니다.


다시 두 번째 항목의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죠. ‘하나님이라면 전능하신 분인데 왜 죄를 없애지 못하셨을까?’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혹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으로 인한 재앙과 불행, 고난을 왜 막지 못하셨을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이건 내가 당한 고난만이 아니라 옆에 사람에게도 많이 일어나는 거라서 참 딱한 일이란 말이에요.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은 그럴 생각이 없으신가요?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일어난 불행을 왜 그냥 놓아두시는가에 대한 질문인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 모든 걸 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무고한 자의 어려움들을 도와주셔야 되잖아요. 그래서 모든 어려움들을 이길 수 있게 해주셔야 되는데 왜 안 하실까하는 거죠. 욥기에 보면 욥의 재앙을 누가 일으킨 거죠? 사탄이 한 거죠. 그런데 재밌게도 사탄이 자기 마음대로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요. 어떻게 보면 좀 만화 같죠. 어쨌든 하나님이 그 장면에서 허락합니다. ‘그래, 욥의 목숨만 건드리지 말고 마음대로 해봐라.’ 이렇게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사탄이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은 이러한 욥에게 일어난 재앙,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포함해서요. 태어날 때부터 극심한 장애를 안고 평생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이나 지능이 아주 떨어져서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는 사람과 그 가족들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 마저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의 일이라고 한다면 이 책임이 결국 하나님에게 있지 않는가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거죠.


우리교회 책읽기 모임에서 지난달에 읽은 책이 주제 사라마구의 카인이라는 책이에요. 제가 몇 번 언급을 했습니다만 사라마구가 문학적인 상상력을 통해서 자기 입장을 강하게 주장하는데요. 여리고성이나 아이성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살당하잖아요. 성경에서는 그걸 하나님이 하라고 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런 것들을 다 포함해서, ‘결국 그 성에서 죽은 한 아이의 책임이 당신에게 있는 것 아니냐.’ 이렇게 따지고 드는 거죠. 그런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거든요. 여러분들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떻게 대답을 하세요. 조금 까다로운 이야기인데 이렇게 설명하겠습니다. 앞에서 제가 죄가 존재론적인 힘이라고 했잖아요. 이 말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안 쓰기 때문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편하게 생각하세요. 그거는 누가 손댈 수 없고 근원적인 힘을 존재론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힘이에요. 이 죄라는 것이 존재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게 바로 성서가 말하는 죄론의 핵심이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죄가 존재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면 기독교 안에 모순이 일어나게 됩니다. ‘죄, 악이 존재론적 힘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대적하는 또 하나의 힘이 있다는 말인가.’ 이런 말이 되잖아요. 하나님과 맞설 수 있는 힘,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악한 존재론적 힘이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면, 하나님은 선한 절대자인데 그거 말고 또 하나의 악한 절대자가 있어서 이 세상이 이렇게 소란스러운 건가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여기에 우리 기독교 신앙의 모순이면서 딜레마이면서 긴장이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에게 필적할 만한 또 하나의 악한 절대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안 하지만 이 악은 절대적인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있어요. 이걸 수학 계산으로 하면 모순되는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모순 그대로 안고 있습니다. 오직 절대자는 한 분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악도 또 하나의 존재론적 힘으로써 이 세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방금 이야기한 욥기에서 동화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거요. 하늘의 천상회의가 열렸는데 사탄이 가서 허락을 받아서 욥의 삶을 파괴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악한 사탄의 행위예요. 그건 결국 사탄의 악한 것을 허락한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 거 아니냐는 논리적인 반론이 가능한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긴장을 안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선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마저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거죠. 악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다면 하나님은 완전히 선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악마저도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를 받는다는 관점을 확실하게 붙들고 있으면서 이 땅에서 벌어지는 불행과 재앙을 사탄, 악마의 존재론적 힘으로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설명하기가 쉽지 않네요. 전달이 좀 됐습니까. 기독교 신앙이나 세계가 간단한 문제가 아닌 거예요. 이러한 문제는 신정론 분야에서 많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꼭 목사라서 그런 게 아니라 신학적인 가르침, 성서의 가르침, 기독교가 말하는 관점이 옳다고 생각을 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 부분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마저 우리 인식의 한계라서 이게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어느 때인가 이것도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선과 하나님의 절대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우리 인식의 한계 때문에 좋은 거 나쁜 것을 구분하게 되는데 총체적으로 보면 결국은 선인 거죠. 악마저도 선,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지옥마저도 선일 수 있는 거예요. 그것도 하나님의 절대성을 드러내는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분만을 알아서 너무 거기에 예민해져 있는데 총체로 볼 때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 어거스틴도 그렇게 기도한 것 같아요. 우리가 공동 주일에 제가 언제 한 번 어거스틴의 그 부분을 인용해서 같이 기도드린 게 있어요. 지금 우리 눈에는 헝클어져 보이는 것도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의 선으로 드러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로 가겠습니다. 자연 신학의 가능성입니다. 욥기 38장~41장까지는 욥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었어요. 여러분들이 꼭 장수를 기억해두십시오. 이 38장~41장이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서 정확하게 욥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욥이 그토록 직접 만나서 듣고 싶다고 했던 그 하나님의 말씀인 거죠. 그 말씀을 듣고 욥이 변하되지 않습니까. 거기에 나온 것들은 다 이 세상에 대한 거예요. 여러 가지 자연에서 벌어지는 신비들을 하나님의 통치로 보면서 그것을 아주 멋지게 문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41장 본문을 잠깐 볼까요? 41장 1절~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2. 너는 밧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3. 그것이 어찌 네게 계속하여 간청하겠느냐 부드럽게 네게 말하겠느냐

