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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el, Eberhard : Tod / 4. Aufl. Gütersloh Verl. 1990.
죽음의 비밀
IV. 죄인의 죽음
죽음은 죄의 대가
성서가 말하는 죽음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죽음에 대한 하나의 견해(해석)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성서에서 죽음관(죽음에 대한 견해)이 표명될 때마다 몇 개의 공통된 특징을 인지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주로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 특징 때문에, 성경 안에 있는 죽음관이 다양함을 간과할 수는 없다. 성서에는 죽음을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단서들의 역사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추상적으로 구축된 것이 아닌, 현실의 역사처럼, (성서에 나타난 단서들의) 역사에도 모순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성서에 표명된 죽음관의 오랜 역사에 나타난 모순이나 대립은 근본적이기 때문에, 이는 신에 대한 기독교적 믿음에 대해서도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여기서 요점은 심층적 공통점을 뚫고 나오는 대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구약에서 감지되는 죽음(에 대한 표상)과 태도와, 신약의 죽음관이 서로 맞서 있다. 이 대립은 [75쪽]
76쪽
이 대립에는 객관적 근거가 있다.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한 표상과 견해, 태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와 더불어 무언가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이해가 가능해졌다.
죽음 그 자체와 더불어 무언가가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함축된 고유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죽음 그 자체와 더불어 무언가가 발생했다는 사실: 역주)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유지된다. 그래서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의미를 선포하고 숙고(반성)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부활한 자에 대한 신앙고백도 일어난다. 부활한 자를 믿는 믿음 때문에, 죽음 자체에 대한 사실도 바뀌었다. 다시 말해, 죽음의 불가피성이 없다면 살 수도 없다는 사실 자체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신약(성서) 전체가 있다는 사실과 상관이 있다. 이제 단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성경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죽음 이해의 결정적 대립을 뒷받침하는 궁극적 근거일 뿐만 아니라 [언약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해명하는 궁극적 근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대립과 차이는 심층적 공통점을 여전히 넘어서면서도 두 성서의 분리될 수 없는 [결속]을 지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죽음과 함께 무언가가 발생했다면, 다시 말해, 불가피한 죽음 없이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무언가가 변화되었다면, 죽음이란 사실을 대하는 태도에서 구약과 신약이 다르며 대립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시대에 표출된 죽음관들 가운데 완전히 일치하는 것들이 일부 있지만,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태도는) 그것들보다 훨씬 더 결속되어 있다.
77쪽
따라서 이어지는 절에서 구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구절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래서 이를 배경으로 삼고, 신약성서의 구절들을 근거로 삼아 예수 죽음의 의미를 논의할 것이다.
성서의 본문들이 죽음에 대해 말하는 바는, 과거와 최근 자료에 나타난 심오한 종교적, 세속적 (죽음에 대한) 표현들과 다르다.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즉 죽음에 대한 물음은 상당히 결정적이지만 완전히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사실 때문에, 성서 본문과 다른 자료의 기술이 다른 것이다. 우리 인생 전체가 죽음에 대한 묵상(혹은 죽음에 대한 연구)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은 성서로부터 도출되는 태도가 전혀 아니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인지 따져보라는 명령과 부유한 농부 비유도 (인생이 죽음에 대한 묵상이라는 견해에 속한다고 이해하면 안 된다.)
(물론) 죽음이 참혹하며, 그래서 불쾌하다는 사실을 성경이 의심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성서에 주목하기로 한 사람들은 ‘영감을 주는 철학의 정신은 죽음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선언을 철학자들에게 아무런 시기심없이 넘겨줘야 하고 넘겨줄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물음은, 이 땅의 생명의 끝에 대한 매우 실존적인 숙고로서, 마지막[끝]에 대해 묻고 있다. 하지만 이 물음은 <바퀴의 중심>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것은 마치 어두운 안개[장막] 뒤에 있는 시선과 같은 것이지만, 이 답변도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만능 열쇠가 전혀 아닐 것이다.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라는 철학의 근본 질문조차, 죽음에 대한 성서의 숙고는 아무런 해답을 주려고 하지 않고 줄 수도 없다. 신앙인(믿는 자)은 죽음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길 뿐이다.
한해가 끝나가는 시점에 죽음에 관한 융엘의 글을 읽으니까 마음이 더 평온해지는 거 같습니다.
고맙습니다.