4. 어찌 그것이 너와 계약을 맺고 너는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

5. 네가 어찌 그것을 새를 가지고 놀 듯 하겠으며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두겠느냐

6. 어찌 장사꾼들이 그것을 놓고 거래하겠으며 상인들이 그것을 나누어 가지겠느냐

7. 네가 능히 많은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 머리에 꽂을 수 있겠느냐

8. 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


이 부분은 악어로 볼 수 있는 어떤 동물에 대한 묘사예요.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게 세상이 신비롭고 놀랍다는 건데, 이건 고대인들의 눈에나 보이지 지금 우리는 모든 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런 식으로 보면 조금 곤란합니다. 이게 고대인의 시각이긴 하지만 이 자연에 있는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와 신비에 대한 시각인 거예요. 그걸 자연신학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어디 산에 갔더니 아름답더라.’ 혹은 ‘이 봄에 매화꽃 피는 게 예쁘더라.’같은 감상적인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근원적인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세계를 비밀로 이해하는 시각인 거예요. 그 비밀은 아주 근원적인 거라서 거기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이 드러날 뿐이에요. 헬라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자연 과학이 펼쳐지고 있고 물리학, 생물학 등등, 모든 것들이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이 세계가 그걸로 다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더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만 확인되는 거예요. 그것이 세계를 비밀로 이해하는 겁니다. 왜 그러냐면 이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이고 그 전체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표현이 좀 신학적인 거라서 와 닿지 않을 것 같네요. 그 부분은 간단하게 줄이겠습니다. 그러니까 자연신학은 단순하게 아름답다든지, 세계를 생태학적으로 보호해야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이 세계의 비밀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실, 완성한다는 사실, 그리고 종말에 새로운 세계가 우리들에게 시작된다는 사실 속으로 들어가는 학문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신학이 바로 그런 거죠. 그러한 작업을 위해서 물리학, 철학, 심리학이나 인공지능, 이런 것들도 다 인간과 자연을 이해하는데 기본이 되기 때문에 자연신학이 그것을 도외시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기독론적인 토대예요. 지금까지는 욥기, 주로 구약에 나와 있는 것들, 죄와 재앙, 하나님의 책임, 자연신학의 가능성까지 말씀드렸는데요. 우리가 욥기를 읽을 때 이런 부분들을 생각해야 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구약성서를 그러한 사상으로만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은 언제나 기독론적인 바탕을 가져야 돼요. 이게 기계적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모세오경, 예언서나 성문서에 나와 있는 모든 것들이 다 기독론적인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초기기독교인들이 구약성경을 읽은 거예요. 그리고 유대교가 정한 39권을 그대로 받아들인 겁니다. 왜냐하면 그 구약성경이 기독론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여러분들이 기독론을 이해하시겠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기 때문에 욥기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 강의 요약문 네 번째 단락 셋째 줄을 보십시오. 고난 문제가 욥과 예수님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간단하게 정리했어요. 욥은 무고한 자의 고난을 당한 거고 예수님도 역시 무고한 자의 고난이에요. 양쪽이 똑같이 무고한 자의 고난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러나 차이가 있는 거죠. 욥은 자기의 개인적인 재앙 때문에 전통신앙에 저항했죠. 전통신앙이라는 것은 지혜전통이에요. 그렇게 욥이 저항했다면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기존의 유대전통에 저항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욥은 자연신학이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신비를 통해서, 앞서 제가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던 38장~41장의 내용에 근거한 건데, 거기에 근거해서 무고한 이의 고난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어요. 이건 우리가 욥기 결론에서 본 겁니다. 38장~41장의 말씀을 듣고 욥이 ‘하나님을 귀를 듣지 않고 이제는 눈으로 본다.’고 까지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절대적인 신뢰를 근거해서 자신에게 임한 십자가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신, 구약 통틀어서 무죄한 자의 고난의 결정적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욥기를 기독론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겁니다.


이제 다 마쳤습니다. 다시 한 번 강의 요약문을 보십시오. 네 가지로 정리했어요. 세상과 재앙, 재앙 문제를 우리가 나 몰라라, 그리고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상관없다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거기에 신앙의 관점을 두고 봐야 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재앙과 불행에 교회가 책임적인 자세로 임해야겠죠. 하나님의 재앙 부분에서는 악마저도 결국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 결국 기독교신앙은, 성서신앙은 이 악 앞에서 두려워 떨지 않는 겁니다. 당장은 힘들죠. 그러나 부처님 손 안에 손오공이라고 할까요? 악은 기껏 해봐야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만 자기의 힘을 발휘할 뿐이고 궁극적인 승리는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 자연신학, 자연을 단순히 아름답다고 하는 감상의 차원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이 세계의 비밀로 우리의 영적인 시각을 열어서 그 비밀인 세계 전체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연신학의 관점을 우리가 욥기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네 번째 기독론적인 토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욥기를 비롯한 구약 전체에 나오는 무죄한 이들의 고난을 하나로 묶어 주면서 극복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류 구원의 길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지난주까지 욥기서 42장까지 다 배우고 오늘 전체를 저희들이 다시 한 번 신학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 요점을 나누어서 정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희들이 때에 따라서는 낯설게 느끼기도 하고 친숙하게 느끼기도 하고 아주 어렵게 느끼기도 하고 아주 이해하기 좋게 느끼기도 하는데 우리가 그 어떤 말씀이든지 진지하게 잘 탐구 하여 우리 영혼에 좋은 양식을 삼도록 저희를 인도해주십시오. 이렇게 긴 시간동안 욥기 공부에 동참한 우리 모든 말씀의 동역자들에게, 그 동지들에게 주님께서 신령한 은혜를 더욱 더 허락해주십시오.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부활절의 기쁨을 우리 마음 깊이 간직하지만 현실에서 당하는 고난도 또한 우리가 외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영광이 우리의 삶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끌어가는 온전한, 그리고 우리가 의존해야 될 힘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붙들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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